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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1) 다윗의 열쇠(청지기)
(이사야22:15-2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 같이 맹렬히 던지되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 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파쇄되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계시록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열한 번째 시간이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열쇠가 주제가 된다. 청지기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다.
1. 셉나가 해고됨(국고를 맡은 서기관)
이 셉나라는 사람은 히스기야 왕 때 국고를 맡은 서기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불의한 청지기로 추방당하는 모습이다. (왕하8:18, 26, 37, 19:2, 사36:3, 11 22: 37:2) “높은 곳에 자기의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는 말은 자기를 위해서 견고한 미래를 설계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공같이 이것을 말아서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처럼 말아서 던진다는 뜻인데 희한한 말이다. 왜냐하면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쳤기 때문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살림을 잘 맡아서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데 주인집에다가 수치를 끼쳤다. 이 셉나는 주인집에 수치를 끼치는 모든 사람의 대표자이고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 말한다면 반역한 천사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지어진 자인데, 그가 자기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보좌에서 쫓겨난 자가 되었다. 바로 셉나와 같은 그런 위치다.
또 그 다음번에는 아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져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동산에서 그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고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할 청지기였는데 선악과를 먹고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그 영화로운 직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사람도 셉나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에 셉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주인집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인집에 수치를 끼치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게 하는 데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자기 영광을 추구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 아담 이후의 이 세상을 보면 누가 하나님을 참으로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만일 참으로 완전하신 분이라면 왜 인간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었는가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고 먹게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했는가. 이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한다. 모르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인간의 현재 상태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지었다는 표시가 없고 안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에 모두 다 주인의 집에 유익을 끼치는 자가 아니고 해를 끼치는 자들이었다.
왜 저주를 받고 멸망이 선고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이 셉나와 같이 주인집에 수치를 끼치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수치를 끼치는 자가 되면 우리는 셉나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임무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교회를 보고 그리스도가 참 영화롭구나, 그리스도가 참 진실하구나를 아는 유일한 길이고 유일한 통로이다. 그런데 만일 교회가 그 자리에 있지 않게 되면 오히려 예수님에게 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저러하냐?’는 말을 보통 듣는다. 이 말은 결국 주인집에 수치를 끼치는 셉나와 같은 입장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서 예수는 영광을 받으시기도 했고 또 수치를 당하시기도 했다. 이것은 먼 옛날 얘기가 아니고 단지 천사에 관한 얘기가 아니고 단지 또 아담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갔을 때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철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내 개인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를 보고 우리 교회를 안다. 말 한마디로도 함부로 잘못해 버리면 ‘대구교회는 저런 거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초창기에 말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 여파가 굉장히 오래 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냥 자기대로 지껄이다가 가버리면 그 사람은 그대로 그것이 대구교회로 알아 버린다. 더 이상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우리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 말이 떠돌아다닌다. 그것은 모두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근원은 사실은 우리들에게서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려면 끝까지 말해서 온전하게 그 사람이 알도록 말하든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의식 없이 자기 좋다고 한마디 해버리고 말면 다음에 그 사람은 그것이 자기가 아는 대구교회가 되버리고 만다. 이런 일들이 전적으로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항상 그런 의식을 가져야 된다. 내가 대표자이고, 나를 통해서 교회는 세상에 이렇게 알려질 수도 있고 또 저렇게 알려질 수도 있다. 교회를 다 여기 와보고 아는 것도 아니고, 속 깊이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 단지 누구를 보고 그냥 아는 것이다.
코끼리 등을 만져본 사람도 있고 다리를 만져본 사람도 있고 꼬리를 만져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 자기대로 말하게 된다. 우리가 꼭 그렇게 해서 100% 완전하게 전달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 책임 안에서 우리는 많은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유익은 못 주더라도 손해를 끼쳐버린다. 그럼 그 다음에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이다. 복음의 문이 막히게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선입관이 있어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하고 그 사람을 우리가 멸망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 책임이 있다. 안 믿으려면 말고 믿으려면 믿고 너 알아서 하고 우리는 모르며 나는 책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일 우리의 잘못으로 그 사람이 복음을 받을 기회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내 책임인 것이다. 그 사람 책임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내 책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하다.
셉나는 해고 되었다. 불의한 청지기로써 해고되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들일 뿐만 아니라 청지기이다. 그 나라를 지켜야할 그 집을 지켜야할 청지기이다.
아담은 만들어져서 바로 무슨 일이 맡겨졌는가. 바로 너는 동산을 지키라고 했다. 그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동산이다. 이것은 지키지 않고서는 같이 살 수가 없다.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지킴으로서 그 세계를 유지할 수 있다. 왜 나라마다 모두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가. 그것은 나라를 지켜야만 그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살라고 놔두지 않는다. 군인이 없으면 아무나 와서 침략해 버리고 말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돈을 들여서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기회를 찾고 있는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사탄의 세력이 항상 교회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의식해야 되고,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두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된다. 내가 개인이 아니다. 내가 내가 아니고 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말고, 손해를 끼치게 되면 우리는 해고될 수밖에 없다.
2. 엘리아김으로 대치됨(궁내다신)
그래서 엘리야 김으로 대체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사람은 궁내 대신이었는데 의로운 청지기로써 셉나가 입었던 옷을 그에게 다시 입히고 그의 띠를 그에게 띄우고 그를 힘있게 하여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긴다는 말이 나왔다. 어디서든지 마찬가지다. 불의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 대치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불의한 청지기가 있다면 의로운 청지기로 바꿔야 할 것이다.
아담을 왜 그리스도로 대치해야 되는가? 그것은 아담이 불의했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으로 보면 사람은 왜 천사를 대치해야 되는가? 천사가 불의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이전에는 천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천사가 만일에 하나님의 모든 목표를 다 완성했더라면 사람이 지어질 필요가 없다. 거기서 불의한 천사가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을 지었고 사람은 그 천사를 대치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 천사가 앉아있던 자리에 사람이 다시 올라가야 되는,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애초에 창세기 1장 이전에 하나님 나라에서 통치하는 보좌에 앉았던 자리가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셉나가 앉았던 자리에 지금 엘리야김이 앉아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사가 앉았던 자리에 사람이 앉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바로 그 천사를 대치하는 인간의 승리이다. 아브라함부터 쭉 시작해서 오랜 전쟁을 통해서 마침내 승리한 승리자이다.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고 한다. 원래 하나님 보좌 우편에는 천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한 인격을 승리자로 만들어서 키워서 결국 다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린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불의한 청지기를 대치하기 위해서 천사를 대치하기 위해서 지어진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천사보다 나은 그리스도 천사보다 나은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원래는 천사가 하나님의 청지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만유의 후사로 택정함을 입은 그리스도가 그 천사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이 바로 인권 회복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되는 자리이고, 우리의 영광이 고도에 이르는 자리이다.
A.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됨(청지기-아버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안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비가 된다는 말은 근원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그 아버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유다 집의 근원이 된다. 지혜의 근원이 되고 능력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 섬김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근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근원이 되고 우리가 그를 섬기는 근원이 되고 세상을 다스리는 근원이 되고 모든 것은 그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에겐 아버지가 된다. 근원이기 때문이다.
공급자이다. 근원이니까 그 근원에서 공급을 한다.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공급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공급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서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유다집의 아비가 된다는 이 말은 청지기일 뿐만 아니라 근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섬기는 자에 의해서 표현되게 되어 있다. 섬기는 자만큼 표현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 표현의 근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 표현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는 그 근원에서 흘러 내려온 것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양육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근원으로부터 시작해서 공급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양육을 받는다는 의미한다. 모든 근원이 그에게 있으니까 그를 통해서 흘러 내려와서 우리가 살고 양육이 된다. 오로지 그리스도로만 양육이 되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으로 양육되면 안 된다. 오늘 어떤 분을 만났는데 묻는 것이 신앙이 성장을 해야 하는데 20년이 넘었지만 일이 바쁘고 해서 성장이 잘 안 된다는 얘기를 한다. 어떻게 하면 성장을 하느냐는 뜻이다. 교회를 가면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하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저 사람의 신앙이 요즘에 성장했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뒤떨어졌다고 한다. 그런 것은 성장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성장이다. 표현의 성장이 성장이다. 우리 생명은 성장할수록 더 온전한 표현이 나온다. 어린아이들은 생명력은 왕성하지만 표현력은 둔하다. 우리 영관이에게 글씨 쓰라고 하면 마음에는 있는데 손으로는 표현이 잘 안 된다. 밥을 백번 씹어 먹으라고 했더니 자기가 입으로 씹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처음에는 하나 둘 세다가 백번 세려니까 입이 아파서 못할 것 같아 나도 꾀를 부려서 손가락으로 열, 스물 식으로 군대 조교 모양으로 했다. 그것을 찬찬히 보더니 다음에는 자기가 손가락으로 그렇게 하는데 아이들은 손가락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섯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섯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마음에는 있는데 손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섬세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안 되고 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표현을 위한 성장이기 때문에 빨리 성숙해야 되고 잘 성숙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 성숙하지 않으면 온전한 표현이 안 된다. 말이 온전하면 사람이 온전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표현이 온전하면 사람이 온전하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만일 더디다면 그만큼 표현의 시간이 더디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누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도를 얼마나 하는가, 철야 기도를 얼마나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을 그만큼 나타내는가 못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목적을 이야기하고 그 목적에서 빚나간 것은 전부 가짜라고 했다. 전부 가짜이고 그것은 다 엉터리라고 했다. 충격을 받았는가 어쨌는가는 모르겠는데 또 만날지 안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 말을 해야 한다. 늘 만날 사람 같으면 조금씩 얘기하면 되는데 만날지 안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되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양육되어서 우리가 성숙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대로 살고 나대로 살고 나 좋을 대로 하고 그리스도는 필요한대로 가져다 쓰면 되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은 그렇게 되면 주인의 집에 내가 누를 끼치게 된다. 수치를 주게 된다.
우리의 근원이고 공급자이시고 양육자이신 이 분으로 우리가 대치되어야 된다. 우리가 바꿔져야 된다. 이것이 참된 청지기 직분이다. 우리는 아들이라는 생각만 가져선 안 된다. 나는 아들이라는 이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된다. 아들은 그냥 먹고 노는 것이 아들이다. 아버지가 다 만들어 주고 아들은 그 아버지 것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이다. 이삭의 원리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개척했다. 그러다 보니 땀이 났다. 이삭은 그냥 아버지가 다 해놓은 것을 누리기만 한 사람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만이 아니고 알고 보면 청지기이다. 아들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청지기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지키려면 우리는 이삭처럼 그렇게만 해서는 못 지킨다. 우리가 청지기로서의 직분이 있어야 그것을 지키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지킬 수가 없다. 우리는 아들이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아들이고 청지기라고 생각해야한다.
예수님을 보면 아들이시지만 그는 철저하게 청지기다.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다. 이것은 유다 집의 근원이 될 것이고 공급자가 될 것이고 생명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치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치하면 안 된다. 내가 그리스도를 대치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나를 대치해야 된다. 이것은 말은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 틀린 말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치한 것과 내가 그리스도를 대치한 것은 아주 다른 말이다. 꼭 그리스도가 나를 대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치해야 되기 때문이다.
엘리야김으로 셉나를 대치한다. 우리는 충성스러운 청지기의 하나의 예표로서 엘리야김이 대치되었다. 이 사람은 유다집의 아비가 될 뿐만 아니라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 어깨에 둔다. 열쇠란 것은 창고문을 열기 위한 것이다. 출납을 주관하는 곳인데 왜 열쇠를 잠궈 놓았는가? 아무것도 없는 집에 열쇠를 잠궈놓진 않는다. 그 안에 좋은 것이 있으니까 보물이 있으니까 잠궈 놓는 것이다. 금고 열쇠는 왜 단단한가? 그 안에 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는 문도 닫아놓지 않는다. 괜히 아무것도 없는 집에 문 닫아놓으면 유리창만 깨진다. 뭐가 있는 줄 알고 왔다가 집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유리창을 깨버리므로 그냥 열어놓는 것이 낫다. 도선생님이 왔다가 구경만 하고 가면 유리창이라도 남는데 이를 꼭꼭 잠궈 놓으면 혹시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싶어서 애써서 뚫고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신경질 나서 집만 망쳐놓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엔 농 같은 곳에 출장비가 될 수 있는 돈을 나둬야 된다고 한다. 좀 놔둬야지 안 놔두면 신경질 나서 다 부수고 간다고 한다.
열쇠는 보물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B.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둠
다윗집의 열쇠니까 왕가의 열쇠이다. 다윗집이라는 말은 다윗 왕궁이라는 뜻이다. 왕궁의 열쇠를 가졌다. 그 열쇠를 어깨에 둔다고 했는데 왜 손에 둔다고 하지 않고 어깨에 둔다고 하였는가. 얼른 생각하면 크다는 말이 된다. 열쇠가 얼마나 크면 어깨에 메고 다니는가 할 것이다.
이것은 큰 책임을 이야기한다. 어깨란 말은 책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문이 크기 때문에 자물쇠가 크기 때문에 열쇠도 크다는 말이다. 이것은 귀중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큰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꼭 부피로만 크다는 말이 아니고, 질적으로 귀중하다는 말이고 보물이 많다는 말이다. 왕의 집과 그 창고니까 얼마나 좋은 게 많겠는가. 그 안에 온갖 보물이 다 들어있다. 그것을 지키려니까 큰 열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귀중한 열쇠, 큰 책임이 필요하다.
왕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큰 책임이 필요하다. 왕의 보물을 지킨다는 것을 오늘 우리로 보면 하나님의 보물을 우리가 지키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동산을 지키라. 동산은 하나님의 보물이다. 당신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보물은 하나님의 보물이고 하나님의 보물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의 열쇠를 가진 분
그리스도를 지키기 위한 열쇠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열쇠를 가진 사람이다.
계시록 3장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할 때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는 말이 나온다. 일곱 교회 중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밖에 없다. 그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다윗 집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계시되었다.
왕궁의 보물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보물은 조금 잘못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만 책임감이 없는 사람에게 맡겨 놓아도 큰일이 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되는 사람이 있고 조금 불안한 사람이 있다. 안심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임감이 없으면 불안하다. 하다가 놔두고 가버릴 수도 있고 자기 좋을 대로 한다. 자기 좋을 때는 지키고 자기 안 좋을 때는 안 지켜 버리면 불안하다.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자기 싫은 것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열쇠를 맡길 수가 없다. 싫어도 해야 된다. 죽을지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맡겨야지 자기 좋을 때는 하고 안 좋을 때는 안 하는 사람은 눈 말똥말똥할 때는 지키고 있다가 졸리면 자버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책임을 맡기겠는가.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오늘의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우리가 어렸을 때는 내 좋을 대로 산다. 나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하는데 사람이 성숙하면 자기가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자기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책임이 없으니까 싫으면 안 하는 것이다. 벌써 우리 영관이도 자기 싫은 것은 안하려고 한다. 밥을 먼저 먹고 다른 것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과일부터 내 놓으면 아이는 과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밥을 안 먹고 과일을 먹으려고 한다. 그러면 밥을 먹고 나면 과일을 주겠다고 달래면 영관이는 과일을 먼저 먹으면 밥을 먹겠다고 한다. 과일을 먼저 먹으면 배가 불러서 밥을 못 먹기 때문에 밥을 먼저 먹으면 과일을 준다고 하면 한참 있다가 ‘과일을 먼저 먹으면...’ 한다. 먼저 과일을 봐버리면 과일을 먼저 먹어야 된다. 과일을 먼저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니까 밥을 못 먹는다. 어린 아이 때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다른 것을 모르고 한 가지밖에 모른다.
사람이 성숙해지게 되면 자기 책임감이 생긴다. 책임감이 생겼다는 것이 바로 성숙했다는 뜻이다. 교회에서도 아무 책임 없이 자기 좋을 대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아직도 미숙하다는 것이고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뒤치다꺼리 하면서 깡통 버리고 가면 다 치워줘야 되고 휴지 버리고 가면 치워줘야 되는 사람이다. 아무 책임이 없이 그냥 좋아서 왔다가 좋아서 가는 것이니까 어지러 졌는지 안 어지러 졌는지 자기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딴 사람이 누군가 다 치워줘야 되는 것이다. 시민들도 성숙한 시민이 되면 쓰레기라든지 담배꽁초라든지 꼭 쓰레기통에 넣어주고 가야 되는데 요즘에 대학교 같은데 가면 엉망진창이다. 담배꽁초가 아무데나 있다. 그러면 청소하는 사람이 다니면서 그것을 다 주워내야 한다. 돈을 주고 해야 한다. 책임 없는 무책임한 아이들을 키워놨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무 생각이 전혀 없다. 아무데나 버리고 가버린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련지 모르겠다. 전부다 아이들을 그렇게 키워가지고 애들을 하나씩 밖에 안 낳고 이러다 보니까 애지중지 키워 애들이 사회에 나가면 아무 책임감이 없이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만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에게는 절대 열쇠를 맡길 수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지키는 열쇠를 어떻게 가지겠는가.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왜 십자가까지 갔는가? 그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 갔다. 인권을 지키려고 십자가까지 갔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창고를 맡은 사람들인데 내가 맡고 싶어 맡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백성이 된 이상 나는 그 창고를 지키는 책임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로 말미암아서 문이 열려져 버리기도 하고 닫혀져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내 어깨에 열쇠가 맡겨져 있는 것이다. 나로 인해서 그 교회가 열어지기도 하고 닫혀 지기도 하는 것이다.
a. <하나님의 집> (딤전3:15)
하나님 집의 열쇠를 가지신 분! 하나님 집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보면 교회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집은 성막과 성전이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집은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될 때 그때 왕국이 된다.(마16:18, 19) 우리가 건축이 될 때 왕국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만일 개인주의가 되어서 자기들 멋대로 돌아간다면 왕국이 안 되는 것이다. 혹시 교회일 수는 있지만 왕국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파 저파 갈라져 있다고 하면 건축이 안 된다. 그러면 왕국이 안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왕국으로 넘어가는 길은 건축이 완성될 때 그때 왕국이 된다. 군대란 것이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라는 조직으로써 조직이 완비될 때 그때 비로소 군대가 되는 것이다. 전선이 구축될 때 그때 전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백성인데 건축이 안 되고 제멋대로 돌아간다면 왕국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전쟁이 불가능 하다. 승리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고 교회는 곧 왕국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가 왜 건축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왕국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나 혼자 개인이 승리할 수가 없다. 세상에 나갈 때 세상 대 교회이지 개인 대 세상이 아니다. 교회 대 세상이다. 교회가 얼마만큼 건축이 되는가가 세상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분열이다. 좋은 일 때문에 분열될 수도 있고, 나쁜 일 때문에 분열될 수도 있다. 어떤 이유로도 분열은 왕국으로 못 가게 하는 길이다. 오늘날 교회가 여러 가지 교리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로 분열되게 되었다. 그래서 왕국이 못 되는 것이다. 물론 근원적으로도 왕국이 안 되게 되어 있지만 또 교회도 우리가 하나가 되면 그것이 왕국이 되게 되지만 하나가 아니면 왕국이 안 되는 것이다.
전쟁 하는데 내 마음대로 골라서 나는 이쪽 지키겠다는 식으로 할 수 없다. 사령관이 시키는 대로 어디로 배치될지 모른다. 내가 속한 부대가 어디로 배치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 중에는 위험한 지역도 있고 또 위험하지 않은 지역도 있다. 어디로 배치될지 나는 모른다. 그래서 충성이 필요하고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데로 가겠다고 하면 전쟁이 전선이 구축이 안 된다. 나쁜 데로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고 고지로 가고 싶어 한다.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전쟁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다. 높은 자리를 점령해야 하기 때문이다. 6.25 전쟁 말엽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백마고지 같은 곳이다. 그 고지 하나를 탈환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 번은 이쪽에서 뺏었다 한번은 저쪽에서 뺏었다가 어떻게 하든지 목숨을 바쳐서 그 고지를 확보해야 된다. 이승만 박사는 그때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 왜냐하면 휴전이 오기 때문에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휴전 직전에 어디에서 멈추느냐 하는 것이 휴전선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해골바가지가 그 산에 깔렸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한 그 위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라가 건국이 잘못 되었니 전통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데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려져서 지금 자기들이 장관하고 있고 자기들이 선생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자기들이 잘나서 나라가 된 줄로 생각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누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지고 열쇠를 가지고 거룩하게 진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진실하게 주님께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다. 오늘 우리가 또 그렇게 해야 또 다음 왕국이 생긴다. 우리가 그렇게 안하면 다음 왕국이 없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이고, 교회는 곧 왕국으로 가는 길이다. 이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이다. 건축에는 꼭 기둥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대들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서까래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각기 다른 재료가 있는 것이다. 철근도 있고 시멘트도 있고 다 있다. 그런데 그것이 한 건축 안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다 있다. 그것이 건축자에 의해서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철근이 시멘트에게 너는 왜 그렇게 먼지만 나고 냄새만 나느냐고 한다든지 시멘트가 철근에게 너는 왜 그렇게 뻣뻣하냐고 한다든지 하면 건축이 되겠는가. 안 된다. 다 건축자에게 필요해서 시멘트도 있고 철근도 있는데 내 생각으로 철근은 철근대로 시멘트 보고 뭐라고 하고 시멘트는 시멘트대로 철근보고 뭐라고 하면 그것은 건축이 안 된다. 왜 우리가 콘크리트 집을 지을 때 철근이 꼭 필요한가? 시멘트만 가지면 돌이기 때문에 단단하기는 무지 단단한데 인장력이 없어서 잘 부러져 버린다. 깨져 버린다. 그래서 철근을 넣는다. 안 끊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철근은 무엇인가? 자기는 안 끊어지기는 하지만 돌처럼 단단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철근과 시멘트가 함께 어우러져 건축이 되는 것이다. 내게 모자란 것이 저 사람에게 있고, 저 사람에게 모자란 것이 내게 있어가지고 서로 보충 보완을 하고 있다. 이래서 건축이 되는 것이다. 철근만 가지고 집을 짓겠는가, 시멘트만 가지고 집을 짓겠는가. 못 짓는다.
바울이 말한 것이 그것이다. 다 이런 사람이겠는가, 다 저런 사람이겠는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 그것이 합해서 한 목적을 위해서 쓰여지면 그것이 건축이 되는데 다른 목적으로 써 버리면 이것은 분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한 목적 안에 있으면 왕국을 향해가는 한 목적 안에 있으면 서로 다른 것이 서로가 필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남녀 간에 연애를 할 때 만나면 서로 똑같은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게 된다. 대부분 그렇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신비로워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결혼을 해 놓으면 그것 때문에 싸운다. 그러니까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다. 결혼하면 연애는 끝나 버린다. 결혼은 건축이다.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조화를 못 이루고 서로 자기만 옳다고 하면 이 집이 건축이 되겠는가. 연애할 때는 그렇게 좋다고 해놓고 몇 년 씩 연애해서 결혼 석달도 못 되어서 이혼한다. 그것이 모두 다 건축을 몰라서이고, 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목표가 하나면 그것이 더욱 필요한 것인데 목표가 없기 때문에 각자 만나보면 틀린 것이다. 서로 불편한 것이다. 철근은 시멘트를 만나면 불편할 것이고 철근은 시멘트를 만나면 불편할 것이다. 불편하니까 자기 편하자고 하니까 싸우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목적이 없다보니까 자기 편한 것 밖에 모른다. 자기 편한 것 밖에 모르니까 결국 안 편하면 싸우는 것이다. 싸우는 것을 대부분 보니까 자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냥 조금 불편하면 살지 그렇게까지 불편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속 모르는 소리 한다고 하고, 살만하니까 저런 소리하지 나처럼 당해봐라 저런 소리 하는가 말한다. 어지간하면 살아도 되는데 그렇다.
한 목표가 있어야 된다. 한 목표 안에서 집은 건축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는 한 목표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를 보존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호하고 지키자는 한 목표가 있으면 내가 철근이 돼서 속에 들어가서 영원히 보이지 않든지 내가 바깥에 있어서 늘 돌에 맞아서 깨지든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편한 것이 목적이 되게 되면 나는 속에 들어가서 왜 평생 못 나오나 한다, 기둥 속에 철근이 들어가 있는데 평생 못 나온다. 평생 빛을 못 받는다.
목표 없는 인생은 괴롭다. 편안한 게 아니고 괴롭다. 하나님께서 목표를 정해주면 좋은데 하나님이 목표를 정해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하나님께로 안 오는가? 하나님께서 목표를 정할 까봐서 안 온다. 하나님께서 목표를 정해주시면 자기가 목표를 못 세울 것 같으니까 못 오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하나님께서 목표를 정해주시는 것보다 편한 일은 없고 완전한 일이 없는데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분명히 저기 가면 하나님 목표가 나올 텐데 그러면 내 목표는 어찌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가 영원한 목표이고 우리의 운명이다. 그분의 목표가 우리 운명이다. 바꿀 수가 없다. 그것을 알면 우리 인생이 안정된다. 그것만 알면 내 인생은 갈 곳이 정해지고 안정이 된다. 불안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을 모르면 불안하다.
b. <열쇠-그리스도>
열쇠! 이것은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국을 여는 것이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천국을 열려면 무엇으로 여는가? 그리스도라는 열쇠로 열어진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바로 열쇠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표현했다. 가지신 분이지만 가지신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이 열쇠이다.
예수님 자신이 천국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신다. 바로 그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고 말씀했다. 내가 천국 열쇠를 주노니, 그것은 교회에 준다는 말이다. 교회가 열쇠를 가진다는 말이니까 그 말은 곧 교회가 곧 열쇠라는 말이다. 교회가 곧 천국의 열쇠다.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천국을 여는 열쇠는 그리스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보물을 간직하고 열고 출납하는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라는 열쇠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많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는데 가보면 아니고 가보면 아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맹세한 땅, 수백년동안 자기들이 그렇게 믿어왔다. 믿고 가보니까 돌짝밭이고 메마른 땅이다. 그러면 그렇게 화려하게 약속된 곳인데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이 안 들겠는가. 그것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가 있어서 그리스도로 그것을 해석하니까 해석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이 무엇인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무엇인지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해석하니까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열쇠이다. 구약에 약속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와서 열려지게 된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도무지 열려지지 않는다.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이 많게 하겠다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맹세하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이 하늘의 별 수와 같이 많아졌는가. 그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무슨 열쇠가 있어야 열어질 텐데 그리스도로 여니까 그것이 열어진다.
그리스도는 오늘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여는 열쇠이다.
c. <보물들-그리스도>
하늘에 있는 보물을 얻으려면 그 열쇠가 있어야 얻을 수 있다. 그 열쇠 없이는 그를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보물은 바로 또 그리스도이다. 열쇠가 그리스도이듯이 보물도 또 그리스도이다. 어떤 말로 하면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를 연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보물들은 어떤 보물들인가? 영생의 성분이 되는 모든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을 알고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을 알고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은 영생의 성분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어떤 성분들을 봤다. 인격 안에 있는 많은 성분들을 봤는데 그 성분들은 모두 영생의 성분들이다. 그 성분들이 모두 영생이 되는 것이다. 그의 거룩하심, 그의 의로우심, 그의 진실하심, 그것이 모두 영생이다. 그러니까 보물을 여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보물 자신이다.
우리는 쉽게 말하면 성령의 열매들이란 말을 많이 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양성과 절재와 이런 것들을 모두 열거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열매를 먹어보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다. 이 성령이 있어야 열매가 열릴 것 아니겠는가. 감나무가 있어야 감이 열린다.
그 성령은 무엇인가? 그 영이고 그 영은 과정을 거친 하나님이시다.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께서 계셔야 이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안 그러고 성령의 열매는 이렇고 저렇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를 구하느라고 기도하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다. 나무는 안 심어놓고 감을 따먹겠다는 생각이니까 감이 열리겠는가. 나무를 심어야 감이 열리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라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이다. 그 성령은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바로 그 영이고 그 영은 예수의 영이다. 예수의 영은 과정을 거친 하나님의 영이다. 과정을 거친 그분이 내 안에 있어야 된다. 그것은 그분의 과정의 거침 안에 내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열매가 맺힌다. 그냥 맺히는 것이 아니다.
이 보물은 사탄과 세상을 폭파하고 천국에 승리를 가져오는 유일한 폭탄이기도 하다. 아무리 영생의 성분이 있고 성령의 열매가 있고 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도둑놈을 못 지키면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 도적을 못 지키면 가질 수가 없다. 그 도적을 폭파하고 천국에 승리가 와야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나 혼자 기도를 한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승리가 와야 우리는 이 천국의 승리를 누릴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가 그렇다.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은 언제 누릴 수 있었냐면 잠시 동안이지만 다윗의 왕국이 세워졌을 때 다시 말하면 승리자의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들은 그것을 누렸다. 그러나 그 왕국이 소멸될 때 그들은 그 누림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보물들을 그 나라 없이 그 나라의 승리 없이 우리는 누릴 수가 없다. 교회가 승리해야 내가 그 보물들을 누릴 수가 있지 교회가 승리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상태에 있으면 우리는 도저히 누릴 수가 없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교회의 승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교회로서 건축되는 것이 필요하다. 나 혼자가 아니고 한 연합 전선이 돼서 건축이 돼서 승리를 가져올 때, 건축 자체가 알고 보면 승리인데 그 승리가 올 때 그때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된다. 싸울 필요도 없다. 건축이 되면 그것이 바로 승리기 때문이다. 사탄은 계속해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만들어서 건축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에 건축이 안 되는 것이다. 시멘트에다가 소금을 섞어 버린다거나 해서 시멘트가 응고가 안 되도록 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기껏 섞어서 철근과 만들어서 지주를 세워가지고 시멘트를 부어서 만들어놨는데 뒤로 가보니까 20년 만에 다리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바다 모래를 완전하게 씻지 않고 시멘트를 만들었더니 시멘트가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사탄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어떻게 하든지 건축이 안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굴 파놓고 기도해라, 신령한 사람이 되라, 위대한 사람이 되라, 아주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라, 희락이 넘치는 사람이 되라, 화평이 넘치는 사람이 되라고 사탄은 그런 것을 도와주고 있는데 문제는 건축을 방해하는 것이다.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 안에서 얼마나 사람들은 사랑하려고 노력했으며 희락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며 화평을 가지려고 노력했는가. 나는 예수님을 믿고 기쁨에 넘친다, 나는 너무너무 좋다고 하면 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물론 희락이 있어야 된다. 하지만 건축이 안 되면 아무리 나 혼자 좋아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자기 혼자는 좋다.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치매가 오면 치매 환자는 행복하고 주변 사람이 불행하다고 한다. 치매 노인은 다 잊어버리고 모르니까 순간순간 행복한 것이다. 단순히 내가 기쁘다는 것으로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건축이다. 내가 괴롭더라도 건축이 되어야 한다. 내가 괴롭더라도 슬픔이 있더라도 건축이 되어야 된다. 내가 기쁘기 위해서 건축이 안 되면 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내가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십자가에서도 편안하게 죽고 전혀 아프지 않다고 죽는다고 해서 승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마시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아무개 집에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으니 그것을 갚아달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얼마나 편안하게 죽었는가. 그렇게 편안하게 죽었다고 천국이 되는가. 그렇다고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목표는 천국의 승리를 방해하는 것이니까 천국의 승리를 방해하는 것은 교회의 분열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교회의 건축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적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가 적절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영리해서 다 안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유가 맞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나는 다른 사람 말을 잘 듣다가 늘 실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나는 상황 판단을 잘 못하고 말을 들어보고 그 말이 옳다고 하면 그냥 넘어간다. 이 사람이 전에도 사기를 많이 쳤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도 이 사람이 와서 합리적인 말을 하면 그냥 넘어가 버린다. 어떤 사람은 직관적으로 저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문을 닫아 버리고 일체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어버린다. 그런데 나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 보니까 말이 그럴듯하면 그냥 들어버린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건축을 통해서 승리한다. 그냥 내가 개인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건축을 통해서 승리한다. 천국의 승리가 있어야 되지 개인의 승리가 있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개인이 엉망이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 더 우선이고 무엇이 더 앞에 있으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건축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사탄의 목표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싸움을 할 수 있는데 사탄이 뭘 목표로 하는지 모르면 싸움을 해도 허공에다가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지금 북한이 뭘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아는가 모르는가가 중요하다. 6자회담을 하라고 해도 왜 안 한다고 하는지 자기들이 무슨 계산이 있을 것이다. 그 계산을 하는 방법이 미국이 다르고 우리 정부가 다를 것이다. 계산하는 방법이 틀려서 말이 서로 안 맞고 방향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 그 사람들이 이러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미국은 그 사람들이 저러저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양쪽 계획이 다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든지 친구처럼 도와줘서 하자고 하고 있고, 미국은 저 사람들을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쳐버리자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 미군 기지가 만일 한국에서 떠나게 되면 그것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기 아주 좋은 방법이 된다. 남한에 있으면서 북한을 공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떠나게 될 때는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군은 어느 나라에 고정적으로 배치되는 시스템을 치우고 기동력을 갖추려고 생각하고 있다. 어디서든지 문제가 생기면 바로 타격할 수 있도록 어디서든지 문제가 생기면 거기다가 전쟁을 투입할 수 있도록 전술을 바꾸고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사탄을 폭파하는 전술이 필요하다. 저 사람들을 목표를 잘 모르고 저렇게 하지만 우리는 목표를 분명히 아니까 폭파하는데 쉽다. 신성한 보물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신성한 행복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d. 그의 지위는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히듯 견고함
그의 지위는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힌 것 같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 못이라는 것이 흙에다가 박아놓으면 아무리 단단하게 박아놔도 흔들면 빠져 버린다. 그리고 푸석푸석한 나무에다가 박아놓으면 역시 그것도 빠져버린다. 단단한 나무에다가 힘을 써서 박아야 그것이 안 빠져 나온다. 그래서 단단한 곳에 박힌 것같이 견고하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지위는 보물을 지키는 그 지위, 열고 닫는 그 열쇠를 가지는 그 책임, 그것이 어째서 그리스도에게는 변하지 않는가? 어째서 그것은 확고한가? 어째서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책임이 완전하고 그 열쇠를 가지는 것이 완전하고 보물을 지키는 것이 완전한가? 그분은 어째서 자기 자신의 그 보물을 지킬 뿐만 아니라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한 그 보물이 영원히 변치 않을 뿐만 아니라 사탄에게도 뺏기지 않게 되는 것인가?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은 언제든지 사탄에게 뺏길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언제든지 사탄에게 뺏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에게서 이루어진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뺏어갈 수가 없다. 왜? 그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힌 것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견고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청지기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내 운명이 내 생명이 십자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기 보다 더 깊이 더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 더 깊이 완전하게 알수록 나는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힌 것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히 할수록, 이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아는 것 같았는데 아니고 아는 것 같았는데 불확실하기 때문에 현장에 나가면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나가면 다른 것이 되 버린다. 나는 십자가가 운명이고 나는 십자가가 있다고 했는데 현장에 나가면 허물어져 버리고 엉뚱한 것이 나와 버린다. 왜?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고한 곳에 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보물이 손상 받지 않기 위한 유일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사탄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지만 여기는 오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 비밀이다. 죽었는데 그것이 확고하다. 죽음의 자리에서만 확고하다. 거기서만 견고하다는 것이 비밀이다. 세상은 살아서 그것을 유지하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서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죽음으로써 그것을 유지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이 보물들이 어떻게 보존될 것이며 교회의 보물이 어떻게 보존 될 것인가? 그것은 십자가의 견고함으로 인해서 보존된다. 다시 돌아가면 그 열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윗의 어깨에 메어진 그 열쇠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엘리야김의 어깨에 메어진 열쇠는 무엇이었으며, 계시록에 나오는 다윗의 어깨에 메어진 열쇠는 과연 왜 그런 열쇠를 가졌을까? 이 열쇠가 바로 십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십자가로 열면 해석이 안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십자가로 해석하면 해석 안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왜 이런가,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인간이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변명사전을 만든다면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가지고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십자가가 모든 것을 해석하는 마스터키이다. 우리의 운명이 거기에 있다면 내 생명이 거기에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면 해석 안 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다 해석된다.
청지기의 직분을 확고히 하려면 십자가가 견고해야 되는 것이다. 내가 어느 직장에 가서 오래 있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아주 확실하게 오래 있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파악하면 오래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직장에 못 있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 사람은 뭐냐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하고 사장님이 생각하는 내가 틀린 것이다. 사장은 생각할 때 오십만원짜리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생각할 때 백만원짜리인 것이다. 그러니 항상 오십 만원을 받으면 마음이 안 맞는 것이고, 사람을 뭘로 보고 이렇게 하는가 하는 것이고 내가 이것 받고 일해야 하는가,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가하여 불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못 있는 것이다. 옛날에 봤던 사람 중에 인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장터에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이었다. 관상이 턱이 길고 뾰족한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데 그 사람은 입술에서부터 바로 목으로 연결된 무턱이었다. 이 사람이 돈을 달라고 하니까 주었는데 요즘 같으면 오백 원짜리나 천원짜리를 누가 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불쾌해가지고 사람을 뭘로 보고 이것을 주느냐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옆에서 보면서 뭘로 보기는 무턱으로 봤지 했다. 지금 돈 얻으러 온 사람이 오백 원도 공짜고 천 원도 공짠데 사람을 뭘로 보고 이것을 주냐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주제를 정확하게 모르면 심지어 거지라 하더라도 행복한 거지가 될 수 없다. 거지도 참 행복한 거지도 있다. 자기는 일하지 않았는데 끼니마다 가면 밥이 오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나처럼 팔자 좋은 사람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거지 직업처럼 좋은 직업이 없다고 한다. 실험적으로 나온 데이터인데 거지 직업을 하다가 절대로 다른 직업을 못한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거지 직업이 최상의 직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직업으로 전직이 안 된다. 그렇게 편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토론토에 가면 유명한 거지가 하나 있다. 보따리 하나 가지고 길가에 앉아서 책을 보고 앉아있는데 얼굴에 만면의 미소가 가득하다. 겨울에는 영하 20도 까지 떨어지는 추운 곳으로 얼굴이 터서 벌건데 책을 보면서 뭐가 좋은지 하여간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거지도 대단히 편안하고 근심걱정이 없다. 자기 밥 한 끼만 해결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므로 다른 직업은 아무리 줘도 못한다. 남의 밑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편하고 정시에 출근 안 해도 되고 월급날 기다릴 필요도 없고 경제지표에 관심가질 필요도 없다, 어디 가든지 한 끼 문제는 해결된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면 거지라도 행복한 거지가 될 수 있고,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면 국무총리를 해도 불편하다. 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데 왜 국무총리를 하고 있는가하고 생각을 하면 행복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 청지기 지위를 확고하게 해 주는가? 그것은 십자가가 우리 청지기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영화로운 것이 없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쓰여진다면 그것보다 더 감사한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우리 주제를 파악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내가 뭐가 못 났다고 지금부터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있는가, 죽을 때쯤 가서 천당에나 가면 되지 하고 생각한다거나 한편의 강도는 보니까 말 한마디 잘해서 천당에 가던데 지금부터 가서 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알면 우리의 운명을 알게 되면 한 순간을 하나님께 쓰여 지더라도 내가 세상의 천 날보다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더 좋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영화로운 것이 없다. 쓸모없는 인생이 하나님께 쓸모 있다는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C. 하나님의 집의 모든 영광이 걸린 걸이가 됨
하나님의 집의 모든 영광이 걸린 걸이라고 한다. 옷걸이 하듯이 걸이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고 한다.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 이것은 모든 그릇들이 걸려 있다는 말인데 이런 그릇들은 뭐냐면 청지기들이다. 우리가 커피 잔에다가는 커피를 먹어야 하고 뚝배기에는 곰탕을 먹어야 하는데 그 그릇들이 전부 걸려있다는 것이다. 주인의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걸려있다는 것이다, 커피 먹을 때는 커피 잔이 보신탕 먹을 때는 보신탕 그릇이 다 있다. 청지기가 주렁주렁 걸려있다는 말이다.
청지기는 어디에 걸려 있는가? 그리스도에 걸려 있다. 그리스도에게 그 잔이 걸려있다는 뜻이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필요하실 때 무엇이든지 커피 먹고 싶다고 할 때는 커피가 나오고 녹차 먹고 싶다고 할 때는 녹차 그릇이 나오고 곰탕 먹고 싶다고 할 때는 곰탕 그릇이 나오는 이런 청지기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 있는 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필요를 위해서 모든 필요한 그릇들이 다 걸려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후손과 족속이 걸려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 백성이 다 걸려 있다. 거기다가 걸어놨다는 말이다. 하나님 백성, 이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종주로부터 항아리까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 모든 청지기들과 후손과 족속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게 된다.
왕궁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그 백성과 왕궁을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청와대를 보면 잘 지어놓았다. 거기에 가면 틀림없이 청지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요리사도 대한민국에서 일류 요리사가 가있을 것이고 이발사도 일류 이발사가 있을 것이고 미용사도 일류 미용사가 있을 것이고, 하여간 모든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사람들이 거기에 다 모여 있을 것이다. 그것이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나라의 영광을 의미한다. 거기에 가봤더니 우리 동네 뚝배기 집만도 못하더라가 되면 그 영광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가서 보니까 일류 요리사가 다 와있고 일류 그릇이 다 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영광이다.
후손과 족속이 걸려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이다. 우리는 그 백성일 뿐만 아니라 그 청지기로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내가 단지 백성만 아니면 그 왕을 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청지기가 없다면 그 임금이 영화로운 것이 아니고 임금이 수고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집의 모든 영광이 걸린 걸이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자식과 족속들 백성들이다. 그릇들은 섬기는 자들이다. 그 백성일 뿐만 아니라 섬기는 자가 있을 때 그때 어떤 나라는 그렇다. 나라마다 백성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백성들이 그 나라를 섬기느냐 안 섬기느냐이다. 우리가 미국을 보면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럽다는 것을 보려면 그 미국의 국민이 얼마나 그 나라를 사랑하고 얼마나 그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가를 보면 안다. 그들은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을 즐겁게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그 나라의 영광이다. 그 백성들이 거기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그 나라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백성과 그 백성의 봉사, 그 백성의 청지기 직분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고 단지 백성일 뿐이라고 하면 주민등록에만 올라가 있고 청지기는 아무도 없다면 그 나라는 영화로운 나라가 될 수 없다. 천하에 없는 우리 대구 교회에 사람이 많이 와 있다. 물론 사람이 많이 와 있는 것도 영광이지만 하지만 한 사람도 청지기는 없다면 이것은 뭔가 영화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귀중한 것 같으면 내가 왜 봉사를 안 하겠는가. 내가 참으로 귀중하다면 왜 내가 청지기가 안 되겠는가. 내가 청지기가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이발사 중에서는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는 것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통령의 이발사라고 어디를 가도 뽐낼 것이다. 요리사 중에서는 청와대의 요리사가 내가 최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요리사, 하나님의 이발사가 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청지기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그 나라가 영광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내가 참으로 교회가 좋다면 왜 교회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내가 참으로 교회가 좋다면 내가 사랑하는데 내가 교회에게 부끄러움을 주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백성과 그 청지기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섬기는 자 때문에 나타난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 때문에 그 나라는 존재한다.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이 걸려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에게 걸려 있다.
최상의 걸이! 하나님의 영광을 거는 최상의 걸이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걸이를 확고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못이 단단하게 박힌 것 같이 걸이를 확고하게 한다. 영광의 걸이를 확고하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걸려진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뺏어가지도 못하고 변하지도 않는다. 파괴되지도 않는다.
그러면 우리의 운명! 십자가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에 걸려진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다. 내가 좋고 안 좋은 문제가 아니다. 내가 편리하고 안 편리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있는 걸이!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 있는 그 기둥!
D. 하나님 집의 보좌가 됨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보좌가 된다. 이 보좌란 말은 왕좌란 말이니까 통치란 뜻이다. 영광이 있는 만큼 통치가 된다는 뜻이다. 영광이 없는 통치란 것은 불가능하다. 영광이 바로 통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있기 때문에 걸려 있는 통치가 일어난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 있을 때 통치가 가능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고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광이 걸려 있으면 세상은 저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서 때려 부셔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영광 앞에 다 무릎 꿇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모든 사람이 잠잠해진다. 은혜가 있는 곳에 다 잠잠해진다. 생명이 흐르는 곳에 나무가 자라듯이 물이 흐르는 곳에 나무가 나듯이 은혜가 나타나면 다 잠잠해진다. 은혜가 아닌 다른 것이 있으면 시끄러워 지지만 은혜가 있으면 다 잠잠해진다. 아무 할 말이 없다. 우리는 그냥 거기에 다 순응할 뿐이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은혜로만 드러날 수 있는가. 전혀 자기로서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은혜로서만 드러날 수 있는가. 지난주에도 감동적인 사건이 생겼다. 00형제도 그날 간증할 준비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형제가 더 먼저 나와서 간증을 해버렸다. 그래서 그 뭔가를 자기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거기가 아니고 지금까지 있던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내놓으니까 00형제가 나와서 늘 그러듯이 형님이 먼저 말해버려서 할 말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할 말이 없다는 것이 그 말이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다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아름다운 화합이 이뤄지게 되었다. 각자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는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그 은혜 안에 하나가 되어 버렸다. 멀리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날의 감동이 자기들에게 스며왔다고 전해 왔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감동이 온다. 그리고 거기에 화합이 생긴다. 거기서 통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통치가 된다. 일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다 풀려간다. 그것 없이 일을 일대로 처리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이쪽을 맞춰놓으면 저쪽이 안 맞고 저쪽을 맞춰 놓으면 이쪽이 안 맞는다. 이 사람 달래놓으면 저쪽이 삐지고 저쪽을 달래놓으면 이쪽이 삐지고 안 되는 것이다. 계산을 맞추어 손익을 백날 맞추어도 안 된다.
그런데 은혜가 나오니까 감사가 나오니까 모든 것이 저절로 다 해결되어 버린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 그것은 아버지로서 근원이고 공급이시고 생명이 되시고 청지기로서 신성한 보물들을 관리하시는 하나님 집의 모든 영광이 걸린 최상의 걸이가 되는 그래서 보좌의 통치를 이루시게 하는 이분인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우리가 참고하면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능히 닫을 자가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창고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들어오라는 것이다.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들어오고 얼마든지 가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 네 앞에서 절하게 될 것이다. 복종하게 될 것이다. 사탄이 엎드려 있을 것이고 사탄을 따라서 거짓말 하던 자들이 엎드릴 것이고 모두다 거기서 엎드리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그분 자신을 말한다. 그래서 내가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되겠다. 이 시험은 온 인류가 받는 시험의 때가 올 것인데 그 시험의 때를 너희에게는 면제해 주겠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 다시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해 주겠다.
이렇게 엄청난 축복이 우리에게 와 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 우리는 이것이 청지기의 지위인 것을 알아야 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흙으로 지어진 아무 쓸모없는 인생을 하나님 보물을 지키는 지킴이로 청지기로 우리를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다윗의 왕궁을 지키는 보물을 지키는 청지기로 엘리야김을 선택하신 것처럼 셉나를 추방하고 해고시키고 엘리야김으로 대치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처리하고 사람을 지으셨고 아담을 하나님께서 해고시키고 그리스도를 대치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로 대치되기를 원하고 충성스러운 증인이실 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우리를 대치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집의 청지기가 돼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 열쇠를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이 열린 문이 우리 앞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가 열쇠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