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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윤병한
조선 청백리의 정신과 이념
이황과 정약용
영의정/이원익의 생애
새 시대의 공직자가 새겨야 할 우리 선조들의 살신 정신
청백리 박수량(朴守良)의 묘
1491(성종 22)~ 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아곡 박수량(朴守良)의 백비에 담겨있는 이야기)
단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
조선 명종이 아곡 박수량의 청백리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내린 비석입니다.
당대는 물론이요
후세에도 귀감이 되는 청백리의 상징적 유물인 백비가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은
39년간 전라도관찰사,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변변한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했고
죽어서는 선산이 있는 장성으로 내려올 장례비가 없을 정도로 청렴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러 두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니
이에 명종이 크게 감동하여 서해바다 암석을 골라 비를 하사하시며.
"비문을 새기다 그 청백함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니 비문없는 비를 세우라" 명하심에 따라
백비가 세워졌다.
본관은 태인. 자는 군수(君遂). 아버지는 종원(宗元)이다.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급제한뒤 승문원부정자·전적·예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그뒤 고부군수·보성군수·성균관사성·내섬시정·군기시정 등을 역임했다.
1534년 함경도경차관이 되어 지방 관아를 순시중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 전주남(全周男)이 마음대로 야인(野人)들에게
우마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었다.
1536년 동부승지·좌승지·나주목사, 1537년 함경도관찰사,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지냈다.
1546년(명종 1) 동지춘추관사로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뒤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후 경기도관찰사·호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주세붕(周世鵬)과 교유가 깊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현재,
한국의 국정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이렇게 청렴결백한 문인들을 배웠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은 벌써 금융대국은 물론
복지사회를 만들었을 터인데
이런 훌륭한 조상들의 선례는 배우지 않고 국민의 혈세를 내돈처럼 쓰고
낯짝 두껍게 자진사퇴를 하지않고 버티는 놈들은
중국식 처형방법 포청천의 법칙대로 작두를 대령하렸다 하면
모두다 제 주둥아리로 불어낼 것인데....
(필자-기러기)
-공직자들의 청문을 보자니 마음 속에 도둑을 키우고 사는 것 같아 ....
(윤병한)
청백리 이원익
(여섯차례 영의정에 오르신)
조선 중기의 문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6번제(六番制)와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공헌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치()의 4세손이며,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낸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세에 4학 중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정자·저작 겸 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해감사이던 이이(李珥)의 천거로 1575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그뒤 교리·수찬·지평·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승정원이 탄핵을 받자
자신만이 파면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1593년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한 공으로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와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600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돌아보았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려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왕의 호위를,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의 호위를 맡았으며,
서울로 와서는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사직하여 낙향한 후에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는 안주목사로 있을 때 농민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병졸들의 입번(入番)을 4번에서 6번으로 하여 1년에 2개월씩 근무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색인 : 6번제).
이 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또한 그때까지 누에를 칠 줄 모르던 안주지방에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장려해서
안주에서는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한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으로 있을 때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거두되 중앙에 선혜청을,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防納)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에 한하여
우선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 묘정,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 시흥 충현서원(忠賢書院),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의 청백리 219人
이름-본관-직책
태조 5명 |
안 성-광주-관찰사 서 견-연일-장령 |
우현보-단양-찬성사 |
류 순-진주-제학 |
길 재-선산-문하주서 |
태종 8명 |
경 의-청주-절도사 최유경-전주-참찬 |
이지직-광주-참의 이 원-고성-좌의정 |
김약항-광산-대사성 박서생-비안-대사헌 |
이백지-용인-관찰사 최사의-경주-판돈령 |
세종 15명 |
정 척-진주-대제학 맹사성-신창-좌의정 홍계방-남양-참의 황효원-상주-우참찬 |
최만리-해주-부제학 류 겸-진주-좌참찬 박팽년-순천-승지 류 염-진주-판서 |
황 희-장수-영의정 이석근-전주-익평군 이정보-경주-관찰사 김 장-광산-장령 |
류 관-문화-영의정 민불탐-여흥-주부 이 지-경주-판관 |
세조 7명 |
노숙동-풍천-대사헌 기 건-행주-대사헌 |
정문형-봉화-영의정 곽안방-현풍-군수 |
박 강-반남-판중추 김종순-경주-판윤 |
이 언-홍양-부윤 |
성종 20명 |
정성근-진양-직제학 허 침-양천-좌의정 이 훈-한산-좌참찬 양 관-남원-지돈녕 이신효-전의-관찰사 |
임 정-이안-판서 박 열-밀양-찬성 이현보-영천-판중추 박처륜-고령-부제학 이 순-우봉-참판 |
성 현-창녕-대제학 윤석보-칠원-직제학 김겸광-광산-우참찬 조지서-임천-보덕 이약동-벽진-지중추 |
허 종-양천-좌참찬 구치관-능성-영의정 안팽명-광주-사성 민 휘-여흥-대사헌 류 훈-문화-판서 |
중종 34명 |
정매신-진주-판관 김 무-안동-판서 김 전-연안-영의정 이 화-전의-판서 류 빈-진주-판서 손중돈-경주-참찬 김연수-안동-대사헌 이언적-여주-좌찬성 신공제-고령-판서 |
조사수-양주-판서 조치우-창녕-부사 강숙돌-금천-사간 김종직-선산-판서 이숭원-연안-판서 표 빈-신창-시정 박 상-충주-판서 김 정-경주-판서 김양진-풍산-판서 |
최명창-개성-참판 오세한-나주-병사 이선장-한산-군수 정갑손-동래-찬성 류희철-문화-집의 조원기-한양-판서 윤사익-무송-판서 유 찬-기계-수사 |
권 빈-안동-전적 송 흠-신평-판중추 류 헌-전주-대사간 정창손-동래-영의정 김 흔-연안-참판 양지손-남원-참의 이철균-성주-대사성 한형윤-청주-판서 |
명종 45명 |
정 연-동래-군수 안 현-순흥-좌의정 임보신-풍천-참의 이몽필-전주-참판 윤춘년-파평-판서 김팽령-경주-사용 김 우- -부사 김언겸-김해-목사 김몽좌-김해-직장 이 황-진성-우찬성 김약묵-강진-집의 송익경-봉화-우의정 |
윤 부-파평-참판 박수량-태인-판서 홍 섬-남양-영의정 홍 담-남양-판서 류 혼-문화-부정 강윤권-진주-사재정 이중경-광주-영의정 변훈남-초계-현령 이준경-광주-참판 송 찬-진천-판중추 노 진-풍천-판서 |
이세장-전주-관찰사 김 순-경주-정랑 이 명-전의-좌의정 성세장-창녕-판서 박영준-고령-판서 오 상-해주-판서 안종전-죽산-군수 박민헌-함양-참판 주세붕-상주-찬성 허세린-양천-좌윤 신사형-영월-목사 |
정종영-초계-찬성 임호신-풍천-지돈녕 이 영-영천-수사 윤 현-파평-찬성 우세겸-단양-부정 신 잠-고령-목사 김 광-영안-부사 이증영-덕산-목사 김 개-광산-판서 안 잠-순흥-별좌 김취문-선산-대사간 |
선조 28명 |
심수경-풍산-우의정 이원익-전주-영의정 백인걸-수원-참찬 안자유-순흥-판서 이광정-연안-참찬 허 욱-양천-좌의정 이기설-연안-장령 |
허 잠-양천-판서 류성용-풍산-영의정 이시언-완산-찬성 이제신-전의-병사 이후백-연안-판서 이유중-덕수-대사헌 오억령-동복-판서 |
이 기-한산-판서 이항복-경주-영의정 최흥원-삭녕-좌의정 정곤수-청주-좌찬성 심희수-풍산-우의정 최여림-전주-승지 김 행-강능-목사 |
이우직-여주-판서 이직언-전주-우찬성 장필무-구례-병사 김 수-안동-영중추 성 영-창녕-판서 김장생-광산-참판 조언수-양주-판서 |
인조 13명 |
김상헌-안동-좌의정 김덕함-상주-대사헌 이시백-연안-영의정 김신국-청풍-영중추 |
김시양-안동-춘추관사 이명준-전의-참판 홍명하-남양-영의정 |
민여임-여흥-참판 성하종-창녕-병사 신경진-영월-대사헌 |
이안눌-덕수-판서 최진립-경주-수사 구곤원-능성-군수 |
숙종 22명 |
이상진-전의-우의정 류경창-전주-참판 성이성-창녕-부사 홍수량-남양-수사 강세구-진주-대사간 윤지인-파평-판서 |
조 경-한양-판중추 박신규-밀양-참찬 이후정-연안-참지 강 열-진주-부사 윤 추-파평-장령 이 제-전주-우윤 |
강백년-진주-참찬 최 관-전주-지중추 조 속-한양-판서 이태영-진주-부사 강유후-진주-부사 |
조석윤-백천-대제학 이지온-공주-좌윤 홍 무-남양-정랑 이세화-부평-판서 최경창-해주-부사 |
경종 6명 |
류상운-문화-영의정 김두남-안동-장령 |
송정규-여산-관찰사 이하원-광주-판서 |
강석범-진주-도정 |
이명준-연안-부사 |
영조 9명 |
허 정-양천-수사 정형복-동래-판서 이겸빈-덕수-대사간 |
이병태-한산-부제학 최유현-삭녕-세마 |
윤 용-파평-판서 윤득재-해평-판서 |
한덕필-청주-참판 이태중-한산-판서 |
정조 3명 |
이의필-전주-참찬 |
이단석-전주-참판 |
이방좌-전의-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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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4명 |
남이형-의령-부사 |
서기순-대구-판서 |
한익상-청주-관찰사 |
심의신-청송-관찰사 |
44씨족, 219명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이다.
임금의 재가를 얻어서 의정부에서 뽑았다.
명종대부터 살아 있는자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고,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 청백리로 녹선(錄選)하였다.
청백리는 총 219명이 배출되었는데,
대동장고(大東掌攷), 청선고(淸選考) 186명,
전고대방(典故大方)에 219명의 자료가 전 한다
여러 기록들에서 본관별로 6명이상을 배출한 집안은 전주이씨, 파평윤씨, 안동김씨, 연안이씨, 남양홍씨, 전의이씨 등 6씨족이며 5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주이씨, 한산이씨, 양천허씨 등이다.
전고대방[ 典故大方 ] 단군(檀君)에서 시작하여 한국 역대 인물에 대한 전거(典據)를 밝힌 일종의 인명사전. • 구분 • 활자본, 인명사전 • 저자 • 강효석(姜斅錫) • 시대 • 조선 후기(1924년 간행) 활자본. 4권 1책. 조선 후기의 학자 강효석(姜斅錫)이 엮어 1924년 서울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발간하였다. 권1은 역대편(歷代編) ·전궁원묘(殿宮園墓) ·만성시조편(萬姓始祖編), 권2는 상신록(相臣錄) ·문형록(文衡錄) ·호당록(湖堂錄) ·청백리록(淸白吏錄) ·공신록(功臣錄) ·명장록(名將錄) ·등단록(登壇錄) ·문무제곤록(文武制閫錄), 권3은 경연관초선록(經筵官抄選錄) ·유현연원도(儒賢淵源圖) ·문인록(門人錄) ·문장가 ·서화가 부보유(附補遺), 권4는 종묘배향록(宗廟配享錄) ·문묘배향록(文廟配享錄) ·서원향사록(書院享祠錄) 등 33개 부문으로 분류, 사건마다 관련인물을 들어 소전(小傳)을 붙이고 알기 쉽게 서술하였다. 책머리에 윤회구(尹喜求)의 서문과 책끝에 편자와 고응한(高應漢)의 발문이 있다.
명 장 (名 將) : 명장록에 수록된 18명의 장군 중 한분임. 등 단 (登 壇) : 대장(大將) 벼슬을 한 어른 문무제곤(文武制?): 유사시 국왕으로부터 도성외(都城外) 군무대사를 수임(受任)한바 있는 선조 대동장고[大東掌攷] 우리나라 역사상의 인물을, 약력과 고사를 분류하여 정리한 책. 13책. 필사본. 순조연간에 홍경모(洪敬謨:1774~1851)가 〈동국통감〉·〈사기〉·〈문헌비고〉·〈동국여지승람>등을 참조하여 편찬했다. 기재양식은 자호(字號), 본관, 시호, 특기사항, 선조 중 유명인, 출신과 과거경력, 생몰, 주요관직 등이다. 1책은 역대고(歷代攷)로 단군조선에서 정조까지의 왕· 왕비· 인물· 사건·치적을 정리했다. 2책은 초액고(椒掖攷:后妃) 이하 종영(宗英:왕자)· 국구(國舅)· 의빈(儀賓:부마)·보상(輔相)·검교정승(檢校政丞)·총재고(冢宰攷)로 되어 있으며, 3책은 사마고(司馬攷)·문형고(文衡攷)·별천(別薦) 문형고· 문형권점록(文衡圈點錄), 4책은 문임(文任)·호당(湖堂)·옥서(玉署)·강관(講官)·국자고(國子攷), 5책은 중서(中書)·검상(檢詳)·전랑고(銓郞攷), 6책은 내한고(內翰攷), 7책은 융원(戎垣:訓將·禁將)·보유(補遺)·기사(耆社)·휴퇴고(休退攷), 8책은 사훈고(司勛攷:공신), 9~11책은 방백고(方伯攷)·사성고(使星攷), 12책은 별편에 유림·문원(文苑)·시인·필원(筆苑)·화가·청리(淸吏) ·명장고(名將攷), 외편에 태묘종사고· 문묘종사고· 계성사(啓聖司) ·장릉배식고(莊陵配食攷), 13책은 내한천권록(內翰薦圈錄)· 내각고(內閣攷)로 되어 있다. 대개 조선 중심이나 수록연대는 항목마다 일정하지 않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청선고(淸選考) 조선 초기부터 한말까지 현직(顯職)이나 봉작(封爵)을 받은 사람, 문묘 ·서원 등에 제향(祭享) ·배향(配享)된 사람의 명단을 수록한 책. • 구분 • 필사본 • 시대 • 조선 후기 • 소장 •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 *시대 *조선 후기 *소장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 5책. 고종 때 편찬된 것으로 비교적 내용이 풍부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제1책은 <조두편(俎豆篇)>으로서 대보단(大報壇)을 비롯하여 각 묘(廟)와 팔도 사도(八道四都)의 서원 및 각 도(道)에 훼철(毁撤)되어 있는 서원 등에 제향 ·배향된 사람의 명단과 약력을 기록하고, 제2책은 대사(臺司) ·이상(貳相) ·사인(舍人) ·주사 유사(籌司有司) ·주사 부제조(副提調) ·녹훈(錄勳) ·장임(將任) ·수부(帥府) ·국구(國舅) ·부마(駙馬), 제3책에는 청백(淸白) ·좨주(祭酒) ·사업(司業) ·찬선(贊善) ·진선(進善) ·유선(諭善) ·경연관(經筵官) ·자의(諮議) ·화사(華槎) ·수로조천(水路朝天) ·사개(使价) ·통신사(通信使) ·효묘동천시 배종황조인(孝廟東遷時陪從皇朝人) 등, 제4책에는 증시(贈諡)된 사람을 연대별로 싣고, 제5책은 증시된 사람의 명단을 시호(諡號)의 종류별로 각각 나누어 실었다. 역참조항목 청백리 |
윤병한/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