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 금융조합서 일하다 일본·미국 유학길
신학 공부하고 돌아와 간도서 강원룡·김영규 등 육성
1945년 서울 장충동에 경동교회 설립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4·19 가담 5·16 거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
네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 등 고초당해
신학 공부하고 돌아와 간도서 강원룡·김영규 등 육성
1945년 서울 장충동에 경동교회 설립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4·19 가담 5·16 거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
네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 등 고초당해
▲ photo 김관용 |
“선친께서는 아호대로 종교인으로서는 자유분방하게 살아가신 분이지요. 장공이라는 아호는 송창근 목사님께서 지어주셨다고도 하고, 선친 스스로 ‘구만리 장천과 비움의 공’이라고 하셨대요. 김정준 목사님은 ‘그의 생활과 사상이, 높고 넓고 푸르고 긴 창공 같아, 사람들이 그를 장공 선생이라 부른다’고 하셨어요.”(3남 관용씨)
김재준은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농사짓던 김호병과 채성녀 사이의 2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창꼴마을은 두만강 국경지대의 유폐된 산촌으로, 지금은 아오지탄광으로 유명하다. ‘창꼴’이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에 군량미 비축창고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김재준의 증조부 김덕영은 산지를 3만평쯤 개간하여 대농(大農) 소리를 들었고, 부친대에도 ‘집터 주위에 자연스레 펼쳐진 텃밭이 1만평쯤 한 필로 되어 있는’ 전답을 소유한 중농이었다. 모친은 경원지역의 실학파 거두 채향곡의 후손인 채동순의 3녀이다.
김재준은 다섯 살 때 부친이 훈장인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아홉 살 때 경월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하며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1915년에 회령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다. 김재준은 회령구청 간접세과에 고원으로 취직하며 1917년에 장석연의 맏딸 분여와 결혼한다. 김재준은 결혼 후 웅기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한다. 이곳에서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을 보면서 민족의식이 싹튼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김재준은 평생 ‘신앙의 형제’이자 ‘신학적 동지’가 되는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을 만난다.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일하던 송창근 전도사가 독립운동 혐의로 징역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웅기에서 멀지 않은 그의 고향 웅산에 내려와 있었다.
창꼴마을과 달리 송창근의 고향 웅산은 일찍이 기독교회가 들어왔고, 송창근은 열세 살 때 집을 나와 간도로 탈출하여 간도 명동중학과 소영자 광서중학에서 공부한다. 송창근은 간도에서 이동휘의 애제자가 된다. 이동휘는 북간도 독립군 군관학교가 운영난에 부딪히자 문을 닫고 독립운동의 내일을 꿈꾸며 시베리아로 떠나면서, 함께 따라나서는 송창근에게 ‘너는 본국에 돌아가 목사가 되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 뒤 송창근은 서울에 가서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교회 전도사가 되어 일하다가 그 무렵 고향에 내려와 두 살 아래 청년 김재준을 만난다. 송창근은 김재준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지금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 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오.”(‘잊을 수 없는 만우’ 김재준)
김재준은 금융조합에 사표를 내고 서울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서울 견지동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운영하는 백부를 찾았다. 그러나 몇 달 후 백부가 경영난으로 어려워지자 김재준은 하숙생활을 하게 된다.
“저금 잔액으로 몇 달을 버틸 수는 있었으나 김재준의 서울 하숙생활은 시골 중농의 경제력으로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내복도 의복도 없는 단벌 학생복으로 눈길, 눈보라와 맞서며 아현고개를 넘나들어야 했고, 하숙집 밥값이 밀려 이부자리를 밥값 대신 주인에게 떼이고 추운 겨울 거리로 쫓겨나기도 했다.”(‘김재준 전집’)
김재준은 정규 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해 중동학교 속성고등부와 서울 YMCA에서 공부한다.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총무 등이 민족의식과 신지식을 제공하는 샘터 구실을 해 김재준은 매주 일요강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또한 잡지실에 무시로 드나들면서 ‘개조’ ‘중앙공론’ 등 잡지를 읽었고 일본어로 된 문학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이 무렵 김재준은 숭동교회에서 열린 서울 장로교회 연합사경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화받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난 중생 체험’을 한다. 2년 후인 1926년 김재준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단돈 5원50전뿐이어서, 무작정 아오야마대학 신학부 졸업반에 재학 중인 송창근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기숙사 규칙을 어기면서 한동안 그의 방에 함께 기거하면서 막노동과 학원 청강, 도강을 한다. 얼마 후 고학생 합숙소에 잠자리를 정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낫토’ 장사, 건축 공사장 지하실 흙 실어 나르기, 잔디 깎기, 유리창 닦기, 서재 청소와 곳간 정리, 꽃나무 전지 작업, 식당 장작 패기 등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고학을 한다.
“추운 겨울에 스팀도 없는 다다미방 기숙사에서 헌 외투 하나로 견디며, 식대가 떨어졌을 때는 하루에 식빵 두 쪽에 냉수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우면서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철인처럼 초연해 보기도 했다.”(‘김재준 전집’)
김재준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아주 특이하게 1928년에 졸업한다. 청강생으로 시작해 정규학생으로 등록된 적도 없는 데다, 수강 학기 수도 졸업 가능 학기에서 한 학기가 모자랐다. 생활이 어려워 학자금, 학우회비, 기숙사비 등을 제대로 제때에 낸 적도 없었다.
“아마도 과묵한 조선 청년의 진지하고도 사려 깊은 학구적 태도와 방학 때마다 기숙사에 남아 엄청나게 독서를 하는 모습을 수년간 지켜본 학교 당국이었기에 그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졸업생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김재준 평전’ 김경재)
졸업반 방학 때 귀국하여 종성·온성·경원·신아산·고건원·경흥·웅기 등 두만강 유역의 교회와 기도처를 순방하면서 설교와 강연을 한다. 졸업 후 김재준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프린스턴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던 송창근이 ‘졸업하면 곧장 미국 유학을 오라’는 권고와 함께 프린스턴대학 입학허가증과 1년 200달러 장학금 허락 통지서를 보내왔다.
“지금이나 당시나 가난한 학생에게는 미국까지 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마침 숭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이재향 목사의 도움으로 재정보증서를 만들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서류와 수속을 거친 뒤에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그의 미국 유학 여비를 마련해 준 사람은 서울 YMCA 지도자 윤치호였다.…윤치호는 미래의 조선 독립을 꿈꾸며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특히 미국에 건너가 자연과학 분야와 신학 분야를 연구하려는 청년 유학생에게 태평양을 건너갈 선박료를 마련해 주곤 하였으므로, 청년 김재준은 서울 견지동 고가에서 윤치호 선생을 면회하고 여비 도움을 청했다. 윤치호는 김재준의 포부를 듣고 격려와 조언의 말과 함께 여비 100달러를 마련해 주었다.”(‘김재준 평전’)
김재준이 요코하마에서 탄 배는 열흘 만에 하와이에 닿고, 다시 나흘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안착한다. 그곳에서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를 거쳐 도착한 프린스턴역에는, 그곳에서 유학 중이던 김성락과 한경직이 마중 나와 있었다.
“김재준이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보수주의, 특히 근본주의 신학을 공부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신학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건전한 신학은 극단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이다.”(‘김재준 평전’)
프린스턴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김재준은 1930년 가을 새학기를 맞아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 2학년에 등록한다. 고학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웨스턴은 장학금 조건도 좋았다. 더구나 그곳에서는 형제나 다름없는 송창근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프린스턴 시절처럼 웨스턴에서도 김재준은 식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숙사 식당 웨이터, 키친 보이, 잔디 깎기, 농장 일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김재준은 1932년 석사학위를 받는 졸업식에서 히브리어 특별상을 받으며, 거의 모든 과목에서 최고 성적을 기록한다. 그러나 경제 공황을 맞아 장학금이 끊긴 데다 아르바이트마저 불가능해 김재준은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귀국해서 고향인 경흥군 일대의 교회를 순방한다.
“나는 노회 뒷좌석에서 얼마 동안 방청했다.…내 인상으로는 은혜도 화평도 증발된 사무 절차뿐이었는데,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님들이니만큼 ‘정통 신학’ 일색이었다. 나는 좀 더 ‘복음적’인 신학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정통주의는 그대로가 ‘율법주의’여서 거기에는 자유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목사님들과 노회원 장로님들 얼굴은 평화 없는 ‘목사 탈(마스크)’로 굳어져 있었다.”(‘김재준 전집’)
이듬해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나 1936년 신사참배 문제와 민족교육금지 문제로 물러난다. 그의 자서전의 고백을 그대로 들어보자.
“나는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초대교회 때 로마의 황제 예배 강요와 유를 같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 예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초대 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했다. 나는 평양신학 도서실에서 ‘성자열전’ 50여권을 한 번에 두세 책씩 빌려다 읽었다. 그중에서 우리와 비슷한 경우에 순교한 분들을 골라 순교자열전을 쓰기 시작했다.”
김재준은 숭실전문교장 마우리 선교사의 소개로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교사로 갔다. 간도 용정은 조선족의 독립운동과 특히 기독교계의 민족 교육열이 왕성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후일 한국 개신교의 큰 역할을 하는 수많은 제자를 육성한다. 강원룡·김영규·전은진·안병부·김기주·신영희·최동렵이 있었고 당시 김재준의 영향을 받았던 제자들이 광복 후 서울 경동교회를 중심으로 집결하여 ‘선린회’를 이룬다.
“김재준 선생의 별명은 ‘천지 선생’이었는데, 강의할 때면 학생들의 얼굴은 보지 않고 교안 노트와 교실 천장만 자주 보곤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강원룡 목사의 회고담’ 기독교장로회 회보 2001년 6월)
김재준은 1939년 서울 숭동교회 김대현 장로가 사재 50만원을 내놓아 설립한 조선신학원의 설립 사무를 전담하며 이듬해 교수로 임명된다. 이후 그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일제강점기 말 조선신학원을 끝까지 지킨다. 광복을 맞아 김재준은 서울 동자동의 천리교 본부 건물을 불하받아 조선신학원의 기틀을 다진다.
“김천의 만우, 신의주의 한경직, 그리고 서울의 나는 모두 조선신학원에 모였다. 셋은 학창시절의 맹우였다. 한국 교회를 세계 수준에 밀어올리기 위한 인물 양성, 그것은 자유로운 신학이다. 나는 구약을 전공하기로 해서, 학업을 마치는 대로 셋이 같이 일할 작정이었다. 이제는 일제가 물러갔으니 기회가 온 셈이다.”(‘김재준 전집’)
1945년 12월 서울 장충동에 경동교회를 세운다. 김재준의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사랑 정신과, 강원룡을 중심으로 한 ‘선린형제단’의 기독교적 사회봉사 정신이 상호작용하여 생겨난 교회이다.
“경동교회는 장충동 1가에 있는 천리교 숙사에서 ‘야고보교회’란 이름으로 내가 맡았다. 지성인과 학생들을 위한 특수교회를 지향한 것이다. 나는 그때 신학교육 개혁운동에 바빠서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일 강단만은 맡아 줘야 하겠대서 동자동서 장충동까지 주일 아침 저녁, 수요일 밤, 식구들을 데리고 걸어갔다 걸어온다.”(‘김재준 전집’)
6·25전쟁 중 부산 피란살이에서 김재준은 남부민동에 천막을 치고 조선신학대학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바꿔 학장에 취임한다. 1953년에는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되어 기독교장로회가 탄생한다.
1960년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4·19혁명을 맞은 김재준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교수 시위에 가담한다. 5·16 쿠데타 후 김재준은 말이나 글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다. 그는 1965년 7월 한경직·이해영·강신명·문재린·송두규·이태준 목사 등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들과 영락교회에 모여 초교파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운동을 벌인다.
이즈음 김재준은 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겸 명예학장으로 추대되며 1972년에는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된다. 이해 12월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김재준은 이듬해 3선개헌 반대 범국민위원장으로 추대되며 함석헌·천관우·이병린·지학순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을 맡는다. 김재준은 1971년 12월 6일 비상사태 선포 이래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할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 어른은 기관원을 따돌리려고 하지 않 고 품에 안고 다니셨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실 때 오히려 기관원에게 ‘고충이 많지?’ ‘지혜롭게 처신해!’라고 하셨다. 귀가하신 것을 보고 돌아가려는 기관원에게 ‘들어와 차 마시고 가라’ 하시며 사모님에게 차를 끓여오도록 하셨다. 때로는 신문사에 보낼 원고의 교정을 부탁하여 결과적으로는 그 말단 기관원이 보고할 자료를 얻게 해 주시기도 하였다.”(‘김재준 이야기’ 서도섭 서울노회 공로목사)
캐나다로 출국한 김재준은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1983년 귀국한다. 귀국 후 김재준은 함석헌 등과 함께 ‘재야원로간담회’에 참여하여 나랏일을 걱정한다. 민주화운동의 절정에서 박종철군이 고문받다 죽자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1987년 1월 벽두에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남겼다. 김재준은 그해 1월 27일 서울 한양대부속병원에서 별세, 경기도 여주군 남w한강묘원에 안장된다.
김재준은 장분여와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은용(76·서울대 사학과 졸업)씨는 손행강씨(간호사)와 결혼하여 하륜(의사)·남희 남매를 두었다. 차남 경용(72·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한인교회 장로)씨는 정효순씨(간호사)와 결혼하여 하령·하준 형제와 딸 서희씨를 두었다. 3남 관용(70·한양대 건축공학과 졸업, 성북교회 장로)씨는 거제도 애광원에 근무하고 있으며 이정희씨(성북교회 장로,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와 결혼하여 명은·명혜 자매를 두었으며 명은씨는 조성철(한신대 졸업, 전주금암교회 목사)씨와 결혼했다. 김재준의 장녀 정자(작고, 정신여고 졸업)씨는 신영희씨(작고, 하얼빈의대 졸업, 중앙의원 개업)씨와 결혼하여 민섭(한양중학교장)·경섭(전 기상청장)·인섭·요섭·진섭 5형제를 두었다. 차녀 신자(81·한신대·동국대 국문학과 졸업)씨는 이상철씨(한신대 캐나다 유니언신학교 졸업,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씨와 결혼하여 정화·정선·정희 세 자매를 두었다. 3녀 혜원(77·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컴퓨터 프로그래머)씨는 장인철씨(한신대 졸업, 광고디자이너)와 결혼하여 딸 지영씨(회계사)를 두었다.
내가 본 장공 김재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나는 1959년 광주의 백영흠 목사님의 소개로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장공 선생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분의 학문에 더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격에 더욱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교육자, 문필가, 사회윤리학자이다. 그분은 성경 문자 무오설과 경직된 교리의 신앙을 비판하고, 신앙은 삶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생활 신앙’을 강조했다. 김문환 시인이 말한 대로 김재준 목사는 우리 시대를 살고 간 ‘신선’이요 ‘작은 예수’였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여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른 자유인이 되고, 하늘 씨앗을 땅속에 심는 성육신의 영성으로 영글어,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지 200년 만에 대승적 기독교 시대를 연 선구자이다. 선교사들의 전도 수준에 머물던 한국 기독교를 세계와 통하는 자유분방한 기독교로 개혁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