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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김영배 ♧ 2009/2/13(금) 10:56 (MSIE6.0,WindowsNT5.1,SV1) 211.216.37.238 1024x768 ♧ 조회: 532 | |
"수제비" 어제 저녁은 임산부처럼 갑자기 수제비가 먹고싶은 생각이나서 주방에 내려가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그리곤 나무 주걱에 밀가루 반죽을 적당히 올려놓고 숟가락 손잡이로 끓는물에 적당한량을 끊어 넣으면서 저어가며 계속했다.끓는 물에는 이미 고추.파 등이 들어있고 간 도,맞춰놨다. 숙달된 사람들이 볼때는 서투르다고 하겠지만,처음보는 사람이 보면"잘한다"고 할정도로 했는데,"내가 어찌 이렇게 잘하나?"그렇게 생각하다가,나도 모르게 왈칵-목이메었다. 1.4후퇴때,피난 가서는 어머님께서 생전 하시지도 않았던 남에집 일을 하시면서 일당으로?받아 오시는것은 좁쌀이나.수수,밀.등을 한홉 정도씩 받아 오셨다.그것을 멧돌에갈아 푸성귀등을 많이넣고 저으며 끓이면 그게 프레기죽 이다. 쌀기울은 반죽이 안되고 밀기울은 한참 주물럭 거리면 좀 뭉쳐진다.어머님은 그걸 나무주걱에 올려놓고 끓는물에 넣으시며,조금씩 떼어내,밑에 눌러붙을까봐 저으며 계속 하셨다.매끼마다 그런 식으로 끼를 떼웠고 배가고픈 나는,다 될때까지 기다리느라고 지켜본게 수백번은 된다.그게 수제비다. 내가 해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순서라는게 몸에 배였고 자연스레 나도 하고 있는거다.피난민이 많다보니 일거리도 차지가 없고,어느날은 간장 한종지를 받아오신적도 있었다.그것을 대접에 물을 떠와 간장 한숟가락을 넣고,휘휘저어 한끼를 떼운적이 많았다. 전기 기술자인 아버지는 어느날 찾아온, 나라에서온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끌려 가셨다.나중에 들으니 이북에서 송전 되어온 전기는 끊어졌고.전라도를 비롯해 경상도 일대에 파괴된 송전탑,전봇대 등을 복구 하는데 가신거다. 둘째 형님은(살아계시면 무진생이니 올해 82세)국민 방위군에 가셔서 춥고 굶주림에 돌아가셨고(군번도 없이 끌려가셨으니 유골도 없다)큰형님은(병인생.살아계시면 84세) 그런것을 피하기위해 혼자 대구로 가셨으니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머니,큰누님(올해 80세.당시22세)둘째누님(올해78당시.20세)셋째누님은,15세때 돌아가셨고,셋째형님 (올해73세.당시15세.6.25때 ,선린중 2학년.57년입대.논산군번 1025-) 넷째누님(당시11세,당시 청파국교3학년)그리고,나(당시 8세.피난지에서1학년)남동생(당시 다섯살.정해년생.66년 지원해서 입대 논산군번.1157-) 막내 여동생(지금 미국거주,49년 기축생 올해 환갑) 참 많기도 하다.거기다 당시 위에 누님두분은 말만한 처녀 였으니 어머님 마음 고생이얼마나 심하셨을까.! 짐작이 간다. 돈을 버는사람 즉-아버님과 큰형님이 안계신 상태의 우리식구들은 피난지 한구석에 오도마니 내팽계 쳐진 처참한 상태 였으니 어머님은 참 기가 막히신 거다. 수제비가 다 끓여질때까지 그생각에 주방 계숫대를 붙잡고 한참을 꺽꺽 거리며 울었다.그리고 수제비를 먹으면서도 울음은 그쳐지지 않았다,지금 이곳에 동생을 보러 가끔오시는 셋째 형님은 당시 15세 인데도 추울때 땔수있는 나무들을 모자르지 않게 준비해 놓는등,남의집 논밭일을 쉬지않고 했었고 어머님의 일을 많이 도와 드렸었다. 두번이나 피난을 다니면서도 어린자식들을 하나도 이산가족으로 만들지 않으셨다.어머님이 돌아가시기전에 생전 처음으로 유언겸 하신 말씀이 있다. "애들아! 나는 참 고생을 많이했다.1.4후퇴때,창배야! 네가(셋째형님) 없었으면 우리가 어찌 살았겠니.! 그리고 영배야! 나는 네가 월남에서 다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와 준게 너무도 고맙고 조상님들께 감사했다." '내가 만약 저승에가서 늬들 아버지를 만난다면,늬들이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고 전해 주겠다.애들아 고맙다.앞으로도 형제간에 다투지 말고 우애있게 살거라"!그게 마지막 말씀이다. 이글을 쓰며 몇번이고 연수원 밖으로 나가서 눈물 닦았다.그래서 그런지 하늘도 흐리고 조금씩 비가온다. 최진사: 왜 나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히게 하는거요? 우리네 인생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이렇게 미사여구 없이 그냥 쓰기만해도 감동을 주는군요. 본인도 울지만 보는이도 웁니다. 젊은이들은 뭔말인지 모를테지만... -[02/13-11:07]- 김병장: 글을 읽으며 흐르는 눈물을 아내에게 들켰습니다.피난지에서 마른 무우 한개를 어머니와 동생하고 나눠 먹고 보리쌀 한줌 들어간 시레기 죽을 온식구가 둘러앉아 자주 먹곤하던 생각을 하며, 지금 살아계신 어머님과 현재의 풍요로운 시대 음식쓰레기 대한 예기를 하곤 합니다.아내는 다섯살 차이지만 이해는 하더군요....그때 그시절 모두가 궁핍한 시절이었지요...공기 좋은곳은 살찐 송아지고기 보다 몸에 좋을것입니다. 건필하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02/13-11:19]- 박용환: 모래내.. 철부지적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국민학교 3학년시절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여서..서대문구 남가좌동..육이오가 터지면서 피난이란건 생각두 못한실정이라 할머님께서 활동하시던(대략은 최성영 형님께서 아실겜니다)할머니께서 거느리던 심부름꾼인 그늠들에(빨갱이라함)이끌려서 피난도 허락없이는 못가는신세..위로 저보담 11세위인 형님은 의정부 미군들에 하우스보이로 올라가셧구 젊으신 아버지는 인민군들에게..아니면 빨갱이늠들에게 붖들릴까봐 오리무중이라 ..끄니를 이을랴치면 그늠들이 몽땅 쓸어가는 바람에..뒤주속엔 먼지만 폴폴나구 . 에구....그만 할랍니다.ㅎㅎ김영배 전우님에글에 감동을받는 바람에..어줍잖은 뎃글루 길게쓴거 갇습니다. -[02/13-11:34]- 황진순: 우리 새대가 마지막 부모님 봉양하는새대이며 자식들에게 봉양받지 못하는 첫 새대일것 같습니다..김전우님 글을 읽으며 오늘 날씨같이 우중충하고 궂은 날씨처럼 마음이 무겁습니다..그래도 즐겁게 지내셔야죠..오늘 중학교 동기 모임이라 모든것 잊고 즐겁게 떠들고 이야기 하렵니다.잘 읽엇습니다.건강하셔요.김전우님. -[02/13-11:37]- 류병욱: 김영배선배 전우님 글읽고 눈물이 나도모르게 흘러내리고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댓글도 잘 못올리겟네요 영배선배전우님 건강하십시요 참 그곳도 비가온다고요 봄소식오나봅니다 대구에도 비가옵니다 지금 보훈병원으로 갈려고 하고있습니다 -[02/13-11:46]- 차경선<: 이 글읽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고생이 뭔지 모르는 신세대쯤 아닐까 싶네요. 우리모두다 함께 겪은일들이니 어찌 가슴에 와 닫지 않으리오만. 그래도 시골태생인 저는 행복한 사람일듯 싶습니다. 피란이니, 이산가족이니 한 경험은 안했으니까요......배곺은 어린시절이긴 했지만 부모님 밑에서 가족과 함께한 저는 행복한 어린시절이 틀림없지요. 좋은 글 감동깊이 읽었습니다. 영배전우님!! 오늘은 거기도 비 오겠지요? 날씨는 영상으로 올랐겠구요. 건강하시길 빕니다 -[02/13-12:45]- 김종선: 물때(조,수 간만의 차 ) 를 마추어 쌀자루와 모래자루 (일명 SAND BAG)속에 쑥 개떡을 쌓아 넣고 아산만을 걸어걸어 찾아 갑니다. 밀물에 갯벌이 들어나면 마치 채송화 모양의 "갯나물"이 쫙 ~~ 보임니다. 벤또 (양은 도시락)로 갯나물 수냉이를 후려쳐 쌀자루에 담습니다, 갯골이 들어나면, 게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고 손끝에 걸리는 게를 잡습니다.얼마나 잡았을까 ? 밀물이 밀려오기 시작 함니다. 어서 뭇으로 나와야 함니다. 갯나물과 게를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 옴니다, 먹잘것도 없으면서 왜 그리 무거운지 모름니다.갯나물을 푹~ 삶아서 빨아내고 물기를 꼭 짜서 콩가루 조금에 버무려 저녁 끼니를 때움니다.그래도 이렇게 먹을때가 행복 함니다. 지금 이런 애기를 젊은이들에게 말하면 소설 쓴다 함니다.김영배 전우님 글을 읽노라니 구구절절 옛날 생각이 남니다.그래도 이국 전선에서도 살아 돌아와 지금도 건재하니 감사할 따름 임니다. 동갑내기 김 전우님 ! 우리는 뭣인가 해 낸 세대라 생각지 않나요 ? 자긍심을 갖고 건강 지키며 최선을 다하며 사십시다. -[02/13-13:08]- 류지현: 우리시대의 비극들을 떠올리고 나열 해보면 비참한 그 세월들이 눈물이 나고 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들이 나라의 곳간을 체우고 후대들에게 비참한 시대를 물려주지않게 만들은 위대한 세대들이라 자부해 봅시다. 김전우님 너무 외로워 마시고 주변에는 전우님들이 항상 같이 있다고 생각 하시고 건강 하십시요. -[02/13-13:36]- 심대흥: 마치 우리네 역사를 얘기하는것 같습니다. 못먹고 못살던 시절의 아품은 누구의 가슴에나 한으로 응어리져 있지요. 그래도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먼 나라 동화같으니 참 세월 많이도 갔네요 그려~ 김전우님! 아직도 대관령엔 눈이 개락이지요?(개락은 강원도 사투리로 많다는 뜻임) -[02/13-14:20]- 최덕종: 전쟁이란 그렇게 비참한것이고 배고픔의 설음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배고픔을 없애준 이가 박정희대통령인데 독재자로 친일파로 못된죄는 모두 만들어 씌우는 자들이 좌파 들이다. 지금 용산사태처럼 검찰의 조사도 못 믿는다. 경찰의 행동도 못 믿는다. 지금처럼 대통령의 통치를 무조건 반대하는 무리들에게 당시에도 그 국정수행을 지금처럼 했다면 배고픔은 지금도 이어 질 것인데 왜 30~40년전의 그때를 다 잊어 버렸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02/13-14:47]- 최진사: 그때는 먹지 못하여 얼굴에 버짐도 생기고 머리에 부스럼도 생겼는데 왜왜왜 이(?)는 그렇게 많아 사람 피를 빨았는고? DDT...그게 사람 몸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지만 복 주머니 차듯이 목거리 해서 차고 다녔는데 괜찮은 거유? 오만것이 다 생각나네...비가 오니 그런가? 에라! 조상님이 드시고 물려주신 퇴주잔에 남은 법주나 한잔 해야겠다. 마침 땅콩도 조금 있군. 김영배 전우님은 술을 못하는 체질이라고 그랬던가? 맞지요? -[02/13-14:58]- 김병장: 아내도 구역예배가고... 기회는 챤스다 하며 남은 복분자술을 물컵에 따라 석잔을 들이켰드니 삥~도는데...기분이 착잡하네요 오늘은 조용히 단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쉬고 싶습니다....참전유공자 선,후배님 건필하시고 항상 건강하십시요. -[02/13-15:20]- 정재성: 1.4 후퇴 때 당시 피난길에서 환갑이 훨씬 넘으신 조모님과 함께 부모님, 누님, 형 과 떨어져 고아가 되었습니다.(지금의 양수리 쯤) 그때는 모두가 걸인이나 다름 없지만 제 경우는 완전히 거지 신세였습니다. 피난민 틈에 네 살 박이 나 혼자만 남겨놓고 할머님은 먹을 걸 구걸하러 나가시면 돌아오실 때까지 울면서 시골 창호지문가운데 박아놓은 작은 유리를 통하여 밖을 내다보며 돌아오실 때까지 조바심을 했습니다. 물과 함께 바가지 밑에 가라앉은 밥알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건져 먹던 일이 지금도 정말 생생합니다. 그래도 건강하시고 억척스러우셨던 할머님의 돌봄으로 생명을 부지하여 꼬박 1년 반 만에 가족과 재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관령 의 휭 한 연수원 부엌에서 수제비를 뜨시면서 옛 생각에 목이 메여 하시는 김 전우님의 입장을 백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저의 피난시절이 아른거려서 가슴이 찡해오며 더운 눈물이 솟습니다. 아마도 우리 참전전우들은 거의가 이런 아픈 기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질경이 같은 삶을 살아온 우리들이라 그 누군가가 늘그막에는 평안한 삶의 공평한 기회를 주리라 믿습니다. -[02/13-15:27]- 김영배: 나는 지금,지난날의 전우신문을 읽느라 다른곳엔 눈도 안돌렸었는데 이곳에 들아와 보니 많은 전우님들이-,잘쓰지도 못한글에 댓글을 달아 주신것에 사실 놀랬습니다.그냥 감사합니다.65년도 12월에 있었던 연천 군정산인가 대대 훈련때도 배가고파,지금 연수원까지 내려와 먹이를 찾는 고라니(사향노루)처럼, 민가로 내려와 눈밭에 남아있는 무우와 배추 줄거리를 주워, 무우는 구워먹고 배추는 반합에 눈을퍼서 녹여 데쳐 먹었으니 6.25와 1.4후퇴때의 고생을, 그걸다-어찌 필설로 다 쓸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이 동생을보러 먼길오시는(시화에서 살고계심) 형님이 "힘이 약해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생했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그 당시에 얘기만 나오면 이를 박박 가십니다. 오아시스님! "전우신문" 보기는 잘볼수있게 아래위로 움직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술은 못하는 체질 맞습니다. 그런걸 다 기억 하시네요. 그리고 심대흥 전우님 이곳은 눈이 아직도 개락 입니다.ㅎㅎ -[02/13-15:32]- 김영배: 댓글을 올리고 보니 정재성 전우님이 글을 올리셨군요,'바가지 밑에 가라앉은 밥알을 고사리같은 손으로,"그럼요 그렇구 말구요. 피난지에서도 잘사는 원주민들집 울타리에 매끼만되면 흘러 나오는 설거지물에 밥알이나 김치 쪼가리를 줏어 먹으려고 서로 앞자리를 찾으려 다투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대들이 그런거 알까요! 특히 구수정이란 년이 그걸 알리없고 좌파와 붙어 우리 유공자를 매도하는것을보면, 솔직히 환장 하겠습니다. -[02/13-15:43]- 장영호: 가슴이 매이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댓글을 쓰기가 힘이 듭니다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힘들었던 시절 입니다 -[02/13-19:00]- 최성영: 1948년 낯모르 아줌마 손에 이끌려 월남(박용환 전우가 어렴프시)2년후에 한국동란 3개월의 적치하 1.4후퇴시 대구 피난살이 3년가량 1963년 입대 먹으나마나 자나마나 논산 30교육연대 마치고나니 원조 인간재생창 영천 MP학교 1965년 파월 이때는 굶주림을 몰랐습니다. 뜨더기국(수제비의 다른말) 자주먹던 그때를 생각 하기도 싫습니다. -[02/13-20:06]- 이상수: 수제비를 한 열흘 계속먹으면 제아무리 속이 좋은사람도 속이쓰려 나중에는 물도 못먹습니다. 옛날에는 밀가루도 귀해서 밀껍질을 덜벗긴밀가루로 수제비를하면 찰진기운은 없고 후제비가 흐물흐물 합니다. 거기에다 량을 늘이려고 밀가루 반죽할때 쑥탙은 나물을 넣고 반죽을 하고 김치국에 콩나물 넣고 수제비를 끓여 먹었지요. 아마 지금 그렇게 끓여놓으면 먹을사람 하나도 없을겁니다. -[02/13-20:38]- 김영배: 30 교육연대? 1118 최성영 선배님! 저도 30 교육연대 13 중대를 나왔습니다. 정말,먹으나 마나.자나마나,그리고 교육장은 왜그리 먼지..그리고 후반기. 9사단에 와서 신병교육. 그리고 1군 하사관학교, 흐유-- ㅎㅎ -[02/13-20:53]- 최현득: 저도 수제비 참 잘만듭니다 어머님 도와 많이 만들어 보았답니다 언제 김 전우의 수제비 맛을 보아야 될터인데 기대가 됩니다 아니 시합을 한번 합시다 ㅎ -[02/13-22:22]- 홍 진흠: 오늘 퇴근길에 W.와 날씨도 추적추적 비오고 기분도 그런데---우리 칼국수나 한그릇씩하고 영화나 한 프로 땡길까? 저는 수제비 상당히 좋아하지만 옆지기가 별로여서 혼자갈때만 수제비 먹습니다. -[02/14-02:14]- 이문이: 님이시여 ! 그어려운 옛날(맘들은 부자였던)그옛날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힘으론 빼앗긴나라도 찿지못하는 착한건지 똑똑치못한건지 ...한우리나라를 여기까지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은 저도 수 제 비 (감자, 호박,부추넣고) 끓여 먹을랍니다 -[02/15-1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