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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18권
30. 초품 중 반야(般若)의 모습[相]과 뜻[義]을 풀이함
【문】 어찌하여 반야바라밀만을 마하(摩訶)4)라 하고 다른 다섯 가지 바라밀에는 그렇게 칭하지 않는가?
【답】 마하는 진나라 말로는 크다는 뜻이고, 반야는 지혜라는 뜻이며,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가 능히 지혜의 큰 바다인 피안에 이르고, 일체 지혜의 궁극[邊]에 이르러 그 근원을 다하기 때문에 ‘피안에 이른다’고 한다.
일체의 세상 가운데 시방과 3세의 부처님들이 으뜸가게 크시고, 다음으로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이니, 이 네 가지 대인(大人)이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일컬어 크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능히 중생들에게 큰 과보(果報)를 주는데, 한량없고 다함없고 항상 변치 않으니, 이른바 열반이다.
나머지 다섯 바라밀은 그렇지 못하나니, 보시 등은 반야바라밀을 떠나서는 단지 세간의 과보만을 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크다고 이름할 수 없다.
【문】 무엇을 지혜라 하는가?
【답】 반야바라밀이 모든 지혜를 포섭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이 불도를 구하건대 마땅히 일체법을 배워 일체의 지혜를 포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문ㆍ벽지불ㆍ부처의 지혜이다.
이 지혜에는 세 종류가 있나니, 유학[學]과 무학(無學)과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다.
비학비무학의 지혜라 함은 건혜지(乾慧地)5)ㆍ부정(不淨)ㆍ안나반나(安那般那), 욕계계(欲界繫)6)ㆍ4념처(念處)ㆍ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 등과 같은 것이다.
유학의 지혜라 함은 고법지인(苦法智忍)의 지혜 내지 아라한의 아홉 번째 무애도(無礙道) 가운데 금강삼매(金剛三味)7)의 지혜이다.
무학의 지혜라 함은 아라한의 아홉 번째 해탈도(解脫道)의 지혜이니, 이로부터는 일체의 무학의 지혜는 마치 진지(盡智)8)ㆍ무생지(無生智)9) 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무학의 지혜이다.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지혜 역시 이와 같다.
【문】 벽지불의 도 역시 같은 것이라면 어찌하여 성문과 벽지불을 나누는가?
【답】 도는 비록 한 종류이지만 지혜를 쓰는 일이 다르다.
부처님이 아직 나타나시기 전이나 불법이 이미 사라졌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인연 때문에 혼자서 지혜를 내어 남에게 듣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로 도를 얻는다.
예컨대 어떤 국왕이 동산에서 노니는데, 이른 아침에 숲의 꽃과 열매가 무성하여 매우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왕이 밥을 먹고 누운 사이에 왕의 부인과 궁녀들이 모두 가서 꽃을 따느라 숲의 나무를 마구 꺾어 훼손했다.
왕이 깨어나서 숲이 훼손된 것을 보자 생각했다.
‘일체의 세상이 무상하게 변하고 무너지는 것도 모두 이와 같으리라.’
이렇게 사유하고 나자 무루도(無漏道)의 마음이 생기니, 모든 결사를 끊고 벽지불의 도를 얻었으며, 6신통을 얻어 고요한 숲으로 날아갔다.
이러한 인연은 전생의 복덕과 원행(願行)의 과보로서 금생에 조그마한 인연을 보고서 벽지불의 도를 이룬 것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또한 벽지불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독각(獨覺)이요, 둘째는 인연각(因緣覺)이다.
인연각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독각이라 함은 그 사람이 금생에 도를 이루되 스스로 깨닫고 남에게 듣지 않으니, 이것을 독각의 벽지불이라 한다.
독각의 벽지불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본래 학인으로서 인간 가운데 태어났지만 이때 부처님도 없고 불법도 사라진 뒤로서 이 수다원은 이미 일곱 생(生)을 채우고 여덟 번째 생에서 스스로 성도할 수 없다면, 이러한 사람을 부처라 할 수도 없고 아라한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일컬어 작은 벽지불[小辟支迦佛]이라 하는데, 아라한과 다름이 없기도 하고, 혹은 사리불 등의 큰 아라한만 못하기도 하다.
둘째는 대벽지불로서 일백 겁 동안 공덕을 짓고 지혜를 길러 32상 가운데 일부를 얻는데, 그것이 혹은 31상, 혹은 30상, 혹은 29상 내지 1상이기도 하다.
아홉 가지 아라한 가운데서 지혜가 날카롭고 수승해져서 모든 깊은 법 가운데서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으로 능히 들어가며, 오랫동안 정을 닦고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이 같은 특징을 일컬어 대벽지불이라 하나니, 이것이 다른 점이다.
불도를 구하는 이는 처음 발심할 때부터 서원을 세우되,
“원컨대 제가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고 일체의 불법을 얻으며, 6바라밀을 행하고 마군들과 모든 번뇌를 무찔러 일체지를 얻고 불도를 이루며, 나아가서는 무여열반에 들겠습니다” 한다.
이러한 본원을 좇아 행하니, 이로부터 있게 되는 지혜로써 총상ㆍ별상과 일체를 모두 다 아나니, 이것을 불도의 지혜라 한다.
이 세 가지 지혜를 끝까지 잘 알고 그 궁극에 이르나니, 이런 까닭에 ‘지혜의 궁극에 이른다’ 한다.
【문】 그대의 말과 같다면 일체의 지혜는 모두 세간이나 출세간에 들어가야 하거늘 어찌하여 3승의 지혜만이 그 궁극에 이른다 하고, 다른 지혜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가?
【답】 3승은 곧 실다운 지혜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허망하다.
보살은 비록 그런 줄 아나 오로지 그것만을 행하지는 않는다.
마치 마리산(摩梨山)10)을 제하고는 어디에도 전단(栴檀)나무를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다른 곳에 혹 좋은 말씀이 있더라도 모두가 불법에서 나온 것이니, 스스로가 불법인 것은 아니다. 처음에 들으면 좋은 것 같으나 오래 되면 묘하지 못하다.
비유하건대 마치 소젖이나 나귀의 젖과도 같다. 비록 그 빛은 같으나 우유는 저으면 연유[酥]가 되나 나귀의 젖은 저으면 오줌이 되고 만다.
불법의 말씀과 외도의 말에서,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중생을 가엾이 여기라,’ ‘마음을 거두어 모으라,’ ‘욕심을 여의라,’ ‘공을 관하라’ 한 것은 비록 같으나,
외도의 말은 처음에는 묘한 듯하다가도 그 귀추를 끝까지 따지면 마침내 헛되고 거짓되다.
일체의 외도들은 모두가 나라는 소견[我見]11)에 집착되어 있다.
만일 실제로 나가 있다면 응당 두 가지, 즉 무너지는 형상[壞相]과 무너지지 않는 형상[不壞相]에 떨어져야 한다.
만약에 무너지는 형상이면 응당 쇠가죽과 같아야 하고, 무너지지 않는 형상이라면 응당 허공과 같아야 한다. 이 두 곳에는 살생의 죄도 없고 불살생의 복도 없다.
만일 허공과 같다면 비나 이슬이 적시지 못하고 바람과 열이 말리지 못하나니, 이는 항상한 모습에 떨어진다.
만일 항상하다면 고가 능히 괴롭히지 못하고, 낙이 능히 즐겁게 하지 못할 것이다. 고와 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재앙을 피해 복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만일 쇠가죽과 같다면 비바람에 무너질 것이요, 무너진다면 무상(無常)에 떨어진 것이요, 무상하다면 죄도 복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외도가 말하기를,
“만일 진실로 이러할진대 어찌 불살생이 복이 되고, 살생이 죄가 될 까닭이 있으리오” 하는 것이다.
【문】 외도의 계율과 복의 허물됨이 이와 같다면, 그 선정과 지혜는 어떠한가?
【답】 외도는 내 마음으로 선정을 추구하는 까닭에, 애착ㆍ견해ㆍ교만이 많은 까닭에, 일체의 법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 실다운 지혜가 없다.
【문】 그대가 말하기를 ‘외도가 공을 관한다’ 하는데, 공을 관한다면 곧 일체법을 버렸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말하기를 ‘일체법을 버리지 못해서 진실한 지혜가 없다’ 하는가?
【답】 외도는 비록 공을 관하나 공의 모습을 취한다.
비록 모든 법이 공한 줄은 알되 나가 공한 줄은 몰라서 공을 관하는 지혜에 애착되기 때문이다.
【문】 외도에는 무상정(無想定)12)이 있어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이 모두 사라진다.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모양을 취하거나 지혜에 애착하는 허물이 없다.
【답】 무상정의 힘으로 억지로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니 실다운 지혜의 힘이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열반이라는 생각을 내고는 그것이 화합으로 이룩된 법인 줄은 모른다. 그러므로 전도(顚倒)에 빠진다.
여기에서 마음이 잠시 사라지기는 했으나 인연을 만나면 다시 생겨나니,
마치 사람이 꿈 없이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다가 깨어나면 다시 생겨나는 것과 같다.
【문】 무상정의 허물됨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이 있나니,
이 가운데에는 일체의 망상이 없으며, 또한 억지로 무상정을 지어내 생각을 멸하지도 않는다.
여기에서는 지혜의 힘 때문에 무상(無想)인 것이다.
【답】 여기에도 생각이 있으나 미세하여 깨닫지 못할 뿐이다.
만일 생각이 없다면 불제자들은 무엇을 반연으로 삼아 다시 진실한 지혜를 구하겠는가.
불법에서는 이 비유상비무상의 의식이 4중(衆)13)에 의지해 머문다고 보는데, 이 4중은 인연에 속하는 까닭에 무상하다.
무상하므로 괴롭고, 무상하고 괴롭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나가 없고, 공하여 나가 없기에 버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대들은 지혜에 애착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자벌레[尺蠖]가 몸을 구부려 뒷발을 편안케 한 뒤에 앞발을 진행시키는 것과 같으니, 반연할 곳이 다하여 더 나아갈 곳이 없으면 돌아온다.
외도는 초선에 의지하여 아래 경지의 욕망을 버리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기까지 의지해서 무소유처를 버린다.
위로는 더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비유상비무상처는 버리지 못한다. 다시 더 의지할 곳이 없어 나를 잃을까 두려워 하니, 얻을 것 없는 경지[無所得]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한 외도의 경에는 살생ㆍ투도ㆍ음행ㆍ망어ㆍ음주를 허용하는 말이 있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주술(呪術)로 죽이는 것은 죄가 없으며, 도를 행하기 위해서나 위중한 환난을 만나서 자기의 생명을 보전키 위해 소인(小人)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또한 위급한 환난이 있거나 도를 행하기 위하여 금을 제외한 나머지는 훔칠 수 있나니, 그로써 스스로를 구제하면 그 뒤에 이 재앙의 죄를 제해야 한다.
또한 스승의 부인이나 국왕의 부인이나 선지식의 부인이나 어린 여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핍박이나 위급한 환난을 당했을 때엔 삿된 음행을 할 수 있다.
스승ㆍ부모ㆍ소[牛]ㆍ자신을 위하거나 혹은 중개 때문이라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또한 날씨가 추우면 엿술[石蜜酒]을 먹어도 좋으며, 제사를 지내는 사당[天祠]에서는 한두 방울의 술을 마셔도 좋다.”
하지만 불법에서는 그렇지 않나니, 일체 중생에게 인자한 마음을 내어 평등이 보아 개미조차도 그 생명을 빼앗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을 죽이겠는가.
바늘 하나, 실 한 올이라도 훔치지 않거늘 하물며 많은 물건이겠는가.
임자 없는 음녀일지라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거늘 하물며 남의 부녀자이겠는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고의로 거짓말을 하겠는가.
일체의 술을 언제든지 마시지 않거늘 하물며 추운 지방이나 사당 안이겠는가.
그대들 외도는 불법과 아득히 머니, 마치 하늘과 땅 사이 같도다.
그대들 외도의 법은 모든 번뇌를 내는 곳이요, 불법은 곧 모든 번뇌를 멸하는 곳이다.
이것이 크게 다른 점이다.
모든 불법은 한량이 없어 마치 큰 바다와 같으니, 중생들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갖가지고 법을 설한다.
혹은 유(有)를 말하고 혹은 무(無)를 말하며,
혹은 상(常)ㆍ무상(無常), 혹은 고(苦)ㆍ낙(樂), 혹은 아(我)ㆍ무아(無我)를 말하며,
혹은 3업을 부지런히 행하여 모든 선근(善根)을 거둘 것을 설하거나, 혹은 일체법이 작위 없는 모습(無作相]을 말한다.
이렇듯 갖가지로 달리 말하니,
어리석은 이가 들으면 어긋나고 뒤섞였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세 가지 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부처님의 말씀을 관해 이 모두가 진실 된 법이어서 서로 어긋남이 없음을 본다.
무엇이 세 가지 법문인가?
첫째는 곤륵문(昆勒門)14)이요, 둘째는 아비담문(阿毘曇門)이요, 셋째는 공문(空門)이다.
【문】 무엇을 곤륵이라 하고, 무엇을 아비담이라 하고, 무엇을 공문이라 하는가?
【답】 곤륵에는 320만의 말씀이 있나니, 부처님 재세시에 대가전연(大迦栴延)15)이 지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사람들의 수명이 줄고, 억념하고 식별하는[憶識] 힘이 적어서 다 읽을 수 없으므로 도를 얻은 사람들이 38만 4천의 말씀으로 줄여서 찬술했다.
만약에 어떤 이가 곤륵문에 들어가서 논의한다면 끝이 없나니, 거기에는 수상문(隨相門), 대치문(對治門) 등 갖가지 문이 있다.
수상문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송에 이런 것이 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뜻을 밝히니
이것이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마음에 속하는 법을 자세히 설명해야 되겠지만, 지금은 다만 ‘스스로 그 뜻을 밝힌다’고만 말씀하셔도 곧 모든 마음에 속하는 법이 다 말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같은 모습이며 같은 대상[緣]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4념처(念處)를 말씀하시는 경우, 여기에서는 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을 여의지 않는다.
왜냐하면 4념처 안의 네 가지 정진은 곧 4정근이요, 네 가지 선정은 4여의족이요, 다섯 가지 착한 법은 5근과 5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다른 법문을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4념처만 말씀하시어도 이미 다른 법문도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부처님께서 4제(諦) 가운데 1제만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2제, 혹은 3제만 말씀하시기도 한 것과 같다.
마성(馬星)16) 비구가 사리불을 위해 이런 게송을 읊어 주었다.
모든 법이 연을 좇아 생기고
그 법의 연 및 다하는 일에 대해
나의 스승이신 대성주(大聖主)께서는
그 도리를 이렇게 말씀하셨네.
이 게송에는 3제만을 말하였으나, 도제(道諦)가 이미 그 속에 포함되었음을 알아야 하나니,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온 집안이 재앙을 받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들을 수상문이라 한다.
대치문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단지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곧 항상하다는 전도ㆍ즐겁다는 전도ㆍ나가 있다는 전도ㆍ깨끗하다는 전도이니, 여기서 비록 4념처를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도 이미 4념처의 의미가 포함된 줄로 알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약을 말하면 이미 그 병은 알려진 것이요, 병을 말하면 곧 약은 알려진 것과 같다.
만약에 4념처를 말한다면 네 가지 전도는 이미 말한 것으로 아나니, 네 가지 전도란 곧 삿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전도를 말하면 모든 번뇌[結]를 이미 말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뿌리를 말하면 모든 가지는 저절로 다 얻어짐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일체 세간에 3독(毒)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3독을 말씀하실 때에 이미 3분(分)ㆍ8정도(正道)를 말씀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3독을 말씀하실 때에 이미 일체의 번뇌의 독을 말씀하신 줄로 알아야 한다.
15종의 애착은 곧 탐욕의 독이요, 15종의 성냄은 성냄의 독이요, 15종의 무명은 어리석음의 독이요, 모든 삿된 소견과 교만과 의심은 무명에 속한다.
이러한 일체의 결사가 모두 3독에 들어간다.
무엇으로 그것을 멸하는가?
곧 3분ㆍ8정도로써 멸한다. 만일 3분ㆍ8정도를 말하면 이미 일체의 37조도품(助道品)을 다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갖가지 모습을 대치문이라 한다.
이러한 모든 법들을 곤륵문이라 한다.
무엇을 아비담문이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모든 법의 의미를 말씀하시고, 혹은 스스로 모든 법의 이름을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이 갖가지로 모아 찬술하고 그 이치를 풀이한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비구가 모든 유위의 법에 대하여 바르게 기억하지 못하고서 세간에서 으뜸가는 법을 얻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세간에서 으뜸가는 법을 얻지 못하고서 바른 지위에 들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바른 지위에 들지 못하고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을 얻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비구가 모든 유위의 법에 대해 바르게 억념해 세간에서 으뜸가는 법을 얻는다면 이는 옳은 말이요,
세간에서 으뜸가는 법을 얻고 바른 지위에 들고, 바른 지위에 들어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을 얻는다면 이는 기필코 옳은 말이다.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경우, 세간의 으뜸가는 법은 그 모양의 의미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어떤 세계에 속하는지, 어떤 인과 어떤 과보인지에 대하여 세간에서 으뜸가는 법으로부터 성문들이 행할 갖가지 법과 나아가서는 무여열반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그 모습의 의미를 분별하나니, 이것을 아비담문이라 한다.
공문이라 함은 생공(生空)과 법공(法空)을 말한다.
『빈바사라왕영경(頻婆娑羅王迎經)』에서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이 날 때에는 단지 공(空)만이 나고, 색이 멸할 때에는 단지 공만이 멸한다.
모든 행(行)이 날 때는 단지 공만이 나고, 멸할 때에도 공만이 멸한다.
이 가운데 나 없고 남[人] 없고 신(神)도 없으니, 인간이 금생으로 부터 후생에 도달함에 인연화합한 명자 등을 제외하고 중생은 없다.
하지만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름을 따라 진실을 구한다.”
이러한 경 등에서 부처님은 생공을 말씀하셨다.
법공이라 함은 이는 부처님께서 『대공경(大空經)』17)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12인연은 무명에서 노사까지를 말하니,
만약에 어떤 이가 말하되 ‘이것이 노ㆍ사이다’ 하거나 ‘누가 늙고 죽는다’ 한다면 이는 모두가 삿된 소견이다.
생ㆍ유ㆍ취ㆍ애ㆍ수ㆍ촉ㆍ6입ㆍ명색ㆍ식ㆍ행ㆍ무명도 그러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되 ‘몸이 곧 정신이다’고 하거나 ‘몸과 정신은 다르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가 비록 다르나 다 같이 삿된 소견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이 곧 정신이라 한다면 이는 삿된 소견이어서 나의 제자가 아니다. 몸과 정신은 다르다 하여도 역시 이는 삿된 소견이어서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셨다.
다시 이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법공을 말씀하셨다.
“만약에 누군가가 늙고 죽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허망한 줄 알아야 하나니, 이를 생공이라 한다.
만약에 이것이 늙음과 죽음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허망한 줄 알아야 하나니, 이는 법공이라 한다.
나아가 무명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범망경(梵網經)』 가운데서 62견(見)을 말씀하셨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신(神)18)은 항상하고, 세간도 항상하다’고 한다면 이는 삿된 소견이요,
‘신은 무상하고 세간도 무상하다’ 하여도 삿된 소견이요,
‘신과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 하여도 삿된 소견이요,
‘신과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다’ 하여도 삿된 소견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이 모두 공함이 진실임을 알 수 있다.
【문】 만약에 신이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삿된 소견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이 항상하다 하여도 응당 삿된 소견이다. 왜냐하면 세간은 실로 모두가 무상하거늘 전도되었기에 항상함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신이 무상하다 하여도 곧 삿된 소견이다. 왜냐하면 신의 성품이란 존재하지 않아서 무상하다는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간이 무상하다 한다면 삿된 소견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의 성품은 실로 모두 무상하기 때문이다.
【답】 만약에 일체법이 실로 모두가 무상하다면 부처님은 어찌하여 ‘세간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삿된 소견이라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실제로 무상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 부처님께서 곳곳에서 말씀하시기를 “유위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관찰하여 도를 얻는다” 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상이 사견에 떨어진다 말하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무상을 말씀하시고, 곳곳에서 불멸을 말씀하셨다.
예컨대 석씨의 왕족인 마하남(摩訶男)19)이 부처님께 와서 말씀드렸다.
“가비라(迦毘羅)20)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혹 달리는 수레나 말이나 미친 코끼리나 싸우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문득 부처님을 생각하던 마음을 잃습니다.
이때 혼자 생각하되,
‘내가 지금 죽으면 어디에 가서 태어날까’ 하였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마하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걱정도 근심도 하지 말라. 너는 그때 악취에 태어나지 않고 반드시 선취(善趣)21)에 태어날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나무가 항상 동쪽을 항해 굽었다면 누가 와서 베기만 하면 반드시 동쪽으로 쓰러지느니라.
착한 사람도 그와 같아서 몸이 무너져 죽을 때에 착한 마음의 의식 때문에 오랫동안 믿음을 간직하여 보시ㆍ지혜 등을 들어 마음을 길들인 까닭에 반드시 이익을 얻어 하늘에 태어나느니라.”
만일 모든 법이 잠깐잠깐 생멸하여 무상한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말씀하시기를,
“모든 공덕으로 마음을 길들인 까닭에 반드시 하늘에 태어난다” 하셨겠는가?
이런 까닭에 무상한 성품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 무상함이 진실이 아니라면 부처님은 어찌하여 무상함을 말씀하시는가?
【답】 부처님은 중생들의 정도에 마라 법을 설하시어 항상하다는 전도를 깨뜨리시기 위하여 무상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내생까지도 믿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떠나면 내생에는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과 죄와 복의 인연은 백천만 겁토록 잃지 않는다 하셨으나 이는 대치실단(對治恣檀)이요, 제일의실단(第一義恣檀)은 아니니,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은 항상함도 무상함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곳곳에서 모든 법의 공함을 말씀하셨으니, 모든 법이 공한 가운데는 무상이라는 것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세간이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이를 삿된 소견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법공이 된다.
또한 비야리(毘耶離)22)에 논력(論力)이라는 범지가 있었는데, 리창(梨昌)23) 사람들이 그에게 많은 보물을 선사하면서 부처님과 토론을 하도록 시켰다.
그는 그 선물을 받아 가지고 그날 밤 5백 가지 어려운 문제를 생각해 모아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여러 찰제리들을 데리고 부처님께로 가서 물었다.
“궁극의 길[究竟道]은 하나뿐입니까, 아니면 여럿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의 궁극의 길이 있을 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없느니라.”
범지가 다시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한 가지 길뿐이라 하시지만 여러 외도의 스승들도 각각 완벽한 도를 제창하고 있으니, 이것이 여러 가지요 하나가 아닌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비록 제각기 주장이 있어 여러 가지가 되었으나 모두 진실한 도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두가 삿된 소견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궁극의 길이라 할 수는 없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다시 범지에서 물으시기를,
“녹두(鹿頭)24) 범지는 도를 얻었느냐?” 하시니,
범지는,
“도를 얻은 모든 사람 가운데서 으뜸일 것입니다” 했다.
이때 장로(長老)인 녹두범지 비구는 부처님 뒤에서 부처님께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물으시기를,
“너는 이 비구를 알겠느냐?” 하시니,
범지가 알아보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부처님께서 이 뜻을 풀이하는 게송을 말씀하셨다.
제각기 완벽한 도를 말하나
제각기 자기의 법을 애착하여
자기만이 옳고 남을 그르다 하나
모두가 구경(究竟)은 아니네.
이들이 토론하는데 들어와
진리를 변명할 때에
서로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이기거나 지면 근심하거나 기뻐하네.
이긴 이는 교만의 구덩이로
진 이는 근심의 옥(獄)에 빠지나니
그러기에 지혜로운 이는
이 두 길에 빠지지 않는다네.
논력(論力)이여, 그대는 아는가?
내 제자들의 법에는
허망함도 진실함도 없나니
그대는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그대가 나의 논리를 이기려 해도
끝내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
일체지(一切智)는 이길 이 없으니
마침내 스스로 무너지게 되리라.
이렇듯 곳곳의 성문의 경전에 법공의 도리를 말씀하셨다.
마하연의 공문이란 모든 법의 성품이 항상 스스로 공하건만 지혜로운 방편으로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색 스스로가 공하고, 수ㆍ상ㆍ행ㆍ식은 각각 스스로가 공하며,
12입ㆍ18계ㆍ12인연ㆍ37조도품ㆍ10력ㆍ4무소외ㆍ18불공법ㆍ대자ㆍ대비ㆍ살바야(薩婆若)25)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26)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스로가 공하니라.”
【문】 모든 법의 성품이 항상 스스로가 공하다면 참으로 공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삿된 소견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삿된 소견이란 죄도 복도 없다는 주장이니, 금생도 내생도 없다는 주장도 이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답】 죄도 복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금생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고 다만 내생이 없다고만 한다.
마치 초목의 종류가 저절로 나고 저절로 멸하는 것과 같아,
사람이 태어나거나 혹은 사람을 죽이든 모두 현재에 머무를 뿐이요 후생이 없다 하면서,
몸의 안팎에 있는 모든 것의 자상이 모두 공함을 관찰할 줄 모른다. 이것이 다르다.
또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을 많이 행하여 모든 착한 행을 끊거니와,
공을 관하는 사람은 착한 법도 하려고 하지 않거늘 하물며 나쁜 짓을 하겠는가.
【문】 삿된 소견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인(因)과 과(果)를 모두 깨뜨리는 것과 과만 깨뜨리고 인은 깨뜨리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말한 것은 과만 깨뜨리고 인은 깨뜨리지 않는 것이다.
인과 과를 모두 깨뜨린다 함은 인도 연도 없는 것이다.
죄도 복도 없다고 한다면 인을 깨뜨리는 것이요,
금생도 내생도 없고 죄와 복의 과보도 없다고 한다면 과를 깨뜨리는 것이다.
공을 관하는 사람은 모두가 공하다고 말하니, 죄와 복과 인과가 모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답】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모든 법을 단멸시켜 공하게 하지만,
마하연을 닦는 사람은 모든 법의 참공[眞空]을 알아서 깨뜨리지도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문】 삿된 소견에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죄와 복의 과보는 깨뜨리되 죄와 복은 깨뜨리지 않고, 인연의 과보는 깨뜨리되 인연은 깨뜨리지 않고, 내생은 깨뜨리되 금생은 깨뜨리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죄와 복의 과보를 깨뜨리고, 죄와 복도 깨뜨리며, 인연의 과보를 깨뜨리고 인연의 인연도 깨뜨리며, 내생과 금생을 모두 깨뜨리되 온갖 법은 깨뜨리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온갖 법을 깨뜨려서 모두가 아무것도 없게 하는 것이다.
공을 관하는 사람들도 참공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 여기의 셋째 견해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삿된 소견의 사람은 모든 법을 깨뜨려서 공하게 하거니와 공을 관하는 사람은 모든 법이 참공임을 알아서 깨뜨리지도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또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모든 법이 모두가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 하면서도 모든 법의 공한 모습에 집착되어 희론을 거듭하거니와,
공을 관하는 사람은 모든 법이 공한 줄을 알아서 모습에 집착되지도 않고 희론을 하지도 않는다.
또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입으로는 비록 모든 것이 공하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곳에서는 애착하는 마음을 내고 화나는 곳에서는 화를 내고, 잘난 체할 곳에서는 교만한 생각을 내고, 어리석을 곳에서는 우치를 내어 스스로를 속인다.
불제자는 공한 마음을 확실히 알아서 모든 번뇌를 움직이지 않으며, 날 곳에서도 나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허공은 연기나 불이 능히 더럽히지 못하고, 큰 비도 능히 적시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갖가지 방법으로 공을 관함으로써 번뇌가 마음에 붙지 못한다.
또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말하기를,
“아무것도 없음[無所有]은 애착의 인연에 의해 나는 것이 아니지만 참공[眞空]이란 명칭은 애착의 인연에 의해 생긴다” 하니,
이것이 다른 짐이다.
4무량심 등 모든 청정한 법도 반연하는 경제가 진실치 않으므로 참공의 지혜와 동등할 수 없거늘 하물며 이러한 삿된 소견이 같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견해를 삿된 소견이라 하고 참공의 견해는 바른 소견이라 하나니,
삿된 소견을 갖는 사람은 금생에는 악인이 되고 내생에는 지옥에 떨어지거니와,
참공의 지혜를 수행한 사람은 금생에는 명예를 얻다가 내생에는 부처의 지위에 오른다.
비유하건대 마치 물과 불의 차이와도 같고, 감로(甘露)와 독약과도 같으며, 하늘 음식인 수타(須陀)와 썩은 똥과도 같다.
또한 참공에는 공공삼매(空空三味)가 있으나,
삿된 소견의 공에는 비록 공이 있지만 공공삼매는 없다.
또한 참공을 관하는 사람은 전생부터 한량없이 보시ㆍ지계ㆍ선정을 닦아 그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모든 번뇌가 얇아진 뒤에야 참공을 얻거니와,
삿된 소견에는 이런 일이 없다.
다만 기억하는 생각으로 분별하고 삿된 마음으로 공을 취하나니,
비유하건대 어느 시골사람이 애초부터 소금을 알지 못하다가 귀한 사람이 소금을 갖가지 고기와 채소에 넣어서 먹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하시오?”
귀인이 말했다.
“이 소금은 능히 모든 음식의 맛을 내게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소금이 능히 모든 물건을 맛나게 한다면 자체의 맛은 반드시 더 많을 것이다’ 하고는,
문득 소금을 한줌 집어 입에 가득히 넣고 먹으려다 짠맛에 입을 상하고는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소금이 모든 음식의 맛을 내게 한다고 했는가?”
귀인이 대답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것은 마땅히 분량을 잘 헤아려 섞어서 맛을 내야 하거늘 어찌하여 순전히 소금만 먹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공해탈문(空解脫門)의 법을 들으면 모든 공덕은 행하지 않고 오직 공만을 얻으려 하나니, 이것이 삿된 소견이다. 이는 곧 모든 선근을 끊는다.
이와 같은 이치들을 공문이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법문에 들어가면 불법의 이치를 알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힘이니, 모든 법에 걸림이 없을 것이다.
만일 반야바라밀의 법을 얻지 못하고는,
아비담문에 들어가더라도 유(有)에 떨어지고,
공문에 들어가더라도 무(無)에 떨어지고,
곤륵문에 들어가더라도 유ㆍ무에 떨어진다.
또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법의 한 모습을 알면서도 역시 모든 법의 갖가지 모습도 알며,
모든 법의 갖가지 모습을 알면서도 역시 모든 법의 한 모습도 안다.
보살의 이러한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문】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모든 법의 갖가지 모습을 알며, 어떻게 모든 법의 한 모습을 아는가?
【답】 보살은 모든 법의 모습, 즉 유(有)의 모습을 관찰하나니, 이 유로 말미암아 모든 법에서 유의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은 유이다.
【문】 무(無)의 법에서 어떻게 유의 마음이 생기는가?
【답】 만일 무(無)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로가 유의 법이 된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을 한 모습으로 관찰하나니, 이른바 무, 즉 없는 모습이다.
예컨대 소에는 양의 모습이 없고, 양에는 소의 모습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모든 법에는 다른 모습이 없다.
전에도 말하기를,
“유로 인한 까닭에 유의 마음이 생긴다” 하였거니와,
이 법은 유와는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없어야 한다.
만일 유의 법에 소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양 또한 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유의 법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다르다면 이러한 모든 것이 없는 것이어서 모두가 다 없어야 한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하나인 것으로 관찰하고, 이 한 법으로 인하여 모든 법에 대해 하나라는 마음을 낸다.
모든 법은 제각기 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개의 하나가 합함으로써 둘이라고도 하고 셋이라고도 하나니, 하나는 진실이요, 둘과 셋은 거짓인 것이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인하는 바가 있는 까닭에 있는 것이니, 마치 사람의 몸은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생멸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모두가 그러하나니, 인하는 바가 있는 까닭에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은 인한 바가 없는 까닭에 있는 것이니, 사람의 몸이 무상하게 생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생멸로 인하기 때문에 무상한 줄로 안다.
이 인(因)에도 다시 인이 있다. 그렇다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다면 인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 인에 다시 또한 인이 없다면 이 무상의 인도 역시 인이 아닌 것이니,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것은 인이 없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유상(有相)이어서 어떠한 법도 모습이 없는 것은 없다고 관찰한다.
예컨대 땅은 굳고 무거움이 모습이요,
물은 차고 습함이 모습이요,
불은 덥고 비춤이 모습이요,
바람은 가볍고 움직임이 모습이요,
허공은 용납해 받아들임이 모습이다.
분별해서 느끼고 아는 것은 의식의 모습이요,
이쪽과 저쪽은 방위의 모습이요,
오래거나 가까움은 시간의 모습이요,
흐리고 악한 마음으로 중생을 괴롭히는 것은 죄의 모습이요,
밝고 착한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은 복의 모습이요,
모든 법에 집착되는 것은 속박의 모습이요,
모든 법에 집착되지 않는 것은 해탈의 모습이요,
현전(現前)에서 모든 법의 걸림 없음을 아는 것은 부처님의 모습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제각기 제 모습이 있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모두 없는 모습이니, 이 모든 모습은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생긴 것이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고 관찰한다.
예컨대 땅은 모양ㆍ냄새ㆍ맛ㆍ닿임 등 네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땅이라 부르는 것으로, 모양 하나만으로 땅이라 부르지 못하고, 냄새ㆍ맛ㆍ닿임만으로도 땅이라 부르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양만을 땅이라 한다면 나머지 세 가지는 땅이 아니어야 하고, 땅에는 냄새ㆍ맛ㆍ닿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냄새ㆍ맛ㆍ닿임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네 가지 법이라면 어찌 한 법이 되며, 한 법이라면 어찌 네 가지 법이 되겠는가?
이런 까닭에 네 가지로써 땅이라 할 수도 없고, 다시 이 네 가지를 떠난 것을 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문】 나는 이 네 가지로써 땅이라 여기지 않고, 다만 네 가지 법을 인한 까닭에 땅이라는 법이 생긴다고 여긴다. 곧 땅이 네 가지 법 속에 머무는 것이다.
【답】 만일 네 가지 법에서 땅이 생긴다면 땅은 네 가지 법과는 다를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부모와 다른 것과 같다.
만일 그대의 말과 같다면 지금 눈으로 모양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감을 아는데,
만일 이 네 가지 법과 다르다면 의당 다른 감관과 다른 의식이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이요,
다른 감관과 다른 의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면 땅은 없을 것이다.
【문】 만일 위에서 땅의 모습을 말한 것이 틀린다면, 의당 아비담에서 땅의 모습을 말해 “땅이란 4대(大)로 만들어진 색이며, 땅의 요소[地種]는 굳은 모습이니, 땅은 볼 수 있는 색[可見色]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답】 만일 땅이 다만 색일 뿐이라 함은 앞에서 이미 잘못이라고 말했다.
또한 땅의 굳은 모습은 다만 눈으로 보는 색일 뿐이라 한다면 물속의 달과 거울 속의 그림자와 초목의 그림자는 굳은 모습이 없나니, 몸[身根]이 닿아서야 알기 때문이다.
또한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이 땅의 굳은 모습이며 법의요소라 한다면,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이 물과 불의 젖거나 뜨거운 모습이기도 하며 물과 불의 요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과 바람의 요소도 따로 따로 나눌 수 있어야 하거늘 사실은 분별치 못한다.
위의 말과 같다면 어떤 것이 바람이며, 바람의 요소는 또한 어떤 것인가?
바람과 바람의 요소가 한 물건이라면 두 가지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요, 다르지 않다면 땅과 땅의 요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 이 4대는 각각 서로 여의지 않아서 땅에도 네 요소가 들어 있고, 물ㆍ불ㆍ바람에도 네 요소가 있건만 땅에는 지대[地]가 치우쳐 많기 때문에 땅이라 부르며, 물ㆍ불ㆍ바람의 경우 역시 그러한가?
【답】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불에 네 요소가 있다면 모두가 뜨거워야 하리니, 뜨겁지 않은 불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세 요소가 불에 있으되 뜨겁지 않다면 불이라 하지 못할 것이요,
뜨겁다면 자성을 버리어 모두가 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미세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과 다름이 없고,
거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미세함도 있어야 하고,
거친 것이 없는 것이라면 미세함도 없어야 한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땅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땅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면 모든 법의 모습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모두가 한 모습이다.
【문】 ‘모습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이 모습이 없다는 것이 곧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습 없음[無相]이 없으면 모든 법의 모습을 깨뜨린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습 없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모습 없음이 있다면 모든 법이 모습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답】 모습 없음으로 모든 법의 모습을 깨뜨리거니와 만일 무상의 모습이 있다면 모든 법의 모습에 떨어진다.
만일 모든 법의 모습에 들지 않는다면 모습 없음으로써 모든 법의 모습을 모두 깨뜨리면 자신도 또한 멸하는 모습이 된다는 말을 따져 묻지 말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앞의 나무를 태우는 불이 여러 땔감을 다 태우고는 자신도 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습 없음을 닦나니, 모습 없는 삼매가 모습 없음까지도 깨뜨리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모양이나 형상도 없으며, 대할 수도 없고 보일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는 한 모습, 즉 무상(無相)이라고 관찰한다.
이러한 모든 법이 한 모습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갖가지 모습으로 관하는가?
온갖 법은 두 가닥 법으로 거두어지나니, 이른바 이름과 모양, 모양 있음과 모양 없음,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대할 수 있음과 대할 수 없음,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등 2백 종류의 두 가닥 법문이 있다. 「천난품(千難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두 가닥의 법을 아나니, 인욕과 부드러움이요,
다시 두 가닥의 법이 있으니, 친하여 공경함과 공양함이요,
두 가지 보시가 있으니, 재물보시와 법보시요,
두 가지 힘이 있으니, 지혜로 분별하는 힘과 닦는 힘이요,
두 가지 구족함이 있으니, 계행의 구족함과 바른 소견의 구족함이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강직한 모습과 부드러운 모습이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선정과 지혜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밝음과 해탈이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세간법과 제일의제법이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생각함과 교묘한 지혜 등이요,
두 가지 진리가 있으니, 세제와 제일의제요,
두 가지 해탈이 있으니, 때를 기다리는 해탈과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는 해탈이요,
두 가지 열반이 있으니, 남음 있는 열반과 남음 없는 열반이요,
두 가지 궁극[究竟]이 있으니, 일[事]과 원(願)이요,
두 가지 소견이 있으니, 앎의 소견과 단절[斷]의 소견이요,
두 가지 구족함[具足]이 있으니, 뜻[義]과 말[語]이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욕심 적음과 만족을 아는 것이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기르기 쉬움[易養]과 채우기 쉬움[易滿]이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법을 따름과 법을 행함이요,
두 가지 지혜가 있으니, 다함의 지혜와 생멸 없는 지혜이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두 가닥의 법문을 분별해 낸다.
또한 세 가지 도를 아나니, 견도(見道)ㆍ수도(修道)ㆍ무학도(無學道)요,
세 가지 성품이 있으니, 끊는 성품ㆍ여의는 성품ㆍ멸하는 성품이요,
세 가지 수행이 있으니, 계로써 닦음ㆍ선정으로써 닦음ㆍ지혜로써 닦음이요,
세 가지 보리가 있으니, 부처님의 보리ㆍ벽지불의 보리ㆍ성문의 보리요,
세 가지 탈것[乘]이 있으니, 불승27)ㆍ벽지불승28)ㆍ성문승29)이요,
세 가지 귀의할 곳이 있으니, 불ㆍ법ㆍ승이요,
세 가지 머무름이 있으니, 범(梵)ㆍ천(天)ㆍ성(聖)이요,
세 가지 증상(增上)이 있으니, 자기ㆍ남ㆍ법이다.
부처님들에게는 세 가지 지키지 않는 것이 있으니, 몸ㆍ입ㆍ뜻이요,
세 가지 복 받는 곳이 있으니, 보시ㆍ지계ㆍ착한 마음이요,
세 가지 무기[器杖]가 있으니, 들음ㆍ욕심을 여윔ㆍ지혜요,
세 가지 법륜이 있으니, 변화하는 법륜 ㆍ타심통을 나투는 법륜ㆍ교화하는 법륜이요,
세 가지 해탈문이 있으니,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종류의 세 가닥 법문이 있다.
또한 네 가닥의 법문을 아나니,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4성제(聖諦)ㆍ4종사문과(種沙門果)ㆍ4지(知)ㆍ4신(信)ㆍ4도(道)ㆍ4섭법(攝法)ㆍ4의(依)ㆍ4통달선근(通達善根)ㆍ4도(道)ㆍ4천인륜(天人輸)ㆍ4견법(堅法)ㆍ4무소외(無所畏)ㆍ4무량심(無量心)이니, 이러한 한량없는 종류의 네 가닥 법문이 있다.
또한 5무학중(無學衆)ㆍ5출성(出性)ㆍ5해탈처(解脫處)ㆍ5근(根)ㆍ5력(力)ㆍ5대시(大施)ㆍ5지(智)ㆍ5아나함(阿那含)ㆍ5정거천(淨居天)ㆍ5치도(治道)ㆍ5지삼매(智三味)ㆍ5성분지삼배(聖分支三味)ㆍ5여법어도(如法語道) 등 이와 같은 한량없는 종류의 다섯 가닥 법문을 안다.
또한 6사법(捨法)ㆍ6애경법(愛敬法)ㆍ6신통(神通)ㆍ6아라한(阿羅漢)ㆍ지견도제(地見道諦)ㆍ6수순념(隨順念)ㆍ6삼매(三昧)ㆍ6정(定)ㆍ6바라밀 등 이와 같이 한량없는 종류의 여섯 가닥 법문을 안다.
또한 7각의(覺意)ㆍ7재(財)ㆍ7의지(依止)ㆍ7상정(想定)ㆍ7묘법(妙法)ㆍ7지(知)ㆍ7선인거처(善人去處)ㆍ7정(淨)ㆍ7재복(財福)ㆍ7비재복(非財福)ㆍ7조정법(助定法) 등 이와 같이 한량없는 일곱 가닥의 법문을 안다.
또한 8성도분(聖道分)ㆍ8배사(背捨)ㆍ8승처(勝處)ㆍ8대인념(大人念)ㆍ8정진(精進)ㆍ8대장부(大丈夫)ㆍ8아라한력(阿羅漢力) 등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덟 가닥의 법문을 안다.
또한 9차제정(次第定)ㆍ9명색등감[名色等減:명색으로 부터 생ㆍ사까지가 아홉이 된다]ㆍ9무루지(無漏智)ㆍ9무루지(無漏地:6선과 3무색)ㆍ9지사유도(地思惟道) 등 이와 같이 한량없는 종류의 아홉 가닥의 법문을 안다.
또한 10무학법(無學法)ㆍ10상(想)ㆍ10지(智)ㆍ10일체입(一切入)ㆍ10선대지(善大地)ㆍ부처님의 10력(力) 등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열 가닥의 법문을 안다.
또한 11조성도법(助聖道法)을 알고, 또한 12인연법(因緣法)을 알고, 13 출법(出法)을 알고, 14변화심(變化心)을 알고, 15심견제도(心見諦道)를 알고, 16안나반나행(安那般那行)을 알고, 17성행(聖行)과 18불공법(不共法)과 19이지사유도중(離地思惟道中)과 162도(道)로써 번뇌의 도적을 깨뜨리는 법과 178사문과(沙門果)와 89유위과(有爲果)와 89무위과(無爲果) 등 이와 같이 한량없는 차별된 법에 대해 생멸ㆍ증감ㆍ득실 및 더럽고 깨끗함[垢淨]을 모두 다 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안 뒤에 모든 법으로 하여금 자성의 공에 들게 하되 모든 법에 집착되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대비심으로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방편의 힘으로 모든 법의 갖가지 이름들을 분별하여 중생들을 제도해서 3승의 법을 얻게 하되,
마치 공교한 사람이 약의 힘으로써 은을 금으로 변하게 하고, 금을 은으로 변하게 하는 것과 같다.
【문】 만일 모든 법의 성품이 참으로 공하다면 어찌하여 모든 법의 갖가지 이름을 분별하는가? 어찌하여 참공[眞空]의 성품만을 말하지 않는가?
【답】 보살마하살은 공을 얻을 수 있다거나 집착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얻을 수 있거나 집착할 수 있다면 모든 법의 갖가지 차별된 모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공이란 것은 걸림이 없는 것이니, 걸림이 있다면 이는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얻을 수 없는 공이 아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얻을 수 없는 공을 알고서도 도리어 모든 법을 분별하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제도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힘이다.
요약해 말하건대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이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문】 모든 세속의 경서(經書)와 96종의 출가인의 경서에도 모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말했고, 성문법의 삼장에도 모든 법의 실상을 말했는데,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하지 않고, 이 경에서 말한 모든 법의 실상만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는가?
【답】 세속의 경서는 나라를 평안케 하고 집안을 온전케 하며, 몸과 목숨을 장수하고 즐겁게 하려는 것이므로 진실이 아니요,
외도의 출가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마음으로 애착하니, 이것 또한 진실이 아니요,
성문의 법에는 비록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법이 있어 모든 법을 관하나 지혜가 갖추어지지 못하고 이롭지 못하여 모든 중생을 위하지 못하며 불법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실제의 지혜가 있으나 반야바라밀이라 하지 못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들고나시는 모든 삼매는 사리불 등도 그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한다. 그러니 하물며 알겠는가.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은 처음 말씀할 때 큰 서원이 없고, 대자대비도 없고, 모든 공덕을 구하지도 않고, 3세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도 않고, 모든 법의 실상을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직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을 벗어나기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처음 발심할 때부터 큰 서원을 세우고, 대자대비가 있고, 모든 공덕을 구하고, 3세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매우 날카로운 지혜가 있어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하고, 갖가지 모든 관(觀), 즉 정관(淨觀)ㆍ부정관(不淨觀)ㆍ상관(常觀)ㆍ무상관(無常觀)ㆍ낙관(樂觀)ㆍ고관(苦觀)ㆍ공관(觀)ㆍ실관(實觀)ㆍ아관(我觀)ㆍ무아관(無我觀)을 버린다.
다만 바깥 인연 가운데서 실상을 관하되 깨끗함도 더러움도 아니요, 항상함도 무상함도 아니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니요, 공도 실(實)도 아니요, 나 있음도 나 없음도 아니라 한다.
이러한 모든 관에 집착되지도 않고 얻는 바도 없나니, 세속의 법이기 때문에 제일의에 두루 청정함이 아니라 하여, 여러 성인들의 수행하는 바를 깨뜨리지도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문】 반야의 본체와 모습이 모습 없음이며, 얻을 수 없는 법임은 이미 알았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어떻게 이 법을 얻는가?
【답】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법을 말씀하셨으니, 수행자는 말씀하신대로 행하면 증득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벼랑의 험한 길은 사다리를 의지하여 오르는 것과 같고, 깊은 물은 배를 의지하여 건너는 것과 같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 부처님께 들었거나 제자들에게 들었거나 정전에서 듣고서,
“모든 법은 끝내 공하여 결정된 성품을 가히 취하거나 집착할 것이 없다. 제일로 진실한 법은 모든 희론을 멸했다.
열반의 모습은 가장 편안하거니와 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해 건지고자 하거늘 어찌 혼자서 열반을 취하랴.
나는 이제 복덕과 지혜와 신통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므로 중생을 인도하지 못하니, 이 모든 인연들을 구족하리라” 하고는 보시 등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한다.
재물보시의 인연으로 큰 부자가 되고, 법보시의 인연으로 큰 지혜를 얻나니, 이 두 가지 보시로 빈궁한 중생들을 인도해서 3승의 법에 들게 한다.
지계의 인연으로 인간이나 하늘의 존귀한 몸으로 태어나서 자신도 3악도를 벗어나고 중생들도 3악도를 면하게 하며,
인욕의 인연으로 성냄의 독을 막고 몸매와 빛이 단정하며, 위덕이 제일이어서 보기만 해도 기뻐하여 공경히 믿고 굴복하거늘 하물며 설법을 해 주면 승복치 않으랴.
정진의 인연으로 금생과 내생의 복덕과 도법을 방해하는 게으름을 깨뜨리고 금강 같은 몸과 요동치 않는 마음을 얻으며, 이러한 몸과 마음으로 범부의 교만을 깨뜨리고 열반을 얻게 한다.
선정의 인연 때문에 산란한 마음을 깨뜨리고 5욕의 죄를 여의며, 즐기어 중생들을 위하여 욕심을 여의는 법을 말해 준다.
선정은 반야바라밀이 의지하는 곳이니, 이 선정에 의지하면 반야바라밀이 저절로 생긴다.
경에 말하기를,
“비구가 일심으로 선정에 전일하면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을 관할 수 있다”했다.
또한 욕계에는 흔히 간탐의 죄업 때문에 모든 선행의 문을 닫는 줄을 알아 단(檀)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 두 가지 일을 깨뜨리고 모든 선행의 문을 열며, 항상 열려있게 하려고 10선도(善道)의 시라(尸羅)바라밀을 행한다.
선정의 지혜를 얻지 못하고 애욕을 여의지 못한 까닭에 시라바라밀을 깨뜨리나니, 이런 까닭에 인욕(忍辱)을 행하여 위의 세 가지 일이 능히 복덕의 문을 여는 줄 안다.
또한 이 복덕의 과보는 무상하여서 인간과 하늘에서 쾌락을 받다가 다시 괴로움에 떨어진다는 것도 안다.
이 무상한 복덕을 싫어하기 때문에 실상의 반야바라밀을 구하나니, 이는 어찌하여야 얻을 수 있겠는가? 곧 반드시 일심으로 하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용왕(龍王)의 보배 구슬을 꿰는데 일심으로 관찰하여 용을 건드리지 않으면 염부제에 비길 값진 보배를 얻을 수 있는 것같이,
일심으로 선정에 들어 5욕과 5개(蓋)를 제하고 마음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매우 부지런해야 된다.
그러므로 인욕 다음에 정진바라밀을 말한다.
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자가 몸을 단정히 하여 곧게 앉아서 생각을 눈앞에 매어두고 전일하게 선정을 구하되 설사 뼈와 살이 바싹 마르더라도 끝내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선정을 닦는다.”
만일 재물이 있어 보시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나쁜 길에 빠질까 두려워해서거나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서 계를 지키거나 인욕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의 세 가지 바라밀에서는 정진바라밀을 말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반야바라밀의 실상을 위하여 마음속으로부터 선행을 구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정진을 닦아야 한다. 이렇게 수행하면 능히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다.
【문】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한 뒤에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가?
아니면 한두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도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는가?
【답】 모든 바라밀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한 바라밀에서 서로 맞음에 따라 행하면 모든 바라밀이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는 때에 따라 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때 많은 쪽으로 이름을 붙인다.
비유하건대 4대(大)가 서로 화합해서 여의지 않으나 많은 쪽으로 이름을 붙이는 경우와 같다.
서로 응함에 따라 행하면 다섯 가지 바라밀이 구족하다 함은 다섯 가지 바라밀을 여의지 않고서 반야바라밀을 얻는 것이요,
때에 따라 이름을 얻는다 함은 혹 한 원인으로 인하여 한꺼번에 반야바라밀을 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보시하면 이럴 때에 보시의 모습을 구하여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항상함도 아니요 무상함도 아니며, 있음도 아니요 없음 등도 아니니, 마치 보시를 깨뜨리는 대목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시의 실상으로 인하여 모든 법도 그러한 줄을 아나니, 이것이 보시로 인하여 반야바라밀을 얻는다 한다.
흑 계행을 지니어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면 마음에 후회가 없거니와, 만일 상을 취하여 집착하는 생각을 내면 다툼을 일으킨다.
이 사람이 전에는 중생을 괴롭히지 않았지만 법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사랑하려는 생각이 있으므로 중생에게 화를 낸다.
그러므로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모든 법의 평등함을 행하여야 한다.
만일 죄와 죄아님을 분별하면 시라(羅)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죄를 미워하고 죄아님을 사랑하면 마음이 저절로 교만해져 다시 중생의 길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를 보되 마음에 미움도 사랑도 없나니, 이렇게 관하는 이는 시라바라밀만을 행하여도 반야바라밀을 얻는 것이라 한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법인(法忍)30)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참는 법이 아니다.
중생들은 핍박이 없으면 능히 참지만 고통이 절실하게 닥쳐오면 참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매를 견디지 못해 죽음으로 뛰어드는 것과도 같다.
이런 까닭에 법인을 내어야 한다. 때리는 이도 없고, 꾸짖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 다만 전생으로 부터의 뒤바뀐 과보의 인연 때문에 받는다 할 뿐이다.’
이럴 때에는 참는 일ㆍ참는 법을 분별하지 않은 채 끝까지 공함[畢竟空]에 깊이 들어가나니, 이런 까닭에 법인이라 한다.
이 법인을 얻으면 영원히 중생들을 꾸짖거나 괴롭히지 않나니, 법인과 서로 맞는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정진은 항상 모든 좋은 법 안에서 모든 좋은 법을 성취케 한다.
만일 지혜로써 모든 법을 분별하고 대중하면 법성을 통달하나니, 이럴 때에 정진이 지혜를 도와서 성취케 한다.
또한 정진의 실상은 몸과 마음을 여읜 것이어서 여실히 동요치 않는 것임을 알면 이런 정진은 능히 반야바라밀을 내거니와,
다른 정진은 환(幻) 같고 꿈과 같아서 거짓되어 진실치 않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만일 깊은 마음으로 생각을 거두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여실하게 보나니,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이란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는 알음알이[知]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6정(情)과 6진(塵)은 모두가 거짓된 인연의 과보이며, 여기에서 알아진 것, 보여진 것 역시 모두가 허망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망한 알음알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나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께서 아승기겁에 얻으신 실상의 지혜뿐이다.
이러한 지혜로써 선정에 의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관하면 이것이 선정에서 반야바라밀이 생기는 것이라 한다.
혹은 다섯 가지 바라밀을 여의고 다만 듣고 읽고 외우고 생각하고 헤아리기만 하여도 모든 법의 실상을 통달하나니, 이러한 방편지혜에서 반야바라밀이 나기도 한다.
둘 또는 셋 또는 네 가지 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이 생기기도 한다.
이는 마치 하나의 진리[一諦]만을 듣고도 도과(道果)를 이루는 이가 있고,
혹은 둘이나 셋이나 네 가지 진리를 듣고 도과를 이루는 이가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고제에 대하여 미혹이 많으므로 고제를 말해 주면 도를 얻는다.
나머지 3제도 그러하여 어떤 이는 4제에 모두 미혹하므로 4제를 다 말해 주어 도를 얻게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탐욕을 끊는다면 나는 그대들이 아나함(阿那含)을 얻으리라고 보증한다” 하셨으니,
만일 탐욕을 끊으면 성냄과 어리석음도 모두 끊어짐을 아는 것이다.
6바라밀도 그와 같아서 간탐(慳貪)이 많은 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보시의 법을 말하면 나머지 악도 끊어짐을 알게 된다.
갖가지 악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6바라밀을 갖추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은 하나씩 행하기도 하고 혹은 합해서 행하기도 하나니, 모든 사람들을 두루 위하기 때문에 6바라밀을 말하는 것이요,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보살은 온갖 법을 행하지 않고 온갖 법을 얻지 못함으로써 반야바라밀을 얻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행(行)은 모두가 허망하여 진실치 않기 때문이다.
혹은 가깝게 허물이 있기도 하고, 혹은 멀리 허물이 있기도 하나니, 착하지 못한 법은 가깝게 허물이 있고, 착한 법은 오랜 뒤에 다르게 친해졌을 때 집착하면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멀리 허물이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에 똑같이 독약이 섞기면, 나쁜 음식은 먹는 즉시에 기분이 나쁘고 좋은 음식은 먹을 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모두 생명을 빼앗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먹지 말아야 한다.
착한 법과 나쁜 법 등 모든 행도 이와 같다.
【문】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세 가지 행, 곧 범행(梵行)과 천행(天行)과 성행(聖行)을 말씀하셨는가?
【답】 행함이 없음을 행함으로 성행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성행에서는 세 가지 해탈문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행과 천행은 중생상(衆生相)을 취하는 까닭에 생기는 것이니, 행할 때에는 허물이 없으나 나중에는 모두 허물이 있다.
또한 지금 진실을 구하나 모두가 허망하다.
만일 현성(賢聖)이라면 집착 없는 마음으로 이 두 가지 행을 행함으로 허물이 없다.
만일 이와 같이 행함이 없음을 행하면 아무것도 얻어 지는 것이 없고, 뒤바뀐 허망과 번뇌가 끝내 생기지 않나니, 허공과 같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다 함은 얻을 바 없음으로써 얻음을 삼나니,
무소득반야에서 말하기를,
“색(色) 등의 법은 공하게 해서 공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항상 저절로 공한 것이요,
색 등의 법은 지혜로써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얻을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항상 저절로 얻을 바가 없다” 했다.
그러므로 몇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야 반야바라밀을 얻느냐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세속을 따르기 때문에 행하라 말씀하셨지만, 제일의제는 아니다.
【문】 만일 얻을 바가 없다면 행할 바도 없거늘 수행자는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답】 얻을 바 없음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세상에서 구하고자 하여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요,
둘째는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에서 결정적인 모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얻을 바가 없다고 할지언정 복덕ㆍ지혜로 선근을 늘어나게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범부들이 세간의 법을 분별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있는 것같이, 모든 선근의 공덕도 그와 같아서 세간의 마음만을 따르기 때문에 얻을 바가 있다고 했을 뿐 부처님의 마음에는 얻는 바가 없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정의를 간략히 말한 것이거니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리라.
4)
범어로는 mahā.
5)
범어로는 tarka-bhūmi. 이른바 ‘마른 지혜’를 뜻한다. 보살 10지 가운데 하나이며, 성문ㆍ연각ㆍ보살이 함께 닦는 삼승공십지(三乘共十地) 가운데 하나이다. 관을 닦아 지혜는 깊으나 온전한 진리의 법성을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한다.
6)
범어로는 kāma-dhātv-apta. 욕계에 매여 있는 법을 말한다.
7)
범어로는 Vajropamasamādhi. 금강이 일체를 부수듯이 모든 번뇌를 부수어 버리는 삼매라는 의미이다.
8)
범어로는 kṣaya-jñāna. 4성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 괴로움은 이미 알려졌으며, 그 원인은 끊어졌고, 적멸의 경지는 체득되었고, 그리로 가는 길은 이미 수습되었다고 아는 지혜이다.
9)
범어로는 anutpāda-jñāna. 10지(智, daśa-jñānāni) 가운데 하나로, 진지(盡智) 다음에 생하는 부동아라한의 지혜를 말한다.
10)
범어로는 Malaya. 인도의 남쪽 지방에 있는 전단향의 주산지를 말한다.
11)
범어로는 ātma-dṛṣṭi.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12)
범어로는 asaṃjñi-samāpatti. 일체의 심작용이 모두 그치는 선의 경지를 말한다.
13)
수ㆍ상ㆍ행ㆍ식을 말한다.
14)
‘유(有)이기도 하고 공(空)이기도 하다’는 태도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곤륵(昆勒)이란 범어 Piṭaka의 속어형인 Peṭaka 혹은 Paiṭaka의 음사어이다.
15)
범어로는 Mahākātyāyana.
16)
범어로는 Aśvaka.
17)
범어로는 Mahāśūnyatā-sūtra.
18)
범어로는 ātman. 상주불변의 나라는 실체를 말한다.
19)
범어로는 Mahānaman.
20)
범어로는 Kapilavastu.
21)
범어로는 sugati. 악취(惡趣, durgati)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른바 인간ㆍ신의 세계를 말한다.
22)
범어로는 Vaiśālī.
23)
범어로는 Liccavi.
24)
범어로는 Mṛgaśiras.
25)
범어로는 sarvajñā.
26)
범어로는 anuttarā samyaksaṃbodhiḥ.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뜻한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도수행의 긍극의 목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27)
범어로는 buddha-yāna.
28)
범어로는 pratyeka-buddha-yāna. 연각승(緣覺乘)이라고도 한다.
29)
범어로는 śravaka-yāna.
30)
범어로는 dharma-kṣānti. 법의 지혜를 얻기 전에 일어나는 결정된 마음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