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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요경 제23권
27. 니원품(泥洹品)
1
거북이 여섯 가지 기관을 감추듯
비구여, 그 생각 거두어 잡아라.
의지함도 없고 해침도 없어
열반에 들면 아무 언설(言說)이 없느니라.
“거북이 여섯 가지 기관을 감추듯, 비구여, 그 생각 거두어 잡아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신령스런 거북이 신명(身命)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원수를 보면 여섯 기관[六]을 껍질 안에 감추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여섯 가지 기관을 감추지 않으면 사냥꾼에게 사로잡혀 머리를 베이거나 앞의 두 발을 베이거나 혹은 뒤의 두 다리를 끊기거나 혹은 꼬리를 훼손할지도 모른다. 지금 예방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비구가 수행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생사(生死)를 두려워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거두고 항상 스스로 생각한다.
‘내가 비록 지금은 사람이 되었으나 이 세상에 얼마 살지 못한다. 만일 지금 스스로 거두어 잡지 않는다면 악마 파순(波旬)이니 욕진(欲塵)의 악마 자재천자(自在天子)로 하여금 틈을 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거북이 여섯 가지 기관을 감추듯, 비구여, 그 생각을 거두어 잡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의지하지도 않고 해치지도 않아 열반에 들면 아무 언설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온갖 결박과 집착과 뒤바뀐 삿된 업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의지하고자 할 경우, 오직 거룩한 진리에 의지하면 가고자 하는 곳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다.
비유하면 오래 앓아 야윈 병자가 자리에 몸져누워 대소변보러 다니기조차 어렵거나, 혹은 아주 늙은 사람이 기거하기조차 자유롭지 못한데, 건장한 사내가 겨드랑이를 부축하면 비로소 가려고 하는 곳을 무사히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중생들도 그 비유와 같이 모든 감관이 우둔하여 깊은 이치를 잘 알지 못하다가 혹 좋은 벗을 만나 의지하거나 우러를 곳이 있으면 차츰 생사를 면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세존께서 후생(後生)들을 가르치실 때 “생사에 의지하거나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의지하지도 않고 해치려는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도적(道迹:須陀洹)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의지함도 없고 해침도 없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열반에 들면 아무 말이 없느니라”란 무슨 뜻인가?
마치 왕성한 불이 일어 혁혁한 불길이 산이나 들의 나무를 태워 가지나 잎이 남은 것이 다 타고 불이 꺼진 뒤, 다시는 불꽃의 기미가 없는 것과 같다. 범부도 그와 같아 탐욕의 불과 분노의 불과 어리석음의 불로 공덕의 선근(善根)을 모두 태워 조금도 남김이 없으니, 자신도 복을 잃고 남도 최후의 경지[究竟]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가 아라한이 되면 온갖 번뇌가 다하고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도 도를 얻고 또 남도 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들면 아무 말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욕을 참은 것 제일이 된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이 최상이라 하셨다.
번민과 애닲음 가지지 않나니
남을 해쳐도 사문이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옛날 보살의 몸이었을 때 사람이 없는 깊은 산에서 정신을 피로하게 하고 몸을 괴롭히면서 인욕(忍辱)을 수행하였다. 안으로 뜻을 한곳에 잡아매어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셨다.
그때 가람부왕(迦藍浮王)이 놀러 나갔다. 궁인(宮人)과 채녀(婇女)들을 데리고 다섯 가지 욕락을 즐기면서, 거문고를 뜯고 비파를 타며 마음껏 풍류를 즐기었다. 그러다가 풍류 소리를 듣는 것도 싫증이 나고 해서 그만 잠이 들었다.
궁인과 채녀들은 각기 흩어져 아름다운 꽃을 꺾다가 멀리서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보살을 보니, 그 얼굴이 매우 단정하였는데, 마치 복숭아꽃 빛 같아서,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기뻐 날뛰었다.
마치 처음 뜨는 해가 두루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았고 허공에 뜬 달이 뭇 별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았다.
채녀들은 그 보살을 보고 다투어 달려가 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각기 한쪽에 섰다. 그때에 보살이 천천히 눈을 뜨고 보니 그들의 위의가 질서정연하였다. 차츰차츰 그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위해 묘한 법을 연설하였다.
“더러운 음행은 큰 근심거리다. 대개 사람이 탐욕 때문에 몸을 더럽히면 그는 죽은 뒤에 참새나 비둘기 따위의 새들의 세계에 떨어지거나, 냄새 나고 더러운 나쁜 세계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성의 참사람으로서는 배울 바가 아니다. 누이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음욕이란 장차 불수레의 지옥이나 화로숯불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은 수없는 방편으로 음욕의 더러움을 설명하였다.
그때에 가람부왕이 잠에서 깨어나 좌우를 둘러보니 채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 날카로운 칼을 빼어 들고 빠른 말을 타고, 사방으로 치달리며 찾다가 한참 만에야 비로소 멀리서 보살이 평온하고 고요한 안색으로 앉아 있는데 채녀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왕은 가만히 생각하였다.
‘저 사람처럼 단정한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틀림없이 나의 채녀들과 정을 통했을 것이다.’
왕은 분노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불꽃처럼 일어나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그 보살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그대가 선사(仙士)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술법을 익혔으니 제일의 선정을 얻었는가?”
보살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대왕이여.”
왕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제2선ㆍ제3선ㆍ제4선ㆍ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불용처(不用處)ㆍ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는 증득했느냐?”
“아닙니다, 대왕이여.”
왕은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여기에서 도술을 배운다고 하면서, 그 여러 가지 덕 중에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면 무엇하러 여기서 세월만 허송하는가?”
보살이 대답하였다.
“제가 가업(家業)을 버리고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욕(辱)을 참는 선정을 닦으려는 것입니다.”
왕은 또 스스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은 여기서 오랫동안 공부하였다. 지난번에 내 안색을 보고 화를 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인욕을 수행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지금 과연 그런가를 시험해 보자. 대개 인욕을 시험하는 법은 맛있는 음식과 반찬이나 아름다운 풍류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면 반드시 잔뜩 성을 내어 그 살을 베는 고통을 주어 보아야 비로소 눈앞에서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왕은 그 선인에게 말하였다.
“가령 그대가 인욕 수행을 행한다면 빨리 오른팔을 펴라. 내가 시험해 보리라.”
그때에 보살은 기쁜 마음으로 팔을 폈다. 왕은 잔뜩 화를 내며 후세를 생각하지 않고 예리한 칼을 빼어 오른팔을 베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왼팔을 베고 또 오른 다리와 왼 다리를 베었다. 다음에는 귀를 자르고 코를 베었다. 그리고는 왕이 보살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마음속으로 무엇을 바라는가?”
보살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인욕을 수행하는 중이며 잠시도 버리지 않습니다. 가령 왕이 지금 내 몸을 취하여 겨자처럼 산산이 부순다 하더라도 나는 끝내 물러나 자비의 인욕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분노 때문에 더러워지면 몸이 부서진 뒤에 한량없이 피가 흐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인욕을 행하는 중이라 가피를 입어 내 몸이 부수어진 뒤에도 그 상처 구멍에서 모두 흰 젖이 나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징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또 수백 명의 선인들이 도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보살이 왕의 해침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달려와 그를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사(仙士)여, 고통이 심하지 않습니까?”
보살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 선인들이 다시 물었다.
“지금 당신의 몸은 일곱 조각이 났는데 어찌 고통이 없다 하십니까?”
보살이 대답하였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지고, 몸은 아프지만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더없이 훌륭하여 최정각(最正覺)을 이룩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 선사들은 저마다 찬탄하였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신선(神仙)시여, 절묘하신 인욕행을 당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민첩하고 영리하고 훌륭한 근기는 그 복을 기르고 자라게 하여 기필코 오래지 않은 장래에 그 소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을 참는 것이 제일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열반[泥洹]이 최상이라 하셨다”란 무슨 뜻인가?
모든 법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은 열반보다 더한 것이 없다.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으로서 담연(澹然)히 함이 없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생각이 없다. 그리하여 모든 법 가운데서 최상으로서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열반이 최상이라 하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번민과 애닲음 가지지 않나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가정과 처자를 버린 까닭은 다섯 가지 욕심을 없애고 세상의 여덟 가지 업을 버리며 속세의 영화를 돌아보지 않고 출가(出家)하여 도를 닦는 데 있거늘, 무엇 때문에 거기서 중생을 괴롭히거나 애닲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번민과 애닲음을 가지지 않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남을 해쳐도 사문이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문이 된다는 것은 제일의(第一義)와 서로 맞고, 사문의 법을 따라 차례를 넘지 않으며, 미움ㆍ질투ㆍ간사함ㆍ속임이 없으며 남을 보호하는 것이 자기를 보살피듯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나아가 공부하게 한다.
그러므로 “남을 해쳐도 사문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부디 추하거나 사나운 말 쓰지 말고
연설은 언제나 변재(辯才)에 맞게 하라.
들은 것 적으면서 남들과 논란하면
도리어 그들에게 굴복을 당하리라.
“부디 추하거나 사나운 말 쓰지 말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대목건련(大目揵連)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대 지금 대목건련이여, 그대가 지금 설법하려거든 법대로 설법하고 그 사이에 순수하지 못한 잡된 이치를 섞지 말라. 바른 법을 연설할 때 마음과 뜻이 단정하여 좌우를 돌아보지 않아야 하겠거늘 어찌 급하지도 않은 일을 부질없이 말하였는가?
왜냐 하면 추한 말은 흠이 많아서 후세에 다시 몸을 받을 때에는 한 몸에 백 개의 머리를 가지게 되어 저 가비라(迦比羅) 비구와 다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디 추하거나 사나운 말 쓰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연설은 언제나 변재에 맞게 하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가 천문ㆍ지리ㆍ성수(星宿)와 재변이 생기는 원인을 알고 여섯 가지 기예를 통달하며 경전에 널리 보아 알더라도, 만일 조작이 끝이 없으면 곧 지혜로운 사람의 혐의를 받을 것이요, 또 꾸지람을 받게 되어 분노만 더하게 될 것이니, 그런 무리들과는 친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연설은 언제나 변재에 맞게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들은 것 적으면서 남들과 논란하면 도리어 그들에게 굴복을 당하리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 시비하며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다. 즉
‘내 말은 옳고 네 말은 그르다.’라고 하면서,
서로 잘나고 못난 것을 따지다가 마침내는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부처님을 비방한 저 두 사람과 같이 된다. 즉 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기는 했으나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 사람은 믿음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감관마저 암둔하였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은 후세에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과보를 받을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여섯 가지 감관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말더듬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들은 것 적으면서 남들과 논란하면, 도리어 그들에게 굴복을 당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자주 제 자신이 번뇌를 일으키면
마치 저 깨진 그릇 같나니
자주 생사에 떠돌아다니면서
오래도록 빠져 벗어날 기약 없으리라.
“자주 제 자신이 번뇌를 일으키면, 마치 저 깨진 그릇 같나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이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하면 매어 부림[結使:번뇌의 일종]에 속박되고 뒤바뀐 어지러운 생각과 삿된 소견이 번갈아 일어나 스스로 얽매이게 된다. 마치 깨진 그릇에 물건을 담을 때 새 나가기 때문에 결국 채울 수 없으므로 티끌 속에 버려져 스스로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자주 제 자신이 번뇌를 일으키면 마치 저 깨진 그릇 같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생사에 자주 떠돌아다니면서, 오래도록 빠져 벗어날 기약 없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사람이 미리 염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을 받을 것이니 마치 옹기 그릇 만들 적에 물레 바퀴가 계속해서 돌며 멈추지 않는 것처럼 생사에 빠져 있어 나오기를 구하여도 이루지 못하고 심한 고통을 받는데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생사에 자주 떠돌아다니면서, 오래도록 빠져 벗어날 기약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만일 스스로 번뇌하지 않으면
완전하고 단단한 그릇 같나니
이와 같아서 열반에 이르게 되어
티끌 때의 더러움 영원히 없으리.
“만일 스스로 번뇌하지 않으면 완전하고 단단한 그릇 같나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스스로 마음을 오로지 하여 온갖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결박을 버리면 마땅히 번뇌 없는 지혜의 뿌리, 즉 4의지(意止)ㆍ4의단(意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현성의 여덟 가지 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완전한 그릇이 물건을 담을 수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스스로 번뇌하지 않으면, 완전하고 단단한 그릇 같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아서 열반에 이르게 되어, 티끌 때의 더러움 영원히 없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이러한 흠이나 찌꺼기가 없으면 번뇌가 완전히 다한 열반[滅盡泥洹]에 이르러 영원히 고요하고 영원히 쉬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아서 열반에 이르게 되어, 티끌 때의 더러움 아주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
병이 없는 것 제일의 이익이요,
만족할 줄 아는 것 제일의 부자며
제일의 벗이요,
열반이 제일의 즐거움이다.
“병이 없는 것 제일의 이익이요”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병이 적은 것은 다 전생의 과보 때문이다.
옛날 어떤 두 장사꾼이 위험한 곳을 무릅쓰고 다른 나라로 장사하러 갔다가 며칠이 못 되어 수없이 많은 재물을 얻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인연이 닥쳐와 갑자기 중병에 걸려 병을 고치느라고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조리 써 버리고, 몹시 곤궁하게 되었으나 병도 고치지 못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병이 없었기 때문에 재물을 쓰지 않았다. 그는 큰 이익을 얻었으면서도 오히려 원한을 품고 하소연하였다.
“내가 지금 얻은 이익은 말할 것도 못 된다.”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아무 손실도 없었지만 밤낮없이 재물을 얻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고 하소연하였다. 그 친족들이 그 장사꾼에게 권유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지금 병도 없고 아무 일 없이 편안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재물을 얻지 못했다고 자꾸 우는소리만 하는가? 몸이 있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보배 중의 최상이니라.”
그러므로 “병이 없는 것 제일의 이익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것 제일의 부자며”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는 율장(律藏)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그 두 사람인가 하면,
첫째는 재물을 얻으면 마구 쓰는 사람이요, 둘째는 재물을 얻으면 깊이 간직하는 사람이다. 설사 염부지(閻浮地) 안에 하늘이 일곱 가지 보배를 내려 이 세계에 가득 채워 가지고 저 두 사람에게 주어도 이들 두 사람은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른다.”
탐욕을 끊지 못한 사람은 재물에 탐착하여 얻고도 다시 구하며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오직 도를 따라 수행하는 사람만은 그것이 덧없는 일임을 분명히 알고 또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 보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것이 허깨비와 같아서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는 것임을 안다. 마치 돌을 때릴 적에 빛이 번개처럼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변하여 자꾸만 옮겨가 머무르지 않는 줄을 안다.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아는 것 제일의 부자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친한 친척이 제일의 벗이요”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서로 친하려면 지극한 정성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먼저는 믿고 뒤에는 의리를 지켜야 한곳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애정이 지극히 깊어 단지 그 친구와 더불어 일할 뿐, 자기 형제와는 말도 하지 않았다. 관청에서 금방(禁防:경찰)을 보내어 그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 사람은 술에 취해 관리를 죽이고 곧 달아나 벗들에게로 가서 저들에게 자기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다.
“나는 지금 매우 위급하여 발 둘 곳이 없다. 나를 받아들여 이 곤액을 면하게 해 달라.”
벗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면서 나무라며 말하였다.
“그대는 큰일을 저질렀구나. 숨겨 줄 수 없다. 여기 머무르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 만일 이 일이 탄로되면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죄가 따를 것이다. 그대는 형제와 친척이 많은데, 왜 그 골육(骨肉)을 등지고 우리에게 왔는가?”
그는 이 말을 듣고 곧 집으로 돌아가 온몸을 땅에 던져 그 형제들에게 귀의하고 제가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친척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위로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우리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그런 후 다섯 친척[五親:부(父)ㆍ모(母)ㆍ형(兄)ㆍ제(弟)ㆍ처(妻)]들이 구름처럼 모여 행장을 단장하고 모두 길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집을 짓고 서로 공경하고 대우하였으니 본국에서보다 곱이나 더 잘되었으며 재물도 날로 불어나고 종들과 하인들도 수없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친한 친척이 제일의 벗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열반이 제일의 즐거움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열반 가운데에는 끝내 걱정이나 괴로움이 없고, 고달픔과 번뇌와 온갖 결박이 영원히 모든 것이 쉬고 아주 사라졌다.
그러므로 “열반이 제일의 즐거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
굶주림을 제일의 근심이라 하고
행(行)을 제일의 괴로움이라 한다.
이런 줄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은
열반 제일의 즐거움이다.
“굶주림을 제일의 근심이라 하고”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옛날 평사왕(蓱沙王)이 그 아들 아사세(阿闍世)에게 잡혀 깊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람의 소식도 끊어지고 양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몹시 굶주려 괴로워하였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이 없었다. 왕은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부처님을 생각하여 마음에 두고, 본래 그 분이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옥중에서 다음 게송을 읊었다.
가장 훌륭한 그 말씀
널리 펴져 끝이 없나니
세상은 모두 서로 전하고 익혀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어느 것도 그것과 짝할 수 없는
말씀하신 그 좋은 가르침
몸을 핍박하는 괴로움 중에서
굶주림의 괴로움보다 더한 것 있으랴?
근심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굶주림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굶주림을 제일의 근심이라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행을 제일의 괴로움이라 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세상에서 살 때 그 뜻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고 그 습관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굶주림과 추위의 괴로움이 우리 몸의 가장 지독한 괴로움이다.
만약 사람이 처음 몸을 받으면 마땅히 어머니의 태 속에 있어 어두운 방에 살아야 하는 근심이 있고, 다시 그 몸이 세상에 나올 때에는 몸을 가르는 괴로움이 있으며, 모든 감관을 두루 갖추면 마땅히 쇠하고 잃고 늙고 병드는 곤란함이 있고, 몸이 변하고 정신이 옮겨가면 후생의 선악의 과보를 받아야 하나니, 그것은 다 행을 지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행을 제일의 괴로움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줄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은, 열반 제일의 즐거움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수행하여 영원히 고요한 경계를 얻으면 온갖 근심을 완전히 떠나고 탐욕 없는 곳에 편안히 살면서 다시는 어떤 번민이나 고통의 근심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줄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은, 열반이 제일의 즐거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선한 법에 나아가는 무리는 적고
악한 법에 나아가는 무리는 많다.
이런 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은
열반을 서둘러 구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선을 닦는 이는 적다. 비록 또 선을 행하려 하더라도 그 서원이 뜻을 따르지 않는다. 마땅히 온갖 행을 구족하면 그때에는 저 하늘[天]들은 오직 인간을 좋은 곳이라 하고 사람은 하늘을 복의 집으로 삼는다. 그것은 저 잡계경(雜契經:잡아함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즉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하늘들은 스스로 다섯 가지 상서로움이 나타나는 것을 알고 모두 구름처럼 한데 모였다. 그때에 나는 그 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여기서 사라지거든 좋은 곳에 나기를 원하라. 그 좋은 곳에 가면 유쾌히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요 좋은 이익을 얻음으로써 함없는 곳에서 편안히 살 것이다.”
그때에 비구들이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여러 하늘들의 좋은 곳이며, 유쾌히 좋은 이익을 얻는 것이며, 함이 없는 곳에 편안히 사는 것입니까? 이 세 글귀의 뜻에서 어느 것이 옳습니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도의 뿌리를 완전히 갖추어, 이 바른 법 안에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는 집안 권속을 좋아하지 말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 이것을 비구의 여러 하늘의 좋은 곳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함이 없는 곳에 편안히 사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4성제(聖諦)를 얻어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 이것을 비구의 여러 하늘들의 함이 없는 곳에서 편안히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도를 행할 때 선을 닦는 이가 적기 때문에 “선으로 나아가는 무리도 적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악으로 나아가는 무리는 많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중생들 가운데 악을 짓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을 알지 못하고 법을 알지 못하며, 비구중을 알지 못하고 또한 선하고 악한 것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며, 다만 지옥ㆍ아귀ㆍ축생의 뿌리만 심고, 어둠에서 나와 어둠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올 기약이 없다.
마치 장님이 촛불을 잡고 남은 비추어도 스스로는 밝게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악으로 나아가는 무리는 많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줄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은, 열반을 서둘러 구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이 모두 총명한 근기가 있더라도 깨닫는 것은 각기 다르다. 즉 어떤 이는 듣고서 스스로 깨닫고 어떤 이는 형상을 보고 이해한다. 그런 까닭에 성인들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포교하나니, 그 병에 따라 약을 주어 헛되지 않게 한다.
그 중에서도 영리한 근기를 가진 무리들은 세상은 만 가지로 변하여 함께 살기가 어려운 것을 관찰하여 위로 함이 없음을 구하니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처럼 서두른다. 왜냐 하면 그는 비고 고요하며 한가하고 안락한 곳에 살면서 영원히 허공과 합하고 맑은 정신이 흔들리지 않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은, 열반을 서둘러 구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9
인연이 있어서 좋은 세계에 나고
인연이 있어서 나쁜 세계에 나며
인연이 있어서 열반에 드나니
이와 같이 모두 인연이 있느니라.
“인연이 있어서 좋은 세계에 나고”라고 한 것은 어떤 인연인가?
이른바 인연이란 보시ㆍ계율ㆍ들음ㆍ지혜ㆍ생각과, 청신사의 위의ㆍ출가한 사람의 위의ㆍ큰 도인의 위의와 버리는 선행의 자취이니, 이것들이 이른바 인연으로서 도에 나아가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이 있어서 좋은 세계에 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연이 있어서 나쁜 세계에 나며”라고 한 것은 어떤 인연인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미움과 질투를 품고 보시하는 마음이 열리지 않거나, 살생과 도둑질 따위의 계율을 범하는 등 열 가지 악행을 고치지 못하면 마침내 타락하여 3악도[塗]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인연이 있어서 나쁜 세계에 나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연이 있어서 열반에 드나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열반이란 모두 현성의 도로써 온갖 번뇌[結使]를 끊고, 함이 없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 현성의 도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저 외도 범지들이 저희끼리 서로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이 세상에는 인연도 없고 또 근본과 끝도 없다. 있는 것도 저절로 있는 것이요, 없는 것도 저절로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비유하면 마치 넓은 들판에 자란 가시 나무와 같으니, 어떤 교묘한 장인(匠人)이 가시의 침을 예리한 바늘처럼 깎아 내었겠는가? 또 저 사슴 따위의 온갖 짐승과 나무에 깃드는 뭇 새들의 털이 여러 가지 빛깔이며 그 형상이 같지 않은데 어떤 사람이 채색으로 그 몸을 모두 그렸겠는가?
또 그 품류(品類)를 논할 때 받은 바 성질이 같지 않다. 흙의 성질은 원래 부드러운 것이요 돌의 성질은 원래 단단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단단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만들어 내겠는가?
이런 것들은 다 아무 인연이 없이 저절로 생긴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모두 미혹을 고집하여 오래도록 서로 교수(敎授)하여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그 일에는 모두 인연이 있다. 부질없이 괴로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무슨 인연이 있는가?
중생들이 열 가지 선행을 닦으면 그 중생들이 사는 곳은 땅이 편편하고 바르다. 그래서 깊은 구덩이와 높은 언덕과 가시와 같은 거스르는 풀이 저절로 평평하게 되거나 정리된다.
또 중생들이 악을 행하면, 그때에는 넓은 땅에 다 가시 나무가 나고 높은 낭떠러지 언덕과 깊은 구덩기와 독사와 독충과 포유 동물들이 득실거린다. 그것은 모두 전생에 악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모두 인연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사슴들은 들판으로 돌아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돌아가며
이치는 분별로 돌아가고
진인(眞人)은 적멸로 돌아간다.
옛날 세존께서 마갈다국(摩竭陀國) 경계 안에 있는 감과원(甘果園)의 인제석실(因帝石室)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청정하고 교요하며 아무 티끌이 없는 천안(天眼)으로 보니 사슴 떼가 사냥꾼을 만나 놀라서 험하고 막힌 곳으로 달아났다.
그때에 세존께서 다시 천안으로 보니 새 떼가 그물을 피해 높이 날아 허공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래께서 다시 천안으로 보니 비구들이 변론하는데 그 이치를 부드럽고 분명하게 깨달으며, 그날 밤으로 열두 가지 인연에 대해 생각하는데 역순(逆順)으로 본말(本末)을 되풀이해 궁구하는 것이었다.
여래께서 다시 천안으로 보니 어떤 비구가 밤새도록 되풀이하여 생각하며 해탈선정(解脫禪定)에 들었는데 밤이 새고 새벽이 되어 어둠이 다하려 할 때 남음이 없는 열반의 경계[無餘泥洹界]에서 반니원(般泥洹)에 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다시 여래의 신령스런 눈으로 보신 것이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이런 이치가 모두 인연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관찰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 가르침을 널리 펴고 다시 올바른 법이 오랫동안 세상에 머무르게 하고 또 후세의 중생들로 하여금 큰 광명을 보게 하기 위하여 곧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사슴들은 들판으로 돌아가고
세들은 허공으로 돌아가며
이치는 분별로 돌아가고
진인(眞人)은 적멸로 돌아간다.
11
게으른 마음으로 겁내거나 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르는 곳 있으리.
열반에 이르기를 구하려 하면
온갖 결박과 집착을 태워 버려라.
“게으른 마음으로 겁내거나 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르는 곳 있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경전인『중아함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은 정진하는 이가 닦을 것이지 게으른 이가 닦을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성질이 게으르면 스스로 매진해 나아갈 수 없으니 어떻게 교묘한 방편으로 열반에 이를 수 있겠는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본래 그 성질이 겁을 내고 약하며 두 눈이 없는 것과 같은데, 어떻게 마음을 내어 넓은 들판에서 노숙(露宿) 할 수 있을 것이며, 도적이 들끓는 어려운 길을 넘을 수 있겠는가? 저 험난한 곳을 지나려고 하면 건장한 사내나 용맹스런 장정이라야 비로소 스스로 건너 함없는 곳에서 몸을 편안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에 성질이 삿되어 뒤바뀐 소견을 믿으면 끝내 험난한 곳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지혜의 눈이 있고 현성의 방편이 있는 뒤에라야 저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게으른 마음으로 겁내거나 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르는 곳이 있으리. 열반에 이르기를 구하려 하면, 온갖 결박과 집착을 태워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비구여, 배 안의 물을 빨리 퍼내라
물을 퍼내면 배는 곧 가벼워질 것이다.
그와 같이 탐욕의 정 영원히 끊어야
비로소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옛날 어떤 비구가 강을 건너려 하였다. 마침 오래되어 썩고 낡은 수리되지 않은 배가 한 척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에 그 뱃사공이 비구에게 말하였다.
“도사여, 만일 건너고 싶으시면 자신의 힘으로 이 배 안에 고이는 물을 퍼내셔야 합니다. 배가 가볍고 몸이 안전하면 어디인들 못 가겠습니까?”
그때에 비구는 젖 먹은 힘까지 다해 배 안의 물을 다 퍼내고서야 비로소 강 저쪽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거기서 다시 옷을 바로하고 위의를 정돈하여 점점 나아가 부처님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곳에 도달하여 땅에 엎드려 머리와 얼굴을 부처님 발에 대며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여래께서 그를 제도할 수 있음을 아셨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자세히 훑어보시니 인물됨이 벽지불(辟支佛)이나 아라한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 곧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비구여, 배 안의 물을 빨리 퍼내라.
물을 퍼내면 배는 곧 가벼워질 것이다.
그와 같이 탐욕의 정 영원히 끊어야
비로소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에야 비로소 눈앞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다시 후세의 두려움을 걱정하는구나. 배가 위험하다는 것은 세상의 평범한 일이다. 방편으로 중생들을 제도할 때 게을리하지 말라. 우리의 몸뚱이는 진실한 그릇 같지만 순전히 깨끗하지 못한 것만 담고 있으니 어찌해서 버리지 않겠는가? 더러운 번뇌의 병을 퍼내고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끊고 현성의 배를 타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13
내게 있는 것 본래는 없던 것
본래 있던 것 지금은 내게 없다.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잡을 수 없다.
“내게 있는 것 본래는 없던 것, 본래 있던 것 지금은 내게 없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외도들의 소견은 제각기 다른데 모두 제가 옳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의 본래의 성은 무엇이며 본래의 이름은 무엇이다. 비록 있다고는 하지만 없는 것이고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인데 저절로 생겼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것 본래는 없던 것, 본래 있던 것 지금은 내게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없는 것도 아니요”라는 것은 과거를 말한 것이요, “있는 것도 아니니”라는 것은 미래를 말한 것이며, “지금은 잡을 수 없다”란 현재를 말한 것이다.
어리석음을 고집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문이나 범지를 떠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삿된 길을 다니면서 스스로 고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제일의 이치인 열반의 도를 알지 못하고, 삿된 소견을 믿으면서 열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것 본래는 없던 것, 본래 있던 것 지금은 내게 없다.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잡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4
보기 어려운 진리는 움직이지 않나니
잘 관찰하여 분별하라.
애욕이 다한 그 근원 살펴라.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
“보기 어려운 진리는 움직이지 않나니, 잘 관찰하여 분별하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번뇌가 다한 열반은 지극히 미묘한 것으로서 형상이 없어 볼 수 없는 것이다. 함이 있는 법은 자꾸 움직여 변해서 멈추어 있지 않지만 형상이 없는 법은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여래나 벽지불이나 성문들만이 지혜의 눈으로 잘 관찰하고 분별하여 낱낱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보기 어려운 진리는 움직이지 않나니, 잘 관찰하여 분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이 다한 그 근원을 살펴라.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애욕의 근본은 여러 가지 병을 일으키는 것임을 알아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빠져 나와 그것을 아주 끊어 남음이 없게 한다.
그러므로 “애욕이 다한 그 근원을 살펴라.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5
애욕을 끊고 욕심을 버려라
강이 마르면 흐를 조짐이 없으리라.
이 애욕의 근본을 능히 밝히면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
“애욕을 끊고 욕심을 버려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애욕의 병은 모든 근심의 근본이 된다. 그러므로 애욕의 근본을 뽑아 버리면 그 가지와 잎은 자라나지 않는다. 거기서 스스로 빠져 나와 그것을 아주 끊어 남음이 없게 하면 애욕의 근본은 스스로 없어져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애욕으로 말미암아 욕심의 흐름이 생긴다. 그것은 마치 급히 흐르는 강물이 중생들을 떠내려 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억천만 중생들이 목숨을 잃고 온전히 구제받지 못한다. 그러나 강이 마르고 나면 중생들이 오가더라도 몸이 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욕을 끊고 욕심을 버려라. 강이 마르면 흐를 조짐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애욕의 근본을 능히 밝히면,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란 무슨 뜻인가?
애욕은 몸의 바탕이 되고 욕심은 가지와 잎이 되며 어리석음은 그것을 죽이는 나루[津]가 된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잘 관찰하여 능히 그것을 끊으면 괴로움의 끝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애욕의 근본을 능히 밝히면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6
볼 때 진실 그대로를 보고
들을 때 진실 그대로를 듣고
알 때 진실 그대로를 알면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
무엇 때문에 “볼 때 진실 그대로를 보고”라고 말하는가?
무엇 때문에 진실 그대로를 보지 않으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눈으로 색을 보고 색의 근본을 분별하여 의식의 인연을 잘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실로 보지 않으면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미욱한 사람이 눈으로 색을 보고 눈의 알음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는 비록 보기는 하지만 보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왜냐 하면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눈의 알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볼 때 진실 그대로를 보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들을 때 진실 그대로를 듣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이 미묘한 소리를 듣고도 거기에 의식으로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들을 때 진실 그대로를 듣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알 때 진실 그대로를 알면”이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이 의식의 몸을 분별하여 선한 의식을 모아 가지고 선하지 않은 의식은 내버리게 되면 온갖 번뇌가 다하고 다시는 새로 짓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 때 진실 그대로를 알면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7
이녕미니(伊寧彌泥)
타비타라비(陀俾陀羅俾)
마설구설(摩屑姤屑)
일체비라리(一切毗羅梨)
이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
옛날 불세존께서 사천왕을 위해 설법하셨다. 두 사람은 중국말을 알았고 두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을 위해 담밀라국(曇密羅國) 말로 네 가지 진리를 연설하셨다. 아무리 담밀라국 말로 연설해도 한 사람은 담밀라국 말을 알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미리차(弥梨車) 말로,
‘마설구설일체비라리(摩屑姤屑一切毘羅梨)’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사천왕들은 모두 네 가지 진리를 통달하고 그 자리에서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얻었다.
18
몸을 없애고 생각을 없애면
모든 아픔[痛:受]이 시원해지나니
온갖 행위 영원히 그치고
분별하는 생각 다시 일지 않으면
그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
“몸을 없애고 생각을 없애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몸은 튼튼하지 않아 닳아 없어지는 법이요, 이 몸은 견실하지 않아 장차 흩어지는 것이다. 오직 오분법신(五分法身)이라야 튼튼하다 할 수 있다.
뜻은 생각에서 생기고 생각은 만 가지 병을 일으키므로 능히 그 생각을 없애야 비로소 진실한 도에 상응(相應)할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없애고 생각을 없애면”이라고 말한 것이다.
“모든 아픔이 시원해지나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중생들이 생사의 바다에 유전하여 강과 호수 등 네 가지 물[四瀆:江ㆍ河ㆍ淮ㆍ濟]에 몸을 던지고서도 싫다 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다 아픔[痛:受]의 근본 때문에 그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중생들이 서로 죽이고 서로 해치는 것도 모두 그 아픔으로 말미암아 그런 근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은 그런 아픔을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아픔이 시원해지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온갖 행위 영원히 그치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의식을 받는 것은 행위[行]에 의하여 생기고 행위가 불어감으로써 온갖 병을 이루거나 선한 곳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도를 닦되 행의 근본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 영원히 그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별하는 생각 다시 일지 않으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분별하는 생각이 흘러 달리면 만 가지 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의식을 거두어 잡아 흩어지지 않게 한다.
사람이 의식을 많이 일으키면 어리석음의 뿌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3백 가지 약으로써 백 가지 의식을 없애는 것이니, 새벽에 백 가지 약을 쓰고 낮에 백 가지 약을 쓰며 저녁에 백 가지 약을 쓴다. 그리하여 의식을 없앤다. 또 번뇌가 없는 거룩한 행의 정인법(頂忍法)으로 써도 의식을 없앤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생각 다시 일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의지하는 곳이 있으면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이 있으면 사라짐이 없고 사라짐이 없으면 싫증내지 않음을 안다. 사라짐이 없음을 알면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으면 생사가 없고 생사가 없음으로써 근심ㆍ걱정ㆍ괴로움ㆍ번민이 없어진다.
이런 괴로움의 쌓임[苦陰]으로 말미암아 온갖 병이 생기니, 그것을 익힘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온갖 결박에 얽매여 있는 사람의 수행은 반드시 의지하는 데가 있어야 하니, 이른바 의지하는 곳이란 산과 강과 석벽 따위의 형상이 있는 종류로서 눈에 보이는 것을 다 의지라고 한다. 능히 이것을 없애야 제일의 진리[第一義]에 상응할 것이다. 제일의 진리는 가고 오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가고 오고 돌아다니는 것이 없으면 생사가 없어지나니,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곧 번뇌[塵勞]를 일으켜 생ㆍ노ㆍ병ㆍ사가 날마다 자라나고 그 때문에 온갖 근심ㆍ걱정ㆍ번뇌가 생겨난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서로 생겨나게 하여 5음의 괴로움의 형상을 성취하는데 이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열반의 길이 있을 뿐이다.
혹 어떤 비구는 생(生)이 있고 진실이 있으며 함이 있다고 하고, 혹 어떤 비구는 생도 없고 진실도 없으며 함도 없다고 한다.
비구여, 함이 없다고도 하지 않는 이는 또한 생도 없을 것이요, 만일 생도 없고 진실도 없으며 함도 없다고 한다면, 그는 생에 의하고 진실에 의하며 함이 있음에 의하여 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령 중생들에게 이런 걱정이 없다면 여래께선 끝내 번뇌가 다한 열반의 즐거움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19
생(生)의 근본과 그 끝을 알면
유위(有爲)도 또한 무위(無爲)임을 알지만
나고 죽음에 얽매여 있으면
노쇠를 제어하기 진실로 어렵다.
“생의 근본과 그 끝을 알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중아함경』에서 말한 대애(大愛)의 본말에 대해 설한 것과 같다. 즉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생(生)이 있는데도 생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생에 대한 법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밑으로 물고기에 이르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용에게는 용의 성질이 있고 귀신에게는 귀신의 성질이 있으며 하늘에게는 하늘의 성질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성질이 있다. 이와 같이 아난아, 나는 생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생의 근본과 그 끝을 알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위도 또한 무위임을 알지만”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아무 형상이 없는 데에서는 변하거나 바뀌는 법을 관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위도 또한 무위임을 알지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고 죽음에 얽매여 있으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세상에 살 때 쇠하고 또 늙으면 죽는 줄 안다. 이 두 가지 일로 핍박을 받으면 그 근심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고 죽음에 얽매여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노쇠를 제어하기 진실로 어렵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모두 음욕ㆍ분노ㆍ우치ㆍ교만ㆍ질투ㆍ성냄ㆍ어리석음 따위의 온갖 행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병의 부림을 받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쇠는 제어하기 진실로 어렵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0
음식이 아니면 목숨을 구제하지 못하니
누군들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음식을 우선으로 여기나니
그런 뒤에 마침내 도에 이른다.
중생들이 유유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모두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음식을 먹지 않으면 도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이 아니면 목숨을 구제하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누군들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깨닫고 음식이 생겨난 곳을 분명히 알고 진리를 찾아 의심이 없으면 받는 이나 주는 이가 모두 의혹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들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음식이란 그 물건됨이 생사의 찌꺼기이고 혼탁한 것이지만 몸이 있으면 음식의 얽맴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음식을 우선으로 여기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감관[入]이 땅도 아니요 물도 아니며 불도 아니요 바람도 아님을 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의식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불도 아니요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생각이 있는 것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며, 금세도 후세도 아니고 해나 달이 비치는 곳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인연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뒤바뀐 소견을 가진 사람들은 날마다 스스로 해탈하기를 구한다.
니건자(尼犍子)등은 스스로 가르치기를,
‘해탈을 구하는 이는 반드시 61주(肘:1척 8촌)나 백 유연(由延:由旬)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방에 들어가는 이는 곧 해탈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부처는 그 이치를 관찰하고 나서 생사의 의혹을 끊고자 하였고, 또 니건자의 뒤바뀐 소견을 막고자 하여 이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해와 달은 동시에 밝을 수 없으며 삿됨과 바름도 다투어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돌아다님이거나 가고 옴이나 나고 죽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말하지 않나니, 이것이 이른바 고제(苦際)의 근본이니라.”
21
땅의 요소와 물ㆍ불의 요소
그때에 바람은 불지 않는다.
광명의 불꽃이 비치지 않는 곳
거기에서 그 진실을 볼 수 없었다.
응화(應化)하는 사람은 혹 존귀한 세력을 의지하기도 하고 혹은 구제해 줄 바에 의지하기도 한다. 존귀한 세력에 호응하여 제도되는 사람은 말을 해 줄 필요가 없다. 의지해서 해탈할 사람은 홀연히 스스로 깨달아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고, 겸손하고 공손한 사람은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광명의 불꽃이 비치지 않는 곳, 거기에서 그 진실을 볼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2
달이 아니면 광명이 없고
해가 아니면 밝음이 없다.
이것을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범지의 행에 호응하리라.
“달이 아니면 광명이 없고, 해가 아니면 밝음이 없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마치 해나 달의 광명과 같이 온갖 티끌이 그것을 덮으면 그 가르침을 널리 펴지 못한다. 마치 도리천(忉利天) 일구경천(一究竟天)에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치는 것과 같아 거기에는 해와 달의 광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다 전생에 행을 쌓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달이 아니면 광명이 없고, 해가 아니면 밝음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것을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범지의 행에 호응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3
단정한 색(色)이 종용(縱容)하여
모든 고통을 벗어났으니
색도 아니요 색 아님도 아니어서
모든 고통을 벗어났도다.
색이 있거[有色]나 색이 없는 것[無色]은 괴로움의 근본에서 생기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정한 색이 종용하여, 모든 고통을 벗어났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최후의 경지[究竟]에 이르면 두려워하지 않고
결박을 벗어나면 의혹이 없어진다.
욕망의 가시를 끊지 못하면
몸이 근심이 된다는 것을 어찌 알리.
“최후의 경지에 이르면 두려워하지 않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최후의 경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용의구경(用意究竟)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구경(自然究竟)이다.
마음이 바르면 그 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후의 경지에 이르면 두려워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박을 벗어나면 의심이 없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온갖 결박을 끊어 완전히 없애 남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오랫동안 나고 죽어 다섯 가지 길을 끝없이 헤매면서 부끄럽고 욕된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박을 벗어나면 의혹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욕망의 가시를 끊지 못하면, 몸이 근심이 된다는 것을 어찌 알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세상에 살 때 행하는 법은 동일하지 않다. 욕망을 끊지 못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계요, 둘째는 색계며, 셋째는 무색계다.
이른바 욕망의 가시란 삿된 길의 가시이니, 그것은 우리를 계속 때리고 손상시키고 또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가시를 끊지 못하면, 몸이 근심이 된다는 것을 어찌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5
이른바 그 최후의 경지란
자취를 끊는 것이 제일이 되고
모든 생각을 다 끊는 것이니
문구에 조금도 착오와 잘못이 없다.
“이른바 그 최후의 경지란, 자취를 끊는 것이 제일이 되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최후의 경지란 모든 법 중의 최상으로서 그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모든 병 중에서 제일 중한 병은 결박과 집착인데, 그 욕심을 없애 남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그 최후의 경지란, 자취를 끊는 것이 제일이 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생각을 다 끊는 것이니, 이 문구는 조금도 착오와 잘못이 없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생각이란 것은 욕심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 생각이요 분노가 바로 그 생각이며 어리석음이 바로 그 생각이다. 저 경전의 말과 같다. 즉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구다(瞿多)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모든 행의 근본이다. 저 모든 생각이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으면 또한 어떤 생각이나 욕심도 일어나지 않느니라.”
그 말씀은 끝내 착오와 잘못이 없다. 왜냐 하면 행에는 다하는 것도 있고 다하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교훈을 펴 후생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을 다 끊는 것이니, 이 문구는 조금도 착오와 잘못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6
절제를 알고 절제를 모르나니
가장 훌륭한 이는 유행(有行:존재를 가져오는 행)을 버리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행을 생각해
마치 알이 그 막(膜)을 깨뜨리는 것 같다.
“절제를 알고 절제를 모르나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절제란 함이 있는 행을 말한 것이요, 절제를 모른다는 것은 오랫동안 큰병을 앓고 있으면서 생각하는 길을 용납하지 않고 여섯 감관을 막아 도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제를 알고 절제를 모르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장 훌륭한 이는 유행(有行)을 버리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지진(至眞) 등 옳게 깨달은 이를 가장 훌륭한 이라고 한다. 그는 그 세 세계를 버리고 그런 행을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이는 유행을 버리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속으로 스스로 행을 생각해, 마치 알이 그 막을 깨뜨리는 것 같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선정에 들어가도 선정에 들어 있지 않은 것 같다가 그 선정의 뜻을 얻으면 도의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동물이 그 껍질을 버리고 거기에서 몸이 나오는 것과 같다. 지금 이것도 그와 같아서 근본의 행을 버리고 번뇌 없는 행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치 알이 그 막을 깨뜨리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7
모든 보시 가운데서 법보시가 훌륭하고
모든 즐거움 가운데서 법의 즐거움이 제일이며
모든 힘 가운데서 참는 힘이 최상이요,
애욕이 다하고 괴로움을 밝게 아는 것 가장 묘하다.
“모든 보시 가운데서 법보시가 훌륭하고”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무엇 때문에 보시 가운데서 법보시가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가? 이른바 법보시는 가장 좋고 훌륭하며 온갖 근심도 없다. 중생들은 그 가운데에서 법을 들으면 마음이 트이고 뜻이 열려 누구나 다 해탈하게 된다. 이른바 재물보시라는 것은 한 사람은 만족시키지만 다른 한 사람은 혐오하고 한을 품는다. 그래서 그 보시하는 마음이 높고 낮아 그 일이 같지 않다.
마치 부처님이 저 병사왕(洴沙王)을 위해 미묘한 법을 연설하실 때 8만 제천(諸天)과 1만 2천 마갈타(摩竭陀) 중생이 들었고, 또 석제환인(釋提桓因)을 위해 석실 안에서 미묘한 법을 연설하실 때 8만의 하늘들이 모두 미묘한 법을 얻고 모든 감정이 통달하여 걸리는 바가 없어진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보시 가운데서 법보시가 훌륭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른바 재물보시란, 오늘 그 보시를 받았다 해도 내일 또다시 구해야 한다. 그 중에는 천상에 가기를 구하는 그런 사람은 법을 듣더라도 이 겁에 저 겁에 이르도록 다할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보시 가운데서 법보시가 훌륭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즐거움 가운데서 법의 즐거움이 제일이며”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속세에 살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생각을 어지럽히는 근본이 된다. 그러므로 그 길로 나아가면 바로 지옥의 행을 짓는 것이다. 대개 법의 즐거움이란 막힘없이 연설하여 물으면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이 통달하여 의기양양하게 들어온다.
그러므로 “모든 즐거움 가운데서 법의 즐거움이 제일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힘 가운데서 참는 힘이 최상이요”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옛날 한 이웃 나라의 왕이 군사를 일으켜 적국을 치려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그 왕에게 말하였다.
“이웃 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지금 가까이 핍박해 오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도 준비하여 공격하도록 하소서.”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 구태여 내 공직을 이용해 스스로 적과 대적하겠는가?”
적군은 차츰 가까이 다가와 성문을 공격하였다. 신하들은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적군이 지금 성 밖에 와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마땅히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비록 적군이 밖에 있더라도 염려할 것 없다. 다만 내 사사로운 일을 경영하면 그만이다. 무엇 때문에 공무를 걱정하겠는가?”
그때 포악한 적군은 성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신하들이 또 아뢰었다.
“적군이 지금 가까이 들이닥쳤습니다. 현명하신 왕께서는 무엇을 생각하시는 지 알 수 없나이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그런 시시한 일을 왜 내게 들려 주는가?”
이웃 나라 대왕은 계속 진격하여 궁전 앞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또 아뢰었다.
“이웃 나라 왕이 지금 닥쳐왔습니다. 성존(聖尊)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나이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은 변하고 바뀌어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흥한 자는 반드시 쇠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마땅히 이 옷을 벗고 형상을 고쳐 걸사(乞士)의 법을 따르리라. 어디론가 스스로 물러가,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도덕을 생각하면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저 사나운 왕이 내 몸을 사로잡아 죽이려 하더라도 나는 그 허물을 사양하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나라를 망치고 국토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나 한 사람 때문이니, 내가 지금 죽임을 당함으로써 만 백성에게 근심이 없게 된다면 어찌 나에게 큰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에 적국 왕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찬탄하고 소리 높여 외쳤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대왕이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이긴다 하더라도 왕에게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슴을 열고 크게 깨달아 세상의 영화를 돌아보지 않고 이제부터는 돌아가 본국을 다스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왕과 함께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면서 자기 몸처럼 이 왕을 접대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힘 가운데서 참는 힘이 최상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이 다하고 괴로움을 밝게 아는 것이 가장 묘하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애욕의 근본은 곧 온갖 번뇌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도를 익히되 먼저 욕망의 결박을 끊은 뒤에 차츰 번뇌 없는 도에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애욕이 다하고 괴로움을 밝게 아는 것이 가장 묘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