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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6념처를 기독교의 교리에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아함] | 기독교 | |
1 | 부처님 | 예수 |
2 | 법 | 말씀 |
3 | 승가 | 교회 |
4 | 계율 | 계율 |
5 | 보시 | 사랑 |
6 | 하늘 | 천국 |
'염’은 '마음에 새겨 한시도 잊지않다, 기억하다’는 것이다.(사띠, 염(念)의 뜻(1))
[청정도론의 번역에서는 '계속하여/지숙적으로 생각하다’라 하였다.]
1. 부처님과 예수
비로자나와 부처님
“모든 어둠을 부숴 버리기 위해
광명으로 허공을 비추리니
이제 저 비로자나(毘盧遮那)의
맑고 깨끗한 광명 나타나리라.
(....)
부처님의 출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온 세상을 안온하게 해주시니
주문 게송으로 라후라 아수라로 하여금
달을 버리고 달아나게 하셨네.”
비로자나와 부처님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비로자나는 빛으로 비유되는 불법 자체, 시공을 초월한 이라 할 수 있겠다.
부처님은 특정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중생의 몸으로 태어나신 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다.
[‘법신’은 비로자나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러 부처님은 ‘응신, 화신’이라 한다.]
“스승이신 석가 세상에 출현하여 그 목숨 너무도 짧았지만
육체는 비록 가셨어도 법신(法身)은 남아 있네.“
보살은 중생 제도의 서원을 일으키고 수행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부처님이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당연하게도 석가모니도 이 땅에 태어나기 직전에는 보살이었다.
최고 경지에 오른 보살로서 부저님이 되기 직전의 보살을 일생보처보살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보살이 보살도를 성취한 과보로 부처님이 된 이를 ‘보신(報身)’이라 하는데,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 등이다.]
[하나님과 예수]
비로자나는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응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수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비로자나가 이 세상에 중생의 모습으로 드러난 모습이듯이, 예수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비로자와 한몸이고, 예수도 하나님과 한몸이다.
[여래장/불성과 요한복음의 빛]
한편 대승 불교에서는 비로자나와 부처님의 성품이 본래 중생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이른바 여래장/불장/불성이다. [이 세 용어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컨대 구름에 가려진 햇빛이나 흙속에 숨겨진 보석에 비유될 수 있다. 햇빛이나 보석은 비로자나/부처님의 성품이고, 구름이나 흙은 그것을 덮고 있는 중생의 번뇌이다.
구름이 걷히면 햇빛이 드러나고, 흙을 떨어내면 보석이 빛을 발한다.
“선남자야, 부처가 만든 무수한 연꽃이 홀연히 시들고 무량한 화불(化佛)이 연꽃 안에 머물고, 상호를 장엄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큰 광명을 놓은 희유함을 대중이 보고 공경하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이,
이와 같이 선남자야, 내가 부처의 눈으로 일체 중생을 보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여러 번뇌 가운데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눈과 여래의 몸이 있어 결가부좌하고 엄연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선남자야, 일체의 중생은 여러 세계의 번뇌의 몸 가운데 있다 하여도,
여래장이 있어 항상 오염(汚染)됨이 없고 덕상을 갖추어서 나와 같으며 다름이 없다.”
“나, 이미 부처의 눈으로
일체 중생을 봄에
불장(佛藏:佛性)에 안온하게 머무는 것을 보고
법을 설하여 열어서 나타나게 한다.“
요한복음의 말씀과 빛에 관한 말씀은 여래장/불성과 거의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빛이 사람들에게 있으나 어두움에 갇혀 드러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2. 법과 말씀
불교의 법은 부처님의 말씀인 불경이고, 기독도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불경에서는 바른 법을 받아들이되, 항상 법이 아닌 것[비법, 외도의 삿된/잘못된 소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잘못된 소견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항상 성경에 기초하지 않거나 성경에 어긋나는 견해인 이단의 견해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킨다.
따라서 나의 믿음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고 경계애야 한다.
믿음을 점검하는 기준은 오직 불경과 성경의 말씀이다. 불경이나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믿음은 잘못된 소견이자 이단의 견해이라 할 수 있다.
불교도의 삶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믿고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따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기독교도의 삶도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3. 승가와 교회
승가/교회는 승려/성직자와 일반 신도로 구성되는데, 법/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또 수행자가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것과 수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물론 수행은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은 결국에는 혼자 성취해야 하는 것이니, 듣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을 듣는 장소와 수행하는 장소도 다를 수밖에 없다.
4. 보시와 사랑
불교에서 보시는 무조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법의 보시와 재물의 보시의 두 가지가 있다.
보시에는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넓은 마음[4등심(4무량심)]과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딛히더라도, 또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성내지 않고 참는 마음[인욕]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은 인욕[참음]을 포함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누가복음 6:35]
5. 하늘과 천국
아함경에서 세계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아수라ㆍ하늘이 있고, 하늘은 욕계의 하늘ㆍ색계의 하늘ㆍ무색계의 하늘이 있다.
불교에서 하늘은 천신들이 사는 세계이다. 각각의 하늘은 등급의 차이가 있고, 수행의 과보에 따라 더 높은 하늘에 갈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목표는 일차적으로는 번뇌가 없는 하늘에 태어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궁극의 목표는 모든 세계의 모든 인연의 끈을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ㆍ태어남이 없는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은 지옥에 대립하는 것이다.
대승 불교의 극락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기독교의 목표도 불교의 목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일차적으로는 천국에 태어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품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6. 계율
불경에서는 다섯 가지 계율과 열 가지 계율이 있다. (자세히는 증일아함경_14. 오계품)
다섯 가지 계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살생ㆍ도둑질ㆍ사음ㆍ거짓말ㆍ술’
열 가지 계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살생ㆍ주지 않는 것을 취함[도둑질]ㆍ삿된 음행ㆍ거짓말ㆍ이간하는 말ㆍ욕설ㆍ꾸밈말ㆍ탐욕ㆍ성냄ㆍ삿된 견해를 일으키는 것’
구약의 출애굽기의 10계는 다음과 같다.
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②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③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④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⑤ 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적질하지 말라.
⑨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Bible4U - Online Bible Audio many Languages)
기독교의 ①과 ②는 불교의 ‘삿된 견해’와 관련하여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기독교의 ④는 뷸교에서 불자가 지녀야 할 일상적인 삶의 태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겠다.
⑤의 부모를 공양하는 것은 보시이다.
그런데 ②의 경우는 불교와 확연히 다르다.
6념처의 ‘부처님을 앚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염불]에서는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의 ⑥-⑨는 불교의 계율에 대응한다.
불교 | 기독교 |
살생 | 살인(⑥) |
도둑질 | 도둑질(⑧) |
사음 | 간음(⑦) |
거짓말 | 거짓 증언(⑨) |
술 | |
탐욕(⑩) |
기독교의 탐욕(⑩)은 불교의 10계의 ‘탐욕’에 대응한다.
기독교에서는 ‘술’과 ‘성냄’에 관한 계율이 없다.
[그런데 ‘성내지 앟는 것’은 인욕이며, ‘사랑’은 인욕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응되는 경우에도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불교에서는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생물인데,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도둑질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말라’고 하여 좀더 포괄적으로 규정된다.
7. 덧붙임
불교와 기독교의 사이에는 유사한 점도 많고 차이도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유사점을 보고는 어떤 종교가 다른 어떤 종교의 영향을 받았느니 하면서 논쟁을 벌이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빋았느니 아니니 하고 논쟁하기보다는, 어떤 종교가 태동하는 초기의 토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주 간단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같은 씨앗이라도 다른 토양에 뿌려지면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듯이,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24.10.23, 수정함)
첫댓글 감사히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