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운경 제3권
[법계를 잘 안다]
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법계를 잘 안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지혜가 있는 것,
선지식에게 의지하는 것,
열심히 정진하는 것,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멀리 여의는 것,
청정한 것,
공경하는 것,
공관을 많이 익히는 것,
모든 삿된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
소견이 진실한 것이다.
선남자야, 보살은 지혜가 있으므로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선지식을 보고는 존경하고 기뻐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에 대해 세존이라는 생각을 하고, 선지식에게 의지해 머문다.
그리하여, 선지식으로 인해 열심히 정진하게 되고 선지식으로 인해 능히 모든 악법을 없앤다.
비록 모든 선법을 만족하였더라도 게으르지 않게 열심히 정진해 장애를 없앤다.
이미 장애를 없앤 까닭에 열심히 도를 닦으면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청정하게 되어 모든 습악(習惡)을 없앤다.
청정하게 되므로 능히 공경하고 공양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므로 공관(空觀)을 얻는다.
공관을 닦으므로 모든 가명(假名)을 없애고,
모든 가명을 없애므로 능히 정도(正道)로 향하며,
정도로 향하므로 능히 진실(眞實)을 본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실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소견이 헛되지 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진실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대답하셨다.
“허망하지 않은 법을 진실이라고 한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허망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진실과 같은 것이어서 진실과 다르지 않은 것을 허망하지 않다고 한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실과 같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이 법은 오직 마음으로만 알 수 있지 입으로는 말하기 어렵다. 이는 문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법상(法相)이 문자를 떠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법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심소(心所)의 행처를 초월하며,
모든 희론(戱論)을 떠나며,
조작이 없고 또 피차도 없으며,
헤아리고 계교하여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또 상모(相貌)가 아니며,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소견을 초월하며,
악마의 세계를 초월하며,
모든 번뇌의 처소를 초월하며,
모든 마음과 의식이 나타내는 것을 초월하며,
적멸한 현성의 처소에 머물지 않되 모든 현성이 증득해 아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구경에 여실한 것이라 한다.
이것이 일체지(一切智)이니, 이른바 생각할 수 없는 경계이며 둘이 아닌 경계이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여실상(如實相)은 어떻게 깨달으며, 어떻게 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출세간지(出世間智)로써 마침내 증득하고 보아 스스로 이 법을 얻는다.”
제개장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의 체성은 구경에 청청하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맑고 고요한 법이고, 미묘하고 가장 훌륭한 법이며, 항상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법이어서,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법성(法性)이 항상 그러합니다.
보살마하살이 어려운 행과 괴로운 행을 열심히 수행하며 백천만억의 어려운 행과 괴로운 행을 닦는 것은 이 법을 얻어 중생을 안립(安立)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제개장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것을 들어서 얻은 지혜[聞慧]로 듣고, 생각해서 얻은 지혜[思慧]로 생각해 몸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여실한 법을 관찰하여야 몸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얻은 지혜로 듣고, 생각해서 얻은 지혜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없다. 듣거나 생각해서 얻은 지혜로 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비유로 말하리라.
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늦봄 날씨가 뜨거울 때 드넓은 광야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동쪽에서 와 서쪽으로 향해 가고, 어떤 사람은 서쪽에서 와 동쪽으로 가다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서쪽에서 온 사람이 더위 때문에 괴로워서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더워서 괴롭고 매우 갈증이 나니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오.
어느 곳에 갈증을 식힐 만한 시원한 못이나 샘이 있습니까?’
동쪽에서 온 사람은 지름길을 잘 알고 길의 사정을 잘 알기에 곧 그에게 대답하였다.
‘오던 길에 시원하고 맛좋은 물이 있었는데 짜거나 쓴 맛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목욕하고 배불리 마시고 이곳으로 오는 길입니다.
선남자여, 당신이 가려는 그곳까지엔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얼마 가지 않으면 곧 두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는 왼쪽으로 난 길이고 또 하나는 오른쪽으로 난 길입니다.
당신은 왼쪽 길을 버리고 오른쪽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오래가지 않아 울창하고 시원한 덤불숲이 보일 겁니다. 그 덤불숲에 묘한 못과 샘이 많이 있습니다. 물이 많고 맛도 좋아 목욕도 할 수 있고 마실 수도 있어 갈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 목마른 사람이 물이 있는 곳을 듣고 생각하고 나면 갈증이 멈추어지느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록 시원하다고 들었더라도 몸은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것도 역시 그러하여 들어 얻는 지혜와 생각해 얻는 지혜 등으로는 곧 실상(實相)의 법을 깨달아 알 수 없다.
드넓은 광야는 비유하면 생사와 같고, 목마른 사람은 곧 얽매인 범부이니, 번뇌의 열이 핍박하면 곧 애착의 갈증이 일어난다.
길을 잘 아는 사람이란 비유하면 모든 지혜의 길을 잘 아는 보살과 같고,
물을 마신다는 것은 비유하면 법의 맛을 잘 얻는 것과 같다.
시원하게 목욕한다는 것은 비유하면 몸으로 증득한다는 것과 같고,
맑고 깨끗하며 짜고 쓴 맛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비유하면 여실한 법과 같다.
선남자야, 너는 지금 잘 들어라. 내가 다시 비유하여 말하겠다.
가령 여래가 염부제에 있으면서 1겁의 수명이 다하도록 감로의 맛을
‘향기가 매우 묘하고 달고 맛있고 청정해 먹으면 즐거움을 느낀다’고 설명하고,
모두들 그 맛이 비할 데가 없다고 찬탄한다고 하여도,
어떤 사람이 비록 그 빛깔은 보았으나 아직 먹지 않았다면 그 맛을 알겠느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지금 너를 위해 다시 비유로 설명하겠다.
어떤 사람이 맛있는 과일을 먹고 나서는 아직 먹지 못한 사람 앞에서 그 과일이 색과 향기와 맛을 갖추었다고 찬탄하였다고 하자.
그 사람이 과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스스로 저 과일의 색과 향기와 맛을 알 수 있겠느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 역시 이와 같다.
듣거나 생각해 얻은 지혜라고 해도 곧 진실한 법의 모습을 깨달아 아는 것은 아니니라.”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저를 위해 쾌히 이런 비유들을 말씀하시니, 듣는 이가 있다면 머지않아 그들도 반드시 법의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법을 들으면 반드시 아비발치(阿厦跋致)를 깨달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네가 말한 것처럼 이 법을 듣는 사람은 반드시 아비발치를 깨달아 분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법계(法界)를 잘 아는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