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살영락경 제6권
19. 수행품 ①[2]
[갖가지 바라밀]
발뒤꿈치[跟]는 가늘고 평평하고 발라서
대성인(大聖人)의 자리를 닦아 이루니
이제 더러움 없는 과보를 얻어서
도의 바라밀을 갖추네.
발뒤꿈치는 중금(重金)을 편 것과 같아
또 티끌의 물을 받지 않으며
발을 들면 회오리바람 같아서
기관에 접촉의 장애가 없네.
마음의 꽃은 티끌에 집착하지 않아
속으로 기뻐하면 색은 밖으로 발해서
모두 인욕의 과보를 말미암음이니
이 때문에 바라밀이라 호칭하네.
마음을 금강(金剛)처럼 잡아서
도지(道地)의 법을 널리 펴서
과거 한량없는 세상을 알아
걸림 없는 바라밀을 갖추네.
입으로 여덟 가지 소리를 연설하여
온갖 말씀의 가르침 모조리 펴고
지극한 정성으로 유(有)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을 속이지 않는 바라밀이라고 하네.
도(道)는 세 가지 관(觀)의 상념을 말미암아
평등한 지혜 능히 미치고
마음이 시비에 집착하지 않아
무생(無生)의 바라밀에 응하네.
처음에 큰 서원의 마음 발함은
적은 수의 사람을 위함이 아니니
자연히 도의 깨침을 이루면
이것을 공을 갖춘 바라밀이라 이름하네.
신족으로 부처님 나라에 노니니
몸과 마음이 한계나 걸림이 없고
한 뜻[一意]으로 옮기고 바꿈 없음은
신족의 바라밀이네.
본래 색을 말미암아 유(有)에 떨어졌으므로
색이 항상함이 있지 않음을 알았으니
이제 이 색신(色身)을 받음은
뭇 상호의 바라밀이네.
아픔의 법은 안팎이 있어서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이 있지도 않으니
안팎의 법을 없앰은
행 없음의 바라밀이네.
같이(根)에 다섯 가지 법 있음은
요컨대 열여덟 가지 가짐을 말미암음이니
분별하여 다섯을 덜어버리면
갚음 없는 바라밀이네.
몸ㆍ입ㆍ뜻을 지켜서 수호하고
방일함이 없게 잘 거두어서
청정한 음향이 널리 비춤은
여덟 가지 도[八道]의 바라밀이네.
세 가지 각관(覺觀)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일어나고 멸함도 내지 않고
뜻을 쉬어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말 없는 바라밀이네.
청정하기 연꽃과 같고
널리 들어도 물들지 않으며
늘 중생을 교화함은
청정한 가르침의 바라밀이네.
평등하여 두 상념이 없고
치우쳐 집착하는 마음 품지 않아서
해가 허공을 비춤과 같음은
혜관(慧觀)의 바라밀이네.
어진 지혜는 헤아릴 수 없고
남이 없음도 볼 수가 없으니,
보시의 마음ㆍ한량없는 지혜는
도지(道智)의 바라밀이네.
삼천대천세계의
일어나고 멸함이 있는 바 없음을 관해서
일체를 잘 깨침은
무상(無想)의 바라밀이네.
생겨남이 본래 생겨남이 없고
인연이 모든 법을 낸다고 알아서
유무(有無)의 도를 성취함은
평등의 바라밀이네.
걸림 없는 도를 총지하고
해탈하여 지혜를 성취하고
분별해도 ‘나’라는 상념 없으면
공하고 청정한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에 다섯 가지 어려움 있음은
세속 티끌에 물들어 집착한 탓
공의 한량없는 경계에 노니는 것은
방편 지혜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의 결박에서 이미 벗어나
해탈 가운데서 유희하면서
청정하여 어지러운 생각 없음은
과보의 바라밀이네.
세상에 있으면서 고행(苦行)을 나타내고
마음을 금강처럼 잡아서
3유(有)의 길을 이미 초월했음은
자연의 바라밀이네.
혹은 허공의 경계에 있으면서
법을 염(念)하여 어지러운 상념 없음이
마치 허공이 포용하는 것과 같음은
무형의 바라밀이네.
유쾌하도다, 무생(無生)의 도여.
모든 번뇌가 영원히 끊기고
가고 옴이 있음도 보지 않으니
행 없음[無行]의 바라밀이네.
신족에 네 가지 일 있어서
시방 국토에 늘 노닐면서도
몸과 마음이 모두 비고 고요함은
밝은 지혜의 바라밀이네.
본래 평등한 마음으로부터
한 뜻도 물든 바 없고
마음이 한량없는 경계를 초월함은
미묘(微妙)의 바라밀이네.
세상에 태어난 고통을 관하여 요달하니
한 모습[一相]도 일어나는 바가 없어서
도의 마음은 옮길 수 없으니
금강의 바라밀이네.
배움 없음으로 범행(梵行)을 닦아
아홉 차제(次第)를 초월하여서
행이 다하여 치열하지 않으니
영락(瓔珞)의 바라밀이네.
도는 세 가지 혜관(慧觀)으로부터
정의(定意)의 행을 분별하고
스스로 쉬어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무량(無量)의 바라밀이네.
네 가지 나쁜 갈래에서 건져내어
차례를 초월하여 증득을 받지 않아도
자연히 무명을 멸함은
등분(等分)의 바라밀이네.
도의 가르침은 실로 미묘해
정진으로도 넘어갈 수 없고
평등하여 두 가지 법이 없으니
온갖 행의 바라밀이네.
세상에 나옴이 뭇 고난이니
위없는 도를 늘 익혀서
유무의 자취를 보지 않음은
온갖 상념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은 한계와 걸림이 많아
지혜의 빛을 보지 못하므로
도의 힘으로 선포해 창달하니
적행(積行)의 바라밀이네.
아홉 가지 선의 법 성취하여
세속 지혜에 물들지 않고
낱낱이 상념을 분별하니
계훈(戒訓)의 바라밀이네.
그러므로 법을 나타내어
온갖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제도함과 제도함 없음을 보지 않으니
고요한 뜻[寂意]의 바라밀이네.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면서
온갖 성현을 받들어 섬기고
가르침을 받아서 잊지 않으니
총지의 바라밀이네.
다시 변화를 능히 나타내어
모든 부처님 국토를 감동시키되
또한 스스로 높다고 아니하니
뜻을 멸함[滅意]의 바라밀이네.
지난 세상을 되돌아 생각하고
보살의 도를 널리 닦아서
안의 온갖 번뇌에 집착하지 않으니
행을 관하는 바라밀이네.
여러 부처님 국토를 닦고 다스리니
청정해서 티와 때가 없고
한량없는 사람을 제도해 해탈시키니
법계의 바라밀이네.
중생의 근(根) 한량없지만
신체는 극히 청정하여서
안팎이 유(有)에 물들지 않으니
법을 요달한 바라밀이네.
삶을 족히 탐내지 않고
권현(權現)으로 방편 없음을 알아
온갖 상념을 내지 않으니
무등(無等)의 바라밀이네.
신법(身法)의 약간의 종자도
또한 번뇌를 내지 않아서
신체의 모습을 장엄하니
공덕의 바라밀이네.
무앙수의 겁으로부터
쌓고 쌓으며 법의 근본을 닦지만
그 쌓고 쌓음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니
신통의 바라밀이네.
6정(情)이 유(有)에 집착하지 않고
한량없는 지혜를 분별하여
허공제(虛空際)를 지나갈 수 있으니
일심(一心)의 바라밀이네.
사람 가운데 태어나기 어렵고
몸을 받음은 한량이 없지만
눈은 바깥 색에 집착하지 않으니
무념의 바라밀이네.
뜻을 잡아서 탐착함이 없으며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쉬지 않고
안의 뭇 행을 스스로 멸하니
공관(空觀)의 바라밀이네.
두려움 없어서 집착한 바 없고
안팎의 법도 보지 않으며
도의 뜻에는 약간이 없으니,
신지(神智)의 바라밀이네.
부처님 몸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은 채
지혜의 통달이 백겁을 지나치니
무심의 바라밀이네.
앞의 마음은 지금 마음이 아니고
생기고 생기면서 끊어지지 않아
한 뜻으로 일어난 바 없으니
큰 지혜의 바라밀이네.
억백천의 중생을
제도하지만 제도를 보지 않아서
심념(心念)에 그릇됨과 삿됨이 없으니
오락(娛樂)의 바라밀이네.
행이 다해서 고(苦)의 증명을 받고
3세의 근본을 통달해 알아서
소승(小乘) 뜻이 있지 않으니
본말(本末)의 바라밀이네.
고통에서 고통을 생각지 않고
네 가지 비상(非常)을 요달해 알아서
생을 다하고서 다시 몸이 없으니
성제(聖諦)의 바라밀이네.
본래 한량없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 받아 장차 부처를 이룰 것인데
그래도 스스로 기뻐하지 않으니
등시(等施)의 바라밀이네.
마음은 본래 불가사의하고
덕은 한량없음을 초월해
유무(有無)의 관(觀)을 분별하니
정적(靜寂)의 바라밀이네.
5도(道)는 뭇 고통의 근원으로서
청백(淸白)의 법을 낳지 못하고
8등(等)으로 지나가는 도행(道行)은
현신(現身)의 바라밀이네.
인체(人體)는 본래 법이 없어서
법계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가 백 가지 행을 지남은
무외(無畏)의 바라밀이네.
한마음, 한 생각 동안에
증명을 받으면 어려움 없고
온갖 번뇌의 법을 영원히 여의니
큰 성현의 바라밀이네.
본말을 영원히 스스로 여의어서
또한 ‘나’를 보지 않으며
신력(神力)도 허공과 같으니
지족(知足)의 바라밀이네.
위의(威儀)를 스스로 거두어 지니고
온갖 상호(相好)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지켜 범하는 바 없으니
친근(親近) 바라밀이네.
나는 무수한 세대로부터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고
온갖 법계를 훼손하지 않았으니
원함 없음[無願]의 바라밀이네.
또한 온갖 법에 대해서
희망이나 요행이 있지 않아서
유(有)도 아니고 생겨난 바도 없으니
적행(積行)의 바라밀이네.
저쪽과 이쪽의 언덕을 생각지 않고
나고 죽음의 바다도 초월하여서
온갖 근본을 찾아 다함은
다함없음[無盡]의 바라밀이네.
열여섯 가지 불가사의함은
또한 열여섯 가지 지혜라 이름하여
고통으로부터 법 없음에 이르니
집착 없음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은 끝이 없어서
혹은 나왔다 혹은 사라지니
이를 다 능히 관하여 요달해 아는 것은
성공(性空)의 바라밀이네.
몸의 법은 서른두 가지로서
오염으로 청정치 못한 행을
낱낱이 능히 분별하니
집착 없음의 바라밀이네.
안식(眼識)은 안팎이 있어서
바깥 몸의 들어옴을 받지 않아도
두려움 없어서 움직이는 바 없으니
자심(慈心)의 바라밀이네.
나와 같이 보리수에 앉아
금강의 자리를 장엄하고
마군을 항복시켜서 두려움 없음은
큰 사랑[大慈]의 바라밀이네.
중생의 무리 불쌍히 여겨서
사람을 제도하되 제도함 보지 않아
널리 제도함에 한계가 없으니
스스로 여읨[自離]의 바라밀이네.
과거는 다시 생기지 않고
미래의 티끌에 물들지 않아
지혜의 마음은 안팎이 없으니
의심 없음[無疑]의 바라밀이네.
안팎의 음(陰)과 지(持)와 입(入)은
온갖 번뇌를 내지 않고
하나를 지켜 방일하지 않으니
신족(神足)의 바라밀이네.
눈은 바깥 색에 집착하지 않고
혀도 또한 다시 맛을 알지만
탐내고 집착하는 상념을 없애니
형상 없음[無形]의 바라밀이네.
보살의 마음을 분별하여
청정한 관(觀)으로 집착한 바 없고
도가 평등한 지혜를 좇으니
위의(威儀)의 바라밀이네.
스스로 숙명지(宿命智)를 인식해서
본래 좇아온 바를 알고
다시는 상념을 일으키지 않으니
현생(現生)의 바라밀이네.
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있으면서 교화하여
고통을 다하니 남음이 없고
생사의 근본을 뽑아서 끊으니
고행(苦行)의 바라밀이네.
연민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양육을 능가하고
지혜는 보편적이라서 높고 낮음 없어
안으로 스스로 몸을 보지 못하니
탐냄 없음의 바라밀이네.
덕은 한량없는 경계에 노닐어
깨쳐 아는 자가 없어도
또한 스스로 칭찬하지 않으니
법신(法身)의 바라밀이네.
다시 온갖 부처님으로부터
공혜(空慧)의 한량없는 법을 받아
자연히 고제(苦際)를 다하니
일어나지 않음[不起]의 바라밀이네.
도는 평등의 지혜로부터
3유(有)의 상념에 물들지 않아
이로부터 신족을 얻으니
무아(無我)의 바라밀이네.
범하는 네 가지에 얽매고 집착하여
삼계의 환난을 여의지 못함을
생을 다하도록 다시 짓지 않으니
통혜(通慧)의 바라밀이네.
무앙수의 겁으로부터
정의(定意)를 교란하지 않고
뜻 또한 옮겨 바꾸지 않으니
본제(本際)의 바라밀이네.
신령한 지혜는 변제(邊際)가 없어
유(有)에 탐착함을 영원히 없애서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게 되니
적멸의 바라밀이네.
도의 지혜로 일곱 가지 품을 관하여
법계에는 들쑥날쑥함이 없고
일상(一相)은 볼 수 없으니
무형(無形)의 바라밀이네.
열반은 나고 멸함 없고
행하는 자취도 있는 바 없어서
능히 피차 속에서 여의니
수행(隨行)의 바라밀이네.
무명은 뭇 행의 근본이니
열두 바다를 유전하면서도
식(識)에 물들지 않음은
집착 없음의 바라밀이네.
이러한 4제(諦)는
갖가지 도의 과(果)를 낳고
4선(禪)을 말미암아 상념을 멸하니
정의(定意)의 바라밀이네.
여래의 여덟 가지 해탈은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서
현재의 번뇌를 능히 멸하니
근심 없음의 바라밀이네.
삼계에 의지해 머무르면서
번뇌를 짓지 않고
신통 지혜를 닦아 익힘은
쾌락의 바라밀이네.
머묾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며
또한 법의 성품도 헐지 않고
번뇌의 경계를 영영 없앰은
변함없음의 바라밀이네.
가령 색은 본래 색이 없는 것이어서
색의 성품은 항상 스스로 그러하니
3세의 고통을 요달해 알면
멸의(滅意)의 바라밀이네.
바깥의 번뇌[塵垢]를 받지 않고
정의(定意)에 다른 상념 없어
생이 다해도 다시 짓지 않음은
받음 없음[無受]의 바라밀이네.
변화를 나타냄이 무앙수이면서도
끝내 스스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도의 지혜에 세 가지 걸림 없음은
본제(本際)의 바라밀이네.
정(定)에 들어서 세 가지 상념 없애고
나ㆍ다른 사람ㆍ수명을 보지 않으며
믿음을 잡아서 치달리지 않음은
뭇 지혜의 바라밀이네.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법과
삼매의 성스러운 길의 관(觀)으로
고요히 한뜻[一意]을 멸함은
회래(懷來)의 바라밀이네.
도는 한량없는 법을 내고
이로부터 저기에 도달하게 되어
3세의 고통을 그윽이 요달함은
수락(受樂)의 바라밀이네.
나는 것은 큰 재앙이라
온갖 법계를 뚫어 새게 함을 알아서
하나를 버리고 물들어 집착하지 않음은
온갖 묘함[衆妙]의 바라밀이네.
자비의 네 가지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를 널리 윤택하게 해서
교화해 인도해도 존비(尊卑)가 없음은
큰 지혜의 바라밀이네.
4대(大)의 인연의 형상
그 체성(體性)은 옮길 수 없어
해탈문에 도달하고자 함은
세 가지 지향[三向]의 바라밀이네.
만일 겁이 모조리 타고자 하더라도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고
자연히 도의 힘에 통함은
상념 없음[無想]의 바라밀이네.
또한 스스로 생각을 내지 않고
약간의 상념을 분별하여
부처님의 지혜에 다함이 없음은
큰 바다[大海]의 바라밀이네.
공훈(功勳)은 뭇 행을 초월하고
본래의 업은 한량이 없어
하나도 없어서 하나를 보지 않음은
이군(離群)의 바라밀이네.
큰 서원으로 원(願)을 갖추고
몸의 형상 없음을 관해서
네 마군의 환란을 깨뜨려 부숨은
장엄(莊嚴)의 바라밀이네.
무념은 모든 법의 근본이고
열반은 고요하여 청정하니
여러 부처님의 노니시는 곳은
깊은 곳간[深藏]의 바라밀이네.
상 없음[無相]은 볼 수 없으니
하나부터 성불하기까지
마음의 근본법을 여의어 버리면
한뜻[一義]의 바라밀이네.
온갖 도과(道果)를 궁구해 다하여
세 가지 소굴이 있지 않아서
지혜의 비춤이 변제(邊際)가 없음은
근본 세움[立本]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는 온갖 어려움에도
함이 없어서 맑고 편안해
다섯 가지 번뇌 내지 않음은
총지의 바라밀이네.
한량없는 세계에 두루 노닐며
중생의 무리 교화하고
나고 죽음의 고통을 겪음은
괴로움 끊음의 바라밀이네.
현재에 어머니 포태(胞胎)에 처해도
실은 유(有)에 물들어 집착하지 않아
마음이 청정하기 허공과 같음은
근본 지혜의 바라밀이네.
과보 받을 것을 보지 않고
온갖 밝은 지혜를 과보로 증득하고
네 가지 도의 근본을 분별함은
닦아 지님[修持]의 바라밀이네.
본래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
법계는 불가사의해서
평등하여 두 마음이 없음은
넓은 지혜[廣慧]의 바라밀이네.
불법은 매우 깊고 묘하여
2승(乘)의 미칠 바가 아니고
한량없는 행을 초월함은
의심 없음의 바라밀이네.
먼저 그 안근(眼根)을 청정히 하고
마음의 근본 행을 깨끗이 닦아
보살이 도를 사모하여 미침은
청정한 뜻의 바라밀이네.
뜻을 금강처럼 잡고
청정하여 티와 더러움이 없어서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영영 여읨은
도과(道果)의 바라밀이네.
옛날 옛적의 여러 부처님
이 원길(元吉)의 나무에 앉으셔서
네 마군의 원수를 항복시킴은
참는 힘[忍力]의 바라밀이네.
신식(神識)은 허공에 두어
애초부터 화내는 마음 없고
또한 번뇌도 내지 않음은
초월의 바라밀이네.
신령한 힘은 한량없어
일체 모든 세계를 초월하고
또한 욕심에 집착하지 않음은
번뇌 없음[無垢]의 바라밀이네.
대저 공(空)을 궁구해 다하고자 하여
안을 깨끗이 하고 밖도 그렇게 해서
비상(非常)의 상념을 분별함은
인연의 바라밀이네.
광명이 여러 세계를 비추어
온갖 어두움을 없애버리고
약간의 상념도 일으키지 않음은
번뇌 끊음[斷垢]의 바라밀이네.
혜관(慧觀)에는 세 가지 법 있어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서
색(色)에 물들게 되지 않음은
지행(智行)의 바라밀이네.
설령 억천 겁으로부터
의지와 큰 서원의 마음으로
중생의 무리 보지 않음은
청정한 가르침의 바라밀이네.
여덟 가지 평등한 큰 도의 행으로
안팎으로 ‘나’라는 상념 없어서
부처님 세계, 법계가 청정함은
한량없음[無量]의 바라밀이네.
사람은 본래 그 행을 닦아
12인연을 뽑아버려서
탐욕을 없애고 유(有)에 집착하지 않음은
한뜻[一意]의 바라밀이네.
인도(人道)의 행을 닦고자 하여
몸ㆍ입ㆍ뜻 먼저 막아
열 가지 선이 뭇 행의 근본 됨은
법에 응함의 바라밀이네.
본래 어리석음 짓지 않아
근본이 존재하게 되니
열 가지 슬기와 한량없는 지(智)는
본무(本無)의 바라밀이네.
법계는 불가사의인데
두려움 없는 법을 성취하여
나고 죽음의 근본을 다함은
중담(重擔)의 바라밀이네.
부처님은 자비와 지혜가 평등하여
기르심에 높고 낮음이 없으며
오염된 마음 없애버림은
바람 없는[無望]의 바라밀이네.
대승의 뜻 발하여서
여러 장애를 대하여 제도하고
나고 죽음의 근본을 보지 않음은
멀리 여의는[遠離] 바라밀이네.
큰 서원으로 근고(勤苦)를 잡아서
온갖 정의(定意)를 유희하고
반복의 마음 항상 품음은
집착을 잊는[忘執] 바라밀이네.
중생의 평등한 지혜로
온갖 근본 모조리 알아서
티끌 욕심의 마음 품지 않음은
권혜(權慧)의 바라밀이네.
큰 도는 매우 묘한 것이라
번뇌와 욕심에 동요하지 않아
세 가지 공[三空]으로 본래의 뜻을 버림은
구경(究竟)의 바라밀이네.
이 현겁(賢劫) 가운데서
여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사
고통을 뽑고 세 가지 장애 없앰은
주선(周旋)의 바라밀이네.
몸으로 평등한 광명 놓아서
수없는 중생을 제도하시고
생겨남을 알아서 생겨남에 물들지 않음은
선우(善友)의 바라밀이네.
위없는 도를 이루고자
선지식을 친근히 해여
고통의 본제(本際)를 능히 다함은
다함없음[無盡]의 바라밀이네.
네 가지 길에 오가는 일 없고
무수한 겁에 수명이 머물면서
도의 근본을 궁구해 다함은
변함없음[無變]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을 궁구하여 다하고자
퇴전(退轉)의 마음을 품지 않고
용맹하고 굳건하여 헐 수 없음은
뜻을 세움[立志]의 바라밀이네.
보시를 행함에 애착하는 바 없고
또한 세 가지 상념을 내지 않아
본말이 모조리 스스로 공함은
해혜(解慧)의 바라밀이네.
도의 힘은 허공과 같아
5음의 몸 헤아리지 않아서
색은 본래 색이 있음이 아니니
청정의 바라밀이네.
남이 없음은 뭇 지혜의 근본
항상하다는 상념은 참이 아니고
교화 있음을 보지 않음은
지력(智力)의 바라밀이네.
지나간 세상 무수한 겁에
나와 같은 호칭의 부처님 있어
평등한 법의 근본 닦음은
형상 없음[無形]의 바라밀이네.
대변(大辯) 여래 나셔서
애착과 욕심의 번뇌 소멸하고
중생의 무리를 가르치심은
신근(信根)의 바라밀이네.
그 이름이 무애(無礙)이신 부처님
한량없는 겁을 고행하시고
뜻을 거두어 방일하지 않음은
계를 지킴[守戒]의 바라밀이네.
다음엔 이름이 홍서(弘誓)이신 부처님
교화하는 데 높고 낮음이 없어서
뜻이 허공처럼 평등함은
인욕(忍辱)의 바라밀이네.
그 이름이 대원(大原)이신 부처님
나고 죽음의 뿌리를 다 궁구해서
무수한 몸을 변화함은
은근(慇懃)의 바라밀이네.
도는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허공의 지혜를 보지 않으니
형상이 없어 볼 수 없음은
자비의 바라밀이네.
갱락(更樂)의 86가지는
보살이 닦아 행할 것으로서
3독(毒)의 근본이 없음은
일어나지 않음[不起]의 바라밀이네.
성현의 열여섯 가지 마음
모조리 있는 바 없음을 알아서
온갖 법계를 헐지 않음은
몸 없음[無身]의 바라밀이네.
한마음[一心], 한 생각[一念] 가운데
선정의 관(觀)을 여의지 않고
다시 한뜻으로부터 일어남은
상념 없음[無想]의 바라밀이네.
허공은 변제(邊際)가 없고
뜻이 고요해서 물들어 더러움 없듯이
하나를 버리고 하나에 집착하지 않음은
정의(定意)의 바라밀이네.
나는 본래 이 행에 응하여
고요하여서 상념이 없고
뜻을 쉰 곳에 나타나 있음은
걸림 없음[無礙]의 바라밀이네.
선정으로 스스로 뜻을 멸하고
청정한 관(觀)으로 세 상념 멸해서
도의 지혜 자연히 청정함은
제염(除染)의 바라밀이네.
부처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고
중생의 경계도 또한 그러해서
법의 성품이 자연히 고요함은
형상 없음[無形]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의 어려움 능히 제도하여
삼계의 고통을 생각지 않고
뜻을 참아서 상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맑고 고요함[澹泊]의 바라밀이네.
3세의 정의(定意)에 들어가서
모조리 중생의 뿌리를 알아
안팎의 몸을 스스로 관함은
원하는 것 없음[無願]의 바라밀이네.
8부(部)의 귀신 세계
저를 따라서 교화해
신족의 힘을 나타냄은
자취를 멸함[滅跡]의 바라밀이네.
착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르치되
본말의 공함을 여의지 않고
4무외(無畏)를 분별함은
무아(無我)의 바라밀이네.
안팎의 몸을 사유하고
공무혜(空無慧)를 분별하여
내가 있음을 관하지 않음은
법의 뜻[法意]의 바라밀이네.
태어나 성현을 만났음을 즐겨하고
여덟 가지 해탈에 집착한 바 없으며
뭇 상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여환(如幻)의 바라밀이네.
바른 법에 남녀 없고
뜻은 사념과 상념을 말미암아 나네.
깊은 법을 볼 수 없음은
오로(惡露)의 바라밀이네.
몸을 한량없는 형상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도로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도
능히 깨달아 아는 이가 없음은
신밀(身密)의 바라밀이네.
여래는 뭇 상호를 갖추어
색신(色身)이 세간에 노니시면서
신족으로 교화하심은
의지함 없음[無猗]의 바라밀이네.
범부는 배움에 들어가지 못하여
안팎의 몸을 관하지 못하니
성현의 지혜 매우 깊고 묘함은
상호(相好)의 바라밀이네.
본래 신족으로부터 일어나
뜻의 법에 높고 낮음 없어
보살의 형상 없는 관(觀)은
안락(安樂)의 바라밀이네.
선정(禪定)은 생각의 기다림 없어서
마음을 쉬어서 집착한 바 없으니
여덟 가지 해탈의 연못에 노니는 것은
지성(至誠)의 바라밀이네.
사람은 다섯 가지 고통의 법 알아
무위(無爲)의 도를 우러러 닦으니
6신통의 무루법[法無漏]은
성현의 바라밀이네.
신통으로 세간에 노닐며
성현의 율(律)을 항상 익혀서
안팎의 법을 보지 않음은
이름 없음[無名]의 바라밀이네.
행을 익혀서 교만함이 없고
뒤바뀐 마음 품지 않으며
온갖 결박을 일으키지 않음은
더러움 없음[無穢]의 바라밀이네.
만일 다시 죽은 송장을 보아도
깨끗함과 깨끗지 못함 분별하지 않고
안팎으로 집착한 바 없음은
아만 없음[無慢]의 바라밀이네.
위의(威儀)를 법률에 맞게 하고
거동을 망령되게 아니하며
뭇 지혜로 스스로 호위함은
대함 없음[無對]의 바라밀이네.
몸 없음을 도의 요체로 삼고
티끌에 물들지 않아서
앉으나 누우나 마음이 항상 정(定)함은
스스로 지킴[自守]의 바라밀이네.
성인이 세속을 불쌍히 생각하여
감로의 법을 비처럼 내려주고
한량없는 지혜를 펴서 창달함은
교화를 받음의 바라밀이네.
널리 보시함은 은혜가 많고
각관(覺觀)으로 마음의 근본 없애
고통의 환난 덜어 없앰은
덤벼 싸움[挌戰]의 바라밀이네.
마음으로 한량없는 법 생각하고
한량없는 변화를 나타내 보여서
신통 지혜의 근본을 찾아 생각함은
용맹하고 힘찬[奮迅] 바라밀이네.
안의 법에 생각하는 바 없지만
항상 바깥 티끌에 물들게 되니
저 무생(無生)의 지혜로써 함은
종원(從願)의 바라밀이네.
뭇 정(定)으로 스스로 영락하고
안식(眼識)은 상념을 일으키지 않아
저도 또한 스스로 있지 않으니
옮김 없음[無移]의 바라밀이네.
뭇 지혜를 닦아 익혀서
해탈바라밀의 지견(知見)으로
불사(不死)의 장(漿)을 마시고자 함은
감로(甘露)의 바라밀이네.
청정한 관(觀)으로 탐착(貪着)함이 없고
지혜바라밀도 공하여 다름이 없어
네 가지 도과(道果)를 분별함은
유전(流轉)의 바라밀이네.
마치 어떤 사내가
감내하면서 수고로움을 받는 것처럼
마음 지혜에 티끌의 물듦이 없음은
염원을 따르는[隨願] 바라밀이네.
모습마다 각각 과보가 있어도
행이 있고 법이 있음은 아니어서
네 가지 선의 행을 초월함은
생진(生盡)의 바라밀이네.
전생에 본행을 말미암아
남에게 화내고 노하는 일 없어
자연히 8난(難)을 여의는 것은
초월의 바라밀이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바
모임에는 이별이 있어
성인의 큰 서원의 마음이 아님은
분별의 바라밀이네.
무(無)로써 본유(本有)를 비추어
밖이 없음을 사무치게 보아서
형상의 누(累)가 자연히 멸함은
봄이 없는[無見] 바라밀이네.
허공계에 나아감이
빨라서 걸리는 바 없고
중간의 법 생각하지 않음은
율에 응하는[應律] 바라밀이네.
근본을 요달하면 한 법도 없으나
지취(志趣)는 각각 다르니
세상에 따라 그 색을 물들임은
결박을 푸는[解縛] 바라밀이네.
3독(毒)의 근본을 분별하면
행이 다해서 곧 행에 응하여
본래 나의 것 아님을 알면
신본(身本)의 바라밀이네.
마음으로 노닐어 자재함을 얻어
욕망을 불타는 것처럼 관해서
5도(道)를 소멸해 없앰은
청량(淸凉)의 바라밀이네.
무원(無願)은 3유(有)에 있으면서
다섯 가지 욕심의 법을 탐내어 집착하니
여덟 무간지옥을 영원히 여읨은
말씀[言說]의 바라밀이네.
일어나고 멸함이 정해짐이 없고
총지(摠持)로 잊지 않아서
온갖 지혜가 족함은
널리 들음[博聞]의 바라밀이네.
지혜를 받음에 네 가지 품이 있어
남은 깨닫지만 스스로는 모르니
이를 반연하여 7공(空)에 미침은
재빠름[捷疾]의 바라밀이네.
부처님 도는 궁진(窮盡)하기 어려워
마음으로 능히 헤아릴 바 아니로되
도관(道觀) 없음을 다 아는 것은
7각(覺)의 바라밀이네.
서른일곱 가지의
여래의 성도(聖道)의 길을 분별하여
한뜻으로 상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명신(名身)의 바라밀이네.
멀고 가까운 법을 감싸서 알고
걸림 없는 도를 생각하지 않아
열 가지 명호가 하나하나 다름은
수 없음[無數]의 바라밀이네.
깊고 요긴한 법 강설해 주고
마음은 겁내고 약함을 품지 않아서
무상(無相)을 원하고 구하지 않음은
지력(智力)의 바라밀이네.
올바른 8등혜(等慧)에 들어
공(空)한 성품의 행을 헐지 않고
속으로 법을 스스로 사유함은
과에 이르는[逮果] 바라밀이네.
명색(名色)이 약간 변함에
애착으로 번뇌의 병에 들어서
본래 없음에 능히 도달하지 않음은
잘 살핌[善察]의 바라밀이네.
열 가지 법은 공하여 변함없고
의념(意念)은 상념을 얽매고 집착하여
밖에서 들어옴을 생각하지 않음은
한제(限齊)의 바라밀이네.
세상의 괴로운 사람을 연민하여
근심하고 걱정함을 끝없이 하여
그들을 위하여 권도 방편을 세움은
교화를 나타내는[現化] 바라밀이네.
마음이 굳건하기 금강과 같아
유위(有爲)에게 결코 헐리지 않고
감로의 법으로 물을 대줌은
깊고 요긴함[深要]의 바라밀이네.
본래 허공의 지혜로 인하여
해탈하여 걸림이 없으니
지혜의 밝음으로 번뇌를 버림은
보고 들음[見聞]의 바라밀이네.
성현의 법률 받들 줄 알고
계(戒)ㆍ문(聞)ㆍ혜(慧)ㆍ정(定)의 마음으로
도의 의지가 강함은
빠트림 없는[無闕] 바라밀이네.
몸이 본래 형상 없는 줄 알아서
생사의 법을 조리고 볶아서
맑고 고요하여 공적함에 돌아감은
결박을 푸는[解縛] 바라밀이네.
지혜 있는 이 세속의 변함에 따르되
끝내 갱락(更樂)에 집착하지 않으며
맺힘을 풀어 괴로움의 근본 끊음은
높고 으뜸가는[尊上] 바라밀이네.
사람 가운데 세상의 영웅이신 스승님
한량없는 세상을 지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속임을 품지 않음은
말로 응하는[言應] 바라밀이네.
마음으로 불가사의를 생각하고
깊은 법장을 궁구하여 다하며
여래의 경계를 분별함은
도각(道覺)의 바라밀이네.
여래의 열 가지 글귀의 뜻은
각각 형상이 없고
고요하여서 음성이 없음은
수결(授決)의 바라밀이네.
공하여 형상 없다고 몸을 관하여
청정하여서 물든 바 없어
본래 없는 법을 증장하는 것은
행이 다함[行盡]의 바라밀이네.
여래께서 수기를 주어서
여여(如如)하여 변하고 바뀜이 없어
나고 멸함의 근본을 보지 않음은
본래 청정[本淨]의 바라밀이네.
정각(正覺)의 가르치시는 바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모두 덮어주고 보호받게 함은
비할 바 없는[無比] 바라밀이네.
사람을 위하여 다리를 만들고
온갖 법을 궁구하여 다하며
점점 깊은 곳간에 들어감은
괴로움 여의는[離苦] 바라밀이네.
중생의 무리를 교화하여
법의 경계를 여의지 않고
도량에 나아감은
스스로 지킴[自守]의 바라밀이네.
중생이 돌아가 나아갈 바는
도의 문으로 모두 향함이니
뭇 지(智)와 자재한 슬기는
걱정 없음[無患]의 바라밀이네.
세상과 함께 횃불 광명을 만들고
중생을 위하여 눈을 만들어
돌아가 나아갈 바를 알게 함은
큰 도[大道]의 바라밀이네.
10력(力)이 세상에 출현하신 바는
근심과 괴로움을 근절시켜 주심이니
지혜로 여러 유(有)를 허는 것은
신령한 슬기[神慧]의 바라밀이네.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즐겁게 있으면서
본래 행한 바를 닦아 익히고
중생에게 능히 변화해 나타남은
지름길[徑路]의 바라밀이네.
한량없는 겁 가운데서
괴로움을 지켜서 괴로움을 버리지 않아
열 가지 법의 보배를 갖춤은
여읨 없음[無離]의 바라밀이네.
관정(觀定)은 허공과 같이
널리 능히 비추는 데 있으니
스스로 관하고 다시 저를 관함은
평등한 성품[等性]의 바라밀이네.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관해서
뭇 지혜로 스스로 영락하고
시방세계에 두루 노니는 것은
고요함[寂然]의 바라밀이네.
다시 한량없는 법을
여래께서 펴서 창달하시어
비법(非法)의 근본을 소멸함은
굳건함[牢固]의 바라밀이네.
중생이 교화 받음에 응하여서
법을 들으면 문득 깨치게 되니
이들 전생의 식이 날카로움은
재빠름[捷疾]의 바라밀이네.
온갖 여러 법의 근본은
있음도 아니요 또한 없음도 아니어서
도가 무상(無想)으로부터 나옴은
여덟 가지 법의 바라밀이네.
지혜가 한량없음을 비춤이
마치 사자의 두려움 없음과 같아
무상(無常)한 법을 관하여 봄은
무생(無生)의 바라밀이네.
법을 설하여서 설함이 있지 않고
사람을 제도하되 제도함이 있지 않은 채
훌륭한 방편으로 백겁을 지남은
물듦 없음[無染]의 바라밀이네.
사라지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으면서
온갖 사람에게 비추고
여래의 지혜를 펴서 창달함은
욕심 없음[無欲]의 바라밀이네.
법을 설해서 법의 상념 없어서
나와 남을 보지 않으며
큰 자비로 유무(有無)를 제도함은
전륜(轉輪)의 바라밀이네.
뭇 새들이 연못 가운데의
푸른 연꽃과 부용꽃 사이에서 즐기듯
선적(禪寂)이 상념을 영원히 없앰은
일 없음[無事]의 바라밀이네.
법을 설함에 세 가지 일 있으니
그 본말의 공함을 없애어
이 한량없는 세계를 제도함은
의지함이 없는[無猗] 바라밀이네.
사람의 근원을 생각해 살피고
저의 마음과 식과 뜻을 관해서
보살의 서원을 여의지 않음은
필경(畢竟)의 바라밀이네.
때를 따라 방편을 행하고
괴로움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아서
늘고 주는 뜻을 영원히 버림은
여법(如法)의 바라밀이네.
환술(幻術)이 안식에 집착하여
출생이 있음을 보지 않으니
이식(耳識)이 저 소리를 들음은
공을 이해하는[解空]의 바라밀이네.
만일 저 솜씨 좋은 요술쟁이가
갖가지 음식을 화현해 내어도
비식(鼻識)으로 분별함은
향훈(香薰)의 바라밀이네.
가령 화현으로 지은 것은
그 뜻이 불가사의하나
궁구하여 다함을 얻고자 함은
미식(味識)의 바라밀이네.
본래 갱락(更樂)을 지어서
몸으로 온갖 법의 근본을 상념하고
뜻을 거두어 자연히 엎드림은
권현(權現)의 바라밀이네.
청정한 음향으로써
시방세계를 두루하고
계와 덕의 향도 그러하니
범함이 없는[無犯] 바라밀이네.
환술(幻術)은 진실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이들을 속이고 미혹하니
진실한 법으로 인도하여 이끄는 것은
진제(眞際)의 바라밀이네.
중생의 뿌리를 찾아도
성인이 아니면 능히 헤아릴 수 없으니
대성인(大聖人)을 권화(權化)함은
교법을 세움[立敎]의 바라밀이네.
청정하기 연꽃과 같아
끝내 티끌과 때를 받지 않고
뭇 행의 밖으로 차례를 초월함은
뜻을 잡음[撿意]의 바라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