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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7권
12.5. 권속연(眷屬緣)
『수마제장자경(須摩提長者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사위성(舍衛城)에 어떤 큰 장자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수마제(須摩提)였다.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치자 부모와 종친(宗親), 그리고 여러 지식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울부짖어 통곡하고 슬퍼하며 땅에서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원망하며 크게 부르짖기도 하다가 기절하여 땅에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혹은 부모와 형제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남편과 주인을 부르는 사람도 있어서 이와 같이 온갖 형태로 울부짖고 통곡하였다.
또 어떤 이는 흙을 파다가 스스로 뒤집어 쓰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칼을 가져다가 그 머리털을 자르기도 하였는데,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의 심장에 독화살이 꽂혀 한량없이 고뇌(苦惱)하는 것과 같았다.
혹 어떤 이는 옷을 스스로 뒤집어 쓰고 슬피 우는 모습이
비유하면 마치 큰 바람이 나무에 불어닥쳐 나무 가지가 서로 부딪치는 것과도 같았고,
또는 물을 잃은 고기가 완전히 맨땅에 eld구는 것과도 같았으며,
또는 베어진 큰 나무가 쓰러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뒹구는 것과도 갚았다.
그들은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일들을 그들의 몸에 가하고 있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아시면서도 일부러 아난에게 물으셨다.
‘저 모든 대중들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도 슬피 울부짖느냐?’
아난이 자세히 갖추어 부처님께 아뢰었다.
‘다만 바라옵건대 세존이시여, 저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주십시오.
모든 불ㆍ세존께서는 요청이 없다고 해서 설법하시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 저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불ㆍ세존께 권유하고 청하옵니다. 부디 큰 자비로서 저곳으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여래께서 아난의 청을 받아들이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이 때 저 모든 사람들은 멀리서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각각 손으로 얼굴을 닦고 앞에까지 나와 부처님을 맞이하였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이르시자 머리와 얼굴을 부처님 발에 대어 예를 올리고 슬픔에 목이 메어 말소리조차 내지 못하였다.
바로 길게 탄식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감히 한숨도 쉬지 못하고 목이 쉬고 기가 막혀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장자의 부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무슨 까닭에 슬피 울고 괴로워하면서 이 허깨비 같은 법에 집착하고 있는가?’
이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말소리를 내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성 안에는 오직 이 사람뿐이었습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단정하고 빼어나며 미묘하였습니다. 나이가 점점 장성해질수록 여러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었습니다.
게다가 재물과 보배까지 많아서 창고마다 넘쳐 흘렀고 수레ㆍ말ㆍ의복ㆍ노비ㆍ하인 등 이와 같은 것들도 다 갖추어져서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목숨을 마쳤으니, 그런 까닭에 저희들이 슬피 울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훌륭하신 세존이시여, 부디 저희들을 위하여 방편을 설법해 주시어 모든 번뇌를 여의게 하여 주시고, 지금 이후부터는 또다시 이와 같은 온갖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 세존께서 장자의 부모와 종친, 그리고 친구와 여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지금껏 이 세상에 살면서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여러 사람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여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만약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고ㆍ근심하고ㆍ슬퍼하고ㆍ괴로워하고 고뇌스러워 하는 일을 여의고자 하거든
다시는 이 은애(恩愛)의 맛줄에 묶이지 말고 마음을 바른 소견에 두고 삼보에 귀명(歸命)하여라. 왜냐 하면 이 세간에는 부처보다 더 뛰어난 이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눈 멀고 어리석은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나니,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것은 곧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또 『법구유경(法句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도를 배울 때부터 예순 살까지 수도했으나 도를 이루지 못했다. 바라문법(婆羅門法)을 가지고 예순 살까지도 도를 증득하지 못했으므로 그 후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얻어 속가에 살면서 한 사내아이를 낳있다.
그 아이는 단정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나이 일곱 살이 되어서는 글씨를 제법 잘 썼고, 배움에 있어서는 총명했으며 변재까지 있어서 그의 말솜씨는 남들보다 뛰어났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한 병을 얻어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마쳤다. 범지(梵志)는 슬픔과 애석함을 스스로 이겨낼 수 없어서 그 시체 위에 엎드려 기절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친족들은 그를 달래고 타이르면서 시체를 뺏다시피 하여 성 밖으로 내다가 매장하였다.
범지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이렇게 통곡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염라왕에게 가서 아이의 목숨을 빌어보는 것이 낫겠다.〉
그리하여 범지는 목욕 재계한 다음 향과 꽃을 싸가지고 집을 떠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에게 물었다.
‘염라왕이 다스리는 관청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이렇게 전전하여 앞으로 수천 리를 가서 어떤 깊은 산 속에 이르러 도를 증득한 여러 범지들을 보고 다시 앞에서와 같이 물었다.
그러자 모든 범지들이 되물었다.
‘그대는 염라왕이 다스리고 있는 관청을 묻는데 거기에 가서 무엇을 구하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저에겐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말재주와 지혜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 아이가 갑자기 죽어 그 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풀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염라왕에게 가서 아이 목숨을 벌어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잘 길러가지고 늙음에 대비할까 해서입니다.’
여러 범지들이 그의 어리석을을 가엾이 여겨 곧 그에게 말하였다.
‘염라왕이 다스리는 곳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사백여 리를 가면 큰 냇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 큰 성이 있습니다. 그곳은 모든 천신(天神)들이 세간을 안행(案行:살펴봄)하면서 머물러 쉬는 성입니다.
염라왕은 항상 사윌 초나흩날이면 세상을 순찰하는데 틀림없이 그 때 이 성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재계하고 그곳에 가면 꼭 볼 수 있을 것업니다.’
그러자 범지가 기뻐하면서 가르침을 받들고 떠나갔다. 그 냇가에 이르자 좋은 성곽이 보였는데, 그 궁전과 집들은 모두 도리천(忉利天)과 같았다.
범지가 그 성문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발돋움하고 서서 주원(呪願)하며 염라왕 만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염라왕이 문지기를 시켜 불러들여 보았다.
범지가 말하였다.
‘늦게야 아들을 낳아 이 아들로서 노년을 대비하려고 일곱 살까지 양육하였었는데 며칠 전에 목숨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어 제 아이의 목숨을 돌려 주시옵소서.’
염라왕이 말하였다.
‘그대의 요구는 참으로 훌륭하다. 경의 아이는 지금 동쪽에 있는 동산에서 놀고 있다. 몸소 가서 데리고 가라.’
범지가 곧 그 동산으로 가서 자기 아이가 여러 어린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곧 앞으로 다가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말하였다.
‘내가 밤낮없이 너를 생각하느라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고 잠을 자도 단잠을 자지 못했다. 너는 어째서 부모의 극심한 고통[辛苦]을 조금도 생각지 않았단 말이냐?’
그러자 어린아이는 놀리면서도 도리어 꾸짖으며 말하였다.
‘어리석고 우둔한 노인이 도리를 알지 못해 잠깐동안 붙어 살던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는군요. 망령되이 잔소리 하지 마시고 빨리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지금 저에겐 이 세간에 다른 부모가 계십니다. 우연히 잠깐 만난 사이에 공연히 나를 껴안으려 하지 마십시오.’
범지는 구슬픈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 오면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구담(瞿曇) 사문이 사람의 혼신(魂神)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잘 안다고 하니, 꼭 가서 물어보아야겠다.〉
이에 범지는 곧바로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갔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원(祇洹)정사에서 대중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계셨다.
범지는 부처님을 법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뒤에 지금까지의 사연을 갖추어 부처님께 자세히 아뢰었다.
‘이 아이는 진실로 내 아들이었는데, 그 이름조차 불리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저를 보고 말하였습니다.
〈어리석고 우둔한 노인이 잠깐 동안 붙어 살던 나를 제 아들로 인식하는군요.〉
이렇게 하면서 부자간의 정이라곤 조금도 없었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진실로 어리석구려. 사람이 죽으면 혼이 떠나 문득 다른 몸을 받고서 부모와 처자의 인연으로 함께 모여 살게 되는데, 비유하면 그것은 마치 나그네가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오.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들이 거기에 묶이고 집착하여 자기의 소유리고 헤아리기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고뇌(苦惱)하는 것이라오.
본래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나고 죽음에 빠져서 마침내 휴식하지 못하는 것이라오.
다만 슬기로운 사람은 은애(恩愛)를 탐하지 않아서 괴로움의 이치를 깨닫고 습기를 버리고는 경계(經戒)를 부지런히 닦고 식상(識想)을 없애어 나고 죽음이 끝나게 되는 것이라오.’
범지가 그 말을 듣고 난 뒤에 마음으로 확실하게 이해하여 곧 앉은 자리에서 아라한도를 증득하였다.”
또 『대법거경(大法炬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들은 다 그 형상의 종류를 따라 이름이 있으니, 마치 참새 따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저 아귀(餓鬼) 중생 같은 것들은 어떻게 결정된 저마다 다른 이름이 없다.
하늘을 결정코 하늘이라거나 사람을 결정코 사람이라거나 아귀를 결정코 아귀라고 말하지 말라.
가령 한 가지 일에 갖가지 이름이 있고 한 사람에게 갖가지 이름이 있듯이, 하나의 천상에서부터 나아가 아귀나 축생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름이 있는 것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아귀가 있지만 전혀 아무런 이름이 없기도 하나, 한 번 손가락을 튀기는 동안에도 그 신체(身體)가 변하여 갖가지 형상이 되거늘 어떻게 그 이름을 다 부를 수 있겠느냐?
그 가운데서 악한 업의 인연이 다하지 않기 때문에 한 생각 종에도 갖가지 몸으로 변하느니라.’
또 『법구유경(法句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사위국에서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계셨다.
그 때 그 성 안에 어떤 바라문 장자가 있었는데, 그는 재물 넉넉하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사람됨이 인색하고 탐욕이 많아 보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밥 먹을 때면 문을 닫고서 손님이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만약 음식을 먹을 때면 문득 문지기에게 명하여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어떤 사람이든 문 안에 함부로 들어와서 음식을 구걸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때 장자는 갑자기 맛있는 음식 생각이 나서 곧 그 아내를 시켜 밥을 짓고 살찐 닭을 잡아 생강과 후추를 고루 섞어 푹 삶게 하였다.
그 음식을 차려 놓은 뒤에는 바깥 문을 닫아 걸고 두 부부가 앉아 아이를 자리 가운데 앉히고 곧 함께 먹기 시작했다. 부모는 닭고기를 뜯어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숱하게 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이 장자가 전생에 복을 지있으므로 제도할 수 있음을 아시고 곧 사문으로 변화하여 그들이 음식 먹는 자리를 엿보다가 그들의 자리에 나타나시어 곧 축원해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다소나마 보시하면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장자는 머리를 들어 변화한 이 사문을 보고 곧 꾸짖었다.
‘당신은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도 없소?
가족끼리 한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데 어찌 그리도 당돌하시오?’
사문이 대답하였다.
‘경이야말로 스스로 어리석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구려. 지금 나는 걸사(乞士)인데 무엇이 부끄럽겠소?’
장자가 물었다.
‘내가 우리 가족과 함께 즐기는데 무슨 까닭에 부끄러워 하겠소?’
사문이 대답하였다.
‘경(卿)은 아버지와 아내와 어머니를 죽여 원수의 집에 공양하면서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고 도리어 걸사를 보고
〈왜 부끄러워하지도 않느냐?〉고 나무라는구려.’
그 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에게 생긴 가지가 끊어지지 않고
다만 음식만을 탐하여 욕심내는구나.
원수를 길러 무덤 늘리는 것에만
어리석은 사람은 급급해 하는구나.
아무리 감옥에 자물쇠를 채워도
지혜 있는 사람은 감옥이라 하지 않건만
어리석은 사람은 처자의 꾸밈새를 보고도
깊이 집착하나니 그 애욕이야말로 감옥인 것을.
슬기로운 사람은 애욕을 감옥이라 말하나니
너무도 굳고 굳어 벗어나가 어렵다네.
그런 까닭에 그것을 끊어버려야 하나니
애욕에만 빠지지 않으면 편안해질 수 있으리.
장자가 이 게송을 듣고 놀리면서 붙었다.
‘도인은 무슨 까닭에 이런 말을 하시오?’
대답하였다.
‘지금 그 상 위에 차려놓은 닭고기는 바로 경의 전생에 아버지라오.
그는 인색하고 탐욕이 많았기 때문에 늘 닭으로 태어나서 경에게 잡혀 먹혔으며, 이 아이가 전생에 나찰이었을 때 그대는 큰 장사꾼으로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나찰국 속에 떨어져 그 나찰을 위한 먹이가 되었었소.
이와 같이 오백 생을 거듭해오다가 목숨을 마치고 지금은 그대의 아들이 된 것이오.
그런데 경은 남은 죄가 아직 다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도 서로 해치려고 할 뿐이오. 지금 이 아내는 전생에 경의 어머니로서 은애(恩愛)가 너무 견고했가 때문에 지금 다시 경의 아내가 된 것이오.
그런데도 경은 어리석어서 전생일을 알지 못한 채 아비를 죽여 원수를 가르며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것이오.
다섯 갈래 세계에 나고 죽음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다섯 갈래 세계를 골고루 돌아다니거니와 이러한 사실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리.
오직 도인만은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그 때 장자는 너무도 부끄럽고 놀라운 듯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두려워하는 형상이 역력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위신(威神)을 나타내어 그로 하여금 전생의 일을 알게 하였다.
그랬더니 장자는 부처님을 뵙고 곧 전생의 일을 알고 난 뒤에 참회하여 사과하고 이내 다섯 가지 계를 받았다.
부처님께서 다시 그를 위해 설법하시자 수다윈도(須陀洹道)를 얻었다.”
또 『불설장자자오뇌삼처경(佛說長者子懊惱三處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사위성에 어떤 대부호인 장자가 있었다.
그는 재물과 보배가 수없이 많았지만 집안에 친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은 뒤에 그 재물을 관가에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기도하고 삼보(三寶)에 귀명(歸命)하여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곧 임신하게 되었다.
부인은 총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인이 해야 할 다섯 가지 일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첫째는 남편의 마음을 잘 알고,
둘째는 남편이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잘 알며,
셋째는 임신한 원인을 잘 알고,
넷째는 그 아이가 사내인지 여자인지를 알며,
다섯째는 선한지 악한지를 잘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이 여인이 장자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미 아이를 가졌습니다.’
장자는 기뻐했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다섯 유모(乳母)를 데려다가 공양하고 안아 기르게 하였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자 좋은 여인을 찾아 결혼시켰다.
그 아들 부부는 동산 숲으로 놀라 나가 무우(無憂)라는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의 꽃색깔은 선명하고 희었으며 솜처럼 부드럽고 붉은 비단 빛 같았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저 꽃을 가지고 싶습니다.’
남편은 곧 그 꽃을 꺾기 위하여 나무 위로 올라갔다가 연약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만 떨어져서 죽고 말았다.
부모가 그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아들의 머리를 끌어안고 어루만지면서 자세히 들여다 보았으나 아들의 숨은 아주 끊어져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부모는 슬프고 애통하여 오장이 다 끊어지는 듯하였으며, 여러 손님들도 이것을 보고 대신 애통(哀痛)해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그 외아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셨다.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음이 있고 사물은 이루어지면 무너짐이 있으며, 과보가 닥치면 목숨이 다하는 것은 피하거나 숨길 수 없는 것이니 버리고 간 것을 다시 근심하고 슬퍼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다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본래 도리천(忉利天)에 살고 있다가 거기에서 수명이 다하자 그대의 집에 와서 태어났고 그대의 집에서 목숨이 다한 뒤에는 이내 용으로 태어나 금시조(金翅鳥)왕에게 곧 잡아먹힐 것이니,
그 때는 세 곳의 부모가 한꺼번에 와서 함께 통곡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과연 누구의 아들이겠느냐?’
부처님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천상에 있는 저 모든 천자(天子)들을
다 경(卿)의 아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저 모든 용들 속에 있다고 하여
그를 용신(龍神)의 아들이라 하겠는가?
부처는 그 때 일을 스스로 알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하늘의 아들도 아니요
그렇다고 하여 그대의 아들도 아니며
또한 모든 용들의 아들도 아니나라.
나고 죽는 저 모든 인연들은
무상(無常)하기 마치 허깨비와 같아
일체가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
비유하면 지나가는 손님과 같다.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이미 가버린 것은 쫓아갈 수 없는 것이니라.’
장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아이는 전생에 지은 죄와 복이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전생에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기뻐하여 남에게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복덕의 인연으로 권세 있고 부유한 가문에 태어났던 것이고, 또 사냥을 좋아하여 상해(傷害)하였기 때문에 그 몸의 수명이 짧았던 것이니, 죄와 복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느니라.’
그러자 장자는 기뻐 날뛰면서 법인(法忍)을 증득하였다.”
12.6. 이착연(離著緣)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정이란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ㆍ수레ㆍ말 따위가 늘어나기를 탐하고 갈구하되 만족할 줄 모르는 곳이다.
가정은 곧 채우기 어려운 곳이라 마치 바다가 모든 냇물을 삼키는 것과 같고,
가정은 곧 만족할 줄 모르는 곳이라 마치 불이 땔감을 태우는 것과 같다.
가정은 곧 쉽이 없어서 각(覺)과 관(觀)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요,
가정은 괴로운 성질이라 원수가 친한 이를 속이는 것과 같으며,
가정은 곧 장애하는 곳이라서 성인의 도를 방해하고,
가정은 곧 싸움으로 혼란한 곳이어서 서로 어기고 다투며,
가정이란 곧 성냄이 많아 항상 좋다 추하다 하며 꾸짖는 곳이다.
가정은 곧 덧없는 곳이라서 아무리 오래 지속하려고 해도 잃거나 무너지고,
가정은 곧 온갖 고통이 있는 곳이라서 애써 구하고 수호해야 하며,
가정은 곧 의심이 많은 곳이라서 마치 원수나 도적 같고,
가정은 곧 뒤바뀐 곳이라서 거짓 이름을 탐하고 집착하며,
가정이란 곧 기인(奇人)과 같은 곳이라서 갖가지로 부질없이 꾸미는 곳이요,
가정이란 곧 변하고 달라지는 곳이라서 만났다가는 반드시 헤어져 흩어지는 곳이며,
가정이란 곧 거짓이며 임시로 벌린 곳이라서 한 일이 없고,
가정이란 곧 잠과 꿈 같아서 부하거나 귀함도 금새 잃는 곳이며,
가정이란 마치 아침 이슬과 같아서 잠깐 사이에 변하여 사라지고,
가정은 마치 꿀물 방울과 같아서 그 맛이 매우 작은 곳이며,
가정이란 가시덤불과 같아서 사람을 찌르고 상하게 하는 곳이고,
가정은 마치 쇠벌레와 같아서 각(覺)과 관(觀)이 항상 쪼아먹는 곳이다.
이와 같은 따위의 근심거리는 이루 다 갖추어 기록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속가에 있는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하여 그 가정의 허물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가정에 있는 처자ㆍ권속ㆍ노비ㆍ재물 따위는 나를 구제하지도 못하고 내가 돌아가 의지할 곳도 되지 못하며 나의 좋은 친구도 아니니, 그런 까닭에 마땅히 하루 속히 여의고 버려야 하느니라.
또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일체 중생들은 여섯 갈래 세계에서 서로 아비와 아들 사이가 되었거늘 친하고 소원함이 어찌 정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저 무명이 지혜로운 광명을 가려
자주자주 나고 죽는 가운데를
가고 오며 갖가지 일을 지어
다시 서로 아비가 되고 자식이 되네.
세간의 즐거움을 탐하고 집착하여
보다 훌륭한 일이 있는 줄을 모르고
원수를 자주 벗[知識]이라 생각하며
친한 벗을 자주 원수라고 생각하네.
그런 까닭에 나의 가르침에 의하여
부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 내지 말라.
만약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 내면
진실한 법을 통달할 수 없느니라.”
또 『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大乘菩薩藏正法經)』에서 말하였다.
“사리자(舍利子)야, 만약 어떤 중생이 아들ㆍ말ㆍ아내ㆍ첩 등 모든 여자에 대한 색욕(色慾)에 맛들이면
곧 그것은 조약돌 같은 우박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요,
곧 그것은 예리한 칼날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매우 뜨거운 쇠탄환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뜨거운 쇠평상에 앉는 것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뜨거운 쇠의자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약 화만(華鬘)과 향을 바르는 것에 맛들이거나 집착하면
이것은 곧 뜨거운 쇠화만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요, 또한 똥과 오줌을 몸에 바르는 것에 맛들이고 집착하는 것이니라.
사라자야, 만약 거처하는 집을 거두어 받아들이면
이것은 매우 뜨거운 쇠독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노비(奴婢)와 하인을 거두어 받아들이면
그것은 곧 지옥의 악한 나졸들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또 코끼리ㆍ말ㆍ낙타ㆍ나귀ㆍ소ㆍ양ㆍ닭ㆍ돼지 따위를 거두어 받아둘이면
그것은 지옥 가운데 검고 얼룩진 돼지와 개를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또 이것은 일백 유선나(踰繕那)에 뻗친 금위(禁衛)의 졸개들을 거두는 것이니,
그 요점을 취하여 말하면 만약 아내ㆍ첩ㆍ아들ㆍ딸 등과 모든 여색의 애욕을 섭수(攝受)하는 것은
곧 일체의 온갖 괴로움ㆍ근심ㆍ수심ㆍ슬픔ㆍ번뇌의 무더기를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차라리 일천 유선나의 양(量)만한 매우 뜨거운 쇠평상이나 극히 뜨거우면서도 두루두루 뜨겁게 훨훨 타오르는 불꽃에 의지하고 붙을지언정 부모가 준 처첩(妻妾) 등 모든 여색을 탐하는 것과 나아가서는 더러운 애욕의 마음으로써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바라보지 말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그것들을 친근히 하여 껴안아서야 되겠느냐?
왜냐 하면 사리자야,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부녀자란 바로 숱한 괴로움의 근본이요, 이것은 장애의 근본이며, 이것은 살해(殺害)의 근본이요, 이것은 계박(繫縛)의 근본이며, 이것은 근심과 시름의 근본이며, 이것은 원수가 되는 근본이며, 이것은 생맹(生盲)의 근본이기 때문이니라.
또 부녀자란 거룩한 지혜의 눈을 멸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부녀자란 뜨거운 쇠꽃을 땅에 펴놓고 발로 그 위를 밟는 것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부녀자란 모든 삿된 성질을 유포(流布)하고 증장(增長)시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무슨 인연 때문에 부녀자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부녀자란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요,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게 하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고 두루 돌아다니게 하기 때문이요,
중생들로 하여금 이 무거운 짐 때문에 마음을 피곤하게 하고 괴롭게 하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들볶아 급박하게 만들기 때문이요,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상해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또 무슨 인연 때문에 부녀자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부녀자란, 모든 중생들이 운반해다가 맏기는 곳이요,
이는 탐애의 노예가 되어 떠돌다가 빠지는 곳이며,
이는 여자에게 순종하는 이가 세금을 실어 다 바치는 곳이요,
이 아리따운 여인은 중생이 미혹하는 곳이며,
이 부녀자가 뛰어나면 중생들이 돌아가 몸을 던지는 곳이요,
이 부녀자에게 굴복하는 사람에게는 방탕한 데 빠지는 곳이 되며,
부녀자의 노예가 된 자에게는 피곤하고 괴로운 곳이 되고
부녀자를 따라 전전하는 자에게는 몸을 기울여 흠앙하는 곳이 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따위의 여러 가지 인연 때문에 그래서 부녀자라고 하느니라.”
또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 종류의 아들이 있다.
무엇이 그 세 가지인가?
부모가 하는 만큼 따라 행하는 아들이요,
부모보다 훌륭한 아들이며,
부모보다 못난 아들이니라.
무엇이 부모가 하는 만큼 따라 행하는 아들인가?
이른바 아들의 부모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음란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들도 부모를 따라 살생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니,
이것을 부모가 하는 만큼 따라 행하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부모보다 훌륭한 아들이라고 하는가?
만약 부모는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아들은 능히 살생하지 말라는 따위의 계를 받나니,
이것이 부모보다 훌륭한 아들이라고 말하느니라.
무엇을 부모보다 못난 아들이라고 하는가?
만약 아들이 부모가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 아들도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수용하지 않나니,
이것을 부모보다 못난 아들이라고 말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