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다니엘 영재교육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
차 례
서 문.................................................................................................7
제1장 체험이 진리에 대한 타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23
제2장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는가?.....................................................63
제3장 예언자인가, 광신자인가, 아니면 이단인가?....................................95
제4장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129
제5장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는가?....................................165
제6장 “제3의 물결.” 그 배경은 무엇이며, 그 물결은
어디로 흘러가는가?...............................................................................201
지은이 소개와 책에 대하여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 JR)
탈봇 신학교 졸업. 그레이스 커뮤너티 교회(선 밸리, 캘리포니아)의 담임목사이다. 잘 알려진 성경 강해가이며 강사, 마스터스 칼리지 그리고 마스터스 신학교 학장으로 섬기고 있다. “그레이스 투 유(Grace to You)”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일 진행하기도 한다.
-전세계 교회에 경종을 울린 베스트셀러-
은사주의 운동은 교회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이 남긴 휴유증 가운데 하나는 혼란과 어지러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에 따라 은사주의자들과 은사 반대주의자들이 교리적인 면에서 어떻게 다른가를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평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문제들에 정면 도전한다.
체험이 진리에 대한 타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는가?
예언자인가, 광신자인가, 아니면 이단인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는가?
“제3의 물결.” 그 배경은 무엇이며, 그 물결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이적과 기사 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영적은사란 무엇인가?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유가 있는가?
만사형통 복음은 왜 잘못되었는가?
서 문
이책을 처음 낼 때) 나는 이 책을 통해 나타나게 될 다양한 반응에 대해 거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몇 가지 반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도 하고 긴장도 했었다. 사실상 지금까지 내가 이 책에서 다룬 것과 같은 주제에 관한 많은 책들이 나왔었지만, 모두가 어딘가 부족하고 부적합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고, 은사주의 운동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듯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은사주의의 문제에 관해 성경적이며 교리적으로 진단하려 했다는 이유로 감사의 편지를 보내 왔다. 그들 중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회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취급하기 두려워했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진단한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내가 놀란 것은,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은사주의가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소리높여 외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이 처음 나오던 해에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안에 은사에 관한 엄청난 혼란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두려운 요소는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진단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반대였다. 은사주의적인 교리, 혹은 실천을 비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일치를 깨거나 불경한 것으로 간주된다. 은사주의 운동의 극단적인 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하여 그들이 상상을 통하여 얻은 사상을 유포한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성경을 중심으
로 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재갈이 물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것들을 시험해 보고, 그릇된 가르침과 비성경적 행위를 드러내고 비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때때로 필요한 경우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될 그의 서신들에서 이름을 지명하여 책망하기도 했다(빌 4:2-3;딤전 1:20; 딤후 2:17). 사랑의 사도 요한도 사도의 가르침을 무시한 교회의 지도자 데메드리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요삼 9-10).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 요한의 사랑관은 진실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사실상 진실과 괴리된 사랑은 위선적 감상주의밖에 될 수 없다. 이런 감상주의가 오늘날 복음주의 내부에 팽배해 가고 있다.
성경적 도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해서 사랑으로 그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그 진실을 말할 뿐이다(엡 4:15).
나도 이 일에 매진할 것이다. 나에게도 많은 은사주의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 비록 우리가 몇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하지만 나는 그들을 귀중한 나의 형제들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친구들 중 몇 사람은 은사주의 운동에 관한 나의 비판이 백해 무익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사실 때문에 괴롭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모든 가르침을 살펴볼 수 있는 척도이며, 나의 유일한 소망은 현대 교회에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하나의 운동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조명을 비쳐주는 것이다.
비은사주의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할수록 은사주의의 영향력은 실제적으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게 된다. 현대의 통신 매체를 통해, 특히 텔리비전을 통해 은사주의 운동은 지구를 뒤덮고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은사주의 운동의 가르침은 미국과 유렵을 넘어 이제는 남아메리카의 최남단과 동양,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남태평양과 동유럽, 심지어는 소련에 까지 전파되었다. 거의 모든 곳이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세계인들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를 빼놓고는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사람들에게 베푸신다고 믿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어, 그것을 일일이 나열하기에도 힘들게 되었고 그것을 검증하는 일도 슂지 않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열정적인 만남은 일반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의 개인적 메시지는 거의 일상사가 되었다. 모든 종류의 치유의 은사가 주장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척추 이상자와 다리 이상자를 치유하시며, 암세포를 제거하셨는가에 관한 놀라운 증언들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다. 대담 프로에 나오는 전능한 기독교인들은 방송하는 동안에 다양한 기적과 치유의 역사가 발생하였음을 증명하는 듯 하고 있다.
그들은 관찰자들에게 들어오라고 말하고 치유되었음을 선포한다.
1달러의 지폐가 20달러의 지폐로 둔갑하는 것이라든지, 세탁기와 다른 전기 기계들이 고쳐지는 것과, 빈 연료 탱크가 초자연적으로 가득 차는 것, 그리고 귀신이 자판기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입신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갔다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지옥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한다. 놀라운 경험이 오늘날의 질서인 듯 보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적이 없는 복음의 유효성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만약 그것이 커다란 표적과기사를 동반하지 않으면 복음의 메시지는 약화되거나 무효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믿기 전에 기적과 표적을 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개념은 완전히 새로운 운동을 배태시킨다.
이름하여“성령의 제3의 물결”(Third Wave of the Holy Ghost)인데, 이것은 표적과 기적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6장 참고). 옛날의 은사주의 운동의 주제에 관한 최신의 이런 변종들은 정통적 교단으로부터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오순절파와 또 다른 은사주의의 영향력에 식상한 사람들이었다.
은사주의자나 비은사주의자나 모두 성경의 핵심적 문제들을 분명히 직시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은사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은사주의를 평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은사주의 침례교 목사 하워드 어윈( Howard Erwin)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은사적인 경험이 없이 성령의 은사주의에 대한 명맥하게 하심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중세의 역동성과 결별된“기독교 윤리”를 적용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영적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경험이 선행해야 한다. 성령은 자신을 위탁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적 비밀을 주시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오순절의 경험은 완전히 헌신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경험은 성경적 진리의 시금석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진리가 경험의 최종적인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어떤 한 가지 문제에만 국한해서 취급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의 목적은 은사주의자들의 주장들에 대응하는 것이다. 부루너(Frederick Dale Brunner)도 이 점을 명백히 했다.“그 자체를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어떤것의 시금석은 그 자체의 의미나 그 자체의 성공 여부, 혹은 그 자체의 권위가 아니다. 비록 그것들이 그 판단을 어느정도 타당하게 할수 있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유일한 시금석은 진실이다.” 은사주의 운동을 교리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책이 나온 후 수년 동안 은사주의 운동은 극적으로 팽창하였다. 결국 그것은 교회 연합이 그토록 이루어 보고자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게 되었다. 즉 어떤 교리적 이해 관계와도 무관한 외적인 단일체를 완성한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사실상 그들의 문호를 은사주의적인 경향을 피하고 있는 모든 종파에 개방해 놓았다. “신오순절 운동”이라고 알려진 은사주의 운동이 1900년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의 후예로 등장한다. 1959년까지의 오순절 운동은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포스케워 복음교회( Foursquare Gospel Churches),그리고 연합 오순절 교회(United Pentecostal Church)와 같은 종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 오순절 운동은 교단적 구분을 없앴다. 쉐릴(John Sherill)의 말에 따르면, 그때 이후로 교단의 벽은 허물어졌다고 한다. 은사주의 운동은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루터교까지 퍼져 나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카톨릭과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서너개의 사교 종파까지도 포용했다.
그러므로 은사주의 운동을 그 운동의 구성원인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교리나 가르침으로 규정짓는 것은 물론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은사주의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교리라기보다는 경험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성령 세례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성령 세례를, 구원 후에 오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은 후에 활력을 제공해주는 두번째 복된 겅험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의 확신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항상 그 증거로 방언이나 혹은 다른 은사를 동반한다. 그와 같은 경험은 자신의 삶에 있어 신적이고 기적적인 힘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는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나는 가능하면 언제나 그들 자신의 언어로 은사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과 모든 인용문을 문서화하여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나는 개인적인 대화나, 편지, 그리고 다른 비공식적인 자료들보다는 출판된 저작물들에서 인용하였다. 말씀 신앙운동을 다루는 12장에서만 교육용 테이프와 텔레비전에서 많이 인용하였다.
그러나, 말씀 신앙운동을 조사하면서 나는 내가 인용한 것이 확실함을 당신에게 확신시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말씀 신앙운동의 설교자들은 실제적으로 그렇게 가르쳤음을 제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책을 사용하셔서 은사주의자든 비은사주의자든 상관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모든 것을 조사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경험의 시금석이 되게 하며, 그 반대가 되지 않기를, 그리고 오직 올바른 것만을 굳게 잡게 되기를 기도한다.
제1장
체험이 진리에 대한 타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몇몇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이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체험을 성경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오히려 신앙이 체험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영적 체험은 어떤 신비적인 무아지경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이 진리로 말미암아 새롭게 소생케 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의 질못은 참된 체험을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지 않고 체험을 가르침의 바탕으로 삼는데 있다. 은사주의적인 체험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기록된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거나, 심지어는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이 신앙의 토대가 된다면 여기에서 야기될 수 있는 거짓된 교훈들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많은 은사주의에 관한 책들과 TV프로그램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들의 가르침들은 환상, 꿈, 예언, 지혜의 말씀,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받는 메시지, 그리고 그 외 개인적인 체험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단지 형식적인 증빙 자료로만 사용한다. 또는 어떤 기발한 착상에 맞도록 그 내용을 왜곡하기도 한다. 때로는 성경 구절들을 너무 엉뚱하게 사용하여 원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의미로 가르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케네스 코펴랜드(Kenneth copeland)는 자기의 기발한 주석들이 대부분 직접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치유은사자라는 펄시 콜레(Percy Collett) 박사의 1982년에 하늘로 들림받아 5일 반 동안 거기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 등.........,
은사주의로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중지시킬수 없다. 왜냐하면 은사주의에서는 체험 자체가 타당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은 성령 세례에서 비롯된다.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누구든지 일단 성도가 되면 성령 세례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방언을 말하고, 희열을 느끼며, 환상을 보고, 또 다양한 감정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례와 또 이 현상들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그러한 사람들은 여전히 미성숙한 자요, 세속적이며, 불순종하는 자요, 불완전한 성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들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필수적으로 놀라운 체험을 계속가져야 되는 것으로 잘못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최고의 여행
신세대 젊은 은사주의자 로버츠 리어던(Roderts Liardon)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덟살 때 하늘나라에 갔었는데 예수가 친히 자기 여행을 안내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리어던은 자기가 하늘나라에 있을 때 예수께서 친히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사역자로 삼으셨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동안 묵묵히 걸었다. 예수께서 나를 돌아보시더니 한 손으로 내 양 손을 잡으시고, 다른 한 손은 내 머리 위에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로버츠, 나는 너에게 큰 일을 맡기려고 한다. 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을 설교하게 될 것이다. 가라! 가라! 그 누구도 간 적이 없는 길을 가서, 내가 행한 것처럼 행하라.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리어던의 이야기가 아주 불경스럽고 터무니없는 망상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도리어 회중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특별한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은 천국 여행을 “최상의 체험”으로 여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천국 여행에 대해 간증한다.
1977년 4월 11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방송국에서는 천국에 갔다왔다는 리처드 에비(Richard Eby)박사와의 인터뷰가 방영되었다.
에비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낙원”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시력이 약했었는데, 거기에서는 안경도 필요없었고, 오히려 수 백마일 떨어진 곳도 환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육체는 반투명 상태가 되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정도로 놀랍게 변화되었다고 한다.
에비 박사는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꽃을 꺾어 보니 줄기에 물이 없었다. “예수께서 친히 생수가 되시므로” 물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천국에는 희생제사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에비 박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뇌에는 열두 개의 뇌 신경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뇌 신경 가운데서는 후각 신경이 가장 발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곧 천국에 좋은 향기를 보내어 하나님의 중추신경을 만족하게 해 드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함부로 조작하다니 정말 모든 기독교인 들이 탄식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방송 도중에 성경적인 내용이 아니라고 지적을 받았는가? 아니다. 도리어 그의 이야기가 “심오하다”고 했다. 여기서 심오하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보다 깊이 있는 진리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보다 더 깊이가 있다는 말인가? 성경보다 더 깊이가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에비 박사는 하나의 쳐험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에게는 체험 자체가 진리의 장당한 기준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수천의 가정이 에비 박사 개인의 이 같은 상상을 마치 “하나님께서 오늘날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의 전형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두 가지 접근 방법
신비주의란 객관적이고 신빙성 있는 사실과는 동떨어진 영적 실재를 인식하려는 신앙 체계를 말한다. 그것은 느낌이나 직관 또는 다른 내적인 감각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은 객관적인 자료들은 항상 무시해 버리고 도리어 내적인 요소에 그 권위를 부여한다. 일시적인 느낌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욱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신비주의는 앞으로 언급하게 될 현대 실존주의, 인본주의, 심지어는 많은 이교도 특히 힌두교, 그리고 이것과 밀접한 뉴에이지 철학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의 체험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비이성적인 신비주의와 갚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 때문에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새로운 기준, 즉 개인적인 체험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보다 개인적인 체험을 더 중요한 것으로 가르친다.
성경의 진리를 다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객관적 방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 주관적 방법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했는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신학을 정립해야 하는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겠는가,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는가? 만약 사람들의 체험을 기준으로 신학을 정립하려 한다면 개인마다 제각기 다른 관점이 나타나는 혼란이 빚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에서 모든 것을 시작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 혹은 체험들이 타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오직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로마 카톨릭은 주관적인 방법론을 선호한다. 직관이나 체험, 신비주의가 항상 카톨릭 신학을 주도한다.
이런 체계에서는 직관과 느낌이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누가 무슨 체험을 했는가 하는 것이 곧 진리인 것이다.
60년 후, 은사주의 운동은 캘리포니아 밴 누이에 있는 성 마가 감독 교회( St. Marks Episcopal Church)의 김독인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t)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프레드릭 브루너(Frederick Dale Bruner)가 기록한 바와 같이, 오늘날 오순절파나 은사주의 운동은 체험, 감정, 현상, 그리고 느낌에 의존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오순절파는 성령 세례의 체험을 최고로 여기는 체험의 기독교로 이해되어지기를 희망한다.
중요한 것은, 오순절파 사람들이 강조하는 바는 교리가 아니라 바로 성령 세례가 체험이라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19-21을 읽어보자.
베드로는 아무리 변화산에서의 체험이 놀랍다 하더라도, 성경이 더욱 확실한 신앙의근거임을 말하고 있다. 비록 그가 영광중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가 믿는 신앙의 기초로서 더욱 확실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이러한 베드로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즉 모든 체험은, 그보다더 확실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여 기독교인의 삶과교리에 대한 진리를 추구할 수는 없다. 우리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만 근거해야 한다. 은사주의 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진리를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체험을 앞세우는 데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대부분 무언가 특별하고 대단한, 충격적인 체험을 통해 기독교인의 삶이 개선된다고 믿고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베드로전서 1:8).
분명히 베드로는 1세기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으며, 또 그러한 환상이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기쁨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은사주의자들은 믿음만 있으면 예수가 실지로 임재한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많이 예수의 환상과 천국 여행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 역시 헨리 프로스트(Henry Frost)가 그의 책 기적적인 체험(Miraculous Healing)에서 제시했던 바로 그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배교자들이 늘어나는 만큼, 그리스도가 신유 등을 비롯한 특별한 이적을 통해 그의 신성과 주권을 드러내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말씀이 충분하다고 했는데(시19:7-14;딤후 3:15-17)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헨리 프로스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비록 은사주의자들이 대부분 프로스트와 같이 분명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사실 그들의 신앙 체계의 핵심에는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부정이 자리잡고 있다.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끊임없이 모독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통해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지 않으셨던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체험을 더 요구해서는 안된다. 모든 체험은 반드시 셩경에 근거한 것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허위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체험은 절대적으로 건전한 것으로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한다. 아울러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어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을 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체험에 의존하였는가?
사도행전 17:2-3에 의하면 바울도 분명히 성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새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너희에게 전하는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생애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23)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바울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 실존주의자들, 인본주의자들, 그리고 이교도들이 가던 길로 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대부분 부지중에 이런 과오를 범했으리라 확신한다. 그들은 흔히 말하기를 “우리는 성경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거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심각한 갈등 속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편으로는 성경을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체험을 자신들의 실제적인 권위로 삼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갈등속에 있음을 스스로 잘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찰스 파라(Charles Farah)는 하나님의 말씀과 체험사이의 긴장 관계를 어떻게든 조화시켜 보려고 했다. 그는 ‘말씀’으로 번역되는 두 헬라어 단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로고스”(logos)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말씀을 가리키고, “레마”(rhemah)는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말씀을 가리킨다고 구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헬라어 의미상으로나 신약 성경의 용례상으로는 그런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있다. 파라의 설명에 의하면, “로고스”가 사람에게 말씀하실때 “레마”가 된다고 한다. 로고스가 법정적이라면 레마는 경험적이라는 것이다. 파라는 또 “로고스가 항상 레마, 즉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로고스가 사람에게 임할 때 레마가 된다는 것이다. 파라의 이론대로라면 역사적, 객관적 로고스가 레마가 될때, 즉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게 인격적으로 임할때 비로소 역사하는 힘을 갖게 된다.
위험스럽게도 이 이론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수년간 주장했던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들 역시 셩경은 오직 개인에게 임할 때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이 그 능력을 체험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다. 독자들이 직접 체험을 할 때에야 비로소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딤후 3:15)이라고 했다. 이것을 디모데가 체험해야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이 이미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다고 가르쳤지, 독자가 그것을 체험해야 비로소 감동될 것이고 유익하게 되리라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근거 없는 열심
은사주의자들은 대부분 신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바울이 말한 유대인과 비슷하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롬 10:2). 은사주의자들은 지식이 없는 열심을, 깨달음이 없는 열정을 갖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반지성적인 방언을 주신 것은 교만한 인간의 지성을 무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를 제거하거나 억제하려 하신다는 것은 완전히비성경적인 생각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2)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시지, 그것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계시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 우리가 이성으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이해하기를 요구하신다(엡 3:18; 4:23; 빌 4:8;골 3:10).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우리의 인식과 사고, 지성으로 이해 할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바울의 중심 사상이다. 이것은 은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4:19). 바로 이것이 바울의 결론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에 의존하거나 체험만으로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감정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으로 먼저 그것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의지로 그 앞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한다.
체험 신학의 기원
신학이란 인격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 신비주의(mysticism)사상은, 오직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이교신앙 등 많은 비기독교적 요소들이 체험 신학을 형성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Ecostentialism) 철학은, 삶이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기꺼이 책임지기 위해서는 , 자신들이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실존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어떻게 느끼는가”에 있다. 그들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바로 권위라고 한다. 실존주위자들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클라크 피녹(Clsrk Pinnock)은 체험만으로는 너무도 빈약해서 기독교의 모든 체계를 그위에 수립할 수가 없다. 단지 한 사람의 생각속에 일어난 심리적인 사건만을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형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적인 흥분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다. 아무리 독특한 체험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잠재의식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주관적인 기준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계시의 내용을 축호하거나, 혹은 자기들 구미에 맞게 계시를 왜곡시킨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셨는가에 치중하기보다는,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신학자들이 종교적인 감수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마약을 선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역사보다 실존주의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면 신학은 한낮미신들의 혼합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또한 성찬의 초도주에 환각제를 넣는 것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본주의(Hujmanism)는 인간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약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과 가르침만 있다면 어떤 문제도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실존주의의 이복자매나 다름없다. 이것도 역시 개개인이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판단할 것을 촉구한다. 요즘같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실제 이름보다는 하나의 번호로 취급되는 컴퓨터 시대에, 인본주의는 매우 호소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존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자는 어떤 최종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이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도 없다. 따라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삿 21:25).
이방종교(Paganism)역시 체험 신학의 일부이다. 이방 종교의 신앙이나 의식들은 대부분 신비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시대에 헬라와 로마 세계에는 신비 종교가 팽배해 있었다. 이것들은 다신교로서 섹스, 우상 숭배는 물론 사람의 사지를 절단하거나 심지어 사람을 제물로 지치기까지 했다. 역사가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런 이방 종교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화와 즐거움, 행복, 그리고 종교적인 황홀경(Ecstasy)을 경험했다고 한다.
역사가 앵거스(S.Angus) 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신도들은 황홀경 상태에서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황홀한 환상‘신’을 볼 수 있었다. 또는 열광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영감을 받았고, 신의 기운이 가득 찼다고 믿었다. 이런 현상들은 어떤 면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을 때 그들이 체험했던 것과 유사하다.
피터슨(Eugene H.Peterson)은 체험 신학이 가나안 이방 종교인 바알 숭배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바알 종교는 정신적인 교류와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다....신자는 황홀경 중에 초월적인 신과 교류한다. 숭배자들의 영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 바알 숭배의 관건이다. 또한 예배가 흥미롭고, 열광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알 종교의 정설이다.
야훼이즘(Yahwism,구약,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그 예배의 핵심이다. 즉 예배자들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성적인 자각을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게 한다. 야훼이즘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섬기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책임있게 행동하며, 결정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선포된다....바알숭배와 야훼예배의 차이는, 야훼 예배가 하나님 계약의 뜻을 깨닫고 이해하며 순종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바알 숭배는 단지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그리고 의지적 결단과는 무관하게 단지 흉내낼 수 있는 맹목적인 힘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은사주의 운동들은 대부분 위험스러울 정도로 새로운 바알 숭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체험이란 사탄의 손에서 위험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사탄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체험을 추구하도록 유혹하기를 좋아한다.
현대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체험주의 사상에 희생당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각성하지 않는다면 신비주의의 유산들, 곧 실존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이방 종교가 교회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피녹(Punnock) 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 새로운 신학은 기독교 메시지의 이성적이고 역사적인 내용들을 삭제해보리고 복통과도 구별되지 않는 인간 내면의 주관적인 체험을 신뢰한다.
체험은 자칫하면 심리학적인, 혹은 생리학적인, 심지어 사탄적인 현상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모든 체험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검토해야만 한다.
성경을 위한 투쟁
금세기 말엽,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위자들과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최초로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여 공공연히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교묘한 두번째 공략이 뒷문에서 시작되었다. 체험적인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이 부대를 이끌고 성경의 충족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수십 년간 그랬던 것과 똑같이 체험주의자들도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존슨(Robert K.Jonson)은 [현대 기독교](Christianity Today)라는 잡지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최근 동향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은 지금 체험에 근거한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하고 있다.
신학이 말씀에서 출발하여 마음으로 가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유산과는 달리 복음주의자들은 마음에서 말씀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복음주의 안에서 다음과 같은 처방을 주장하는 소리가 점점 늘고 있다. 즉 교회가 계속해서 적절하고 충분한 신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연구하는데서 출발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어떻게 그를 체험하였는가를 연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객관적인 계시가 아닌 주관적인 체험에서 출발하는 신학이 올바른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학은 단지 체험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고, 객관적인 진리라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 즉 우리의 체험은 우리의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귀한 말씀의 객관적인 진리에 비추어 우리늬 체험을 검토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렇재 않으면 틀림없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체험에 근거한 신학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된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은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다(마 7:24-27).
은사주의자들은 신학과 성경 정통주의가 오히려 복음 증거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그리스도가 그의 몸된 교회에 새롭게 나타나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는 신학자들의 냉랭한 교리에 싫증이 났다.
로드만 윌리엄스(J.Rodman Williams)는 신학이 체험을 평가하기 보다는신학이 체험에 맞도록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현대 교회가 성경을 지키는 투쟁에서 지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다. 우리는 어떤 느낌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또는 그 밖의 어떤 잠재적인 사기술이나 신빙성 없는 증거들에 의존하면 안된다. 열심히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살아 있는 말씀을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체험은 더할 수 없이 크고 순수한 기쁨이자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말이 은사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찬송처럼 되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철석같이 믿는 별별 사람들이 저마다 신기한 예언을 한다.
기독교의 정통적인 가르침은 항상 하나님의 특별 구원 계시가 성경의 가르침 안에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만약 성경이 완전하다면 그것은 닫힌 진리 체계일 것이다. 만약 성경이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표준을 담고 있다면 성경의 가르침들이 교리적으로 확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전히 새로운 계시를 부어주신다면 하나님의 진리는 지금도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의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것 이상으로 새롭고 분명한 진술로 하나님의 진리를 해명할 때 그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대 선지자들의 난해한 이야기들을 말씀 가운데 주어진 신성한 진리가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신한다.
나 역시 이 말에 동감한다. 성경은 닫힌 진리의 체계이다. 즉 완성된, 충분한,그래서 어떤 것도 더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진리 체계이다(유3: 계22:18-19). 성경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모든 영적인 진리를 다 담고 있다.
영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감”이라는 단어는 “숨을 불어넣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 되었다.
영감에 해당하는 헬라어 theopheustos는 “하나님께서 내쉬다”이다.
그래서 이 구절의 문자적인 의미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쉬신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신적인 기운을 불어넣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 자체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벧후1:21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어떻게 말씀하시는 가를 잘 설명해주는 핵심 구절이다.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예언도 인간의 의지에 의한 행동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감동받은”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성령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영감에 대한 현대의 견해
오늘날 성경 연구는 어떤 것인가? 몇몇 현대 신학자들은 영감이 계속되고 있으며 계시가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듀이 비글(Dewely Beegle)은 오래 된 찬송 중에서 어떤 것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영감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비글은 정경이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믿는다.그래서 그는 “계시와 성령의 영감은 계속되고 있다..... 성경의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정경 이후의 해석자들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라고 한다. 그는 또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20세기에 끼친 하나님의 영감을 더욱 역동적으로 감지한다면 교회의 전도와 파급 효과는 더욱 크게 될 것이다.
성경의 독특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 영감이 절대적으로 우리 시대의 영감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과 해석가들을 세우시고 보내셨던 것처럼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과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말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를 이렇게 복잡한 세대에게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성경 시대에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영감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영감과 특별한 지혜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은사주의자들이 믿는 바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도 영감으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면 “성경의 독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다. 정경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면, 또 하나님께서 지금도 새로운 예언이나 신령한 노래, 또는 지혜의 말씀들을 주시고 있다면, 우리는 이 새로운 계시들을 열심히 수집하여 성경에 첨가하고 또 이것들은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계시들이 우세하다. 우리 문화와 더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여기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정경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무이한 기적이다.
1500여 년 동안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류없이, 서로 모순됨이 전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까지도 모두 기록했다. 어떤 새로운 찬송도 성경에 버금갈 수는 없다. 어떤 새로운 예언이나 지혜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과 동등한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다.(마 5:18).
점진적인 계시인가?
교회가 성경을 신앙과 삶의 절대 무오한 최종의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학적인 혼돈을 초래하게 된다. 너도 나도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한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것이라도 신적인 계시에 의한 진리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저명한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거짓과 허구를 조장하면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의 신앙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이 갖는 유일성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영적 방임주의에 이르게 되었다. 뭔가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역사적인 기독교의 신앙은 아예 제쳐 두고 오히려 사탄을 모방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혼란과 실수, 심지어는 사탄적인 속임수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거짓 예언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9).
율법은 거짓 선지자들을 엄격하게 다루도록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 18:20-22)
예외는 없었다. 거짓 선지자 즉 성취되지 않을 예언을 한 자는 누구든지 죽어야 했다. 하나님을 대변하여 선포한다는 것은 심각히 생각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떠나게 하고 또 주관적인 방법을, 즉 하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갖거나 혹은 예언, 꿈 그리고 환상 따위를 통해서 진리를 찾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영원한 말씀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보다 새롭고 좀더 친밀한 형태의 하나님의 계시를 추구하게 한다.
기록된 계시에 의해 끊임없이 조정받지 않으면 우리는 곧 주관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다 하더라도 금방 정도를 이탈하게되고 신비주의나 광신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성경에 어떤 것이라도 더하거나 감하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신 4:2; 계22:18-19). 이단 종파들은 대부분 성경에서 벗어난 창시자의 가상적인 계시나 새로운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정경은 마감되었다.
사실 성경보다 새롭거나 친밀한 계시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따로 개인적인 계시를 주실 필요가 없다.(딤후 3:16-17).
성경은 완전하다. 성경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은사주의 편에 선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으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지금 현재를 위해 완전하다는 것이다. 성경의 정경 작업은 마감되었다. 요한은 신약 마지막 편의 마지막 말씀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그다음에 성령께서 영광의 찬송을 더하셨고, 이로써 정경은 마감되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 구약 정경이 마감되고 나서 400여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선지자도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지 않았던 “침묵의 시기”가 있었다.
이 침묵은 신약 시대 이전에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써 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이것은 또한 계시록에서 끝이 났다. AD2세기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완전한 정경이 널리 인정되었다. 4세기에 교회 공의회는 교회가 무엇을 보편적으로 인정했는가를 검토하고, 공식적으로 오직 성경 66권만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참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정경은 완성되었다.
마치 구약 정경이 마감되고 침묵이 있었던 것처럼, 신약 정경이 마감되고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계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계시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어떤 새로운 기록이나 구전적인 예언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신적인 진리라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3장
예언자인가, 광신자인가, 아니면 이단인가?
캔사스 시의 예언자들
신약이 완성되기 전에 초대 교회에는 간혹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이 영감된 계시로 교회를 권면하기 위해서 특별히 사용하신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경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예언의 계시적인 측면은 오직 사도 시대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모든 예언을 신적인 계시의 수단으로 보는 것은 성경과 예언을 모두 평가절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은사주의자들은 소위 “하나님의 입술로부터 새로 받은 메시지” 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거짓 가르침, 무질서, 오류, 광신 등 갖가지 혼란이 교회에 범람하게 만들었다.
정말 하나님의 영감으로 받은 메시지라면 어떻게 오류와 거짓으로 오염될 수 있겠는가? 영감된 예언이라면 성경과 같은 수준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언적인 계시는 모두 겉으로든지 혹은 속으로든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을 담고 있다. 계시된 예언은 결코 그 선지자의 견해나 사색이 아니다. 또는 단지 그마음 속에서 생긴 특별한 감동이나 추측, 혹은 예상도 아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점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계시를 선포하는 예언자는 곧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므로, 참 선지자의 계시라면 모두 진실하고 믿을만해야 하며 성경과 마찬가지로 절대 무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되며, 또 한번 계시의 의의를 무시하고 영감에 대해 다른 기준을 정해야만 할 것이다.
빌 헤이먼과 그 밖의 다른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이란 하나님께 받은 새로운 계시를 의미한다. 헤이먼은 “개별적인 예언들은 모두 조건적인데, 그 조건들은 때로는 분명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믿는다. 즉 예언이란 취소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고 역전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예언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그 예언의 말씀을 받는 에언자가 적절히 협조해야만 한다고 한다. 따라서 헤이먼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거짓 예언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상황이 바귀거나 그 예언자의 믿음이 부족하면 하나님은 그 예언을 바꾸시거나 취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헤이먼은 의심할 바 없이 그가 현대의 예언과 계시를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서 이러한 구분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글에서 헤이먼은 이렇게 썼다.
[개인적으로 받은 예언들을 기록하고 읽고 또 묵상해 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4-15)고 했다.]
헤이먼은 문맥과는 무관하게 이 구절을 도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성경을 연구하듯이 개인적인 예언들을 경건하게 연구하고 묵상하라고 부추기고 있다(수 1 : 8 : 시1:2). 이것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면서도 개인적인 계시를 수용하려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예언들을 기록하고 묵상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 일을 소홀히 하면 이것도 죄가 될까? 이 일은 그 계시를 정경으로 만드는 작업인가, 이니면 쓸데없는 수고인가? 헤이먼은 이것을 계시의 작업으로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영적으로나 그 내용으로나 정확히 증거하려면 이성이나 논리 그리고 감각 따위를 무시하라고 충고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는 또 [사람들이 종종 ‘나는 예언을 증거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들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알고 보니 사실은 그 예언이 자기 신학과 개인적인 욕구나 목적과 맞지 않으며 어떤 때는 자기 감정이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혼, 즉 정신이나 감정 혹은 의지로는 증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의 이성은 정신에 있지 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과 신념, 그리고 완고한 생각들로는 진리의 예언을 온전히 증거하지 못한다. 영적인 응답은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느낌이 복부 윗 부분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잘못된 예언은 “아니다”, “조심하라”,혹은 “뭔가 잘못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우리 속에 긴장, 신경질, 혹은 불편한 감정이 나타난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계속 들게 마련이다. 우리의 생각보다는 우리의 영에 더욱 조화를 맞출 때 이 느낌은 신뢰할 만하다. 만약 우리 생각이 이 느낌을 주도한다면 이것은 단지 정신적인 반응에 불과할 뿐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셔서 그 예언의 말씀이 올바르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또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합당하면 우리의 영은 성령의 열매로 화답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 온유와 사랑의 감정이 샘솟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영적인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흥에 겨운 나머지 벌떡벌떡 뛰었다 앉았다 한다. 이러한 느낌으로 우리는 성령이 질서 있게 우리 영에게 증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비록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모든 것들이 당장에는 우리 생각과 같지 않더라도 말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생각을 떨쳐버리고 신념은 잊어버리고, 신학이나 일반 상식은 팽개치라는 말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 복부 위에서 일어난 느낌으로 한 “예언”이 어느 정도 가치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한다.
이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런 말은 찾을 수 없다. 예언이 진실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은 복부 윗부분이 어떻게 느끼는가와 전혀 상관이 없다. 만약 상관이 있다면 아마 소화 불량에 걸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충고를 따라 인간의 예언에 귀 기울여 교적을 옮기고 혹은 평생에 모은 재신을 예언자들에게 헌납하였는가?
이런 사상이 은사주의 운동에 팽배해 있다. 결국 예언이 고작 직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주도하는교회에는 실수와 혼란이 판을 치는 것이다.
몬타누스주의
몬타누스(Montanus)는 2세기 무렵 비르기아(Phrygia)출신의 이단으로, 고행과 방언, 예언 계시를 통하여 기독교를 개혁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지자로 보냈으며 자기의 가르침은 모두 성령으로 영감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소위 두 여선지자로 불리는 브리스길라(Priscilla)와 맥시(Maximilla)로 인해 몬타누수주의는 널리 확산되었다.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령께서 몬타누스와 그 두 여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믿었다. 몬타누스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몬타누스는 교회의 형식주의를 배척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성경의 “죽은 글자”만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신령하다고 기독교인들을 협박하였다.
로마 카톨릭
은사주의자들의 계시관과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말이다.
가장 최근에 추가된 로마 카톨릭 신조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파이우스 12세(Pius Ⅻ)가 성 베드로의 권좌에서 선언한 엑스 카데드라(ex cathedra)이다. 즉 마리아의 육신은 그녀가 죽자마자 무덤에서 부활하여 몸과 육신이 다시 결합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에 올리워 천국 여왕의 보좌에 앉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이 선언에 “누구든지 이 교리를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과 교회의 신앙에서 완전히 타락한 자이다” 라는 경고가 덧붙여졌다.
이 선언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것들은 모두 “전통”의 일부로서 성경 밖에서 계시된 것이다.
둘째,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출교의 협박 때문에 의심 없이 이것들을 믿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리는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계시가 추가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오류를 연발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에 고해성사, 연옥설, 교황무오설, 죽은자를 위한 기도, 그리고 갖가지 성례전 등과 같은 전통을 덧붙였다.
이것들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께시하셨다고 하는 로마 카톨릭 신앙에 의해 확정되었을 뿐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미 자기들 나름대로 이와 유사한 전통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예를 들면 “입신”(slan in the spirit)은 은사주의자들에게 귀에 익은 말이다. “입신했다”는 것은 신적인 능력을 발산한다는 사람이 만지기만 하면 그대로 쓰러져서 황홀경에 빠지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의식은 성경 어디에도 없고 단지 신비주의 종교에서나 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의 방법론과 로마 카톨릭의 방법론은 이 점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신정통주의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신학은, 성경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그 의미있는 순간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정통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경 안에서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친히 만나셔서 개인적인 계시 가운데 인격적으로 말씀하신다고 한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은 하나의 좋은 표본이요 강력한 증거일 뿐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적용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단지 선반위에 놓여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마음 속에 말씀하실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한다.
얼핏 듣기에 이것은 좋은 말 같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문제가 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주관주의의 투기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것은 각 개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방법대로 진리를 규정하게 하고 개인적인 느낌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게 한다. 결국 이것도 성경 이상의 계시를 추구하는 또 다른 시도에 불과하다. 은사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찾기 위해 인간의 체험에 의존한다.
신정통주위의 이면에는 성경이 사람에게 어떤 체험을 갖게 할 때 영감된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에밀 부루너(Emil Brunner)는 하나님의 영이 “기록된 말씀의 표지 안에 갇혀있다고 했다. 성경은 인간의 체험을 통해 풀린다고 한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고, 성경의 기자들을 감동시키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람들을 감동시키신다고 한다.
성경의 영감이 주관적인 체험에 의존하고 성경 자체가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경의 권위는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기록이나 말들이 모두 성경와 마찬기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잠재력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잠재적인 “계시”의 근거가 될 것이다.
사이비 종교
몰몬경은“ 보라 여러날을 금식하고 기도하며 이러한 것을 스스로 알려 하였으매 이제 그것들이 참됨을 스스로 아나니, 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게 알게 하셨음이라. 이는 바로 내게 임한 계시의 영이었느니라.”
몰몬교도들은 그들의 두 책 「언약교리」(Doctrine and Covenants)와 「값비싼 진주」(ThePearl of Great Price)를 성경과 동등하게 보고 있다. 이 추가된 “계시” 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과 사역에 대하여 잘못 기록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신학적인 혼란을 일으킨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역시 성경 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진리에 의존하고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저널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철학이 아니고 신적인 계시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론과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다른 어떤 체계와도 구분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에 대해 여러책에서 잘못 소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디 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어 그녀가 사는 시대를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도록 했다고 믿고 있다.
아마도 미국 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이비 종교는 여호와의 증인(the Jehovahs Witness)들일 것이다. 그들은 쉴새 없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자기들의 구원 교리를 전파한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니믜 은혜를 무시한다. 그들은 예수가 단지 하나의 피조물일 뿐 성자 하나님은 아니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기들에게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믿고 있는가? 당연히 그렇다 . 이것은 그들의 잡지 파수대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파수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잡지다. 이것은 잡지 출판사가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진리와 예언을 성경에 기록한 위대한 저자의 작품으로, 이제 그가 이것을 통해 그 예언들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만국교회"(The Worldwide Church of God)도 성경을 능가하는 새로운 계시와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집단이다.
허버트 W.암스트롱(Herbet W. Armstrong)이 이 종파를 창설했는데, 그는 또한 앰버서더 대학을 세우고 「명백한 진리」(The Plain Truth)라는 잡지를 펴냈으며, “내일의 세계”(The World Tomorrow)라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사람이다. 암스트롱은 어떻게 시작했는가? 그의 아내 암스트롱 부인이 받은 새로운 계시가 그 동기였다. 천사가 환상 중에 그녀에게 나타나 모든 조직과 체계를 가르쳐 주었고, 그녀는 이것을 남편에게 말해서 새로운 종파가 탄생했던 것이다.
자칭 메시아인 한국의 문선명은 스스로 하나님의 사자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자기에게 성경이나 그 어떤 책, 그리고 구 누구의 머리에서도 나올 수 없는 최고의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문선명에 의하면 만약 그의 ‘진리’가 성경과 모순된다면 (사실 그렇다),성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오직 성경으로”에서 “어떤 특별한 것”으로의 전환
은사주의자들도 현대의 “새로운 예언”을 받아들임으로써 위험한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 길에는 ‘다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사실 새로운 계시의 길은 오히려 있는 것마저도 뻬앗기는 길이다. 그 길로 가면 반드시 이탈하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더욱이 거기에는 함정도 많다.
몇몇 은사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문제에 빠져 있다.
스테판 스트랭(Stephen Strang)은 잡지 「카리스마」(Charisma)에 이렇게 썼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또는 이 특별한 은사를 드러내어 인정받으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영이 아닌 나쁜 영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스트랭은 핵심 문제는 잘 지적하고 있으나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누가 진짜 예언을 하는지 안하는지, 그 메시지가 점치는 악령에게서 온 것이거나 누군가의 상상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기껏해야 뱃속에서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과 같은 주관적인 방법으러 진리를 식별할 수 있는가? 성경을 제쳐두고 무슨 근거로 이것들을 구분하겠는가?
은사주의적 심리주의나 주관주의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는 막대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예언이 계시하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말하며, 가르친다.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학문이나 진지한 연구는 아예 제쳐두고 있다.
말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적인 내용이나 요지와는 상관없는 신비주의 기독교를 발전 시키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최근에 급성장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도움과 성장을 위해서 성경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일반 기독교 서점에 가보라. 그러면 대다수의 책들이 성경과 교리,혹은 신학연구에 치중하기보다는 느낌이나 체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성경이 너무 단순하고 시시하다고 믿는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뭔가 “특별한 다른 것”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다.
나는 성경을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내 안에서 친히 그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그 말씀도 내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꼭 필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을 가졌고 그분이 나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차적인 자료일 뿐입니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로 이런 오류들과 싸웠지만 은사주의자들은 이 결정적인 사상을 버렸다.
이제 20세기의 참교회는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전성을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결코 전통이나 체험을 성경과 동등하게 보는 신학에 항복해선 안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유일 무이한 것이다. 성경 자체의 주장이 지금 도전받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것을 묵인할 수 없다.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경 외에는 다른 “특별한 어떤 것”도 없다. 누군가가 상상으로 지어낸 공허한 예언을 좇아 신령해지려고 애쓰지 말라 . 불확실한 느낌이나 직관의 도움을 구하지 말라. 스스로 미혹된 예언자들의 권고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딤후 3:16-17)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의 전부이며, 우리의삶에 있어야 할 모든 영적인 필요에도 충분한 것이다.
제4장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피해야 할 세 가지 오류
1.적절한 해석을 희생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려고 하지 말라.
2. 심도 있는 연구를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다루려면 부지런함이 요구된다. 우리가 부지런하다면, 성경의 주요 진리들과 세세한 구절들의 일반적 개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숨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의미가 항상 즉각적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성경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선포되었을 당시의 문화를 이해해야만 확연해진다. 때때로 그것은 원어의 미묘한 어감을 분석해야만 분명해진다.
우리는 성령에 대한 이런 자의적 해석 방법을 철저히 경계해야만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강단에 서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항상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신학을 창조한다.
3. 본문 그 자체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해석 하거나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건전한 성경 해석을 위한 다석 가지 원칙들
1.문자적 원칙
문자적 해석이란 우리가 성경을 비유법과 과장법, 직유법과 은유법, 그리고 상징주의까지를 포함하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하셨다. 그것도 가능한 한 가장 분명하고 간편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하셨다. 성경의 단어들은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그것들을 이해하듯 이해해야만 한다. 비록 성경에 종종 상징어와 비유어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사용된 곳을 금방 알 수 있다. 조심성 있는 해석자가 찾아보아야 할 첫번째 것은 문자적 의미이다. 그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어떤 신비주의적이거나 좀더 깊고 내밀한, 그래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적이거나 풍유적 해석을 좋아해서 문자적 해석을 경시해왔던 사람들은 정확성과 일치성을 이룰 수 있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 대신 그들은 모든 것에 자유를 가지고 있다.
상상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자적 의미를 거절한 채 성경을 해석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성경을 노예화 하는것이다. 즉 성경이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이다.
2.역사적 원칙
성경의 어떤 부분에 접근하려 할 때에는 먼저 그것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교회들 중 하나에 보내는 편지라면, 그 교회의 신자들이 살고 있던 도시의 몇 가지 특성과 그 시대의 정치, 문화적 상황, 그 도시의 지배자가 누구인지와 또 어떤 정치적 압력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강도는 어떠했는지, 교회 공동체내에는 어떤 갈등과 문제, 그리고 위기가 있었는지, 그 당시 문화는 무엇과 같았는지, 사람들의 풍속은 어떠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3. 문법적 원칙
가끔 성경 구절의 문장 구조가 그 의미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예를 들면 때때로 한 문장의 의미는 하나의 명제와 같이 단순한 것이다. 확실히 “......... 때문에”, “비록......임에도 불구하고”,“........으로”,“....안에서”, “.....에 의해서” ,“......과 함께”를 말하는 성경 구절인지 아닌지가 매우 중요시된다. 어떤 경우에는 사용된 원어가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른 단어로도 번역이 가능한지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한 문장이 “이것” 혹은 “그것”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대명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이 메시지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그들에게 성경 본문의 원어-히브리어 혹은 헬라어-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단어들과 문장의 적당한 배열에 주목한다. 나는 문장 구조와 문법을 파악한다. 나는 그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를 원한다.
이것은 약간의 시간과 노력만 투자한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4. 종합의 원칙
종합의 원칙은 성경과 성경을 결합시켜서 좀더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의미를 표출해 낸다. 만약 우리가 해석한 어떤 성경 구절이 다른 성경 구절과 모순되게 해석되었다면 두 구절 중 하나는 틀린 해석이다. 아니 두 해석 모두 틀렸을 가능성도 있다. 성령은 자가 당착에 빠지지 않으신다. 분명한 의미를 가진 구절들은 좀더 불분명한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결코 하나의 불분명한, 혹은 불투명한 구절에 기초하여 교리 체계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
5. 실제적 원리
우리가 항상 물어보아야 할 마지막 질문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냐? 그 모든 것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16의 이 진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어떠하든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교훈이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진리로서 모든 성경 구절이 지적하는 원칙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지표를 포함한다.
책망이란 성경이 우리 죄, 심지어는 숨겨진 죄까지도 드러나게 하며, 우리를 밀실로부터 광명한 빛으로 끌어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경을 적용하려 할 때 그 첫 단계는 종종 성경이 우리를 책망케 하는 것이다.
책망은 바르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르게 함이란 우리가 책망을 받은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행위이다.
그 후에야 의로 교육받게 된다. 즉 진실한 교리에 합당한 새롭고 의로운 길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실제적 사역이다.
성령의 조명
해석의 다섯가지 원리들은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조명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치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듣고 또 성경 말씀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공부하면 성경의 의미에 관해 몇 가지는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없다면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 꿰뚫고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도리가 전혀 없다. 성경의 이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을 모시고 있어야 한다. 그분은 성경의 기자들을 영감하셨다. 만약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없었다면 성경적 진리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꿰뜷지 못했을 것이다.
은사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는 네 가지 성구들
1. 마태복음 12: 22-31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인가?
찰스 헌터(Charles Hunter)와 프란시스 헌터(Francis Hunter)는 유명한 은사주의 부부 사역자들인데 은사주의적 경험을 증거하기 위하여 서너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계속해서 연설을 다니고 있다.
[나는 왜 방언을 말하는가?] (Why should 'I'Speak in Tongues?)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들은 방언과 은사주의 운동의 다른 측명들에 의혹을 표시하는 사람을, 예수를 비판하며 그의 사역을 사탄에 힘입은 것으로 비난하였던 바리새인들에 비견한다. 또한 헌터 부부는 은사주의 운동의 비판자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성령을 훼방하는 불경의 죄를 범할 수 있는 위험한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헌터 부부의 견해가 올바른 것일까? 은사주의적인 교리에 도전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불경의 죄와 동일한 것인가?
어떤사람이 오늘날의 방언을 부정하거나 성령 세례가 중생 후에 온다는 사실을 거부할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인성-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훼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행하시던 그의 기적들이 사탄에 의해 향하여진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거절당하는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가르침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성령을 훼방하며, 에수에 관해 알면서도 여전히 그의 사역을 마귀의 탓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용서함을 얻을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중생의 사역을 담당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구원을 위해 에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반드시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만약 누구든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사는 대신 성령의 확신케 하심을 거부하거나 비난하면 그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먼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다음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는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적요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은사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2.히브리서 13: 8
많은 은사주의 지도자들이 히브리서 13: 8을 그들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헌터 부부는 “어제 일어난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기간과 사도 시대에 일어난 일이 오늘도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계시하고 있고, 방언도 계속되며, 치유의 은사도 계속되고, 기적도 여전히 일어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히브리서 13 :8에 대한 오순절 교회와 은사주의 지도자들의 해석이 건전한 해석학적 원칙들을 적용시켜 볼때 정당한 것으로 판멸될 수 있는가?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는-어제와 오늘 ,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은사주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들의 견해는 올바르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하에 그들의 입장은 다시 점검될 필요가 있다.
왜 “어제”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당시까지만 적용되는가?
구약 시대는 어떤가? 구약 시대에 예수께서는 인간의 육신 중에계시지 않았다. 그 당시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로서 존재하셨다.(창 16:1-13;출3:2-1 ;삿 13:21-22 ; 슥 1:12-13 ; 3:1-2). 또한 구약 이전 시대는 어떤가?
예수께서는 삼위일체의 인격으로 하늘에 계셨다(시 2:7 ; 히 10:5).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대를 통해 형상이 “동일”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지상 사역과 구약시대에는 방언을 암시하는 것이 없었다.
확실히 방언은 사도행전 2장이전에 있는 “어제”의 예수님의 사역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영원히”에 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은사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 8-10에 따르면 분명히 예언과 방언, 그리고 지식의 은사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건전한 해석학적 원리에 적용시켜 본다면 히브리서 13:8에 관한 은사주의자들의 이해는 정당한 것이 아니다.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이 성구가 원래 가지고 있자 않은 의미를 강제적으로 이 성구에 집어넣은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방언과 이적, 그리고 치유의 은사가 1세기경에 나타난 것처럼 오늘날도 일어난다는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3.마가복음 16: 17-18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구로 지적되는 또 다른 것은 마가복음 16:17-18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마가복음 16: 17-18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다섯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즉 귀신을 쫓아내고, 새로운 방언을 말하며, 뱀을 다루고, 아무런 해도 없이 치명적인 독을 마실 수 있으며, 병자를 치료하는 일이다. 만약 뱀이 사탄을 의미한다면, 다른 네 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그것을 풍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풍유화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오류에 빠지게 되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들, 특히 현재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섯 가지 표적들을 행할 수 있는가?” 은사주의자와 비은사주의자를 막론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병든다. 또한 병든 신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암과 신장 장애, 심장병, 그리고 다른 질병들로 죽어간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뱀에 물리거나 독으로 죽어갔다.
이런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의 변명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헌신해야 하며 이런 경이로운 은사들을 간구, 심지어 애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법적인 원칙을 적용할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본문의 어디에서 그것을 말하는가?” 본문이 말하는 유일한 조건은 “믿는다”라는 말이다. 그것은 “믿음+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본문에서 말하는 “믿는 자들”(16:17)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따라서 17절의 “믿는 자들”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근거를 문맥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약속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적인 원칙과 종합의 원칙을 적용시켜 볼 때 우리는 이런 이적들이 어떤 한 집단- 사도들의 공동체-에만 적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사도들은 이와 같은 일들을 했다.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이 이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모든 이적들(독을 마시는 것은 제외한 )이 사도 시대에 발생하였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표적들이 오늘날 모든 신자들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고후 12:12 ;ㅎ; 2:2-4).
더 나아가, 건강하지 못한 신자들은 신앙이 돈독하지 못하며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표적들을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영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도록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이 모든 일은 경악할 만한 죄책감에 이르게 한다. 이는 잘못된 성경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표적들은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유효할 수도,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들은 한 묶음으로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그 목적은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인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4.베드로전서 2:24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종종 베드로전서 2:24을 치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구절에는 해석상의 문법적인 원칙이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베드로전서 2:24에서 말하는 “나음을 얻었다”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과 본문의 앞뒤를 볼 때 그것은 욱신적 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즉으셨을때 자신이 몸소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2:24에 따르면, 우리는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지 건강에 대해 산 것이 아니다. 이는 중요한 차이이다.
또 다른 문법적 시금석은, 이 구절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시제는 십자가 당시로 상황을 되돌리고 있다.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상한 영혼들은 고침을 받는다. 본문은 “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가 계속적으로 육체적 질병을 치료받게 될 것”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병과 다른 약함에 종속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의 약함을 극복하게 하신다. 예를 들면, 성령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롬 8:26). 그러나 이생에서 사는 동안에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증하시지는 않는다.
올바르게 분변하라
디모데후서 2:15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변할 것을 권했다. 헬라어 원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정확하게 재단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장막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과연관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장막 만드는 일을 할 때 그는 어떤 본을 사용하였다. 그 당시 장막은 가죽을 조각조각 붙여서 만들었다. 각 부분들은 반드시 정확하게 재단되어서 서로가 꼭 맞아야 했다.
만약 성경이 각기 다른 부분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적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성경 연구와 해석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정확히 분변해야 한다.
대단히 많은 은사주의 지도자들이 성경을 자신들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해석 방법을 용인하면 잘못된 가르침과 혼란, 그리고 요류가 판을 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성 없는 혹은 왜곡된 방식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5장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는가?
무엇이 기적인가?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행하시는 특별한 사건 즉 자연 현상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을 말한다. 기적은 항상, 기적을 목격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계시를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도구인 누군가를 입증하기 위해 행해지곤 했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들은 참된 기적이 아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초자연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이상한 현상들을 거의 초자연적인 기사들로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으로 널리 잘못 해석되는 기괴하고도 특이한 사건들을 점점 더 많이 듣고 있다.
기적을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거의 특별한 일이 생겼다 하면 그것이 순수한 하늘의 이적인 양 믿으려고 한다. 그것은 교회에 엄청난 위험을 가져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거짓 기적이 마지막 대의 사탄의 첫번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적들을 믿을 수 있는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기적이나 표적, 이적 등은 사도들의 기적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과 역사를 통해 볼때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의 은사와 같은 것은 오늘날 일어나지 않는다(기적의 은사에 대해서는 은사(Ⅱ).제 9장). 성령은 사도들에게 준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현대의 기독교인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은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죽은 자를 살리신다고 믿는다.
오늘날 기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불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던 신약의 기적과는 달리 현대의 기적은 사적인 자리에서, 혹은 종교적인 모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기적의 유형또한 신약의 기적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와 중풍병자 그리고 한편 손마른 사람을 즉각, 그리고 완전하게 고쳤다. 그것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명백한 기적들이었다.
예수의 대적들조차 이적의 실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기적은 즉각적이었으며 철저한 것이었고 항구적인 것이었다. 우리의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결코 점차적인 그리고 불완전한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의 기적들은 거의 항상 부분적이며 점진적이고 임시적이다. 단지 정신 신체증(Psychosomatic diseases)과 같은 유의 질병에 있어서만 “즉각” 치료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듯이 보인다.
기적의 시대에는 어떤일이 일어났는가?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똑같이, 성령의 방법은 결코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대 교회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이 되어가면서 변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 결과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그 능력은 마침내 거의 2천년이 지난 지금 다시 회복중에 있다는 것이다.
많은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그들의 운동을 통해서 “신약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이 재현되고 있다고 믿었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1세기에 사도들이 행했던 것을 오늘날 기독교 신지들이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가? 만일 그렇다면 현대의 계시와 이상, 방언, 치유 그리고 기적은 사도들이 행한 것과 왜 전혀 다른가? 그리고 사도들이 사라진 이후 1,900년간에 걸쳐 기적이나 치유, 표적 그리고 이적이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 기간 동안에는 성령께서 활동하지 않으셨는가? 혹은 그기간 동안에는 그의 능력이 단지 일부 주변그룹과 광신자들에게만 나타났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대와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사용하신 때와 그 이유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적은 성경 역사 가운데 주로 세 차례에 걸쳐 나타났다. 즉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가 그것들이다. 이 세 시대는 하나같이 백년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이 세 시대의 기적은 시대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 즉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에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는 특별했다. 모든 구원사에 있어서 그처럼 대량의 기적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 그 결과 각색병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되었다. 귀신들은 매일같이 두려워했으며 죽은 자가 일어났다. 이 시대, 질풍노도와도 같은 기적의 역사는 다른 시대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구약에서의 모든 선지자들의 선포와 집필 활동 전체를 통틀어도 이와같은 시대는 없었다. 새 언약의 진리가 찾아 왔으며 단지 반세기만에 즉시 신약성경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깨서는 유례없는 표적들을 보이심으로서 그것들을 확고히 입증해 보이셨다. 결코 그와 같은 때가 없었으며 다시 그와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 추정할 만한 이유도 없다.
기적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를 가져다 주었다
세 차례의 이적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록된 계시 즉 성경을 주신 시기였다. 기적을 행한 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같이 계시의 시대를 전하는 자들이었다. 모세는 다섯권의 책을 썼으며 엘리야와 엘리사는 선지 시대를 열었다. 사도들은 거의 모든 신약성경을 기록했다. 다른 시대에 간간이 있었던 초자연적 이적들조차 성경을 쓰도록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은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히스기야의 치유는 이사야와 관계되어 있으며 풀무불에서의 세 사람은 다니엘 선지자의 동료들이었다.
첫번째 계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모세는 완전한 모세오경을 기록했으며,모세의 계승자인 여호수아는 그이 이름을 담은 책을 썼다. 모세와 어호수아 시대 후에 간헐적으로 다른 책들이 추가되었는데, 예를 들면 사무엘에 의해 사사기와 사무엘상하가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대부분을 썼으며 솔로몬은 잠언 대부분을 기록했다. 다른 많은 책들의 경우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와 같은 놀라운 기적들이 동반되지는 않았다.
두번째 기적의 사건들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성경 계시의 시대와 더불어, 즉 구약의 선지자 시대와 더불어 있게 된 것이었다.
솔로몬의 통치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쪽의 왕국은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아합 의 때에 가서는 최악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일으키셨다. 그들의 생존시에 선지자 직분이 많은 놀라운 기적들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선지자직의 계승과 더불어 이사야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지서가 쓰여지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 시대가 오기까지 거의 사백넌에 걸쳐 계시의 침묵이 있었다. 구약의 이 마지막 기간 동안 아무도 예언하지 않았으며 어떤기적도 기록되지 않았다.
세번째 기적의 시대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 기간(A.D.33-96)동안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을 주셨다.
기적은 계시의 전파자들을 증거했다.
모든 기적은 중요한 목적을 띠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선지자들의 주장을 입증하며 확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모세가 행한 이적들은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을 먼저는 바로에게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기적은 기록된 율법의 확실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이었다.
기적은 새로운 계시에의 관심을 요구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그들로 그 메시지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셨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바라시는 바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기적은 기적 그 자체의 즉각적인 영향을 뛰어 넘는 지시적인 목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애굽에서 행한 기적은 두 그룹의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기 7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첫번째 기적을 보게 된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는 그렇지 않았다. 바로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것은 모든 재앙 가운데서 가장 끔찍한 재앙, 즉 죽음의 천사가 모든 애굽 가정의 장자의 목숨을 취하는 열번째 재앙이 내려진 이후였다.
신약 시대에 와서 기적과 표적은 또 다시 신자들을 든든케 하고 불신자들을 헌신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즉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요 20:31)하기 이해서 많은 표적이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이 기록된 것은 불신자들로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도들의 기적 도한 마찬가지의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행 5:12-14)
오늘날에도 기적이 필요한가?
신약과 구약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는 마쳐졌다(히 1:1-2). 많은 표적과 기사, 그리고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책을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를 입증하기 위하여 기적이 계속해서 나타날 필요가 있는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믿음을 가진 이들은 기적을 “요청”할 수있는가? 하나님은 가적을 요구할 때 기적을 행하시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표적이나 이적, 그리고 치유등과 같은 현상들도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해 행해진 기적들과 유사한 것들인가?
이상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 시대의 기적이 그 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기적을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서 성령과 관계된 신자를 향한 명령은 오직 다섯 부분만 있을 뿐이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으로(안에서) 기도하라”(유20)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을 구하라는명령은 없다.
방언이나 치유, 그리고 기적 등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가 닫혀짐에 따라 표적 또한 그쳐지게 되었다.
신학자 워필드(B.B.Warfied)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기적은 공연히 특별한 이유없이 성경 여기저기에 종잡을 수 없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시의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하나님께서 신뢰받는 전도자들을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때, 즉 그의 은혜로운 목적을 선포하실 때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들의 교회에 기적이 많이 나타난 것은 곧 사도 시대에 계시가 풍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시대가 마감되었을 때 기적의 시대 또한 지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새롭고 불필요한 계시를 세상에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주어진 계시를 세상 가운데 널리 전파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그 구원의 지식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신다.
히브리서 2:3-4은 선지자들에 대한 인정이 성경 기적의 주된 목적이었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표적과 이적과 기적,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들은 자들”)의 메시지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이 증거하고있음을 볼 수 가 있다.
“확증한 바니”라는 말은 헬라어에 있어서 정확하게 과거시제로 쓰여졌다. 이는 기적과 이적, 그리고 표적의 은사가 사도들이 전하는 새 계시를 확증하기 위해 단지 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 성경 용어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약속하시는가?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 대해 기적을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만을 위한 특별한 기적을 가지고 계신다” 기도교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사적인 기적을 간구해야 하는가? 만일 당신이 예수에의해 행해진 기적을 연구하게 된다면 어느 것 하나 사적으로 행해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질고와 육체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셨을 때 그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그의 메시아 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요 20:30-31). 마찬가지로 사도들 역시 사람들을 치유했을때 그들의 첫번재 목적은 새로운 계시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계시는 결코 사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빅토르 버젠(Victor Budgen)은 이것의 위험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대치시키기를 원한다. 때때로 우리는 사탄이 그렇게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데, 이는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 속임수를 알아 차린다.
오늘날 자신들을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비교하는 자들 , 즉 새로운“계시”를 믿으며 거짓된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자들이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저자들은 항상 극단적인 예를 다루곤 한다.
그러나 쉽게 눈에 띄는 많은 거짓된 운동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치유와 계시 그리고 마침내는 집단 자살로까지 갔던 ‘인민사원’에 연루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열심있고 순수한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악령에 이끌려 미혹에 빠지게 되었으며 패역한 가운데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이고도 충족할 만한 말씀을 성경 가운데 주셨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만이 각가지 미혹에 대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유일하고도 진정한 보호막이자 안전 장치이다.
진실로 기적적인 은사를 구하는 기도교인들은 스스로를 사탄의 미혹 가운데 떨어뜨리는 것이다.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신자들에게 성령의 표적과 기사를 구하라고 명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순히 성령으로 행할 것에 대해서 (갈 5:25),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골 3:16)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말씀을 순종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우리가 소망을 원한다면, 우리가 닻을 원한다면,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이끌 그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다.
무엇이 사도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그들은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던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사도들은 교회 발전의 토대가 된 사람들이었다(엡 2:20). 그 토대는 이미 이루어졌으며 또 다시 필요하지 않다. 즉 어떤 현대의 사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고후 12:11-12)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였다. 이는 그들중 일부가 그의 사도직의 권위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기적을 행하는 것이 평신도들도 흔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자신이 행한 기적을 거론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려 한 바울의 노력은 어리석은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도 시대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모두가 표적이나 기적 혹은 능력을 행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같은 일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되었던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위의 증명으로서 그가 행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들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기독교인들 사이에 되는 대로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사마리아 사람들과(행8장)이방인들 (행10장) 그리고 에베소에서 세례요한을 따르는 자들(행19장)에게 일어난 성령의 강림조차 사도들이 그곳에 갔을 때에야 일어났다(사도행전 8,910,19장).
사도직이 오늘날을 위해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여섯가지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교회는 사도들 위에 세워졌다.
그들의 역할은 이제 갓 태어난 교회를 든든하게 하기 위한 토대를 놓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터였다. 그 역할은 그들에의해서 완성되었으며 따라서 또 다른 사도들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부활의 목격자들이었다.
고린도전서 15:7-8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는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택함받았다.
사도들은 예수를 대표하는 자들로 예수에 의해 임명되어졌다. 고후 8:23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약의 다른 곳에서 다른 이들이 “사도”로 불린 것이 사실이나, 그들은 단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교회의 사도들”로 불렸다.
개인적으로 주님에 의해 보냄받은 주님의 사도들과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의해 보냄을 받은 교회의 사도들은 전혀 별개의 사람들이었다. 뿐만아니라 교회의 사도들이 기적을 행했다는 어떤 기록도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열두 사도와 바울은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수임받은 자들로, 사도직은 결코 이양될 수 없는 직분이었다. 목회 서신이 교회의 지도력을 계속 발휘하기 위해 방침을 세웠을 때 그들은 장로와 집사에 대해서 말했을 뿐 결코 사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기적과 표적을 통해 입증되었다.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앉은뱅이를 치료했다(행 3:3-11).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행5:15-16).도르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행 9:36-42). 바울은 높은 데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렸다(행 20:6-12). 또한 바울은 독사에게 물리고서도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 (행 28:1-6).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같은 기적들은 결코 이전에- 사도 시대에조차- 사도들이나 사도들에 의해 수임받은 자들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행해진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사도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사도들은 그 사실성이나 진실성에 있어 판단을 받아야 했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가졌다(고전14:29-33). 사도들이 말했을 때에는 어떤 이견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의 대리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사도들은 특별하고도 영원한 존경을 받는다.
계시록21장은 새 예루살렘에 대해 묘사해 주고 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성곽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고 했다.(4절) 그들의 이름과, 직분은 특별한 것이었고, 그들의 사역 역시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이 행한 기적 역시 특별한 것이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어떤 계승자도 있을 수 없었다. 사도 시대와 그들의 행적은 영원한 과거사가 되는 것이다.
사도 시대는 특별한 것이었으며 마감되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고, 또 신학이 그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자체가 반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감소되었는가?
행전5:16절에서 교회가 막 시작되던 때인 사도 시대 초기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사도들에 의해 치유받았던 사실을 보게 된다. 그로부터 25년 후 모든 사도 중에 가장 큰 자인 바울은 그 자신을 괴롭게 하는 가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후12:7-10). 그가 마음먹은 대로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능력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할지라도(행28:8) 바울은 그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거의 병고치는 은사를 행하지 못했다. 그는 디모데에게 당시 일반적인 의학 상식에 따라 그의 배를 위해 포도주를 조금 써볼 것을 조언했다(딤전5:23). 후에 그는 거의 죽을 무렵에 이르러 사랑하는 형제를 밀레도에 병든 채 남겨두었다(딤후4:20). 만일 그가 할 수만 있었다면 틀림없이 고쳐주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앞부분을 보면 예루살렘은 기적으로 가득 찼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안에서의 어떤 기적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 시대의 기적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적을 구하거나 행하라는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받은 명령은 우리를 현명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또한 믿음으로 살고, 보는 것으로 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고후5:7).
요한복음 14:12절의 “이보다 더 큰 일”은 더 굉장한 기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즉 요14장의 문맥은 결코 초자연적인 표적이나 기사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5:20-21은 죄인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사도들의 역사는 질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보이는 면에 있어서 예수보다 더 큰 기적을 행했다. 그들은 당시 세상 끝으로 알려진 곳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 많은 결실은 기적이 사라지기 시작한 뒤에 나타났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만일 우리가 기적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믿는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해 모자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무력하게 되셨는가? 2천년 동안 중요한 일이라곤 전혀 행하지 않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목격하곤 한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새롭게 거듭나는 모습 가운데서, 날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가운데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되어 온 무자비한 박해와 여러 가지 내적인 공격 가운데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교회의 생명력 속에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에 행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그들의 기적들에 대해 특별한 목적을 가졌으며 그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것은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이는 그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행하는 것은 항상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제 6 장
“제3의 물결”- 그 배경은 무엇이며
그 물결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제3의 물결” 이라는 말은 C. 피터 와그너가 만든 말이다. 그는 풀러 신학교 교회 성장학 교수로서, 교회 성장에 대해 많은 책을 썼으며, 제3의 물결의 방법론을 주도적으로 제안한 사람이다. 와그너에 따르면 “제1의 물결은 오순절 운동이고, 제2의 물결은 은사주의 운동이며, 이제 제3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고 한다.
제 3의 물결은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과 합류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생긴 새로운 성령 운동이다. 그 기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1980년대에 시작하여 20세기 말에 그 힘이 응집된 것으로 본다.........제 3의 물결은 제 1, 제2의 물결과 다르지만 동시에 매우 유사한 면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성령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과 그 증거인 방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제 3의 물결은 무아지경의 체험,신기한 현상, 기적적인 힘, 그리고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물론 전통적으로 내려온 영적 성장 순단, 즉 기도, 성경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씀을 가르치고 순종하며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 중에 몇 명이 아나하임에 있는 존 윔버의 교회에 찾아갔었다. 거기서 그들이 본 것은 정말 아수라장을 방불케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방언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여자들은 바닥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어떤 남자는 발작을 하며 드러누었다. 거기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은 의자에 서서 춤을 추고 뛰며 소리쳤다.
이와 같은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3의 물결은 놀랍게도 비은사주의 운동으로 여겨져 왔다. 이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교회와 교단들은 제3의 물결 내에서도 탁월한 학문적 배경을 자랑하는 많은 강사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강단을 맡겼다. 제 3의 물결은 마치 무서운 해일처럼 굽이치면서 혼란과 무질서의 자국을 남기도 있다.
제 3의 물결은 마치 비은사주의 운동인 것처럼 교묘하게 선전하고는 의미한 살짝 바꾸어 그들의 가르침을 연기처럼 침투시키고 있다.
실제로 자세히 살펴보면 제 3의 물결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제 그 중에 네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기사와 이적?
제 3의 물결을 신봉하는 자들은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야말로 자기들의 운동이 참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기적적인 현상이 바로 제3의 물결의 핵심적인 신앙이다. 제3의 물결을 믿는 사람들은 기적, 환상, 방언, 예언, 그리고 신유 등이 복음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 없는 기독교는 서구인들을 무기력하고 조악하게 타락시킨 물질주의적인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제 3의 물결은 기사와 이적을 핵심적인 전도 방법으로 삼는다. 기적을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으며 기적을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잘못 믿은 것이므로 영적으로 온전하게 성장할 수 없다고 한다.
윔버 : 여인의 발이 절단- 다시 자라남.
언청이 - 삼 일만에 기적적으로 치료.
피터 와그너 : 충치 - 깨끗해지고 없던 이가 새로 남.
솔직히 이 이야기들은 정말 터무니없다. 이것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과장하여 전해진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각 사건들을 보면 모두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 기적들이 정말 일어났다면 세계 신문들이 떠들썩하게 기사로 다루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제 3의 물결은 틀림없이 전세계에서 각광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을 죄와, 불신, 불화, 기도부족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아직 자신의 뚜렷한 치유 신학을 정립하지도 못한 채 육체적 질병은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성경적 원리를 거부한다.
실제로 제 3의 물결이 아무리 기사와 이적을 강조한다 해도 그들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기사나 이적으로 인정될 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행하지 못했다.
구약에 나타난 기사와 이적들을 보라. 이것들 역시 믿음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강한 기사와 이적들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마음은 강팍했었다. 그리고 그 기적들을 목격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신으로 인해 광야에서 죽었다.
제 3의 물결 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근본적인 전제가 잘못되었다. 기사와 이적은 결코 참신앙과 부흥을 가져올 수 없다.
능력 전도?
제 3의 물결이 만든 두 번째 허구를 살펴보자. 그들이 말하는 “능력 전도”란 결코 복음적이 아니다. 제 3의 물결의 방법론은 복음의 권능을 아주 왜곡했다. 제 3의 물결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구원의 메시지를 삭제하거나 왜곡하는 죄를 짓고 있다.
제 3의 물결의 전도 전략은 복음의 메시지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기사와 이적에 치중한다.
일부 제3의 물결의 신봉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응답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보다 기적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현대의 기적에 믿음의 근거를 두는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그리스도 이름을 불러도 그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한다. 구원을 얻게 하는 참 믿음의 대상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지 어떤 사람의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2:16)
“능력 전도”는 비성경적인 것의 전형이다. 예수께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능력 전도”를 행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매번 꾸짖으셨다(마12:38-39 ; 16:1-4 ; 막8:11-12 )등
예수님의 사역은 기적이 아니라 설교 중심이었다. 때때로 예수님은 기사 이적없이 설교만 하시기도 했다.(마13:1-52 ; 18:1-35; 요7:14-44).
제 3의 물결은 이와 반대의 방법을 선호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근본적인 회개도 없이 초자연적인 체험에 의해 겉으로만 따르게 하는 그런 방법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전도이다.
성경 중심인가?
제 3의 물결의 지도자들은 성경보다는 뭔가 실용적이라고 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
그 어떤 체계라도 기본적인 진리를 거부하면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제 3의 물결의 특징인 새로운 계시에 대한 갈구는 실제로 그 운동이 성경의 충족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성경 이외의 체험이 필수적이라고 함으로서 전혀 성경적일 수 없는, 오히려 주관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또 하난의 체계를 고안해 낸 것이다.
제 3의 물결 지지자들은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용주의자라고 한다. 이 두 가지가 다 맞을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실용주의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주로 관심을 둔다. 그러나 성경적인 사람은 오직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제 3의 물결의 지도자들은 다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최고 규범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먼저 체험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정하고 나중에야 성경적인 뒷받침을 찾으려고 고심한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 영적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믿음과 행함을 위한 유일한 강령이 아니고, 기껏해야 개인의 체험을 확증하는 시녀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분명히 제 3의 물결 극단적인 실용주의와 극적이고 신기한 체험에 대한 갈망이 연합하여 그 사이에서 난 자식이다. 그들이 아무리 극구 부인해도 결국 그들은 성경 중심이 아니다.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제 3의 물결 운동은 혼합주의 운동이다. 사실상 제 3의 물결은 교묘하게 복음주의라고 위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은사 운동을 꺼리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운동을 판매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하다.
와그너는 로버트 슐러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기독교 체험의 신기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슐러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한국의 조용기 목사의 ”사차원” 사상을 적극 수용하는데, 이것은 불교와 신비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제 3의 물결은 누구나 다 옳다는 것이다. 천주교도,고교회파도, 셰이퍼카도 옳고, 퀘이커 교도도 옳고, 복음주의도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 3의 물결 지지자들은 복음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했다고 결론내렸기 때문에 보수적인 복음주의는 이미 제쳐주고 있다.
이것은 제3의 물결에서 출판된 모든 간증집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문제점이다.
제 3의 물결 지지자들은 대부분 신학이 체험과 동떨어져 있고, 지나치게 학문적이며, 제한적인 가르침이고, 공허한 교조주의이며, 죽은 정통주의라고 말한다. 그 책 속에 있는 간증들은 과거에 허무하고 제한적이며 반동적인,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거짓된 신학에 사로잡혔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기적을 도외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들은 기사와 이적을 보지 않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접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들은 성숙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회심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같은 관점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신약성경은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하기 위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마24:24-25; 7:22-23; 살후2:3,8-9)
결코 제 3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라. 한 개인이든 아니면 어떤 조류이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기사와 이적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기괴하고 떠들썩한 기사와 이적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삶을 주관하시는 대로 조용하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