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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장성.기행문.앨범(4) ◈여행일자 : 5박6일간 2004.7.30(금)~8.4(수) ◈주 관 : 해사랑 TOUR (대표 신정범) ◈참 여 : 49명 ①덕유산악회 27명 (대장 이경훈) ②가림산악회 23명 (대장 정연랑) ③금수산악회 9명 (대장 박효종) ▶2022.02.04재편집하였음 |
다섯째날 2004.08.03.(화) 관전시-(LONG DU HOTEL)-호산장성(단동시) |
◈ 2004.08.03(일) 제5일 날씨 : 오전 맑음,오후 비
08:04 ▲ 관전시 롱두호텔(프론트) ▲
08:05 ▲ 관전시 롱두호텔(로비) ▲
08:15 ▲ 관전시 롱두호텔 ▲
08:17 ▲ 관전시 롱두호텔(길거리모습) ▲
아침 7시30분 롱두호텔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9시경에 호텔을 출발했다.
큰 강을 건너는데 이정표를 보니 강이 길림성과 요녕성의 경계인 모양이다. 강안을 따라 한참 달린다.
어디쯤인지 오르막길이 끝난 고개. 길 확장공사로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이 작업하느라고 통행차량이 밀리는가 싶더니, 양쪽에서 서로 끼어드는 바람에 엉켜버려 올.스톱 상태로 20여 분간을 허비했다.
00:00 ▲ 호장산성(구글지도) ▲
호산장성(虎山長城)
7G9G+JGH, Kuandian Manchu Autonomous County, Dandong, Liaoning, 중국 118218
辽宁省丹东市宽甸满族自治县 邮政编码: 118218
+86 28 8556 8847
10:51 ▲ 호산장성(虎山长城) ▲
왼쪽 창밖으로 압록강이 가끔씩 보이더니 호산장성에 당도했다.
매표소 입구에서 인원수를 세는 사람이 세 번이나 올라와 손가락을 짚어가며 확인한다. "에이~ 멍청한 X!"
호산장성(虎山长城)
호산장성(중국어 간체자: 虎山长城, 정체자: 虎山長城, 병음: Hŭshān Chángchéng 후산창청[*], ㄏㄨˇ ㄕㄢ ㄔㄤˊ ㄔㄥˊ,
영어: Hushan Great Wall)은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 시 콴뎬 만족 자치현 후산 진에 위치한 유적이다
개요
장성 유적의 인근에서 주민들의 의해 발견된 석산이 드리워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석산은 고구려의 성인 박작성이 철거되어
생긴 석산이다. 호산이란 의미는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호산(虎山)"이라고 한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경을 둔다. 현재는 장성 유적을 산책할 수 있도록 정비되어 있다
역사
중국의 주장
명나라 성화제, 성화 5년(1469년)에 축조됐다. 건조한 목적은 세력을 높히던 여진족과 해상의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목적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명 말기, 후금의 세력 아래에 들어가며 파기되었다.
1989년, 하늘에서 랴오닝성의 장성을 조사해서 명사대로 호산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푸순, 선양, 랴오양, 안산, 진저우를 통해서
허베이성과의 경계의 산하이관까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호산의 600여 m의 장성 유적을 발굴하고 1990년, 뤄톄원(羅哲文) 등의 장성 전문학자들에 의한 실지조사에서 명나라 시기 장성의 동쪽 끝 기점으로 인정되었다. 이때까지 산하이관이 동단이라 알려졌지만 이 발견으로 인해 중국 장성은 1000여 km 연장시켜 호산을 장성의 동쪽 끝 기점으로 바꿨다.
1992년에 380만 위안을 투자하여 600여 m의 호산장성을 수리하고, 처음으로 장성 최동단의 전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더욱이 2000년, 2,230만 위안을 투자하여 1000여 미터 장성의 주체 복구를 완성했다.
호산으로부터 동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까지 이르는 장성은 연나라의 장성으로, 후일 진나라와 연결되는 연진장성이다.
사실(史實)
실제로는 명나라의 장성이 아니라 고구려가 세운 박작성(泊灼城)으로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동북공정이다.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를 제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만주가 옛날부터 중국의 지방정권 내지 영토임을
과시 및 홍보하기 위한 공작이다.
자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82%B0%EC%9E%A5%EC%84%B1
10:58 ▲ 호산장성(虎山长城) ▲
10:59 ▲ 호산장성(虎山长城) ▲
11:00 ▲ 호산장성(虎山长城) ▲
압록강가에서 시작한 好山의 산줄기를 따라 축성한 산성으로 그 유명한 만리장성의 시작되는 곳이라고 한다.
자연석이 아닌 내화벽돌을 구어 축성하였으며, 한국의 수원성을 축성할 당시 중국의 벽돌 굽는 기술을 전수받아 시공하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도 있고 관광객이 참 많았다.
11:00 ▲ 호산장성(虎山长城) ▲
11:04 ▲ 호산장성(虎山长城) ▲
11:05 ▲ 호산장성 8호 망루(虎山长城) ▲
11:20 ▲ 호산장성(虎山长城) ▲
11:20 ▲ 호산장성(虎山长城) ▲
호산장성(虎山长城) 시작점과 압록강
길어지는 만리장성, 늘어나는 역사왜곡 (호산장성을 가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압록강변 호산에 만리장성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호산에서 만리장성의 석축을 발견했고 그 위에 새롭게 성을 쌓았다고 주장한다. 학술적 증거는 없다.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없이 서둘러 장성 신축 공사를 착수했다.
2009년 9월 25일. 국가문물국 '명 장성 연장' 선포에서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2551.8km가 늘어나 8851.8km가 되었음을 발표한다. 새롭게 선포한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 압록강번의 동산시 호산성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명대 만리장성은 압록강까지 이르게 된다. 만리장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며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이미 역사가 만리장성의 길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기존의 동단기점이 ‘신해관’이 아니라 ‘호산장성’임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길이 늘리기의 수법으로 보이지 않는다.
2012년 6월,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의 길이에 대한 발표를 한다.
2만 1196.18km. 동쪽으로 늘어난 만리장성에 중국의 성이 아닌 고구려와 발해의 성이 포함되어 있다.
늘어난 만리장성의 의도가 보인다.
가는 곳마다 호산장성은 ‘만리장성 동단기점’을 강조한다. 한글로도 표시되어 있다. ‘만리장성의 시작’이라는 ‘자부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아님 한국에게 가리고 싶은 ‘진실’이 있어서 일까. 중국이 신축한 성벽 아래에는 또 하나의 고구려식 석축, 진실이 깔려있다.
깔려있는 진실,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
당나라군이 압록강을 거슬러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성이다.
중국 정부는 성터만 남아 있던 이곳을 1990년대 정비하고 새롭게 성을 쌓아 호산장성이라 부른 것이다.
이곳 박물관에는 고구려와 관계없는 한나라 시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호산장성의 힘찬 필체의 현판이 요란히도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은 볼록, 뒤는 뾰족한 전형적인 고구려양식의 쐐기돌이 선명한 현판 아래 잃어버린 고구려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한다.
1991년 호산 일대를 발굴한 중국 조사단은 쐐기돌로 쌓은 석축과 대형 우물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이곳에 고구려의 대형 성벽터가 있었다는 발굴 결과를 정리하였다.
1994년, 전 요령성박물관장 왕면후가 집필한 <고구려 고성연구>에서는, 고구려의 ‘박작성’은 단동의 호산산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고구려의 ‘박작성’은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의 하나이다.
이 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 기사에서 처음 나타난다.
645년(보장왕 4)에 당태종의 대규모 고구려 침략이 실패한 지 3년 후인 648년에 태종은 설만철로 하여금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박작성을 공격케 하였다. 설만철이 압록강을 거슬러 박작성 남쪽 40여리 지점에 진영을 갖추자,
당시 박작성 성주 소부손이 1만 여 명의 군대로 대항하여 성을 지켰으며, 고구려 장군 고문이 오골성과 안시성의 군대
3만 여 기를 거느리고 구원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중국은 이 모든 역사의 증언을 묵과하고 있다.
자료 헬스 뉴스
http://healthtomato.com/view.aspx?seq=592271
11:21 ▲ 호산장성 3호 망루(虎山长城) ▲
11:21 ▲ 호산장성 3호 망루(虎山长城) ▲
3호 망루에서 조망되는 곳 안내하고 있다.
11:22 ▲ 호산장성 3호 망루(虎山长城) ▲
박물관으로 가는 계단길이다. 시간여유가 없어 가보진 않았다.
11:26 ▲ 호산장성 3호 망루(虎山长城) ▲
11:36 ▲ 호산장성 3호 망루(虎山长城) ▲
국경초소가 보이는 곳이 국경선이며 위에 보이는 곳이 압록강.
11:39 ▲ 호산장성 3호 망루(虎山长城) ▲
압록강이 눈앞에 조망된다.
제일 높은 3호 망루에 올라서니 앞록강과 그 건너 북한지역이 보이고 바로 아래 샛강이 국경선이라는데 조그마한 다리 양쪽에
초소가 있었다. 가이드가 시간이 없다고 재촉해 내려가 보지는 못하고 되돌아 내려왔다.
11:53 ▲ 호산장성(虎山长城) 안내판 ▲
중국의 입맛에 맞도록 장기적인 계획으로 역사왜곡을 밀어 붙혀서 나온 이런 자료는 신뢰성이 없다.
11:53 ▲ 호산장성(虎山长城) 안내판 ▲
11:54 ▲ 호산(虎山) 표지석 ▲
후산장성(虎山长城)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추정
후산(虎山)은 생김새가 누워 있는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압록강 하구에 있던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박작성은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1990년 중국이 이곳에 새롭게 명나라식 장성을 쌓고 관광지로 개방한 것이다.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후 산 장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며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하이관(山海关)이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안다.
박작성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려서 한국인에게 외면받을 법하지만, 북한의 산하가 지척에서 보이기 때문에 많이들 오른다.
총 길이는 1,250m 정도로 산등성이를 따라 제법 가파르게 이어진다. 압록강에서 바라보는 신의주가 멀게 느껴졌다면 후산 장성으로 가 보자. 봄이면 드넓은 옥수수밭에서 북한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장성 자체로 평가한다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다.
자료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77900387
11:56 ▲ 호산장성(虎山长城) ▲
공원내의 길거리 장사꾼
광장에서 다시 이동, 산성망루에서 보았던 샛강 국경선을 보러 가는 길옆의 과일노점 아줌마가 추가 달린 계량저울에 사과를 달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11:56 ▲ 호산장성(虎山长城) ▲
11:59 ▲ 호산장성(虎山长城) ▲
한 발짝 건너 가면 북조선이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一步踏이라 새긴 표지석 뒤로 국경선 샛강이 흐르는 건너에는 나무와 풀의 숲이다.
숲 속에 초병들이 잠복해 있어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된단다.
조금씩 뿌리던 비가 마구 쏟아져 1,000원에 우산을 파는 노점상 재고가 금방 바닥이나 버렸다.
11:59 ▲ 호산장성(虎山长城) ▲
이 개천에서 보트를 태워주는 영업을 하는 모양이다.
12:00 ▲ 호산장성(虎山长城) ▲
이 개천이 국경선..건너가면 북한지역이다.
14:08 ▲ 발맛사지.안마소(단동시) ▲
한 시간 정도 걸려 단동시내에 당도, 여행사 사장의 서비스로 전원이 발안마소에 들렸다.
50여 분간 발을 위주로 안마하고 마무리로 부분 몸 안마.
전문 서비스 업종으로 간호학원 같은 곳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추가로 돈을 내면 전신 안마도 가능하다고 한다.
14:34 ▲ 한식당에서 중식(단동시) ▲
안마소를 나와 조선족이 운영하는 룡가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단동항을 향해 가다가 중간에 간단한 쇼핑매장을 들려(오후3시), 중국돈 200위엔을 중국 전통녹차 두개구입으로 소진했다.
빗줄기는 계속 내리는 속을 이동하여 단동항에 도착. (오후4시)
다섯째날 2004.08.03.(화) 단동항(중국)-귀국길. |
17:35 ▲ 귀국뱃길(단동항) ▲
단동항 출입국장은 협소한데 사람이 많아 출국수속 하는 줄이 길고 복잡하다.
인천항에서 출국수속 후에 빗줄기 속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올때 탔던 그 여객선 같은 방에 여장을 풀었다.
17:35 ▲ 귀국뱃길(단동항) ▲
17:38 ▲ 귀국뱃길(단동항) ▲
18:39 ▲ 귀국뱃길(단동항) ▲
오후 6시30분 배가 움직이기 시작, 인천을 향해 비 내리는 궂은 날씨의 단동항을 출발했다.
한 시간 정도를 지났는데도 항로 양옆측은 갯뻘이 보여 뱃길폭이 아주 좁은 외통수 길인가 보다.
18:38 ▲ 귀국뱃길(단동항) ▲
18:40 ▲ 귀국뱃길(단동항) ▲
18:48 ▲ 귀국뱃길(단동항) ▲
여섯째날 2004.08.04.(수) 단동항(중국)-귀국길.선상일박-인천항-귀가 |
◈ 2004.08.04(수) 제6일 날씨 : 맑고 무더움
아침식사 후 상갑판으로 갔다.
쾌청한 날씨다.
오전7시, 핸드폰에 뜨는 안테나 표시가 명멸한다.
문자를 보내는데 핸드폰은 사용을 별로 해보지 않아 세 번이나 송출을 실패하고 네 번째 성공하고 나니, 안테나 감도가 완전히 떠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에 효숙과 반갑게 통화, 찬영이 출근시키고 아침산행 중이란다.(오전7시25분)
성희는 안 일어났는지 전화를 안받아 나중에 문자로 교신했고, 출근길의 찬영이와도 통화했다.
이번 여행을 무사하게 마무리함에 있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효숙을 비롯한 우리 가족과 진행을 했던 모든 이에게 감사를 드린다.
09:07 ▲ 귀국뱃길 ▲
09:07 ▲ 귀국뱃길 ▲
09:08 ▲ 귀국뱃길 ▲
09:09 ▲ 귀국뱃길 ▲
09:56 ▲ 귀국뱃길(인천항) ▲
09:59 ▲ 귀국뱃길(인천항) ▲
10시 조금 지나 인천항 부두에 도착했다.
예인선이 이 큰 여객선체를 부두로 안전하게 밀고 들어가는 모습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09:59 ▲ 귀국뱃길(인천항) ▲
10:00 ▲ 귀국뱃길(인천항) ▲
10:05 ▲ 귀국뱃길(인천항) ▲
10:07 ▲ 부두 정박준비(인천항) ▲
10:07 ▲ 인천항 부두 ▲
검역은 비디오 같은 장치로 하는데 온도계 귓속측정에 비해 첨단화 된 것 같다.
세관과 법무 입국신고로 입국절차 끝!
남은 달러를 환전하고 터미널을 나서니 출발 하던날 만큼이나 무척 무더웠다.
택시로 인천 역까지 와서 커피 한잔을 하고, 전철에 올라 주안 역에서 급행으로 바꾸어 탔다.
신도림 역에서 상옥과 헤어져 나와서 버스를 타고 12시 넘어 한시 가까이 되어 집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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