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격려 - 이케다 SGI 회장과 서원(誓願)의 동지 (12)
밝고 강한 ‘서민의 도시’
〘도쿄 아라카와〙
“이케다(池田) 선생님이 도착하셨으니까 남자부는 마중 나가세요!”
장년부 간부의 목소리에 많은 청년이 일제히 뛰어나갔다.
국철에 다니는 닛포리역에 이케다 SGI 회장이 도착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지역회원이 10퍼센트 넘게 확대되어 도쿄 아라카와 총구의 원점이 된 ‘하계블록지도’’가 시작된 날이다.
1957년 8월 8일,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사실무근의 선거위반 용의로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구류되었다가 출옥한 지 3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도경제성장의 여명기, 이케다 SGI 회장은 일본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듯 사는 도쿄의 서민 동네인 아라카와에 어떠한 권력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는 ‘서민의 도시’를 구축하자고 투쟁을 시작했다. 스물아홉 살의 여름이었다.
진실이 이긴다!
실제로 마중을 나온 사람은 이케다 지로(작고)와 열아홉 살이던 에두아르도 다구치(일본이름 다구치 가쓰시게)였다.
다구치는 지금 브라질SGI 의장이다.
다구치가 택시를 불러 좌담회장으로 가는 길을 설명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 하자 이케다 SGI 회장이 불렀다.
“함께 갑시다.”
다구치는 아버지를 잃고 매우 가난했을 때 어머니 미쓰(작고)가 신심을 시작한 일, 신문배달을 하며 집안 생계를 도와온 학생시정의 노고까지 묻는 대로 말했다.
그때 이케다 SGI 회장의 한마디가 온 몸을 관통했다.
“훗날 일본 전국을 뛰어다니는 인재가 되세요. 청년에게 중요한 것은 ‘진지함’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합니다.”
1971년, 브라질로 건너가 일본뿐 아니라 ‘세계광포에 모범적인 이사장’이 되었다. “브라질로 건너간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어도 잘 알아듣지 못해 말로 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실과 진지함, 이 지도대로 관철했습니다.”
8일 회합 때 다구치는 건물 밖 정리담당으로 밖에 서 있는데 한 부인부가 빙수를 주며 말했다.
“대기실에서 선생님에게 빙수를 드리자 ‘저 청년에게도 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시며 ‘나만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을 격려하시고 또 회관 밖에 있는 나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빙수를 급하게 먹는데 머리가 ‘띵’ 하며 저렸다. 그날의 불가사의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다구치의 좌우명인 ‘진실’과 ‘진지함’은 어머니 미쓰의 신심에서 이어 받았다.
미쓰는 어렸을 적부터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 겨우 히라가나만 읽고 쓸 수 있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모든 살림살이를 잃고 전쟁 후, 남편인 규사쿠도 결핵으로 여의었다.
1953년 오직 빛을 바라며 입회했다. 장남인 다구치가 기념문을 히라가나로 써주어 열심히 근행을 외우며 학회활동을 시작했다.
“언제 들어가도 어머니는 늘 창제를 가고 계셨습니다.”(셋째딸 요네다 아키에)
“처음에는 절복하러 가도 ‘너네 집은 가난하잖아’ 하며 바보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지역 분들이 어머니의 인품과 확신을 느껴 계속 입회했습니다.”(넷째딸 이시이 토모코)
어머니는 지역의 우인과 가족 그리고 친지를 계속 입회 시키고 묵묵히 광포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그러한 음지에서의 공로자를 결코 모른 척 하지 않았습니다.
1978년 3월, 일본 전국의 선구적인 대형회관 건설로 ‘아리카와문화회관’이 완공되자 1978년에 여덟 번, 1979년에 한 번, 1980년에 두 번 방문했다. 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 속에 아라카와의 공전(共戰)하는 동지와 만남을 이어갔다.
1980년 1월 6일, 미쓰가 아리카와회관의 간담회에 초대받았다.
뒤쪽에 앉은 미쓰가 사람들을 헤집고 이케다 SGI 회장 앞으로 나갔다.
“아들이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이케다 SGI 회장에게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다정하게 “아니요,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은 저입니다.” 하며 기념촬영을 제안해 두 사람은 기념촬영을 했다.
미쓰는 생애 세 번 이케다 SGI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사본이 어머니의 집을 물려받은 차남 다구치 쇼우고(아라카와도다구 부본부장) 부부의 집에 남아 있다.
‘선생님의 정성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저도 계속 나이에 지지 않고 음지에서 힘이 되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읽기 힘든 글씨로 씌어진 한 글자 한 글자에 존귀한 ‘창가학회의 진실’이 빛난다.
‘아리카와문화’ 35주년
같은 날인 1월 6일 간담회에서 이케다 SGI 회장이 뒤쪽에 있는 한 장년부를 보았다.
“이쪽으로 와주세요.”
장년부는 이시즈 고우지(작고)였다. 1957년 아라카와 지도 때 함께 투쟁한 동지였다.
“이분은 ‘아리카와의 오쿠보 히코자에몬’으로 열심히 노고하신 분입니다.”
모두에게 소개했다.
오쿠보 히코자에몬은 자신의 출세보다 오로지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던 무사다.
이시즈도 마찬가지로 아라카와 광포를 받쳐준 무명(無名)의 영웅 중 한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옛날 일을 기억하시는 구나.’ 신심을 관철한 인생이 모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1957년 8월 12일, 구내 구라타니 댁(당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거듭되는 이케다 SGI 회장의 따뜻한 말에 블록장(당시) 이시즈는 아직 역직이 없는 회원을 데리고 방문격려 간일을 말했다.
이케다 SGI 회장은 “그래도 좋습니다. 역직은 관계없습니다. 당신은 ‘아라카와의 오쿠보 히코자에몬’이 되어 힘써 주세요!”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 작은 기억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시즈는 1985년, 여든아홉 살로 타계(他界)했다. 그러나 아라카와 광포의 뜻은 지금 증손자 이시즈 후미코(여자부)와 미쓰요(女지구리더) 그리고 요우이치(男지구리더)에게 이어졌다.
아리카와 이케다구의 오구혼쵸지부는 지부회합에서 이케다 SGI회장을 맞은 역사를 긍지로 삼고 있다.
1978년 6월 30일, 학회가 ‘광포로 달려라’를 발표한 학생부간부회와 같은 시간에 아라카와문화회관에 모여 있었다.
오후 7시 반쯤 회합이 끝나고 동지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케다 SGI 회장이 나타났다.
“선생님은 긴 시간 학생부를 격려한 뒤였음에도 불수하고 굉장한 기세로 들어와 ‘근행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지부장 이치카와 구니오(아라카와이게다구 주사)는 상황이 빠르게 전개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념촬영을 합시다.”
이케다 SGI 회장의 제안으로 각 부별로 1065명이 기념촬영을 했다. 나중에 모두 사진을 받았다.
이치카와는 “그 격려를 받은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선생님이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격려하고 싶다는 훌륭한 마음으로 오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당시 지부부인부장이었던 부인 요시코(아라카와이케다구 부인부주사)도 “기념사진을 지금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함께입니다.’ 지면 안 됩니다.’ 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오구혼쵸지부(다카하시 게이키지부장)는 해마다 6월 30일을 중심으로 원점을 서로 확인하고 홍교와 세이쿄신문 그리고 인재확대로 아리카와를 이끌었다. 35주년이 되는 2013년을 맞아 ‘반드시 승리로 장식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지금 아리카와의 벗은 2.20 ‘구의 날’을 기념하는 2월을 나아간다.
“나는 아리카와를 사랑한다.”
“아리카와는 좋은 곳이다.”
이케다 SGI 회장은 1957년 그 여름부터 계속 말했다.
1956년부터 구내에 네 개의 노선과 아홉 개의 역이 탄생했다.
아라카와 마키구치의 활동무대인 미나미센주는 대규모의 재개발이 진행되어 오래된 전통에 새로운 문화가 융합한 미래지향적인 지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사람이 바뀌고 마을은 변해도 밝고 저돌적인 아리카와 가족의 광선유포를 위한 힘은 변하지 않는다.
스승을 바라고 스승과 함께 구축한 ‘서민의 도시’이다.
태양의 격려 (16) 밝고 강한 ‘서민의 도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