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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장 11절).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 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체제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인 카톨릭 신자들이 있다
어쨌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부인이 아니라 첨가로 인해 배교하게 된 카톨릭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카톨릭의 위장술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영국)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 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 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인의 유물과 각종 형상을 숭배케 하는 죄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영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영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교황 절대무오설은 성경적인가?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다"라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죄를 고백할 대상은 사제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 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마리아 무염시태설과 몽소승천설은 명백한 이단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 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들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죽은 성인들의 공덕을 얻기 위해 빌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선행과 공덕, 세례로 의롭다 함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카톨릭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 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 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 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 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카톨릭교회의 규율 순종이 더 중시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 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 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구원의 확신 배제하는 고해성사와 연옥 교리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 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루터,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 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 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한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 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매스컴에 비치는 공손하고 친절하며 융통성 있어 보이는 모습의 이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라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적 기독교만이 카톨릭에 맞설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 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 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마틴 로이드존스/ 전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안티오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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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톨릭을 반대한다는 것은 거기에 속한 신부님들이나 신도들의 아름다운 선행과 봉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분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개신교도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 더 많을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는 내일 방한하는 프란체스코 교황에게서도 배울 점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배울 것은 배우되 그 때문에 반대해야 할 것을 희석시켜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은 가톨릭이 가진 비성경적인 교리들입니다. 타종교라면 객관적인 존중으로 끝나겠지만 기독교라는 이름을 주장하기에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비판적인 분별은 꼭 필요합니다.
가톨릭 안에 있는 비성경적인 것들과 개신교 안에 있는 문제점들을 인식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유독 가톨릭에 대해서만은 비판하길 꺼리거나 지나치게 조심하려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 종교다원주의를 통한 종교통합을 막지 못하고 그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게 됩니다. 성경적 기준이 모호하게 흐려진 인본주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것이며, 종교통합은 그런 분위기에서 선명한 복음의 터를 약화시킵니다.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사회주의 기독교와 하나님 나라 복음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듯한 목소리들이 자주 나오는 걸 보면서 교황의 행보와 평판을 부러워하는 듯한 개신교의 요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불편합니다.
가톨릭은 진리도 인정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우상을 허용함으로써 결국 진리를 허물어버립니다. 진리를 가장한 거짓을 분별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가 마지막때에 더욱 기승을 부릴 영적 미혹의 가장 민감한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을 어떻게 대하고 이해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 분별력도 대충 짐작되는 시대에 이미 접어든 것 같습니다.
개신교 일각에서 가톨릭과 신앙과 직제를 일치시키자는 움직임마저 일어나는 혼탁한 때에 가톨릭의 교묘한 이중성과 종교개혁기 이후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는 오랜 허점을 외과의사의 메스로 도려내듯 예리하게 짚어내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탁월한 분별력과 서슬퍼런 외침은 개신교인들로 하여금 가톨릭에 대해 다시는 일말의 미련도 두지 않게 해줄 확고한 나침반이 되리라 믿습니다.
카톨릭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모체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더군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음녀가 바로 지금의 교황인것이 너무 들어맞는듯 하여 놀랍니다. 오래전부터 예수회를 통해서 신실한 기독인들을 잔인하게 죽여왔고 선행을 강조하지만 교황을 하나님 위에 두는것 자체는 우상숭배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십계명도 변개하여 우상숭배 말라라는 빼버리고 이유는 자신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기에... 삭제하거나 첨가하여 자신들 나름의 십계명을 사용하는 종교집단이 과연 하나님편에 서 있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마지막때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도 알곡과 쭉정이로 나눠질듯 합니다
성경을 알고 깨어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어찌 카톨릭과 짝을 할 수 있을까요 종교다원주의 자체가 잘못된 교리인데...구원의 길이 주님 한 분밖에 없다고 엄연히 성경에 말씀 해두셨는데 데체 그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다는 말인지요! 요즘 교황의 모습을 보면 저는 소름이 끼칩니다 어쩌면 그리도 평화주의인척 인도주의인척 하면서 사람들 환심을 사는지....거기에 미혹되는 영은 분명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생각도 들어 그들을 위해 전하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성경에도 나와있듯이 그들의 결국은 권세와 손잡은 나라의 왕들과 그들 잇속을 챙기는 모든 악한세력들이 함께 멸망하는 것이겠지요
핵심적인 내용 잘 용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서..요약본으로 만들어 카톡이나 밴드용으로 전파했으면 하네요...
카톨릭과 개신교 비교가 많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여러 형식에 현혹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좀 더 복음에 진리를 잘 풀어서 알리는것이 필요합니다.
공감합니다.
더 많은 부분이 았지만 평신도들에게 윤곽을 전해 주기에는 좋은 자료입니다.
이단은 카톨릭에 있습니까? 개신교에 있습니까 극소수의 이단으로 개신교 전체를 음녀로 정죄할 수 있나요?
카톨릭도 구원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합니다.그럼 카톨릭이 기독교 입니까? 불교입니까?기독교 아닙니까
사탄은 개신교도 왜곡하여 많이 더러워졌습니다.카톨릭도 그런 시각으로 이해하고 서로 비난하기 보다는 권면하는 가운데 공동선을 협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럴 때 개신교가 겸손한 종교라고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톨릭의 교리는 비성경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물론, 개신교의 어떤 종교단체들에게서도 비성경적인 요소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성경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행실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느끼는 두려움은 카톨릭의 문제보다 개신교 교회안에 나타난 가톨릭의 이단적 요소들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많은 부분에서 정통 보수교회라 칭해지는 곳에도 카톨릭의 이단적인 요소들이 문득 문득 느껴질때가 있읍니다
제가 잘못 알거나 느끼는 건지요? 세세한 예를 들어야하는데 먼저 다른 분들도 혹시 그런 것을 느끼신 적이 있으신지 알고 십습니다 카톨릭의 잘못된 점을 혹시 개신교에서 지적하기 전에 먼저 개신교 안에 그런 요소가 있다면 먼저 고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귀한 글을 올려 주심 감사드립니다. 그저 맨 바닥에서 신앙생활 남따라 가는 분들에게는 보다 분명한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데..... 개신교의 젊은 청년들도 카돌릭에 대한 이해가 적어 그저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 흔들릴 때가 많은데 이 글이 귀한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