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 배신 -
터널
김미조
아무것도 몰랐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헤매고 있는 곳마저도
안 맞는 신발을 신고
두 발이 아프도록 걷고 걸어야 했다
무거운 가방도 짊어지고
모르는 길을 기웃, 기웃거렸다
스물이 되고 서른이 넘었다
이제 똑바로 서야지
시선은 앞으로
*김미조: 산청군 생초면 출신, 경성대학교 국문학과 중퇴, 현 필봉 문학회 편집 간사, 지리산 힐링 시낭송회 회원.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그새 T.V를 켜놓고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각자 제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내가 와도 누구 하나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일상은 이런 것이었다. 가족이라도 각각의 외로움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거였다. 간단하게 씻고 내 방에 들어와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삶은 부조리한 것, 사랑 또한 그러한 것.’
오후 무렵까지 나는 내내 잤다. 목이 마르면 잠시 깨어 물을 마셨고,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물었다. 4월은 역시 잔인한 달이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멍한 상태로 집 안에서만 보냈다.
문자가 여러 통 도착해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문자는 없었다. 거의 친구인 한수의 걱정 반, 충고 반이 담겨 있는 문자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언제 나갔는지 집안에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없었다. 남겨진 존재란 게 이런 것일까. 나는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로빈슨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나는 불현듯 옷을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도저히 이 상태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야 했다. 만나서 어떤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다. 모처럼의 서울행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하나 사서 택시를 탔다. 무산 시에서 오후 무렵에 기차를 탔는데 서울역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했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비는 구슬펐고 처량했다.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받지 않을 거로 예상했으므로 나는 직접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일전에 그녀에게 언뜻 들은 집 주소를 휴대전화 메모난에 기록해 둔 건 잘한 일이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신촌에서 홍익대 방면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되었다.
아파트 입구에 꽃집이 보였다. 나는 이곳에서 장미꽃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는 무작정 102동 경비실로 들어갔다. 경비실에는 마침 사람 좋아 보이는 초로의 영감이 있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나는 최대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꽃 배달을 대신 왔거든요. 그런데 동수는 알지만, 고객이 사는 호수를 잘 몰라서요.”
영감은 날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고객의 이름을 물었다.
“정유희입니다.”
“전화번호도 없어요?”
“네. 그런 것도 없답니다.”
“그래요? 가만있어 보자, 입주민 명단 장부가 있을 터인데.”
그는 고맙게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었다. 그는 이내 안경을 끼고 입주민 명단 장부를 살펴보았다.
“어. 여기 있네. 1214호. 정유희.”
그는 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나는 그만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옆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경비실입니다. 1214호 정유희 씨에게 꽃 배달이 왔거든요. 바꿔주실래요?”
“어머. 언니 지금 없는데요?”
“그러면 어떡하실래요. 동생분이 직접 내려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언니분에게 연락해서 들어올 때 경비실에 들러 찾아가시겠습니까?”
“네, 곧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으니 경비실에 들러라 할게요.”
“알겠습니다.”
인터폰은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다 들렸다. 나는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지갑에서 얼마의 현금을 꺼내 건네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거로? 허허. 그래, 댁이야말로 어떡하실래요? 꽃을 두고 가실래요. 아니면 기다렸다 직접 줄래요?”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중요한 분의 부탁이라서요. 제가 확인을 해야 하거든요.”
“그럼, 그렇게 하쇼. 편하게 있어요. 난 순찰 시간이라 잠시 돌고 올 테니.”
경비원은 그렇게 말하고선 나를 혼자 둔 채, 손전등을 들고 나가버렸다. 작은 성의를 표시하는 것은 이럴 때 유용했다. 나는 경비실에 앉아 비 내리는 아파트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말로 언니가 곧 들어온다 했으니 이곳에서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과 불안감이 엄습해오면서 나는 이곳에서 마냥 그녀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경비원이 오는 시간에 맞춰, 양해를 구한 뒤에 그녀가 사는 아파트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린 지 대략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대략 9시경이었다.
예감에 그녀가 올 것 같아 나는 우산을 접고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마침 검은 승용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언뜻 보니 조수석에 그녀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경비실에 들어가 꽃을 챙겨 아파트 출입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심장이 급격하게 뛰고 있었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침내 승용차에서 그녀가 내렸다. 승용차는 시동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금방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태워준 승용차의 주인이 못내 궁금했다. 그런데 그녀가 우산을 펼치자 운전석에 있던 어떤 남자가 내리는 게 아닌가. 나는 얼른 화단 쪽으로 숨었다. 내가 있는 쪽은 컴컴했지만, 그녀와 사내가 있는 쪽은 아파트 출입문 쪽이어서 환했다. 사내는 그녀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녀를 가볍게 포옹했다. 순간, 나는 전율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굳이 연인이 아니더라도 가볍게 작별의 의미로 포옹 정도는 하는 것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장면에 나는 그만 내가 들고 있던 장미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포옹을 넘어 사내와 진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뭐예요? 집 앞에서.”
“어때?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 정도 애정 표시는 해야지.”
“앞으론 내게 잘할 거죠?”
“그래, 이제 다 끝났어. 우리 앞날은 화창해. ”
그와 사내가 나눈 대화가 여과 없이 내 귀에 들려왔다. 승용차는 출발했고 그녀는 한참이나 출입구 앞에 서 있다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장미꽃뿐만 아니라, 쓰고 있던 우산도 화단에 둔 채, 아파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제야 나는 친구 한수가 한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배신, 이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나는 충격을 넘어 정신이 붕괴할 정도로 아팠다. 어제 나는 솔직히 그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슬픔과 분노가 내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날 욕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러 서울까지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나는 못 볼 것을 보았고 그녀가 다른 사내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똑똑히 확인했다.
낯선 도시에서 어제처럼 전화를 걸어 술 한잔 나눌 친구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오늘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그래도 그녀의 아파트 근처에서 뭘 사 먹는 것은 오히려 날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일단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갈까요?”
“무산 시로 갑시다.”
나는 엉뚱하게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에 무산 시요? 요금이 많이 나올 텐데.”
“정확히 무산 시 근처 양산의 펜션입니다. 주소는 조금 있다 불러드릴게요. 빨리 가주신다면 요금은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기사에게 그렇게 말하고선 나는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 과장님. 오늘 못 오신다, 그러지 않았어요?”
“지금 서울에서 출발해. 기다려주면 좋겠어.”
“서울요? 에이 그리 멀리서? 알겠어요. 고기랑 술이랑 넉넉하게 남겨둘게요. 빨리 오세요.”
연희와 몇몇 직원들은 오늘부터 월요일까지 2박 3일로 양산의 펜션에서 공로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분기마다 실적이 좋은 직원 몇을 뽑아 사장이 별도로 운영하는 펜션을 제공하여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연희 외에 만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벽 2시경, 양산 펜션에 도착하니 연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원래부터 술을 좋아하지 않는 연희는 내 전화를 받고 한 방울의 술도 먹지 않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이렇게 하는 데에는 모범직원 추천에 내 입김이 작용한 까닭이었다.
“서울엔 왜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일단 우리, 테라스에 나갈까? 여긴 너무 답답해. 가서 술 몇 병과 간단한 안주만 가져와.”
양산에 도착하니 비는 그쳤다. 테라스는 약간 쌀쌀했으나 피워놓은 불로 인해 견딜 만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일단 술부터 마셨다. 연희가 앞에서 연방 고기를 구워 내 접시에 담아두었으나 여전히 입맛은 없었다.
“혹시 유희랑 관계되는 일이예요?”
술을 마시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제야 나는 연희에게 금요일에 있었던 일부터 오늘까지의 이야기를 대충 꺼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실이에요. 온 빌딩에서 과장님과 유희와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소문이 다 퍼져있어요.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다 하니 정말 문제네요.”
그녀는 날 위로한다 했으나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과장님은 뭣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시는 건가요?”
나는 차마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다 그녀에게 모두 다 털어놓기로 했다.
“유희에게 남자가 있어. 그게 너무 화가 나. 그녀는 날 속였어.”
그런데 연희의 표정이 의외였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자 야단을 칠 때의 그 표정이었다. 그녀는 반문했다.
“과장님은 그럼, 모르고 계셨어요?”
“뭐?”
“세상에나. 유희 정도면 어디에서나 남자가 들끓어요. 그 정도 외모에 이때까지 남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구요. 저도 얼핏 유희에게 듣긴 들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 교제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어요. 단지, 어떤 사정 때문에 한동안 만나지 않다가 얼마 전부터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더군요.”
“어떤 사정?”
“그야 전 모르죠. 유희가 그것까진 말해주지 않았어요.”
나는 연희의 말에 어제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본 사내를 떠올렸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외모를 소유한 나보다 젊은 남자였다. 갑자기 분노와 질투심이 분수에서 물이 솟구치듯 뿜어나왔다.
그런데도 밤하늘의 별은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