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나일 수 있는 곳 >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라며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던 공간의 그윽한 공기도 생각납니다.
학교 음악실이나 농구장 벤치, 학원 강의실 맨 뒷자리를 우리만의 아지트라 찜해두었습니다.
호기심 많고 예민한 십 대에게는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으니까요.
김혜진 작가의 청소년 소설 《프루스트 클럽》의 주인공 윤오와 나원이, 효은이는
각자 나름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윤오는 이전 학교에서 생긴 어떤 사건 이후
새 학교에 전학을 왔지만 역시 이곳에서도 쉽게 아이들 속으로 물들지 못합니다.
나원이는 영혼이 자유로운 학교 밖 청소년입니다.
한없이 명랑해 보이지만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보입니다.
윤오와 같은 반인 효은이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아
언뜻 보면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효은이의 가정에는 어두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어느 날 윤오가 도서관 옆 좁은 골목 한구석에 있는 낡은 카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찾아내면서 세 사람과 카페의 인연은 시작됩니다.
“나, 오데뜨라고도 불리거든.”(29쪽)
만나자마자 반말을 하는데도 기분 나쁘지 않은 유쾌한 사장님은
세 사람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독서모임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
잘 쓰지 않는 공간인 카페 창고를 열어줍니다.
그곳에서 윤오와 나원이, 효은이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함께 읽으며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서서히 열게 됩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이 안전한 공간에서
이들은 지금까지 자기 안에 꽁꽁 숨겨왔던 깊은 상처를 용기 내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윤오가 오래 묵은 상처를 드러낸 그날,
오데뜨는 뜨겁고 고소한 쌀죽을 끓여 내어 줍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죽 한 그릇과
내 아픔을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소중한 공간.
그곳에서 윤오의 상처가 아물어 “아름다운 흉터”(174쪽)가 되어 갑니다.
청소년이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시공간은 청소년의 성장에 무척 중요합니다.
나의 꿈을 이야기할 때 비웃음이 아닌 응원을 받을 수 있고,
나의 아픔을 그대로 들어주며 상처를 보듬어주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청소년은 존중과 신뢰, 희망을 배우고 자존감을 키워갑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전국에 청소년 전용 공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에서 운영하는 청소년문화공간 JU(주)와
가톨릭청소년 이동쉼터 서울A지T(아지트) 등도
청소년의 현재와 미래를 지원하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청소년이 충분한 쉼을 누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서
더 많은 ‘오데뜨’가 더 많은 ‘윤오’에게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건넬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임여주 아녜스 |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