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공원(漢陽公園)
갑작스럽고 엉뚱한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뜬금없다고 한다. 벌건 대낮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을 못 했다. 첫 대면은 생뚱맞다 못해 아연실색이다. 물론 남쪽 지리산 근처에서 태어나 전국 각지를 떠돌다 느지막에 수도권에 터를 잡고 사는 시골고라리 이니 서울에 대해 아는 것이 일천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산이 어떤 곳인가. 백두산 다음으로 애국심을 고양하던 곳이다. 국사당에 봉수대가 있는 목멱산, 서울의 남산에는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에 불변하는 한국인의 기상 푸른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알았다. 그런데 싯누런 사암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한자가 음각된 우람한 돌덩이가 남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서있다. 뜬금없다.
광화문광장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남대문시장으로 들어선다.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경기가 바닥이라는데 그래도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의외로 많아 보인다. 며칠째 여름비가 내린다. 어깨가 부딪히고 시야가 가려져 우산을 펼칠 수가 없다. 그냥 비를 맞고 걷는다. 계묘년 보릿고개에 왔던 그 지긋지긋한 긴 장마가 생각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으니 한기가 느껴진다. 외국의 젊은이들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문신을 드러내고 걸어 다닌다. 이슬람 국가에서 온 여자들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맨 채 길거리에 서서 빵을 사 먹고 있다. 정치 불안이나 치안을 염려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기 힘들다. 세계인으로부터 아직은 괜찮은 나라로 생각되는 듯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나무하러 가는데 개 따라가듯이 시장 구경을 왔으니 아내가 일을 보는 동안 남산이라도 올랐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세계백화점을 돌아 나와 남산 오르는 길로 들어선다. 시멘트 옹벽이 길게 쳐진 곳에 분홍색 작은 장미들이 한참 벙글기 시작했다. 빗물이 꽃잎에 맺히면서 특유의 은은한 향이 길가에 피어난다. 남산 터널로 가는 공해 가득한 도로가 장미향이라니......
오래전 남산에 오른다고 왔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몹시 바람이 불었다. 터널 앞에 느릿느릿 기어가던 차 매연으로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낮게 내려앉은 도심의 구름과 공해가 뒤섞여 그만 남산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오늘은 싱그러운 오월이다. 아직 장미가 만개하기는 조금 이른 계절이긴 하지만 매연은 느껴지지 않고 장미 향만 가득하다.
느릿느릿 걸어서 남산을 오른다. 우산을 쓴 사람도 있고 비옷을 입은 사람도 보인다. 조금 오르니 비가 그치고 온 산이 안개로 휘감긴다. 이런 날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타워로 오를 이유가 없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며 시내를 조망할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에 올 때를 위해 케이블카 이용 매표소에 들려 가격표를 본다. 어른 왕복권이 만 오천 원이다. 요금이 싼 것 같지는 않다.
동남아에서 온 관광객 같아 보이는 일행이 가격을 보더니 입을 딱 벌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요금이 적절하니 어쩌니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냥 텅 빈 채 오가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가격으로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근처 길거리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천천히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그때다. 오른쪽 인도 공터에 마치 폐사지 표지석 같은 한양공원 표지석을 뜬금없이 만났다. 저절로 발길이 옮겨진다. 일부러 누군가가 훼손한 듯이 보이는 표지석은 흉물스러웠다. 그것도 뒷면은 글자들을 정으로 일부러 마멸한 듯 글자를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망해가던 대한 제국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왜인들이 떼를 지어살던 곳에 공원을 꾸미고 왕이 친필로 쓴 이름을 내려주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너무도 치욕적인 비석이나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 치하의 잔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쓴다. 아래 내용은 여러 자료를 찾아서 정리해 본 것이다.
1885년부터 왜인들의 도성 내 거주가 정식으로 허용되자 그들은 명동에서 충무로 일대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한양에 왜인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거류민단이 왜인을 위한 위락시설을 조성하려고 했다. 이에 그들은 1897년 남산 북쪽의 현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을 조성하고 1908년엔 한성부로부터 남산 기슭에 30만 평을 무상으로 임대 받았다. 공원 부지는 현재의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넓은 면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을사늑약 이후였으니 국권은 이미 일본에 넘어가 있었다. 태황제로 물러나 있던 고종은 칙사를 보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08년부터 조성을 시작한 한양공원은 각종 시설을 완비해 1910년 5월 29일에 정식으로 개원했다. 한양공원 개원일에 고종은 칙사를 보내 치하하고, 비석에 새겨진 글씨인 ‘한양공원’을 직접 써서 보냈다고 한다.
한양공원 개장일은 대한 제국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한일병합의 국치일이 1910년 8월 29일이므로, 정확하게 3개월 전이다. 고종은 제위를 아들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물러나 있을 때였다. 고종이 한양공원의 글씨를 써준 것이 왜인의 압박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으로 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쨌거나 너무도 치욕적이다. 나라를 내주기 직전에 침략자의 무리들에게 일국의 왕이 무슨 마음으로 저런 글씨를 써주었을까.
마음이 울적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멀리 관악산 쪽에서는 번개가 치고 뇌성도 운다. 우산을 펴들고 다시 둘레길을 걷는다. 한참을 가다 보니 이번에는 흙탕물이 내려쏟는 작은 계곡에 생뚱맞게 와룡묘라는 알림판이 보인다. 아니 서울의 남산 한복판에 제갈공명 무덤이라니...... 살펴봐야겠다.
일본 침탈의 잔재에 마음 상했는데 이건 또 무슨 나라를 세운 이래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중국인 사당이 있단 말인가. 좁고 비탈진 계단을 따라 얼마를 올라가니 마치 심산유곡에 흔히 보이는 무속인 신당 같은 기와집 몇 채가 좁게 앉아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제갈공명 석고상과 함께 관운장의 석고상이 있고 그밖에 대북, 청룡도, 삼지창 등 의식용 제구가 보인다.
좁은 경내에는 단군성전, 제석전(帝釋殿), 약사전(藥師殿), 삼성각(三星閣), 요사(寮舍), 문신각(文臣閣) 등이 함께 있어, 와룡묘가 중국 도교계의 신령을 모신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우리의 토속신앙과 결합된 무속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제갈공명이야 후한 말 삼국시대 촉나라의 재상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 사당이 있어야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와룡묘에서 내려와 다시 걷는다. 둘레길을 걷는 이들 중에는 제법 외국인들도 보인다. 단순히 관광객이 아니다. 달리기나 등산에 맞춤한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인근에 살거나 장기 체류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나라가 살만하여 벌어먹기 위해 들어와 사는 사람과 병탄한 나라에 백성의 고혈을 빨며 군림하러 온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주다. 지금처럼 경제대국,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함에 희생한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참으로 힘든 질곡의 시간을 버틴 한국인이다.
비가 그친다. 다시 푸른 오월의 하늘이 펼쳐진다. 백발의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둘레길 계단에 앉아 지금의 시국상황과 나라 걱정으로 열을 올린다. 그때 근엄한 표정을 한 양반이 느닷없이 막고 서더니 “젊은이는 어떻게 생각해?” 하며 마치 싸우기라도 할 듯이 길가는 나를 붙들고 다잡는다.
오늘은 엉뚱한 일의 연속이다. “예? 예에? 무슨 말씀이신지...... 아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고는 웃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든도 훨씬 넘어 보이는 그들이 결코 나라가 잘못 가는 방향으로 억지를 부릴 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다시 오던 길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조지훈님의 시비가 보인다. “파초우” 남산 길을 걸으며 시비를 만난 것은 그나마 위로이며 행운이다. 님의 시 한 구절을 읊는다. 오늘같이 비 내리는 날 맞춤한 시다.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아라
오늘 걸은 남산 둘레길은 이런저런 생각과 깨우침을 가져왔다. 몰랐던 사실 앞에 부끄럽고 죄스럽다. 선인들이 겪었던 어려운 시기를 너무 일찍 망각한 것은 아닐까. 무능한 정치 지도자들은 사익만 취하고 갈등과 분열 속에서 나라를 잃은 채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던 시간이 있었음을 기억은 할까.
남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라 걱정으로 목청을 높이던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귀에 쟁쟁했다.
첫댓글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린데 그것을 잊고 삽니다. 까맣게요. 잘 감상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물려줄 책임도 있습니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나라도 잃게 됩니다
어려서 김밥에 어머니와 학교 소풍 다니던 고향의 산이 간직한 아품과 한을 오늘 보았습니다.
눈은 멀쩡하나 모르는 역사를 대하니 청맹과니가 됩니다.
우리는 남산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외국 침탈의 상흔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마음이 씁쓸하더군요
모름지기 글을 쓴다는 사람은 이런 아픔의 역사를 알리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족혼이 숨쉬는 성산에 일제와 사대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