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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오드리 헵번 & 그레고리 펙
미국 파라마운트 픽쳐스에서 1954년에 만든 흑백 영화. 감독 윌리엄 와일러,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주연.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으로 알려진 영화이다. 미국에서도 150만 달러로 만들어져 1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도 성공했다. 유달리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고 세월이 지나도 인기가 엄청났다. 물론 서구권에서도 인기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한 시절을 풍미한 흘러간 수작 정도의 취급을 한다. 동아시아권에서는 2008년에도 헵번이 핸드폰 광고에 등장한다. 일본 영화지 키네마 순보가 영화 할리우드 역사상 최고 걸작 100 선정에서 이 작품이 들어갈 정도다. 불세출의 명작 정도로 취급한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이게 그렇게 명작이라니 하고 놀라워했을 정도이다.
로마를 방문한 어느 나라의[1] 공주 앤(오드리 헵번)은 꽉 짜인 스케줄에 진력이 났다. 어느날 밤 남몰래 숙소인 대사관을 빠져 나가지만, 시의(侍醫)가 준 수면제 때문에 벤치에서 깜박 잠들고 만다. 그곳을 지나가게 된 미국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는 그녀를 하숙으로 옮겨 편히 자게 한다. 이튿날 그녀가 왕녀임을 알게 되어 같이 즐겁게 로마 시내를 관광하면서 특종을 노리고 친구인 사진사를 시켜 그녀 몰래 사진을 찍게 한다. 하지만 서로가 은밀한 애정을 품기 시작하면서 특종을 단념하고 기자회견 때 사진을 공주에게 건네주며 작별을 고한다.
오드리 헵번이 앤 공주 역으로 열연,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 되었으며 아직도 그녀의 최고 배역으로 이 앤 공주 역을 꼽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렇듯이 여러 배우들이 주인공 물망에 올랐다. 원래 프랭크 캐프라가 감독을 남자 주인공은 케리 그랜트, 여주인공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할 예정이였으나, 캐프라의 제작사가 재정난으로 판권을 파라마운트에 팔았고, 감독도 윌리엄 와일러로 교체되었다.
카프라 대신 연출을 맡게 된 와일러는 제작비가 적어서, 영화전체를 흑백필름으로 하루 동안 두 남녀가 로마 시내를 구경하는 스토리로 찍었다. 그랜트는 오드리 헵번이 여주인공을 맡게 되자 "그녀와 공연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다"고 하차했지만, 10년 후 샤레이드에서 그녀와 공연한 후 "나와 공연한 여배우들 중 최고"라고 극찬했다.
또한 영화에 나오는 곳들은 거의 대부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진실의 입[2] 같은 경우엔 그 전에도 유명했으나 이 영화에 나오고부터는 그냥 1년 365일 내내 입에 팔을 집어넣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외엔 앤 공주가 스페인 광장의 계단에 앉아 젤라토를 먹는 장면이 유명했다. 하도 관광객들이 따라 한답시고 젤라토를 먹고 쓰레기를 버려대는 통에(...) 젤라토 가게는 없어지고 2012년 현재는 가방 가게가 자리잡고 있다.
헵번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숏컷은 '헵번 스타일' 이란 이름으로 21세기에도 여전히 미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 영화의 포스터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당시 포스터에는 신인인 오드리 헵번의 이름보다는 이미 명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그레고리 펙의 이름이 크게 나왔었다. 그러자 펙은 "헵번은 오스카 상이 확실할 정도로 잘 했는데 내 이름만 크게 올린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며 수정할 것을 요청했고,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크기로 나왔다고 한다.
국내에선 여러 번 더빙 방영된 바 있는데 90년대 후반 KBS 1TV에서 더빙판으로 방영할 당시 성우로 정미숙, 故 이강식이 남녀 주인공 역을 맡았다. 2016년 10월에는 OBS에서 오드리 헵번 출연작 연속 방영의 일환으로 편성한 적이 있다.
영화 자체가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으로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 지금도 종종 나오는 이야기 구조인 공주나 아가씨 등 높으신 분이 몰래 빠져나와 평범한 주인공과 데이트를 즐긴다는 소재의 오리지널이다. 이 이야기 구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카피되고 있다. 저작권도 만료되었겠다 더 거리낄 게 없다
[1].영국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영국순방을 마치고 로마에 왔다는 방송이 나온다.사실 유럽에 왕국이 영국만 있는 게 아니잖아? 네덜란드도 왕국이고 벨기에,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도 왕국이다. 그런데 80년대 말 한국에서 출시된 VHS판에서는 자막이 '미국의 공주'라고 나온다.
[2].Bocca della Verità.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라 코스메딘 성당 입구의 벽면에 있는 원형의 대리석 조각인데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이 조각된 로마시대의 유물이다.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으로 쓰였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거짓말을 한 사람이 홀르비오 신의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로 유명. 영화 속에서 앤 공주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이 걱정되어 손넣기를 주저하다가 남주인공 조 브래들리가 손을 넣다 잘린 척 연기하자 앤 공주가 놀라는 모습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수많은 사람의 손이 닿아 아랫입술이 반질반질하게 닳아있다. 현재도 입에 손을 집어넣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청초한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긴 영화다. 중후한 멋의 그레고리 펙도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유럽의 어느 나라 공주 앤(Ann)이 나라를 대표해서 유럽 순방길에 오르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런던과 암스텔담에 이은 도착지가 로마다.
공식적인 환영행사 후에 본국 대사가 주최하는 무도회가 저녁에 이어진다. 고목의 메마른 나무껍질같이 딱딱한 분위기의 행사였다. 생기 넘치는 어린 공주는 표정없고 의례적인 내외귀빈과 맞추어 춤을 추어야 했다. 공주에게는 너무나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앤 공주가 끝까지 고운 얼굴에 전아한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애처로워 보인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공주가 침대에 올랐다. 시중을 드는 백작부인은, 쉴 틈 없이 짜여진 다음 날의 행사 일정을 나열한다. 하나 하나 고분고분 듣고 있던 공주는 결국 감정을 폭발한다. 바로 침실로 들어온 의사는 신경안정제 주사를 놓는다.
아직 약효가 돌지 않았는지, 공주는 침실에 홀로 남겨지자마자 바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숙소인 대사관을 몰래 탈출한다. 곧 약 기운에 취한 공주는 로마 시내의 한 난간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 옆을 미국인 기자 조 브래들리가 우연히 지나간다.
길가에 누워있던 아가씨와 어쩌다 엮이게 된 조는, 결국 술에 취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 아가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진다. 막무가내로 잠에 취한 아가씨는 방에 들어와 정신줄을 놓고 잠에 빠진다.
대낮까지 늦잠을 잔 조는 오전에 일정이 잡힌 공주와의 기자회견을 놓친다. 황당한 마음으로 바로 신문사로 서둘러 간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공주의 모든 공식일정이 취소되었다는 대사관의 발표를 모른 체, 천연덕스럽게 기자회견에 갔다 온 것처럼 얘기하다 곧 조는 편집장에게 발각된다. 그러다 신문에 나온 공주의 사진을 보고, 집에서 자고 있는 아가씨가 그녀임을 알아차린다. 공주 관련 기사를 팔면 큰 돈을 벌 것으로 확신한 조는 편집장에게 공주와의 단독인터뷰 기사를 약속한다.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조는 잠들어 있는 공주를 깨운다. 정신을 차린 공주는 엉뚱한 곳에서 밤을 지냈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게다가 남자와 한방에 있었다는 것에 더욱 당혹해 하지만, 곧 몸에 밴 왕가의 당당함과 위엄으로 상황을 정리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오드리 햅번의 공주로서의 우아함과 격조는, 마치 연기가 아니라 그녀가 원래 공주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같이 시간을 보내자는 조의 제안을 물리친 공주는 작별인사를 하고 조의 숙소를 나온다. 대사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마 거리를 혼자 걷는 공주는 북적대는 거리의 일상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공주는 트레비 분수 옆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른다. 소녀가 여인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드리 햅번의 짧은 머리가 이렇게 영화에 처음 등장한다.
몰래 공주의 뒤를 따르던 조는 우연을 가장하여, 공주와 거리에서 다시 조우한다. 그 장면이 바로 스페인광장의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순간이다.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사진기자 친구를 불러, 공주와 같이 로마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장면의 한가닥 정도는 우리의 기억에 있을 것이다.
사진기자 친구는 라이터 사진기와 다른 사진기를 이용해 사진을 찍었으나, 공주는 아무것도 모른 체 새로 만난 인연과 함께 로마 시내를 구경 다니며 평생 처음이었을 것 같은 자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조와 함께 경찰서에 잡혀갔으나 결혼식장을 가려는 새 신랑 새 신부라고 둘러대고 나오는 소동도 겪는다. 한밤 강변의 무도회장에서 본국에서 날아온 비밀요원으로부터 납치되는 것을 피하려고 조와 함께 힘을 합쳐 그들과 맞서기도 한다. 결국, 사정을 알 리 없는 이태리 현지 경찰이 비밀요원을 잡아가고, 조와 공주는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으로 수영해서 도망 나온다.
한밤에 젖은 몸으로 한기를 느끼는 공주는, 몸을 감싸주는 조와 눈이 맞으며 첫 키스를 나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의 집으로 돌아온 공주는 옷을 말린다. 잠시, 아주 잠시, 조와 인생을 같이할 마음을 비쳤던 공주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공주의 병세를 예상할 수 없다는 뉴스를 듣고 곧 현실로 돌아온다. 자정이 되어 신발을 벗어 던지고 현실의 미천한 신분으로 돌아온 신데렐라와는 반대로 공주는 깊은 밤에 이르러 공주의 신분으로 돌아가려 한다.
조가 운전하는 차로 대사관 근처로 돌아온 공주. 차 안에서 조와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며 서로의 신분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아파한다. 공주의 잘못도 아니고 조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그네들이 처한 위치가 그네들의 사랑을 갈라놓았다. 공주가 조를 떠나 듯이, 조도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공주를 뒤로하고 차를 몰고 떠난다.
다음 날, 낌새를 눈치챈 편집장이 조의 집으로 찾아와 기사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이미 조는 공주와의 사랑을 기사로 쓸 마음이 없었다. 그 어떤 돈을 준다 해도 조는 공주와의 순수했던 사랑을 팔아 이익을 취할 수 없었다. 그것은 조가 사랑한 공주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지만, 공주를 사랑했던 조의 사랑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기사 찾기에 실패한 편집장은 공주의 기자회견장으로 조를 보낸다. 그리고 조는 기자회견장에서 앤과 조가 아닌 공주와 기자로 마지막 만남을 가진다.
헛된 꿈으로 끝난 24시간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보내는 전날 밤 차 안에서의 입맞춤은 다음날 낮 기자회견장에서 둘 사이만 소통하는 애절한 눈 맞춤으로 끝을 맺는다. 기자회견장에서 공주는 질문에 답하면서, 오로지 조와 그녀만 알 수 있는 암시를 섞어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내가 의역한 대사이고, 밑줄 부분이 앤공주와 조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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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공주님, 국가 간의 친선에 대한 견해가 무엇인가요?
앤공주: 국가간의 친선에 대해서 전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 멈췄다가, 조를 응시하며] 사람간의 우정에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듯이요. [공주의 주변과 기자들이 웅성인다,]
조: 공주님이 갖고 있는 믿음이 옳을 것입니다.
공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니 기쁘군요.
기자: 공주님이 방문한 도시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아했나요?
[공주는 다시 조를 응시한다.]
시종장: [조용히 옆에서 답변을 읽어준다] 각각의 도시는 그 나름으로 ...
공주: 각각의 도시는 그 나름으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를 고르기는 어려울 것이라...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리고, 표정이 밝아지며] 로마입니다. 무엇보다도. 로마입니다. [기자단이 웅성거린다. 공주는 조와 눈을 마주친다.] 내 일생 동안, 여기 왔던 기억은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될 것입니다.
...
마지막 질문이 끝나고, 이례적으로 공주는 계단을 내려와 앞에 서 있는 기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조의 친구 사진 기자에게서 어제의 사진을 받는다. 이윽고, 조 앞에 이른 공주는 의례적이고 무덤덤해 보이는 악수를 하지만, 눈빛에는 서로만이 알 수 있는 사랑이 담겨있다.
공주는 인사를 마치고 단상으로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기자들을 돌아본다. 돌아보던 시선을 잠시 조에 멈추고 둘만의 눈 맞춤과 미소를 나눈다. 공주는 곧 몸을 돌려 단상 뒤로 걸어나가고, 조는 공주가 사라진 단상을 응시하다 마지막 눈길을 거둔다. 홀론 남은 조는 터벅터벅 기자회견장을 걸어 나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요즘 칼라영화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영상미를 기대할 수 없는 흑백영화이다. 하지만, 오로지 극 중 스토리 전개,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에 집중하기에는 오히려 명암만을 보여주는 흑백화면이 더 적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