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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를 지배한 신라인
boolingoo 2009.06.28 15:45 |
조회 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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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조금 자극적이지요? 현 시점에서 고대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이를 믿을 분들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따라서 어떤 사료에서 부분적으로 이를 말해주는 정황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참으로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미리 제 입장을 정리해 놓는다면, 아래에 분석을 통해 제시할 사료들을 통하여 그 역사적 진실 여부에 대해서는 전향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무시하고 넘어갈만한 그런 대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것이 곧바로 고대사상을 재구축할 정도로 확실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과제로 해놓겠습니다. 여기서 언급할 사료들은 [신당서 발해전][무경총요][明章潢撰 圖書編][독사방여기요][요사지리지][환단고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입니다. 먼저 익히 잘 알려진 [신당서 발해전]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도리기의 한 부분입니다.
①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末島、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里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八百里.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新唐書/~/~/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
등주로부터 동북쪽으로 해로로 대사도(大謝島)·구흠도(龜歆島)·말도(末島)·오호도(烏湖島)까지 삼백리이며, 다시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지나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鎮)까지 이백리이다. 동쪽으로 바다에 연한 육지를 끼고(傍海壖) 청니포(青泥浦)·도화포(桃花浦)·행화포(桃花浦)·석인왕(石人汪)·탁타만(橐駝灣)·오골강(烏骨江)까지 이르는데 팔백리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육지를 끼고 오목도(烏牧島)·패강구(貝江口)·초도(椒島)를 경유하면, 신라 서북의 장구진(長口鎮)에 이른다. 다시 진왕석교(秦王石橋)·마전도(麻田島)·고사도(古寺島)·득물도(得物島)를 지나 천리를 가면, 압록강(鴨淥江)·당은포구(江唐恩浦口)에 이른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육로로 7백리를 가면 신라 왕성에 이른다.
현재까지의 해석은 청니포는 대체로 현 요동반도 남단의 대련에, 패강구는 현 대동강 하구에, 초도는 대동강 인근의 섬으로 각각 비정되고 있습니다. 신라 서북의 장구진이라든가 마전도·고사도 같은 섬들은 당연히 한반도의 섬들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인용문상으로 그 다음에 다시 압록강이 나오는데 이는 설명이 조금 이상한 것으로 판단하여, “이 북중국항로는 산동반도로 부터 동북으로 항해하여 대사도 등 발해의 小島를 거쳐 동쪽해안을 따라 지금의 중국 대련과 북한 압록강을 지나 지금의 대동강 하구의 초도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북중국 항로를 노철산수도경유항로(老鐵山水道經由航路)라고도 하였다.[趙相斗·崔干植, 唐羅親善關係史, 遼寧民族出版社, 1995, 31~41쪽]”라 하여 압록강 다음에 초도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며 통설이라 할 것입니다. 즉 여정 중에 ‘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라는 부분은 이미 한반도까지 이른 항로를 다시 부연하여,‘천리를 가면 압록강(또는 당은포구)이 있고’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따른다면 사실 당시는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묘도열도의 섬들을 거친 다음, ‘요동만을 들르지 않고’ 바로 요동반도로 와서 계속하여 연안항로를 이용한 것이 됩니다. 도리진까지 와서 바로 동쪽으로 청니포(대련)에 이른다는 설명이니까, 그 사이에 있었을 요동만의 여러 섬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이 됩니다. 이것은 당시 정세 인식을 토대로 위 인용문 압록강 부분의 내용을 일부 재구성하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위 문장의 항로를 말 그대로 재구성하면, ‘오목도(烏牧島)=>패강구(貝江口)=>초도(椒島)=>신라 서북의 장구진(長口鎮)=>진왕석교(秦王石橋)=>마전도(麻田島)=>고사도(古寺島)=>득물도(得物島)=>천여 리=>압록강(鴨淥江)=>당은포구(唐恩浦口)’ 로 됩니다. 즉 인용문이 말하는 항로를 그대로 따랐을 경우의 순서입니다. 압록강에 이르기 전에 패강구와 초도, 장구진(신라 영역), 진왕석교 등등을 거치고 천여 리를 가야 압록강·당은포구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 서북쪽 영역이라는 장구진은 압록강에 이르기 훨씬 전에 있는 지명이 되지요.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므로 해석은 역시 위에 제시한 학계의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문헌 하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②按皇華四達記... 一路徃三韓, 海行東北歴大謝·鼉歌·烏湖等島約三百里, 又傍海岸歴青泥鋪·桃花鋪·杏花鋪·駱駝灣約八百里. 自其江口即新羅界. 東控高麗諸國. 唐置東牟∇萊二郡, 守悉兼守捉...[武經總要前集卷十六上 邊防 登州附見]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를 살펴보건대... 하나의 길은 삼한(三韓)에 이른다. 해로로 동북쪽으로 대사(大謝)·타가(鼉歌)·오호(烏湖) 등 섬으로 가는데 약 3백리이다. 다시 육지를 끼고 청니포(青泥鋪)·도화포(桃花鋪)·행화포(杏花鋪)·낙타만(駱駝灣)을 거치는데 약 8백리이다. 그 강 입구로부터 신라 경계이다. 동쪽으로는 고구려 (옛) 여러 나라를 공제(控制) 하였다. 당이 동모(東牟, 산동반도의 군)·동래(東萊) 두 군을 두었는데, 군수는 모두 수착(守捉)을 겸한다.
위 신당서 발해전은 가탐의 도리기(道理記)를 인용한 것이고, 무경총요의 이 대목은 가탐의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를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경총요에 총 6회 인용되어 있는 황화사달기는 실상 도리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북송(北宋)에서 1040년에 세상에 나온 무경총요(武經總要)의 편찬자인 증공양(曾公亮, 998~1078년)의 경우, 신당서의 감수를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당서는 1044~1060년 사이에 구양수(歐陽修)와 송기(宋祁) 등이 칙서를 받들어 편찬하였지요. 시기적으로 무경총요가 세상에 조금 더 일찍 나왔는데, 같은 인물이 책 하나는 편찬을 하고 다른 하나는 감수를 담당하였으며, 내용이 같은 도리기 또는 황화사달기를 책 안에서 인용하고 있으므로 내용상 상세함의 차이는 있겠지만 같을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습니다. 예컨대 무경총요의 경우 행화포 다음에 낙타만(駱駝灣)이라 하였는데, 신당서에서는 탁타만(橐駝灣)이라 하였습니다. 탁타(橐駝)는‘낙타(駱駝)의 별명’으로 낙타(駱駝)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낙타만과 탁타만은 완전히 동일한 지명으로 같은 장소를 달리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경총요에서는 이 낙타만까지 8백리라 한 다음, 그 입구의 어떤 강으로부터 신라 경계라 하였습니다(自其江口即新羅界). 여기서 신당서를 보면, ‘...橐駝灣、烏骨江八百里’라 하여 탁타만에 이어 오골강(烏骨江)이 등장하며 거기까지 8백리라 하였습니다. 동일한 내용에 신당서의 경우만 오골강 설명이 하나 더 들어간 것이지요. 따라서 무경총요에서 드러나지 않은 강 이름은 오골강으로 확정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낙타만이라는 지역은 오골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입해구 지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경총요에서는 이 오골강으로부터 신라 경계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당서의 초도 다음의 ‘得新羅西北之長口鎮’이라는 설명은 오골강을 거치면서 신라 경내 해역으로 들어온 다음, 오목도(烏牧島)·패강구(貝江口)·초도(椒島) 등 섬을 거치고서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鎮)에 이른다는 것으로 그 뜻이 한층 명확해진다고 하겠습니다. 즉 오골강 다음부터 등장하는 지명들은 다 신라 경내라는 것입니다. 장구진 다음의 진왕석교(秦王石橋)·마전도(麻田島)·고사도(古寺島)·득물도(得物島) 등 섬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따라서 위 인용문①과 ②에 등장하는 지명들 중 중요한 것 몇 개만 확정할 수 있다면 이 신라 강역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라는 고구려가 존재하던 그 시기의 신라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료의 원전이 되는 당나라 가탐(賈耽, 730~805년)의 황화사달기 또는 도리기(801년)는 이미 실전되어 그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대체로 8세기 후반~9세기 초에 쓰여졌을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의 일이지요.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지리정보는 7~8세기의 신라에 대한 지리 정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 나오는 지명 특히 섬들의 위치를 당시 문헌들을 통하여 확인할 길이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일단 몇 개의 지명들을 조사해보지요. 참고로 위 문헌들에 기록된 지명들은 단순한 항로상의 지명 나열이 아니라, 항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착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먼저 오호도(烏湖島)·오호해(烏湖海)에 대한 것입니다. 오호도(烏湖島)는 현재 산동반도 봉래시(蓬萊市) 북쪽의 황성도(隍城島)에 비정되며, 이에 대해서는 별 이견들이 없다고 합니다. 오호해 또한 그 주변의 바다를 지칭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잠시 후에 다시 논의 하겠습니다.
청니포(青泥浦)는 일본학계에서 그 위지비정을 시도하였는데, 현 요동반도 대련으로 추정합니다. 그 근거로 대련도서관 소장의 중국고지도 중 명 가정 5년(1526년) 제작 지도상에 요동반도 돌출부 가까운 바다 중에 청니(青泥)라는 섬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며, 요동지(遼東志)에 금주(金州) 남쪽 40리에 청니도(青泥島)가 있다는 표시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대련시 송산(松山) 부근의 송산사(松山寺) 중수탑비(1870년)에 “大清国盛京奉天府金州郡西旅安社青泥窪..”라는 문구가 있어, 이 일대가 청니와(青泥窪)로 불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 세 개의 지명이 다 동일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현 대련 일대가 청니로 통했다는 것은 이로써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추정을 진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청니포라는 지명을 대련에 비정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작용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도를 언급할 것이면, 일제치하의 대련도서관 소장의 고지도를 힘들게 언급할 필요 없이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사방여기요의 다음 해도(海圖) 한 장이면 사실 많은 의문이 풀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비정에 독사방여기요가 언급되는 것은 못보았습니다. 위 참고 지도를 보면, 우선 방향을 시계반대방향으로 90도 돌려야 합니다. 이를 수정한 것이 참고지도 2번입니다. 독사방여기요가 쓰여진 시기에 어떠한 항로를 잡았건 위 지도상의 지명들을 토대로 가탐의 도리기 항로를 재구성하면 말 그대로 연안항로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등주(봉래)에서 오호도까지의 방향을 보면, 요동반도를 향하는 것이 아니지요. 반대쪽인 연안항로를 합니다. 오호도에서 청니포까지 지도상에서는 도리진이라는 기착지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오호도와 청니포 사이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청니포에서 요동반도쪽으로 향하는가 하면 이번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붉게 표시된 낙타(駱駝)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항로는 요동만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청니포에서 낙타만 사이에 있어야 할 지명 ‘도화포(桃花浦)·행화포(桃花浦)·석인왕(石人汪)’은 여기 지도상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각각의 기착지에서 1박을 하였다고 본다면 청니포에서 낙타만의 오골강 입구까지는 대체로 4일의 일정입니다. 이렇게 요동만 깊숙이 자리잡은 낙타만까지 들어온 다음에야 항로는 다시 요동반도를 돌아서 계속 이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섬들이 많아서 그 섬들을 표지로 삼아 ‘산동반도<=>요동반도’로 직항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 독사방여기요와 신당서 발해전을 기억한다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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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통일신라의 영광스런 만주 경영 | |
6~7세기 만주(滿洲)는 신라(新羅) 영토였다! | |
김필재 기자 2008-10-25 오후 9:21:25 | |
과거에는 만주를 흑룡강성·길림성·봉천성 등 3성으로 나누고 이를 동3성(東三省)이라 했는데, 이 지역의 서쪽·남쪽은 현재의 요령성·열하성 지역이다. 이 동3성 지역을 신라가 통치한 것을 북사(北史)와 당서(唐書), 수서(隋書) 등의 중국사서는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을 구축한 역사학자 안호상은 송(宋)나라 때 제작된 신당서(新唐書·1060년에 완성)를 근거로 신라의 영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라의 나라 땅이 본래 땅의 가로가 1천이요, 길이가 3천리나 됐다. 신라의 영토가 조선 동남의 경상도와 강원도로부터 길림성오랍(吉林省烏拉)까지이며, 서쪽으로는 길림성 개원(開原)과 철령(鐵領)까지다. 길림·오랍은 압록강 북쪽 970여리 쯤에 있고, 개원·철령은 심양시와 장춘시 지역이며 큰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을 신라산(新羅山)이라 했다.” “무열임금(654-660) 때 백제의 옛 땅과 고구려의 남쪽 땅을 또 취함으로써 동서가 9백리, 남북이 1,800여리로 더 늘어났는데 그곳은 요북성·열하성·요영성이다. 신라가 문무 임금 때에 고구려 땅인 요동 전체와 백제 땅인 북경(北京)지역을 통합하고 그곳을 상주(尙州), 양주, 강주, 웅주, 전주, 무주, 한주, 삭주, 명주 등 9주(九州)로 나누고, 또 주 마다 한 도독이 있었는데, 그 밑에 10군들 혹은 20군들이 있었다. 이 9주들 가운데서 몇 주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상주는 동경로(東京路)에 속함으로써 길림성 영안현에 있고, 전주(全州)는 북경로(北京路)에 속함으로써 열하성 파림에 있고, 강주(康州)는 요영성의 의무여산(醫巫閭山)에 가까운 곳에 있고 삭주(朔州)는 봉천의 봉황성(鳳凰城)이며, 명주(溟洲)는 본래 예땅(濊地)이다.” “신라가 9주들을 둘 때에는, 동쪽으로는 길림성까지요, 서쪽으로는 직예성 北京인 광령(廣寧)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신라가 요서(遼西)인 북경지역까지 다스린 까닭에 그 당시에는 신라가 중국 산서성 무주(武主)에서 생산되는 산물을 가장 많이 취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성덕 임금 무렵(713년·唐 현종 개원 1년)부터 발해(渤海)가 강해져 신라의 서·북쪽 영토를 모두 차지하고 신라는 압록강 남쪽만을 차지하게 됐다.” 2. 청(靑·신라 후손이 세움)나라 건륭제 42년(1777년) 한림원에서 편찬된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서는 신라 강역이 현재의 만주 지역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주원류고는 신당서와 함께 구당서(舊唐書)·북사(北史) 등 다수의 사서를 인용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가 가라(加羅)와 임나(任那) 등을 합병한 후 대등해졌다. 신라의 동남(東南)은 지금 조선(朝鮮)의 경상·강원도이며 서북(西北)으로는 지금의 길림오랍(吉林烏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개원(開原)과 철령(鐵領)에 가깝다.” “당나라 현경(顯慶) 이후에 백제 땅과 고구려 남쪽을 얻어 동서로 900리 남북으로는 1000여리가 더 커졌다. 개원 이후 발해가 강해져 그 서북의 땅을 발해에 빼앗겨 신라는 압록강 이남 땅만 남았다. 당(唐) 말에 고구려가 다시 일어나 그 남쪽 땅을 차지하고 발해는 거란에 망해 신라는 서(西)로는 해주 암연현으로 거란과 경계를 삼고, 서북(西北)으로는 압록강 동쪽 8리에 있는 황토령으로 거란과 경계를 삼았다. [원문:謹案新羅始附庸於百濟後兼加羅任那諸國與百濟爲隣考其疆土東南並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西北直至今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嶺唐顯慶以後又得百濟故地及高麗南境於是東西增九百里南北增千餘里開元以後渤海盛强其西北諸境盡爲所倂新羅所有僅鴨淥江以南唐末高麗復起割其南境曁渤海爲契丹所侵於是新羅西與契丹以海州巖淵縣爲界西北與契丹以鴨淥江東八里黃土嶺爲界矣雞林州之名始於唐龍朔三年以其國爲雞林州大都督府國王世襲都督之號以音譯及地理考之卽今吉林許亢宗行程錄云自咸州至同州東望大山卽新羅山遼之咸州今爲咸平芬州今爲銅山縣俱在今鐵嶺開原之間東至威遠堡門卽吉林界則州名取此無疑第其後地爲渤海所得而都督之號則仍係新羅於是幷朝鮮之地亦沿雞林之稱耳七重城在朝鮮慶州北南臨發盧河舊唐書言劉仁軌率兵絶匏盧河攻七重城卽此水也買肖城亦在其地當時用兵皆自登萊浮海往來故多在朝鮮界也至九州之設東至吉林西至廣寧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 위 내용 대로라면 신라는 당(唐)연합군과 함께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백제의 강역이었던 요동반도의 서쪽지역(대륙백제)을 당(唐)이 차지하려고 하자 크게 반발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서 무려 7년이란 긴 세월을 싸운 것이다. (신라의 만주영토는 이후 발해의 등장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짐) 당(唐)은 이 같은 신라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문무왕을 신라왕에서 내려앉히고 그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과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책봉했으나, 이후 문무왕의 형식적인 사죄를 받아들여 왕직을 원상회복시킴으로서 요동반도의 신라통치가 굳어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계림(鷄林)과 길림(吉林)의 중국 발음은 똑 같이 Jilin(지린)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계림은 경상도 지역이 아니라 만주의 길림성이다. 따라서 김인문이 계림주대도독이 됐다는 것은 만주지역을 관할하는 관리가 됐다는 뜻이다. 따라서 계림주(鷄林州)란 한반도 동남쪽의 신라를 통틀어 말한 것이 아니고 전쟁 후 새롭게 편입된 요동반도의 길림에서 철령 지방 이남을 말한 것이다. 이 같은 역사 해석의 오류가 생긴 것은 전쟁 이전 신라·백제가 서로 요동반도를 점유한 사실, 그리고 전후 백제가 점유했던 영토까지 신라로 편입시킨 사실을 왜곡하다 보니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다. 민족사의 금자탑 신라가 달성한 삼국통일은 반쪽짜리 통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금 복원해야 한다.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을 달성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로마제국과 교류한 신라인들의 정신을 다시금 되살려야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우리는 1천년 동안 민족의 주체성을 지켜왔다. 대한민국은 이제 자유통일로 북한동포를 해방시키고,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핍박받는 만주지역의 우리 혈족(조선족·몽고족)들을 해방시켜 향후 1천년을 ‘한민족 대부흥’의 시기로 만들어야 한다. 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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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영역은 일제식민지때 축소된 역사-
<만주원류고>는 신라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긴 여진족이 그들의 원류를 찾고자, 중국의 역대 사서와 서적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뽑아서 유목민의 관점에서 일일이 고증하여 수록한 책이다. 1,777년 청(淸)의 건륭제의 지시에 의해 43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부족ㆍ강역ㆍ산천ㆍ국속(國俗)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편찬된 책이기에 만주원류고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역사서이자 문화사적 서적이라 볼 수 있다.
만주원류고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비중 있게 인용한 뒤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접하고 넘어가야 할 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다른 각도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다. 한민족과 같은 계열인 여진족의 청(淸)이 그들의 시각을 담아 고증하여 편찬했다는 점과 중국의 정통사서가 중국을 중심축으로 만주를 분절시켜 기술한 데 반해 만주가 중심이 되어 각 시대별로 사건 기사가 집대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이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만주와 한반도는 동일한 삶의 공간을 형성했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영위해 갔던 일관성 있던 삶의 족적들이 중원의 사가들에 의해 시공간대별로 분절되어 마치 다른 부족이 다르게 활동한 것처럼 지금까지 이해되어 왔었다. 그에 따라 만주는 온갖 서로 다른 부족들이 뒤엉켜 야만적으로 살아간 지역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이 계속 그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살아갔음을 생각해 보자. 중국의 만다린어를 구사하는 사람과 광동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현재 모두 중화족을 형성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만주 지역 부족들 간의 이질성은 지나치게 부풀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붕괴하고 그 자리에 발해가 건립되기까지 불과 한 세대(30여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고구려를 구성했던 주민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말갈인만이 남아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통해서도 만주와 만주의 사람들에 대한 중원 사서들의 기술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주원류고는 중국 사서에서 자의적으로 기술된 부분을 언어적 관점에서 집요하게 추적하여 교정하려 했다. 여진족의 용어를 뜻글자인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하나의 객체가 시대별로 사가들의 무지나 자의에 의해 서로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후대에 마치 서로 다른 것으로 오인되었던 것을 만주어의 관점에서 일일이 고증하여 바로잡으려 했다. 청대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그 권위를 부여받은 이러한 자세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중국 사서에 나오는 한민족 관련 용어를 치밀하게 검증하여 그 역사적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큰 것으로 언어학을 통해 역사적 용어를 검증하는 새로운 학문의 계열을 마련해도 될 정도의 치밀성을 보이고 있어 중원사서에 나오는 한민족 관련 용어 역시 치밀하게 검증하여 그 역사적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먼 훗날, 중국의 커커우컬러(可口可樂)가 미국이란 변방에서 코카콜라로 표기되고 한국에서는 가구가락으로 표기되어 콜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는 분석상의 우스꽝스러움을 피하기 위해서도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조선사연구초>를 통해 시도했던 언어학적 검증을 정통 사학계에서도 도입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만주원류고는 또한 만주와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적 습속을 집대성하고 만주인의 시각으로 이를 분석 평가했다는 점에 그 소중함이 돋보인다. 모계사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즐기는 축제의 모습, 민주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제 부족집단들의 의사결정 모습 등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만 역사를 이해하려 많은 사람들의 선입관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도 남는다.
여진은 신라의 후예라는 것, 통일신라의 강역이 길림에까지 미쳤다는 것, 삼한의 한(韓)은 지역명이 아니라 징기스칸과 같은 리더의 이름이라는 선언적 기술은 어쩌면 만주원류고가 우리에게 정신적 대리 만족을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을 보는 관점을 중원에서 만주 중심으로 변화시킨 것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관점을 변화시키면 역사에 대한 해석이 변할 수 있다.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중화 제일주의에 기인한 시각보다 우리의 시각이 동아시아 역사를 이해하는 데 더 합리적이고 실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나가는 것이다. 만주원류고는 이런 측면에 우리의 훌륭한 반면교사가 된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통독할 수 있는 번역본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 늦게나마 만주원류고의 전 텍스트가 번역된 책이 나오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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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 한민족의 국가가 두만강 너머 간도지방에 행정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을까? 과연 고려의 강역은 두만강에도 미치지 못했을까? 아마도 김 교수 뿐만 아니라 한국의 태만한 역사학자들... 그리고 사기역사(詐欺歷史)를 배워왔던 한국의 학생들은 고구려, 발해 이후 한민족의 역사에서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을 통치한 적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매국사학자는 중국 측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고구려와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자의 말대로라면 한강 이북의 영토도 역사적 경위나 법리적으로 한국 영토가 아니라는 논리가 된다.)
고구려사(高句麗史)와 고려사(高麗史)를 반으로 동강낸 일본 역사학의 사기꾼 이케우치[池內宏]의 의도대로 국내 역사학계는 만주지역을 고려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사서(史書)와 고지도에는 분명 신라와 고려의 북쪽 경계가 만주(滿州) 일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강단사학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이케우치[池內宏]가 한국 고대사와 중세사 무대를 한반도 중부로 축소시킨 내용을 진실로 믿고 잇는 것이다.
아래 지도의 좌편(고구려 천리장성)은 명나라에서 '변장'이라 불렀던 것이고, 아래 지도의 우편(고려 강역)은 청나라에서 1660년 '류조변'이라 불렀던 곳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의 행정구역 수는 584개이다. 그런데 조선의 행정구역 수는 324개에 불과하다.(신라는 450개로 나온다) 조선왕조와 일본인들이 고려사를 얼마나 갉아 먹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1) 고구려(高句麗) 천리장성도(千里長城圖)와 고려 강역
잘려나간 고구려사(高句麗史)와 고려사(高麗史)
이 지도는 보다시피 중국인들이 만든 지도이다. 위 지도는 압록강 하류와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 서해안이 보이는 지도이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 강역이 확실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좌편을 보면 고구려 천리장성이 요하 건너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함을 볼 수 있다. (실재의 고구려 천리장성은 지도보다 더 왼쪽/고구려 천리장성은 '부여에서 해유리까지')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의 고구려 강역도는 절대로 '요하'를 넘지 않고 있다. (나쁜 놈들!) 고려의 천리장성은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시원하게 뻗어 고구려 장성에 연결되어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 강역이 '성문 이름'까지 표시되어 있다. 고려의 강역이 만주 일대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의 행정구역 수가 584개요 조선의 행정구역 수가 324개인 이유가 확실히 표시되어 있다.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의 매국책동을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반드시 부수어야 한다. 위의 '류조변시의도'에 나타난 고구려 및 고려의 천리장성을 현대의 대륙지도에 다시 옮겨 보겠다.
현대의 대륙 지도에도 고려의 영토가 만주까지임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려령(高麗嶺), 고려모(高麗貌) 라는 고려의 영토가 북만주(北滿州)에 표시되어 있다. 고려의 '철령위(鐵嶺衛)'가 한반도에 있는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녕성의 철령임을 보여준다. 고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한반도의 함경도 영흥이 아니라 길림성(吉林省) '쌍성(雙城)' 지방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한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지역인 선춘령(先春嶺)이 북만주의 '흥개호' 근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은 이 선춘령을 한반도의 함경도 북청 근처에 그려놓고 있다.)
이런 천하의 매국노 무리들이 어떻게 한국인일 수 있는가? 이런 천하의 패륜아 족속들을 어떻게 석사, 박사, 대학교수로 불러 줄 수 있는가? 조국도 역사도 팔아먹고 마는 저 오랑캐 족속들을 어떻게 같은 민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저들의 패배주의 사상에 의한 자국 역사 파괴행위로 인해 중국인들이 마음놓고 '동북공정(東北工情)'을 기획했던 것이다. 천하에 죄질이 가장 나쁜 놈들!
프랑스는 나치스 세력에 부역한 자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오늘의 위대한 프랑스를 건설했다. 프랑스는 자국의 민족정신을 팔아먹은 언론인, 학자들, 지식인들을 가장 가혹히 문책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이름으로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는 말살되었다. 나머지 남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역사마저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본인들이 국내 사서(史書) 51종 20만권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환국 3301년, 배달국 18대 1565년, 단군조선 47대 2096년은 그렇게 거세당했다. 그 미치광이들의 칼춤을 뚫고 살아남은 것이 오늘날의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箕古史)인 것이다. 저 패륜적인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箕古史)를 위서(僞書)라 주장하고 있다. 그 더러운 입으로 아직도 조상을 모독하는 극언을 일삼고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신화이고, 단군(檀君)은 곰의 생물학적 후손이고, 한국 역사의 시작은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저들의 죄는 반드시 능지처참(凌遲處斬), 부관참시(剖棺斬屍)로 다스려야 한다.
(2) 고려의 대륙 9성(大陸九城)이 반도 9성(半島9城)으로 조작되었다.
[참고서적: 김영호의 '국사광복의 햇불']
단제(丹薺)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두만강 건너 700리 선춘령(先春嶺) 밑에 윤관(尹瓘)이 세운 정계비(定界碑) 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 ?“ 하며 “조선 역사상 1,000년 이래 제일 대사건” 이라고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속에서 지적하고 있다. 물론 뒷날의 공양왕실록(恭讓王實錄)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에서 공험진(公險鎭)은 두만강 이북 간도성에 있는 선춘령이며 그곳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양왕(恭讓王) 4년에 올랑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족에 속하는 (兀 : 우뚝할 올, 斡 : 관리할 알) 여진인(女眞人)들이 래조(來朝)했을 때 그들의 말중에 “시중(侍中) 윤관 공이 우리 영토를 평정하시고 비를 세워 고려의 경계를 하시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들 부족은 윤관의 북벌(北伐) 당시 동만주 송화강 하류(北伐當時東滿洲松花江下流)쪽으로 쫓겨난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정계비는 두만강 이북에 있다는 뜻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거양성 선춘령에 윤관의 입비처(立碑處)가 있고 비문에는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넉자가 새겨져 있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선춘령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가면(-> 수빈강(愁濱江) : 흥개호 인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 찾는중), 옛 성지(城址)가 지금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사적(日本史賊) 이케우치[池內宏]가 한국 역사를 축소, 왜곡하기 위해 9성이 두만강 이북에 있지 않고 함흥평야에 있다고 '날조'한 것을 국내의 이적사가(利敵史家)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국내의 사서(史書)와 중국 고지도(古地圖) 등에 의하면 동북 9성(東北九城)은 두만강 북쪽에 있어야 한다.
일본 역사학의 사기꾼 이케우치[池內宏]가 두만강 북쪽 7백리 홍개호 인근에 있던 윤관(尹瓘)이 쌓은 동북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에 있다고 조작한 내용을 광복 후 60년이 지나도록 친일식민사관 매국사학자들이 답습하여 조작된 역사를 국사 교과서에서 지금까지 교육하고 있다. 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
만주 일대를 다스렸던 실제 고려의 강역을 한반도 중남부로 축소시킨 일본 역사학의 사기꾼 이케우치[池內宏]나 그 자의 수하에서 충실히 교육받아 광복 이후 철저하게 한국 역사를 망가뜨린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나 그들의 제자들로 역시 우리 조상들의 활동 무대를 형편없이 축소시킨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이기백(李基白) 등은 모두 공통적으로 역사학 도적놈들이다.
상기 지도 노란선은 송령산맥 - 철령위 - 화주 - 고려모 - 선춘령을 연결하는 선이다. 고려의 강역은 과연 어디까지 였는가?
선춘령(先春嶺)의 고려 비석 -> 고려 경계는 두만강 북쪽 700리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고려대학 박물관 소장]
1107년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이 총지휘하는 고려의 17만 대군이 수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여진족(女眞族)을 물리치고 국경을 넓혀 그곳에 육성을 쌓았으며,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 네 글자가 새겨진 비를 세움으로써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선춘령(先春嶺)의 위치는 어디일까? 다음의 고지도를 보자.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두만강의 북쪽에 있습니다..
현재의 지도로 보자. 지금 현재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어디에 있을까?
1900년초 일본이 작성한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 기요' 극비보고서에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중국 연길국자가 서쪽 1리반 지점에 있는 포이하통하 강물에서 커다란 석비를 발견 하였는데 비문의 대부분은 알아 볼 수 없고 남은 20여자의 글자 중 다행히 무자년이라는 기록을 알 수 있다"
'무자년은 고려 예종(睿宗) 3년으로 윤관이 비를 세운 해와 일치한다.'
지금의 그 비석은 중국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고려지경(高麗之境)” 4글자가 씌여져 있었던 그 비석을 꼭 찾아 보고 싶다.
(3) 고려의 동북쪽 경계는 함경남도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밖이었다.
지금까지는 고려의 동북 경계는 함경남도 정도로 배워 왔으나 고려사와 고지도는 두만강 북쪽 700리 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사 권46에 의하면 서북쪽은 압록강,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춘령에 대해서는 중앙도서관 소장 한 61-77(고지도) 및 규장각 소장 고 4709-89-2(고지도)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림을 보면 위쪽 원안에 선춘령(지금은 윤관비로 표기)이 있으며 아래 원이 두만강 표시이다. 서북쪽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볼수 있지만, 만주원류고 신라항목과 고려사 137권 철령위 및 고려사 42권에 동령부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으로 불리웠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 강역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