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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계산 이야기
<2009.10 시경계답사중 과지초당방문>
▣ 과지초당
추사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67세때 제주도 유배생활을 긑내고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선친 김노경의 여막을 지키면서 자신의 추사체를 완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곳 과지초당에서 서울(강남)의 봉은사를 왕래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대웅전 판전등의 현판이 모두 이때에 써진 것이다
<2009.10 서초구와 과천시 주암동의 경계표지판>
청계산 [淸溪山]은 618m로 서울특별시 서초 신원동, 경기 과천시 막계동 , 의왕시 청계동,
성남시 수정구에 위치하고 있다.
<2009.10 서초구에서 설치한 청계산등산안내도>
청계산 등산로는 4개 코스로 나뉜다. 1코스는 양재동 만남의 광장-옥녀봉-정상 코스이며, 신원동 코스라고도 한다. 초입에서 3분 정도 원토골지구로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오고, 약수터를 지나 독특한 냄새가 풍기는 조림이 잘된 낙엽송 사이로 20여 분 올라가다 보면 100여 평의 공터가 있는 제1야영장이 있다. 제1야영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계곡물 소리가 독특한 화음을 내고 있다. 제1야영장에서 오른쪽 등산로로 100m 가량 가면 옥녀봉에 이르게 되며, 옥녀봉에서 왼쪽으로 가면 망경대에 이른다. 이코스가 경계1구간과 근접한다.
2코스는 서초구 원지동 원터골-정상 코스와, 성남시 상적동 옛골-원지동-정상 코스로 나뉜다. 두 코스는 망경대 등정 코스 중 가장 인기 있다. 원터골 코스에는 원터골 계곡 또는 진달래 능선, 매봉이 나오며, 이 길은 망경대로 이어진다. 망경대에서 원터고개를 지나 원터골에 이른다. 옛골 기점 코스는 다시 이슬샘-이수봉-망경대-혈읍재-약초샘골 코스, 정토사-옻샘-망경대 코스, 정토사-옻샘-약초샘골-망경대 코스, 정토사-어둔골-목배등-이수봉-망경대 코스로 나뉜다.
다른 코스가 서초구, 성남시, 의왕시를 기점으로 한다면, 3코스는 과천시를 기점으로 한다. 3코스는 크게 사기막골을 지나 정상에 이르는 코스와, 서울대공원에서 정상에 오르는 코스로 나뉜다. 사기막골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 쪽으로 약 400m를 오르면 사기막골 코스와 서울대공원 코스가 합류한다. 서울대공원 코스의 경우, 공원 입구에서 곤충관을 지나 삼림욕장의 푯말을 따라 가다 보면 청계산 입구에 이르게 된다. 매봉을 거쳐 절고개, 망바위, 이수봉 삼거리를 거쳐 망경대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절고개에서 하산하여 청계사에 이르거나 옛골이나 원터골로 내려갈 수 있다.
<지도:Gosan21.net 박영준의 산행정보>
<조선왕조실록>에 청계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때는 1445년(세종27)이다.
이것으로 보아 청룡산이라는 명칭의 연원이 더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조에 와서 청룡산의 명칭은 사라지고 청계산이라는 이름으로
왕들의 사냥터로서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청계산은 신경준의 <산경표>에 의한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으로는 한남정맥에 속한다.
한남정맥은 안성의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경기도의 서북쪽을 달려서
김포의 문수산에서 끝나는 산줄기를 말한다.
이 한남정맥 중 수원의 광교산과 백운산에서 북쪽으로 지선이 나와 청계산과 관악산을 만들고
이 맥이 우면산과 양재의 대모산까지 이어진다.
한남정맥을 타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산줄기가 한남금북정맥인데, 그 끝이 속리산이다.
다시 말하면 한남정맥을 타고 안성까지 내려가서
한남금북정맥을 타고 속리산까지 가면 백두대간을 타고 백두산에 다다를 수 있다.
청계산의 원뜻은 맑은내 인데 한자에서 그 뜻을 빌려 청계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청계산의 역사 (이달호,과천향토사연구회원),1998 과천문화 P42,과천문화원
▣ 수종폭포(水從瀑布)
청계산의 주봉은 망경대(望京臺)로 해발 618m에 이르는데,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반대했던 인사들이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함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진다. 관악산이 남성적인 산이라면 청계산은 여성적인 산이라고 하겠다.
이 청계산 서쪽에 큰 폭포가 있는데, 이 폭포를 수종폭포(水從瀑布)라 한다. 과천현에서 바라볼 때 수종폭포는 해가 뜨는 동향에 있다고 하여 동폭포(東瀑布)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 김노경의 묘터
김노경(1766~1838)은 조선 순조21년(1821)에 조정인사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형조판서,병조판서,판의금 부사등 중앙부서 요직을 두루 거친 김정희의 부친이다. 순조24년(1824) 59세의 김노경이 한성부윤(현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과천 청계선 옥녀봉 아래(주암동 돌무께)에 과지초당이라는 자가별서를 마련하였고, 헌종4년(1838) 3월30일 향년 73세로 서거, 옥녀봉 바로 아래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이 자리에 안치된다.
추사선생은 여막에서 3년상을 치렀다. 1970년대초 묘는 이미 이장하였고 앞자리에 후대의 다른묘가 자리했다. .
<2006.12 돌문바위를 등산객들이 돌고있다>
▣ 돌문바위
청계산의 북쪽능선 매바위 아래 있는 바위이다.
큰바위 두 개가 사람인 자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그 바위 사이로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통로처럼 되어 있다. 등산객들이 일부러 그 돌문 사이를 통과하여 돌아서 지나가는데, 이렇게 바위문을 통과하면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
▣ 청계산 충혼비(淸溪山忠魂碑)
- 연대 : 1982년
청계산 충혼비는 옥녀봉에서 망경대로 가는 등산로를 1/3 정도 지난 곳에서 안내문을 따라 오른쪽으로 50m 정도 들어간 지점에 있다. 충혼비는 1982년 6월 1일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하여 이동하던 중 오후 2시 49분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산화한 공군 대령 이동권 등 53명의 군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비에는 1986년 6월 6일 유족들이 충혼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忠婚의 숨소리
그대들이 흘린 뜨거운 피와 忠魂의 얼로
祖國은 살아 크게 숨 쉬나니
그대들의 靈魂은 祖國의 山河에서
永遠히 살아 꽃피리라
그대들은 祖國을 사랑하고
또한 祖國은 그대들을 사랑하노니
거룩한 英靈들이여
祖國의 품속에 고이 잠드소서
1982년 6월 1일 오후 2시 49분
전체적인 비의 형태는 4단의 화강암 받침을 만들고 그 윗면 가운데 ‘충혼비’라고 대리석 명패를 붙였다. 그 윗부분에 회색대리석 받침을 다시 두고 마지막으로 검정색 대리석에 글을 새겼다. 그 옆에는 다섯 매의 화강암을 기둥처럼 만들고 맨 윗부분에 군장을 하고 행군하는 모습의 군인을 부조하였으며 그 위에 베레모를 쓴 군인의 토르소를 얹어 마무리하였다. 이 부분의 정면에는 세로로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전반적인 조각은 특정 인물을 상징하기보다는 일반적인 군인의 모습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과천향토사>
<2006.2 눈덮인 혈읍재>
▣ 혈읍재
청계산 망경대와 매봉 사이의 망경대 쪽 안부를 근래에
혈읍재로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한강 정구 선생의 문집등 그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 출처가 분명하고, 또 역사성을 지닌 이름으로서 의미있는 지명이 될 것이다.<성남문화9호,2002>
청계산(淸溪山)혈읍재(血泣) 표지판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인 일두 정여창(鄭汝昌)(세종32(1450)~연산군10(1504)) 선생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 은거지인 금정수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통분해서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재라 명명(命名)하였다.
정여창 선생은 청계산 金井水(망경대 아래 석기봉 옆)에서 은거하다 결국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과 함께 유배후 사사 되었다. 그후 갑자사화때 종성땅에서 부관참시 당했다.
정여창 (鄭汝昌) : 세종30(1450) ~ 연산10(1504).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 자 백욱(伯勖). 호 일두(一?).
시호 문헝공(文獻公). :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출생.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성종14년(1483)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 유생이 되고, 1490년 學行으로 천거,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로 근무하다, 세자(연산)와의 불화로 인하여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간다. 연산군4년(1498)무오사화로 함경북도 종성에 유배, 연산 10년(1504)에 사사. 그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서 용학주소, 주객문답설등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때 부인이 모두 소각하였고, 유집 일부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 속에 전해진다.
중종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의 경현(景賢)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함양의 남계서원(선생의 묘가 있음)을비롯하여 10여 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우, 장 果川鄕校에서도 설총,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등ü장 이 동방 18현으로 모시고있다. 문집에 일두유집(一?遺集)이 있다.지금도 정여창 고택이 경남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에 중요 민속자료 제 186호정몽주정돼 규모나 모습으로 보아 교과서 같은 사대부 집으로 잘 보존돼 있다.....
망경대는 청계산의 최고봉으로, 망경봉, 만경대라고도 불린다. 본래 망경대란 ‘좋은 경치가 보인다’는 뜻이었으나 고려의 충신 조윤이 이곳에 올라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서울(송도)이 보인다’는 뜻의 망경대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망경대와 서쪽의 응봉은 활 모양의 등성이를 이루는데, 그 내부에 서울대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망경대이야기1<자료 제공:갈현동 이용진(남, 75세),과천향토사>
관악산은 진산(鎭山)이고 청계산은 청룡산(靑龍山)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옛날에는 비가 오려고 하면 진산과 청룡산이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천지개벽을 할 때 배를 타고 다니며 돌을 주어 망경대를 만들었는데, 관악산 꼭대기인 영주대(연주대)에 배를 대고 돌을 모았다고 한다. 큰 비가 와서 홍수가 났는데, 관악산 꼭대기만 빼고는 모두 물에 잠겼으므로 배를 탔다는 것이다. 청계산 정상의 이름은 이 때 여러 경치를 주어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여 만경대(萬景臺)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윤(趙胤)이 이 곳에 와서 서울이었던 개성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망경대(望京臺)가 되었다고 한다. 조윤이 온 것은 평양 조씨가 청계사(淸溪寺) 절에 산을 70정보를 떼어 주고 원찰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평양 조씨의 후손들이 청계사 앞에 지금부터 7-8년전에 큰 돌을 세우고 사연을 새겨 시조부터 7세까지를 모시는 신당을 만들었으며 매년 제향을 지낸다고 한다.
국사봉또는 국은봉(과천향토사엔 538m)은 망경대에서 남쪽 방향에 있으며
청계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나라를 사모한다 혹은 나라의 은혜를 생각하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아마 여기서 '국'은 고려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조선왕조실록>어디에도
이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지어낸 이름인 것 같다.
망경대와 국사봉은 과천시와 성남시에 걸쳐 있다.
청계산에서 가장높은 봉우리 망경대에 대해서는
고려왕조가 망한 후 절개와 지조를 지킨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고려왕조의 신하중에 조준과 조윤 이라는 신하가있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때 형조준은공신노릇을하고
동생 조윤은 통곡하면서 두류산으로들어갔다가 청계산에 머물렀다.
그는 매번 청계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다.
조윤은 정몽주와 친한사이였으며 명에와 절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성계가 그를 호조전서로 발탁하려하자
그는"송산에서 고사리캐기를 원할지언정 성계의 백성되기를 원하지않는다"고하였다.
어느날 태조 이성계가 조준가 함깨 기병10명을 데리고 청계산에 도착했다.
조윤이 굳게누워 이불로 낯을 감추자, 태조가 "손님과 주인의 자격으로 볼 수 없겠는가?"라고하니,
그제야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머리만 숙이고 절은 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청계산 근처의 한 개 면을 봉해주고 석실을 쌓아 정절을 표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윤은 옛나라의 신하가 거처하기에는적합치 않다고하여
즉시 양주로 옮겨 스스 호를 송산이라 하였다.
송산이란 고려 왕조의 수도인 개성의 다른 이름 송악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이름은 견으로 불리나 초명은 윤이었다. 설화에 의하면 이름을 윤에서 견으로 고치고 자를 종견이라 했으니, 나라의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는 개와 같다는 뜻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정조실록>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반면에 그가 조선조에서 수많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71세까지 고종명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조가 건국된 지 400년이나 지난 정조때에 이러한 내용이 실린 것으로 보아 당시 경기 유생들이 국가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 일수도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충절의 교훈도 있지만 자기 주관에 따라 부귀 영화를 마다하고 지조를 지켜 고통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소중한 덕목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과천문화제4호1998,이달호>
<2007.3>
-가운데 봉우리가 제2봉 석기봉이고 그 바로 아래에 신선대가 있다. (군시설 왼편에 청계산 정상 망경대가 있다)
신선대 왼쪽 골짜기 상단부분에 금정수 (하늘샘)가 있다.
<2006.12>해발 : 592 M
▣ 금정수,마왕굴샘,박쥐골샘,오막난이굴샘,하늘샘,단비샘
청계산 최고봉인 망경대에서 바로 남쪽으로 석기봉이 이어지며, 그 석기봉 절벽 1백여 m 아래 있는 샘이다.
행정구역상 과천시 막계동에 속하며, 청계산의 서쪽 벼랑이 된다.
<과천현 신수읍지>에는
금정수는 만경대 정상에 있다. 충암이 백길이 서 있는데, 마치
사람이 대를 쌓은 듯 하다. 한가닥 샘이 소리내며 바위틈에서
똑 똑 떨어진다. 그 빛이 마치 금빛 같아서 금정수라 이름 지었다.
이도 볼만한 곳이다.
하였다. 절벽아래 건물터가 있는데, 바위사이로 지금도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으나 바위에서 똑똑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 샘에 대하여는 송산 조견선생의 은거지설, 무오사화 때 희생된 일두 정여창 선생 은거지설 등이 대립하고 있으나, 두분의 생존연대에 상당한 차이가 있고 또 조송산의 기록은 불확실하므로 정일두 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으로 보고자 한다.
금정수라는 이름은 김종직의 문하생인 정여창이 무오사화의 변란때 청계산에 피신하여 금정수를 마시며 이곳 마왕굴에서 은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후 정여창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갑자사화때 다시 시체의 목을 베는 극형을 당하였다.
그때 이곳 금정수의 샘물이 핏빛으로 붉게물들었다고 하며, 뒷날 사화에 연루되었던 사림의 선비들에게 복권이 이루어지자 이 샘물이 다시 황금빛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샘은 청계산 꼭대기 바로 가까이 있어서 하늘 가까이 있는 샘이라 하여 산악인들 사이네 하늘샘으로 통하였다., 또 박쥐골샘이라는 이름은 이 절벽의 바위굴에 박쥐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하며, 마왕굴샘에 대하여는 마왕과 관련된 내력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샘이 층암절벽의 바로 아래있고, 그아래 어두운 굴이 있어서 마치 마왕이 살고 있는 굴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어느 산악인은 설명하였지만, 필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마왕굴에 대하여는 두가지 측면에서 그 내력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본래 맥굴-막굴-망굴- 마왕굴로 변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조견선생과 마왕굴에 대한 안내문에, 고려때 맥이라고 하는 이상한 짐승들이 이 굴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므로추찰할 수 있다.
두번째는 이곳 망경대에 연대 미상의 성곽과 망루등이 있었던 것이 전적에 나오고 있으므로 망루=망을 보는 곳, 즉 망굴>마왕굴로 볼수 있으며, 나악 망경대라는 이름도 이곳이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는 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오막난이굴샘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세워진 송산 조견선생과 마왕굴 안내문에 고려가 망하기 직전 맥이라고 하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들이 떼를 지어 이 굴로 들어갔다고 하여 오막난니굴 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 굴 부근에는 건물터를 입증하는 기와편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정일두선생의 은거지라는 설, 조송산선생의 은거지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역시 정일두 선생의 유적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단비샘이라는 이름은 1990년대 초 잠실중학교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정우영산악회가 함께 청계산 등반을 하다가 마왕굴샘의 청정한 약수를 보고 단비샘이라고 이름지었던 것 같은데 원래 이름이 있었던 셈이므로 지명혼란만 가중시킨 셈이다.
금정이라는 이름은 부산 동래의 금정산을 비롯하여 전남 영광의 금정, 충남 청양의 금정등 여러 곳에 금빛 우물로 인하여 생긴 이름들이 있다. <2002,성남문화연구 제9호>
4. 느낌이 있는 답사
경계답사를 시작하는 일요일 아침, 한분두분 참가자들이 오신다
기상청 발표에서 처럼 그다지 춥지않은 날씨, 참 다행이다
지난해 참가하셨던 분들의 모습에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나눈다
참가지 명단을 작성하고 나무에 달아줄 표식, 4구간 경계답사 지도, 오늘의 일정표,
물,김밥등을 나눠 드리느라 과사모 지킴이들 바쁘게 움직인다
문화해설사님, 경계안내자님, 등반대장님의 간단한 인사와 소개가 이어지고... 잠시후 대열 정비
옥녀봉, 매봉, 망경대를 향하여 자~~ 이제 출발이다..
**김노경(1766~1838)님은 조선 순조21년(1821)에 조정인사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 부사등 중앙부서 요직을 두루 거친 큰 인물이다.
순조24년(1824) 59세의 김노경님이 한성부윤 (현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果川 청계산 옥녀봉 아래(주암동 동무께)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자가별서를 마련하였고,
헌종4년(1838)3.30일 향년 73세로 서거,
옥녀봉 바로 아래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이 자리에 안치된다.
果農(과천 사는 농부) 果老, 果山 등 果川에관련된 호를 즐겨 쓰기도 한 秋史선생은
말년에 북청 귀양에서 돌아와 瓜地 草堂(과지초당)에서 머물며 평소 이곳을 자주 찾아
극진한 효도의 예를 다하시며 마지막 예술의 정수를 집대성하시다,
철종7년(1856)10.10향년 71세로 아무런 병환 없이 조용히 주무시듯
대 예술가의 위대한 생애를 고이 접으신다...**
역사적인'과지초당'이 새롭게 탄생하게 될 주암동 돌무께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문화해설사님의 해설이 흐뭇한 나의 마음 속으로 감미롭게 흘러 들어 온다 <2007 신나라>
밤이 많아 밤골이라는 해설이 있고 "정말 밤이 그렇게 많았어요"라고 되묻는
해설사님의 표정이 아이처럼 귀엽다.. 이동네 살던분께 다시 여쭤 볼까 말까?
단전호흡을 가르치시는 '국선도' 관장님께 산행전 몸풀기 스트레칭을 부탁드렸다
다같이 팔,다리, 목, 온몸을 흔들어 몸을 적당히 풀어 주고
다시 한번 인원 점검후 어른 45명, 학생 8명이 씩씩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있어 망설여진다는 해설사님, ㅎㅎ그러나 나의 우렁찬 대답으로
'옥녀봉' 야한버전(?)의 해설이 있었고... 古詩의 대가이신 이충구 교수님,,
뒷쪽에 앉으셔서 조용히 듣고 계신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후배 아껴주시는 선배님..
변함없으신 표정과 말투에 뵐때마다 존경과 친근함이 더해진다
오늘도 여전히 참 반가우신 분이다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수많은 나무계단을 뒤로하며 드디어 매봉도착 야~~호!!
기념사진 찰칵 찰칵~~ "점심 맛있게 드세요" 서로서로 맛있는 인사를 나눈다 <2007
58회이명숙 친구와 62회송영호 후배, ㅎ~옆에서 아주쬐끔 거들어주신 57회이윤구선배..
시산제 상을 정성껏 마련하여 절을 올리고 향이 좋은 술로 헌주를 하였다
앞으로 우리 '과천문화를사랑하는모임'에 좋은일이 많을듯 술이 달다 <신나라 2007>
다소곳이 절하시는 신나라 운짱님이 너무 아름다우시다! 이충구 박사님의 우리 과천 나아가 동양의 보배이십니다. 한학의 태두이시지요... ^^* 2007 청관>
신현희 위원장님께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과사모의 무궁한 발전및 화합 그리고 이번 과천시 경계답사가 아무런 사고없이 잘마무리 되기를 기원하며"~~~~~~~~ 이날 알콜성분의 음식이 여기 제를 올렸던 헌주뿐이였으니 그음복주가 얼마나 달았을까??? <yhsong 2007>
과사모지킴이 호정구님, 배드민턴만 잘지는 줄 알았더니 제기차기도 훌륭하다
아무리 애써도 남자들 못 따라가겠다.. 5년만 젊었어도 30개는 찰텐데...훗~
2구간때는 상품을 마련해 환경정화센터견학후 점심을 맛있게 먹고
경계답사 참가자중 원하는 사람 모두 남녀노소 구분없이 치열하게 우열을 가려봐야겠다 <2007 신나라>
점심식사후, 바람이 차 이동 하기 전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정여창, 혈읍재, 금정수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귀기울이며 듣고계신 참가자들 모습이 단풍처럼 곱고 이쁘다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 햇살과 바람, 하늘과 구름이 함께 경청하는듯하다
과천,서초,성남의 경계영역- 혈읍재 <20003>
<2007.3월>
-가운데 봉우리가제2봉 석기봉이고 그 바로 아래에 신선대가 있다. (군시설 왼편에 청계산 정상 망경대가 있다)
신선대 왼쪽 골짜기 상단부분에 금정수 (하늘샘)가 있다.
-금정수(하늘샘) 정지 작업하는 이효진, 황인구 지킴이님들... 2007.3
--1급수청정수 에만 산다는 무수히 많은 도룡농 알들...하늘샘이 도룡농들의 자궁이었나.?
-넓고 훤해진 하늘샘 터.. 나름 만족하신듯 혹은 부족한것이 없나?효진형 바라본다 ^^;
-잡목과 위험한 뿌리들 제거하고, 오물수거하고, 첩첩한 산그림자 뒤로하며 기념사진..
멀리 매봉이 자못 웅장하게 보인다. 2007.3
한발자국만 더 나가면 아득한 절벽이다.
*** 이렇게 이효진님, 황인구님, 정재성 지킴이들께서 귀한 시간을 할애하시며 장장 오전10시부터
오후6시까지의 보존관리 작업을 마쳤다.
다소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모두 하루 아깝지 않고 보람있게 잘 보냈다는 마음들이다.
모쪼록 다음에는 더 많으신분들이 참여 하여 주시기를 소망해 본다.
이젠 올라가는 길이나 내려 오는길을 잘 익혀 두었기에 시간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넓고, 양지바르고 따뜻한 정여창선생 은거지에서 하늘샘의 맑은 물로 차 한잔 타서 마시고 낮잠 한숨 푹 자보아야지..... ^^* <2007.3.20 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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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신중에도 귀한시간 내셔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이충구교수님 내외분,
문화해설사님, 시청 지적팀의 59회신학희후배님, 산행대장이셨던 57회 이윤구선배님,
언제나 늘 힘이 되어주는 58회 이명숙친구, 묵묵히 무거운짐 지고 도움주신 듬직한 62회
송영호후배님, 출발전에 이것저것 도와주며 훈훈함을 남기고가신 64회 원금구 후배님,
1구간 내내 사진 찍느라 애쓰신 69회박정국 후배,
사고없는 산행을 위해 안전을 담당해주신 호정구 지킴이님..
모든님들께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배 후배님들 2,3,4,구간 경계답사때 오실거죠~? <2007.10 신나라>
<2003년 답사기 정재성 >
09:00 경마장역 1번출구. 맑은 유리처럼 투명한 날씨다 손종태 대장 먼저나와 기다리고 있다. 역시 책임감 있는 안내자 답다. 기다리며 오늘 일정을 다시 논의 해 본다.
09:30 몇 분이나 오실까?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점쟎으신 부부가 오시고 이어 가족동반 다수, 대우증권에서 한 팀 오시고, 속속 학생과 시민들이 도착하셨다. 작년에 같이 답사했던 예쁜 전영옥님의 부부가 함께 오시어 너무 반가왔다.
과사모 지킴이들의 분주한몸놀림으로 답사에 필요한 유인물 (문화유적안내,지도),안내표찰,쓰레기 수거봉투등을 나누어 드리고 참가자 명단을 받고 신학희 지적안내자,손종태 등반안내자, 송세연 문화안내자님을 소개하며 오늘 답사에 필요한 주의사항과 요지 일정및 공지사항과 안전사고방지,학생들의 자원봉사 활동 요령등을 안내했다.
10:00 마침내 2003년도 과천시경계답사 제 1구간을 향하여 깃발을 앞세우고 힘차게 첫 출발하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신 가족들을 다시 찾아가서 모셔오기도 하였다. 경마장 말두레길을 따라 양재방향으로 걸어간다. 이경수 과천시의원 가족을 만나 박수로 맞이하며 합류한다.
주암동 돌무께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말년을 지내신 과지초당 자리 앞에서 문화안내를 하였다. 지면을 통해 일부 소개한다.
추사 김정희선생(1786~1856)의 생부 김노경의 묘터와 과지초당의 김노경(1766~1838)님은 조선 순조21년(1821)에 조정인사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형조판서,병조판서,판의금 부사등 중앙부서 요직을 두루 거친 큰 인물이다. 순조24년(1824) 59세의 김노경님이 한성부윤(현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과천 청계선 옥녀봉 아래(주암동 돌무께)에 과지초당이라는 자가별서를 마련하였고, 헌종4년(1838) 3월30일 향년 73세로 서거, 옥녀봉 바로 아래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이 자리에 안치된다. 추 사선생은 여막에서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평소 이곳을 자주찾아 극진한 효도의 예를 다하신다. 과농이라는 호를 쓰기도 한 추사선생은 북청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의 옥녀봉 아래 (주암동) 자가별서인 과지초당에서, 뚝섬 봉은사를 내왕하며 우리 고장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시다 철종7년(1856) 10.10일 향년 71세로 아무런 병환없이 조용히 주무시듯 대 예술가의 위대한 생애를 고이 접으신다,... 평소 우리고장 과천을 사랑하시어 과천과 관련된 많은 호를 사용하셨다.과노,과농,과산,과월,과파,과도인,과지당노인등,
10:33 죽바위 길을 따라 유공저유소 지나 10:49 서울,과천간 경계 지주대 도착하였다. 마침 시민신문 황인구 사장님이 취재차 오시어 모두 박수로 환영한다. 신학희님의 안내를 받으며 본격적인 경계답사를 한다.
11:03 밤나무 숲을 지나 약수터에 도착한다.그곳에서 만난 김광수 주암동 11통장님을 만난다.
"여기는 과천시 땅이 분명한데 서초구가 마치 자기네 것 인양 표지목을 설치하고 안내물을 부착하여 서초구에게 빼앗긴 기분이고 자존심 상합니다." 라는 말씀을 하시며 동행한 이경수 시의원에게 이점 잘 헤아려 시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하신다.
또한 시경계 답사를 통해 우리과천을 빛내는데 일조해 달라고 당부하신다. 중간중간에 시경계답사 노란표찰을 시민과 학생들이 직접 부착하면서 운행을 한다. 물론 쓰레기도 함께 주우면서 행군이다. "앗! 뱀이다!" 선두에 가던 황선근학생(중앙고1)이 소리친다.
바로 뒤쫓아 가보니 살모사 한 마리가 있다. 순간 민첩하게 이경수의원이 나뭇가지로 뱀머리를 누르고 맨손으로 덥석잡아 "가을 뱀 맹독있어 뒷사람에게 위험하다"며 멀리가서 놓아준다. 으흠! 역시 평소 시민의 안녕을 위하여 자기 한 몸 투척하는 희생정신이 뚜렷한 공인적책무감이 투철한 지도자답다... 12:00 형무관(현무관)에 도착한다. 서초구에서는 이곳을 옥녀봉이라고 조형물과 시설물을 설치해 놓았다. 일반사람들은 여기가 옥녀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군동8경중의 옥봉추월의 그 옥녀봉이 아니다. 참 옥녀봉은 청계산 북쪽 끝자락에서 삼포마을과 로 뱀머마을사이에 우뚝 솟아 단아하고 소담,담박한 봉우리이다. 허나 이곳에서 바라본 맑고, 깊은 가을 망경대와 과천경마장의 조망은 진정 아름답다 아니할수 없다.
오후 1:00에 삼각분기점 봉우리에 도착한다. 이어 국운의 융성과 우리 과천의 무궁한 발전과 이번 경계답사의 무사고와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의 가정에 만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간단한 시산제를 올렸다. 그리고 준비한 도시락과 음식들을 권하며 나누어 맛있게 먹었다.
1:30에 출발
1:55에 과천시,서울시,성남시 3개 시가 만나는 경계점 지역을 신학희님이 찾았다. 모두 박수로 기뻐하며 3개시 경계점 표찰을 부착했다.
2:01 오늘 구간 종착지인 혈읍재에 도착하다.(혈읍재에 얽힌 역사는 다음 구간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혈읍재 안내를 하고 현대미술관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3:00 산림욕장에 도착하다.
모두 49명 만보기 측정 총걸음 15936보, 산행도상거리 약7Km 의 행군을 마쳤다.
서로간의 노고에 격려를 하며 모아온 쓰레기를 휴지통에 담고, 봉사활동 보고서 나누어주고 제2구간 일정을 안내하고 다음에 다시만날 것을 기약하며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공원으로 향했다. 끝으로 자료주고 도움주신 문체과 박준범 계장님, 지적담당 정종기 계장님, 자원봉사센터 김순옥 선생님, 관악레져 김영일 사장님, 과사모 박정국님 외 여러분들 깊이 감사한 마음 보냅니다. 아울러, 항상 선두에 서서 열심히 안내 표찰을 부착하며 씩씩하게 동행했던 황선근(과천 중앙고1) 황창근(과천중1)형제에게 격려의 박수 보낸다.
시민과 학생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면서(대학생환영)... 특히 학생들에게는 호연지기를 배양하며, 발로하는 체험 지역사랑으로 환경정화활동을 하면서, 지역문화가꾸기 자원봉사활동시간으로 인정받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