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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본문: 시35:1-28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말하기가 좀 민망한 그런 제목이지요.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엉덩이도 사실은 제가 많이 부드럽게 고쳐서 쓴 것이에요.
울다가 웃으면 본래 이게 항문에 털 난다. 이런 말도 돼있는 것인데 이 금기어가 갖고 있는 뜻이 뭡니까?
감정의 아주 극단적인 변화를 경계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감정의 극단적인 변화가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때가 사춘기라 그래요. 사춘기.
그래서 웃다가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사춘기 때 뭐 겨드랑이에도 털이 나고 이제 성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 맞춰서 한 얘기이기도 하고 뭐뚜렷한 그리고 정확한 유례를 알 수 없습니다마는 엉덩이에 털 나는 것이 뭐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 아닌 바에는 울다가 웃고 웃다가울고 하는 그런 감정의 극단적이고 과격한 기복은 사람의 감정의 자연스러움에 좀 대치되고 잘 맞지 않는다하는 뜻으로 생긴 말이라고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다윗은 아마 엉덩이가 원숭이 엉덩이 같지 않았겠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요. 털로 덮였을 거 같아요.
오늘 시편 35편 보면 1절부터 8절까지 우리가 읽었지 않습니까?
원수에 대한 대적들에 대한 오기와 반항심과원한으로 가득차있는 느낌이 확 듭니다. 그러다 갑자기 9절과 10절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말을 했는데 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이 즐거워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길이라는 단어가 아랍어의그 뿌리를 두고 있는 히브리어인데 아랍어의 뜻이 뭐냐 하면 빙글빙글 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건 뭘 뜻하냐?
우리가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하면서 손잡고 빙빙 도는 것처럼 여호와하나님과 손을 잡고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오벳에돔의 집에서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올 때 그 성에 입성하면서 법궤 앞에서 펄쩍펄쩍 춤을 춥니다.
그때 아내 미갈이 보고 어떻게 왕으로서 저다지도 체통 없는 행동을 할까? 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다윗이 듣고 미갈을 저주하게 되지요.
그래서 미갈이 애가 없었습니다.
하여간 이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에요.
마음이 기쁘다. 마음이 흡족하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기쁨이 충만하다, 충만하다 못해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가지고 온 몸이 펄쩍펄쩍 뛰면서 하나님과 두 손 잡고 강강수월래 하듯이 너무 기뻐하는 그런 모습을 말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10절에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 같은 이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자다.
뼈가 말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대적들에게 둘러싸여있고 착취하려는 악랄한 사람들에 의해서 포위되어있지만, 쫓겨 다니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뼈에서부터 우러나는 거예요. 뼈에서부터.
그 뼛속으로 심층적으로 흐르고 있는 안도감, 쾌적함 이걸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가 배경이 뭔지 아십니까?
아주 두드러지게 반복되어지는 배경인 사울 왕에 의해서 쫓김 당하던 도망자시절에 쓴 시에요.
그런데 이 시에서 지금 보면 이렇게 8절까지와 대적들에 대한 원한이 가득 서린 듯한 기도, 간구가 징징거리고 우는 듯한 소리가 있다가 9절, 10절에서 갑자기 펄쩍펄쩍 뛸 만큼 기뻐하는 마음의 표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11절부터 쭉 17절까지 원수들의 대적의 상황, 어떻게 나를 괴롭히려 그러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그러고 이런 얘기를 쭉 하다가 18절에 되면 또 갑자기 감사 찬송.
내가 대회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19절에 부당하게 나의 원수 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옵시고. 또 이렇게 나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28절에 보면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라고 또 웃으면서 끝이 나요.
이러니 엉덩이에 털이 나도 이거 무슨 뭐 곰새끼, 원숭이새끼처럼 나지 않았겠어요?
신앙인이 여러분, 울다가 웃으면서 엉덩이에 털 난자들이 신앙인입니다.
한번 여러분, 거울 보세요. 아침에. 아니면 쓱 한번 남몰래 마누라, 남편 몰래 내 엉덩이를 쓱 만져보시고 털이 없어 매끈하시면 이거 뭔가 잘못된 신앙인이다 생각하셔도 되겠다 이겁니다.
자, 여러분 이 지독하게도 아주 과격한 감정의 기복,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왜 이런 감정의 기복이 가능하게 될까요?
1절에 보면 여러분, 이런 말이 있어요.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이 말속에 왜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극단적인 변화로 표현되어져야 되는가가 이유가 들어있다는 것이에요.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시고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소서.
세상에 어느 인간이라서 이렇게 하나님과 한편인 자가 있겠습니까?
하여간 이 세상사람 중에 나와 다투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요.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그렇게 완벽하게 하나님과 한편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있다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과 한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냥 하나님과 한편이 될 수 있는자질과 인격과 영적 상태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자꾸 하나님이 내 편이 돼달라고만 얘기할 게 아니라 어떡하면 다윗처럼 이렇게나와 다투는 자는 여호와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를 여호와가 싸우신다고 할 만큼 하나님과 한편이 될 수 있는가를 좀 생각해봐야되지 않겠냐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한가?
그게 바로 9절과 10절에 답이 나온다는 거예요.
지금 다윗이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9절의 말씀, 그리고 내가 그 구원을 기뻐한다. 이 말이 뭡니까? 그 구원을 기뻐한다.
평소에 시편을 보면 너무 많이 나오는 말 같습니다마는 오늘 이 시편 35편에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히브리어 길이라고 하는 단어가 독특한 의미를 풍기면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대적이 지금 둘러싸여있습니다.
대적이 둘러싸여있는 가운데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하듯이 펄쩍펄쩍 뛰면서 빙글빙글 돌면서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환희의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그 구원을 기뻐한다는 게 그 구원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사울이 쫓아오고 있는데 예를 들어 블레셋 왕이 쳐들어와가지고 사울을 쳐 죽이고 다윗을 구해줬다. 다윗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지금 원하는 것은 사울 왕이 쫓아오고있는 그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께서구원해주실 수 있어야 그것이 자기에게 기쁨이 된다는 거예요.
그 구원이 나의 기쁨이다.
그러니까 내가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는데 형님이 나를 도와주십니다.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형님이 도와주시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이 형님을 통해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이 생겨야 그때 기쁘다는 겁니다.
무조건 돈이 생겨서 돈의 곤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면 돈도 싫고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면 클레오파트라도 싫고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면 건강도 싫고 다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돈, 돈 자체의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구원자체에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적에 의해 둘러싸여서징징거리고 울 수밖에 없고 하는 그런 현실 속에서 마음의 심층구조에서 마음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손 붙잡고 펄쩍펄쩍 뛰는마음,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있다면 나와 다투는 자와 하나님이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하나님이 싸우신다. 라고 말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분, 어때요?
예배 나와 가지고 찬송하며 기뻐하고 하는 중에도 심층에서 흐르는 슬픔이 있어요.
하나님, 내 자식이 언제쯤이면 제자리로 돌아오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하는 사업이 언제쯤이면 좀 번성해서 하나님, 내가 언제쯤이면 멋진 남자 만나서 결혼하겠습니까?
하나님, 바람피우는 우리 남편 언제 돌아옵니까?
이 마음에 한이 맺혀있는 것이에요. 심층 속에서. 거꾸로 돼있는 거예요. 다윗과.
거꾸로 돼있어요.
다윗은 이 모든 희노애락의 감정이 표출되어지는 현상의 배후, 현상의 심층에 하나님과 손 붙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기쁨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희노애락의 표출적 삶의자리에서 희노애락이 표현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울고 웃고 화내고 하다가 그러다가도 심층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하나님으로부터오는 기쁨 때문에 헤헤헤 하고 또 웃다가 또 현상을 보면 대적들이 가득 싸여있으니까 또 하나님이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나와 싸우는 자와 싸워주시옵소서. 노래를 하는데
우리는 심층 속에서 뭘 하고 있느냐?
돈에 대한 애절함, 자식에 대한 애절함, 뭔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얽혀서 그 심층적인 감정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희노애락이 표출되어서 사람과 만나고 생활을 하고 있는 거라는 겁니다. 그 마음속 깊이.
여러분, 언젠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저희 할머니가 만주에서 시집을 오셔가지고 두 살 아래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열여섯에 결혼을 하시고 할아버지가 열네 살.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가 하여간 말씀으로 듣기는 여러 친척 분들과 저희 아버지의 증언을 따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클라크케이블 같대요.
너무너무 잘생기셨다는 거예요. 저는 사진도 못 봤어요.
태자 한자 규자 되시는 존함을 갖고 계시는어른이신데 그런데 하여간 뭐 얼굴값을 하시느라 그러셨는지 고등학교를 서울에 경신고등학교를 유학을 보내놨더니 아프다는 전갈이 와서할머니가 불원천리하고 서울에 병간호 때문에 내려왔는데 아, 그 하숙방에 세상에 여자신발이 있더라는 겁니다.
만주에서부터 불원천리하고 그 어린신랑을 간호하겠다고 내려오신 할머니의 심장이 어땠겠습니까? 덜컥 내려앉지요.
그리고 만주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그 바람기를 죽이지 못하셔가지고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시고 그런 중에 할머니가 예수님 믿게 되셨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신랑 얻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고맙지요. 따뜻하고자상하고 아내에게 잘하는 남편이었다면 예수님 안 믿으셨을 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하여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단 하루도새벽기도를 안 빠지시고 쭉 나가시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기쁨에 젖어 평생을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사람이 희노애락이있잖아요. 삶에.
이놈의 신랑이 돌아와야 말이지, 이놈의 신랑이 집에 들어와야 말이지. 그러니까 속이 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주 벌판에서 42도 영하 42도까지내려가는데 그 들판에 있는 샘물가로 가가지고 망치로 얼음을 깨가지고 그 얼음물로 벌컥벌컥 들이켜시면서 그래서 달래시고 그렇게사셨다는 이야기를 그 누구도 아닌 막내 손주를 데리고 말씀을 하시더라 이겁니다.
할머니가 그런 말씀 하셨어요. 할머니가 저한테 그러세요.
철아, 나는 천국에 가면 남자도 여자도 없고 결혼도 아니 한다 그러는데 결혼을 좀 하는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그러시는 거예요.
얼마나 이 마음에 한이 맺히셨으면. 한이 맺히셨으면.
그래도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다 승화되셔서 길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할머니를 보시면 아, 할머니는 진짜 예수 믿는 사람 같아요.
그렇게 온화하신 그런 표정을 지으시고 많이 행복해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마는 어쨌든 그런 한이 있는 거예요. 사람이. 그런 아쉬움, 안타까움.
그런데 이게 돈에 대한 아쉬움, 자식에 대한 아쉬움, 남편에 대한 아쉬움, 내 미모나 건강에 대한 아쉬움, 이런 것으로 차있어 갖고는 절대로 다윗처럼 하나님이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은 사실 여러분,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보이는 사람들이에요.
희노애락의 차원에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고 화도 나고 합니다마는 그럴 때마다 밑바닥에서 하나님과 손 붙잡고 강강수월래 하듯이 기뻐하는 감정이 폭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적인 웃음도 쪼개지고 세상적인 울음도 쪼개져나가고 세상적인 분통도 쪼개져나가고 다 쪼개져나갑니다.
세상적 차원에서의 모든 희노애락의 감정이 심층부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 기쁨, 뼈가 노래하는, 뼈가 노래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안도감과 평강.
내 뼈가 노래하는 거예요. 뼈가 노래하는 거예요. 가장 깊은 곳에서.
그러니까 뼈가 노래하는, 뼈가 통뼈가 아니라 노래하는 뼈에요. 노래하는 뼈.
노래하는 뼈를 갖고 있는 자들.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뼈들을 갖고 있는 자들을 이 세상 그 무엇이 그들을 짓누를 수 있겠습니까?
조수미씨가 그랬잖아요.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악기는 우리의 몸이다.
조수미씨 얘기가 인터뷰하는 기사를 봤더니요노래를 할 때 온 몸의 땀구멍이 다 열린대요. 세포가 다 열린대요. 허리도 열린대요. 허리에서 소리가 난대요. 완전히 서라운드스피커. 허리에서 소리가 나와요. 온 몸이 다 뚫려서 소리가 나와야 정말 자기가 소리에 빠져서 노래를 하게 된다는 거예요.
아, 굉장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신앙인이 뭡니까?
뼈가 노래하는 거예요. 뼈가.
신앙인의 뼈는 어떤 뼈냐?
골다공증의 뼈. 구멍이 많은 뼈. 단단한 뼈. 무른 뼈. 이런 뼈가 아니라 신앙인의 뼈는 노래하는 뼈입니다.
그래서 뼛속에서부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강과 안도의 노래와 감사의 노래가 뼈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 표피적인 삶의 차원이 뭐 잘되건 못 되건 울고 웃고 하세요.
화도 내세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뼈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평강의 감사가 이 표층적인 모든 것을 다 묵사발 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런 사람들한테는 여러분,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그러는데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즐거운 웃음이 기조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희노애락의 감정을 따라 살고 있는 이 신앙인들에게는 털 대신에 뭐가 날까요?
하나님의 뜻이 마치 대지를 뚫고 싹이 나듯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엉덩이에 털이 나듯이 기조로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과 기쁨과 뼈가 노래하는 그러한 감사의 기조가 흐르고 있는 가운데 희노애락이 반복되는 삶을 사는 동안에 우리의 삶의 표면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숭숭숭숭 자라기 시작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다윗이 노래할 때 원수를물리쳐주세요, 물리쳐주세요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뼈가 하나님의 평강을 노래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는 이러한신앙이 된 사람에게는 그냥 원수들에 대한 기도가 다 하나님의 뜻이 돼버리는 것이에요.
내가 원수가 이렇게 둘러치고 나를 괴롭히고이유 없이 나를 학대하는 너무너무 힘든 상황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손 붙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강강수월래를 부르듯이 하나님과 함께랄라랄라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고 내 뼈로부터, 내 뼈로부터,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감사가 나올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다투는 자를 하나님이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를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겁니다. 나의 대적이 곧 하나님의대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이 생기면 기뻐하고 자식이 공부 잘하면 기뻐하고 멋진 남자와 데이트하면 기뻐하고 내 외모가 출중하면 기뻐하고 그런 기쁨의 상태로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기는 애당초 글렀지요. 애당초 글렀어요.
여러분, 우리도 웃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십자가의 증인들도 웁니다. 그리고 때로는 화가 납니다. 예수님이 성전정화를 하실 때처럼 바리새인을 향하여 말씀의 채찍을 휘둘렀던 것처럼 화가 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삶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기복들은 언제나 밑바닥에서 흐르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웃음의 흐름의 기조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를 내다가도 밑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어야 해요.
슬퍼하다가도 밑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리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우리 삶에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의 털이 무성무성 자라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세상의 삶에서 울 일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모든 울음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 때문에 웃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 모든 울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웃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주렁주렁 결실되어지는 일이 있게 될 것이에요.
울다가도 웃읍시다. 털 나게 말입니다.
하나님아버지!
표층적인 현실의 삶에 우리의 마음이 매여서 삶에서 웃는 것이 웃는 것이고 삶에서 우는 것이 우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현상적인 삶의 층에서 우리 마음이 죽게 하시고 뼛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감사가 살아날 수있게 도와주시며 어떤 상황이 주어져 나를 둘러 진 칠지라도 하나님 손 붙잡고 강강수월래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해주시옵소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 때에 언제나 다시금 우리 심층부에서일어나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의 삼키게 하셔서 이 기쁨이 우리를 통하여 널리널리 전파되는 복된 복의 근원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는 울다가도 웃는 사람들인 것을 기억하게 되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