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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지 않은(?) 엄친아
렘 35:1-19(5-14)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부럽지 않은(?) 엄친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부럽지 않은 말에 물음표를 붙여서 읽어야 제목이 뜻하는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엄친아를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혹시 엄친아에 대해서 낯선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잠깐 설명을 드립니다.
2005년도에 인터넷에 게재된 만화가 있습니다. 심윤수 화백의 만화인데 그 만화의 시리즈 제목이 골방환상곡입니다. 골방환상곡에서 제 8화의 제목이 우월한 자인데 그 우월한 자가 몇 커트 안 나옵니다.
그 우월한 자가 누구냐면 명문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외모가 출중합니다. 부모에게 아주 극진히 효도를 합니다. 그리고 취직난 같은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이 우월한 사람은 연봉 초봉이 2억이 넘는 그러한 제의를 받고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오라고 난리를 치는 정말 탁월하게 우월한 자 엄친아라고 나옵니다.
엄친아, 엄마 친구의 아들. 다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엄마들이 자식들이 공부 안하고 제구실 제대로 못하면 잔소리 할 때 등장되는 비교를 위한 어떤 모범적인 존재 이 엄친아.
저도 여러 번 그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제 친구 아무개가 있습니다.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가고 모회사의 간부로 요직에서 근무하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늘 엄마의 잔소리가 아무개 발이나 씻어라 이렇게 까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공부가 어떻고 엄마한테 어떻게 하고 집안에서 어떻게 하고 일어나면 자기 잠자리 다 개고 방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데, 너는 공부도 못하고 뭐도 못하고 이 방 꼬락서니는 뭐며 이러면서 엄마들이 야단치고 잔소리할 때 꼭 등장하는 모범이 엄마 친구의 아들 엄친아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 엄친아를 등장 시키십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예언 활동을 하는 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한 250년 전 쯤의 사람일까요?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 10대 왕 예후 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나답의 아버지가 되는 레갑은 야곱 족속 12지파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 미디안 사람 아닙니까? 바로 이 미디안 족속입니다. 미디안 족속이면서 아마 모세 때부터 이스라엘에 영입되어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요나답의 자손들을 불러다가 성전에 여러 방이 있는데 그 한 방에 초청을 해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을 불러다가 포도주가 가득 찬 잔을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요나답의 자손들이 포도주를 마시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조상 요나답이 250년 전 쯤에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포도주를 먹지 말라 했으므로 내 아내나 내 자녀가 250년 동안 이 요나답의 자손들 집에서는 그 누구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나답이 250년 전에 말하기를 집을 짓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씨앗들을 들고 다니면서 파종해서 농사를 짓지 말라 했다. 그리고 언제나 장막에서 생활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250년 동안 지금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예레미야에게 고백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너는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해라.
이제 하나님이 등장시키는 엄친아가 나오는 겁니다. 모범적인 영적으로 우월한 엄친아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요나답의 자손들은 요나답이라고 하는 한 인간, 그들의 조상이 내린 명령도 250년 동안을 충실하게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너희들은 뭐냐? 사람이 아니라 천지를 지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너희를 출애굽시킨 너희의 여호와로서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있는데 어떻게 너희는 그렇게 끊임없이 지킬 것을 권고하고 선지자들을 보내면서 끊임없이 종용했건만 지금 이 꼴이 뭐냐? 어떻게 나 하나님의 명령을 그렇게 어길 수가 있고 어떻게 지키지 않을 수가 있느냐? 라며 비교를 하십니다.
이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집을 짓지 마라, 농사를 짓지 마라, 장막생활을 하라, 포도주를 마시지 마라, 포도농사를 짓지 마라. 이것은 가화만사성 같은 가훈이 아닙니다. 이런 정도 무게의 가훈이 아닙니다. 청빈낙도와 같은 가훈이 아닙니다. 외유내강, 고진감래 이런 의미에서의 가훈이 아닙니다.
집을 짓지 말고, 농사를 짓지 말고, 장막에서만 생활을 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포도 농사를 짓지 말라는 이 말은 절대로 잘 살기를 거부하라는 말입니다. 잘 사는 반대편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어느 조상이 자기 후손들에게 이렇게 너는 절대로 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삶을 살지 말고 못 사는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리로만 살고 그리로만 나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건 단순한 가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그 돈을 지켜나가며 어떻게 사회를 위해서 올바르게 사용하느냐? 우리나라의 명가 경주 최씨, 이조시대 때 200년 동안을 만석꾼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 부자의 올바른 철학.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어떻게 부를 거머쥐고 그 부를 올바르게 쓰느냐? 빈민을 구제하라 이런 게 아니라, 집을 짓지 말라 농사를 짓지 마라 포도주를 마시지 마라...
여기서 포도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포도주가 아닙니다. 수돗물이 있고 음료수가 포도주가 아니라도 콜라부터 사이다로 해서 환타 등 가지가지 음료수가 있는 이런 시대가 아닙니다. 물도 안 좋고 귀한 중동 땅에서 포도주는 거의 식사 때 음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지켜왔다는 이 사실 속에 하나님께서 엄친아로 등장시키지만 우리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엄친아는 키 크고 잘 생기고 명문대 졸업하고 외국 유학이나 연수 경력이 있고 탁월한 외국어 실력에 연봉 2억에 이 회사 저 회사로 오라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 세상에서 부럽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등장시킨 엄친아, 당신의 백성인 유다백성을 꾸중을 하시기 위해서 등장시킨 이 레갑자손 요나답의 후손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삶을 고수했습니다. 이렇게 삶을 고수하게 된 삶의 원칙의 이면에 도대체 어떠한 정신이 들어 있었을까요? 요나답이 이렇게 살라고 명할 때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후손들에게 이렇게 못 사는 방향으로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이할 정도로 잘 살 수 있는 방법과는 반대 방향의 삶을 제시하고 명령했을까요?
요나답이 예후 왕 시절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등장하던 시대는 이런 때였습니다.
아합 왕 때에 이세벨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 전역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온 나라 안은 그 종교적인 바알 숭배의 어떤 예식에서 나오는 성적인 혼잡스러움이 범람하고 윤리와 기강과 도덕과 여호와 신앙에 대한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아합)의 아들로서 그 형제 아하시아의 왕위를 계승한 여호람 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때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후에게 떨어집니다. 예후를 왕으로 세우시려는 계획이 시작됩니다.
이때 예후가 아합과 아하시아와 여호람이 다 오무리 왕조인데 이 오무리 왕조에 대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그 쿠데타의 첫 걸음이 열왕기하 10장에 보면 전국의 바알 선지자들을 한 자라에 모아서 다 목을 자릅니다.
이 대숙청 작업을 시작할 때에 예후 말고 예후가 도움을 청하게 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언급이 됩니다. 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입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을 예후가 타고 가는 마차에 동승해서 거의 파트너십으로 관계를 맺고 바알 선지자들을 척결하는데 앞장을 섭니다.
언뜻 보면 요나답이 예후가 왕이 될 것을 마음에 확신하면서 정치적으로 한 자리 얻으려고 참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내하면 요나답은 야곱 족속이 아니므로 여호와 신앙을 원초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아닙니다. 미디안 족속 이드로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뿌리가 없는 그 사회 안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예후를 도왔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250년이 지난 뒤에 요나답이 예후를 도와서 바알 선지자들을 척결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250년 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요나답의 의도가 바야흐로 선민 유다가 망하기 직전에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요나답은 바알을 단순히 십계명의 1,2,3 계명에 어긋나는 우상 숭배라는 것으로만 규정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왜 선민이 바알을 숭배할 수 밖에 없고 바알 숭배에 이렇게 강하게 매료되어 버릴 수밖에 없을까를 연구한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요나답은 그의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를 한 결과 바알이 누굽니까? 가나안 농경사회의 주신입니다. 농경사회라는 것은 정착이 첫째 조건이 되어야 되고 그리고 풍요로운 수확이 농경사회가 한결같이 바라고 있는 최종적인 소원입니다. 농업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농경사회에 소속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숭배를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농경사회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삶의 스타일에 있다고 요나답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
단순히 바알을 우상숭배다, 계명을 어겼으니까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뉘우침으로 바알숭배를 하지 마라가 아니라 왜 바알숭배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출애굽의 대단한 기적의 역사들을 경험하고 그토록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해 들어온 선민이 무엇 때문에 바알숭배에 그렇게 빠져서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을까를 연구한 결과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하고 집을 짓고 성읍을 짓는 그런 생활 속에서는 풍요와 다산 부요함을 원하지 않을 수가 없고 다시 말해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것을 원하고 있는 한 바알숭배처럼 매력적인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손들에게 말합니다.
“집 짓지 마라.” 정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농사짓지 마라.”
바알숭배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십계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을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너희의 삶 자체가 아예 풍요와 다산을 원할 수 있는 그 뿌리를 근절시켜야 된다. 정말 요나답 대단한 사람아닙니까?
이 영적인 거장이 부자가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요나답의 자손이 250년 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만 250년을 바알을 피하기 위하여 요나답이 제정해준 그 집안의 명력을 대대로 지켜가는 놀라운 충성스러운 레갑의 자손들은 250년 동안 하나님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알숭배를 피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거부하고 가나안을 끌어안습니다. 가나안을 끌어안을 때 단순히 청빈낙도를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요나답은 돈 버는 것 대신에 하나님을 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는 방법, 어떻게 돈 벌듯이 높아지듯이 다산을 이루듯이 하나님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많이 갖고 하나님을 많이 버는가 하나님을 버는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세운 것입니다.
여러분, 제 마음에서 눈물이 납니다. 어떻게 이 사람이 바알숭배가 만연하던 북왕국 이스라엘 오무리 왕조시대에 자기 자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눈물이 납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거장이 완전히 역사의 그늘 속에 숨겨져 있다가 선민이 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엄친아로 등장을 시키는데 이 사람의 삶을 누가 부러워합니까?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집 원하지요, 농사가 사업 아닙니까? 비즈니스 잘 되기를 원하지요. 이 사람이 비즈니스를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집을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가르쳐 준 이 삶의 스타일의 원칙은 정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원리가 아닙니다. 요나답이 스스로 연구하고 정말 따지고 따져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방법을 채택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답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지만 신명기 6장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5-9)
그렇게 하면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신 6:10-11)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답은 포도원을 갖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요나답의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한편으로 주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운 집을 주고 싶어하시고,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운 기업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모세의 걱정도 요나답의 걱정과 똑같았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렇게 주시고 또 주시면서 이 땅에서 너희가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줄 때 하나님의 당부의 말씀 제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희가 배가 부르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풍요와 다산을 좇아갈 것인데 그러면 안 된다...(신 6:12-14).
이 본성을 알았기에 모세는 거듭 거듭 주의를 주었고 요나답은 아예 내가 이 조인으로서 풍요와 다산을 좇아가는 한 바알숭배를 피할 길이 없다면 차라리 풍요와 다산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으로 배부르기를 작정하겠다고 정한 것입니다.
이 요나답의 갸륵한 정신을 하나님이 250년 동안 그 자손들이 면면히 지켜가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집도 없이 포도주고 마시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당시 그 환경에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러나 마시지 않으면서 밭농사도 짓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벌기 위하여 유다백성이 바알에 만연해질 때 조차도 집없이 장막 안에 거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지켜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원은 이 갸륵한 마음 위에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 세상 것도 주고 싶으신 겁니다. 이 요나답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조차도 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충족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끊임없이 땅을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업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 기업의 토대 위에서 삶을 구축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그 땅에 마음을 붙였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삭을 마음에 붙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망할 뻔 했었습니다. 이삭을 떼어냅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주시는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죽어야 합니다. 마음을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다 드리는 겁니다.
요나답이 그런 마음으로 삶의 원칙을 만들어냈듯이 집을 짓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고, 포도원을 짓지 않고, 오직 떠돌이 장막생활만 한 이 마음이 하나님에게 정착했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영원한 본향을 사모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 이미 이 땅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요나잡의 삶의 원칙보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십자가 붙잡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죽고 내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기를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땅에서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에 말려들어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고 우리 마음은 축복에 빠지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야 됩니다.
부럽지 않은 엄친아!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부럽지 않은 자이지만 적어도 저처럼 참으로 미흡한 신앙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는 자만해도 요나답이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요나답의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 쯤 될까요? 어떻게 요나답이 바알숭배가 만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정말 부요와 다산을 향한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결정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그 후손들은 지켜나갔는지 그들의 마음의 백분의 일이라도 우리들에게 허락해주셔서 그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붙잡고 내 마음은 하나님을 벌고 그러므로 땅에 붙지 않은 내 마음을 보시고 이 땅에 대해 하나님이 이루고 싶어하시는 은혜스러운 모든 계획들이 다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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