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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이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 산행은 예상보다 수월했지만
구름으로 인해 주위 시야가 안보여 사진촬영을 할만한 풍경이 적었고
주위 산야의 풍광이 없어 아쉬웠던 산행이었다.
출발지 : 복성이재
복성(卜星)이재(550m) :
옛날에 변도탄이라는 기인이 있어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糧官)으로 있었다.
그는 천기를 살펴보니 삼년 내에 국가에 큰 변란을 겪을 것으로 나왔다. 이에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했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해서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는 전란을 대비,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이 남쪽으로 비쳐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했다. 이 별빛이 멈추는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짓고 피난했으며, 임진왜란이후에도 계속 살게 되었다고 한다고 하여 복성이재가 되었다.
이 백두대간 능선은 500m 이상의 고도를 유지하고 있어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으로 굳어져, 아막산성(阿幕山城) 등 많은 산성들이 축조됐다.
또 다른 이야기로 옛날에는 점을 쳐 전쟁을 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점을 쳤다고 하여 [복성동]이라 했으며 그 후 당군(唐軍)이 신라군에 쫓겨간 후 병영도 철수되고 마을도 없어졌는데, 임진란 때 그 후 유씨 한분이 피난처로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한다.
아래 사진은 복성이재에서 지나온 길이다.
아래 벌목지역은 개인 사유지로 오르막 길 내내 철조망이 쳐 있다.
매봉(712M)에 도착했다.
봉화산 철쭉재가 있는 군락지가 있는 곳이다.
아영면의 흥부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매봉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멀리 정자가 보인다. 치재이다. 같은 말로 짓재
치재 사거리
치재는 고개라는 뜻의 치와 재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2017년 새로 건립된 봉수왕국 전북가야 기념비가 있다.
치재, 짓재의 위치.
멀리 아영면의 흥부마을 방향이다.
날씨가 안좋은 관계로 잘 보이지 않는다.
흥부마을 : 흥부 발복지로 알려져 있는 마을로 아영면에 성리 상성마을이다.
예로부터 ‘춘보제(春甫祭)’ 또는 ‘춘보망제(春甫望祭)’라 하여 제사를 지내왔는데 일제강점기에 중단된 것을 1992년부터 다시 지내오고 있다. 흥부 문화를 선양하기 위한 흥부마을 터울림 행사는 매년 음력 9월 9일 흥부묘에서 개최된다.(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흥부놀부 이야기의 근원설화는 방이설화이다. 방이설화(旁?說話)는 금추설화(金錐說話)라고도 하는데 중국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신라시대에 김방이(金旁?)가 살았는데 그의 아우는 부자였고,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하였다.
어느 해 방이는 아우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하자 심술사납고 성질이 포악한 아우는 누에와 곡식 종자를 삶아서 형에게 주었다.
이를 모르는 방이는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그 중에서 단 한 마리의 누에가 생겼는데, 그것이 날로 자라 황소만큼 컸다.
소문을 듣고 샘이 난 아우가 찾아와 그 누에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러자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들어 실을 켜 주었으므로 형은 ‘누에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곡식도 한 줄기밖에 나지 않았으나, 역시 이삭이 한 자가 넘게 자랐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산 속으로 달아났다. 새를 쫓아서 산 속 깊이 들어갔던 방이는 해가 저물어 돌 옆에 머물게 되었다.
그 때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金錐子]로 돌을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다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를 먹고 놀더니 금방망이를 돌 틈에 놓아두고 헤어졌다. 방이가 그 금방망이를 주워서 돌아오니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심술이 난 아우는 형처럼 하여 새를 쫓아가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지난번 금방망이 도둑으로 몰려 사흘이나 굶주리며 연못을 파는 벌을 받고 코끼리처럼 코를 뽑힌 다음에야 돌아왔다.
<흥부전(興夫傳)>은 이 설화를 번안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코 떼었다’ 또는 ‘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도 이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짓재/치재에서 봉화산 매봉(남쪽) 방향 사진
안테나 있는 곳이 매봉(712m)이다.
아래는 치재를 지나서 작은 능선을 우측으로 진행하고 나타난 2번째 봉우리이다.
약 700m 정도의 고지이다.
꼬부랑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야 한다.
상기 700m정도의 고지를 지나 평탄한 안부길이 계속된다.
여기가 꼬부랑재이다.
양측으로 난 샛길은 사람이 안다녀서 길이 사라지기 직전이다.
꼬부랑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샛길, 꼬부랑재의 존재여부를 알기 힘들 정도이다.
꼬부랑재 위치
꼬부랑재를 지나 760m높이 정도의 작은 봉우리
시그날이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줄 알았다는...
사리재=다리재(850m)
: 봉화산 가기 전에 이정표가 있는 봉우리이다.
봉우리이지 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지도를 보면 좌측 임도를 통해 고개로서 역할을 할 듯 싶다.
사리재의 위치
사리재에 있는 이정표.
사리재 표시는 없고 이정표의 글씨도 이미 퇴색되어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사리재에서 봉화산방향으로 사진 한 컷.
드뎌 봉화산(烽火山, 919.8m)에 도착하다.
봉화가 있다는 것은 멀리 불빛을 비추어줄 수 있는 봉우리이다는 의미이다. 즉 시야가 좋은 봉우리이다.
날씨가 흐려서 보이지 않지만 남쪽으로 지리산 능선을 보지 못하고 그냥 갈 수 밖에 없었다.
봉화산은 전에는 장안산으로 불리어졌다. .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면 백두대간의 남원 지역 출발점이 봉화산(烽火山)이다.
봉화산을 수원으로 하는 풍천(楓川)이 남쪽으로 흐르며 아영면의 중앙으로 가로질러 기름진 들판의 젓줄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진주의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두대간 능선을 경계로 장수군 번암면 쪽의 물은 섬진강의 상류가 되기도 한다.
남쪽 방향으로의 사진.
날씨만 좋으면 지리산이 보였을 것인데 아쉽다.
봉화산에서 진행방향으로 한 컷.
멀리 보이는 화살표의 봉우리가 연비지맥이 시작되는 무명봉(無名峰)이다.
봉화산에서 600m 진행하면 나오는 공터 삼거리이다.
봉화정(烽火亭)이라는 정자와 흥부산악회가 만든 제단이 있다.
남쪽으로 지리산 능선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지리산 능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안내판이 있지만
날씨로 인해 안내판만 보이고 지리산은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무명봉 정상근처의 연비지맥 안내판 및 시그날.
무명봉(944m, 아홉새드리/아름새드리) :
전북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 그리고 경남 함양군 백전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지리산천왕봉이 있는 방향인 남동쪽의 오봉산·삼봉산·왕산의 능선(연비지맥)이 시작되는 갈림길이다.
좌측은 전라북도 장수군이고, 삼거리의 우측능선의 남쪽은 전라북도 남원, 북쪽은 경상남도 함양으로 경계를 이룬다.
무명봉에서 남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아래 안국사가 있는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연비지맥(燕比之脈)의 이름은 남쪽에 아영면 흥부마을이 있어 제비가 날아가는 방향과 감안한 적절한 명칭이라 생각된다.
이 무명봉은 연비지맥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무명봉이라는 명칭보다는 봉우리에 대한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봉(峰)으로 하기에는 1㎞ 근처에 있는 봉화산(919.8m)보다 고지가 높다.
또한 무명봉(944m)에서 대간길로 이어지다 광대치까지 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능선중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즉 명명(命名)을 한다면 봉(峰)보다는 산(山)이란 명칭을 붙여야 할 듯 하다.
연비지맥(燕比之脈)의 시작점인 연비산(燕比山)이라는 명칭도 어울릴 수 있겠지만, 순수한 우리말 용어로 이 지점을 언급된 것이 있다.
2007년도의 블로거에는 이 봉우리에 대한 언급으로‘아홉새드리’라는 용어가 나오다가 이후 블로거에는 ‘아름새드리’라는 용어가 나온다.
[아름]은 아름답다라는 순수 우리말아고, [아홉]은 '9' 또는 '많다'를 말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아홉은 무명봉에서 연비지맥이 끝나는 안국사가 있는 백운산까지 고개가 9개 정도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새드리]는 ‘사다리’의 방언이다. 순수한 우리말에 산(山)이란 용어를 붙어 ‘아홉새드리산’ 또는 ‘아름새드리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약간은 어색할 수 있지만 한자(漢字)인 산(山)을 없애버린 ‘아홉새드리’ ‘아름새드리’란 용어를 계속 사용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무명봉의 정상부에 큰 정상석은 없다.
새로운 이름을 기대해서 그런지 커다란 입석은 만들지 못하고
대신 작은 삼각 돌맹이를 정상에 놓아두고 있다.
빨리 커서 이름을 가진 큰 입석이 되기를...
지나온 봉화산 방향
무명봉의 위치
무명봉에서 남쪽으로 찍은 사진.
작은 봉우리들이 남쪽을 향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연비지맥이다. 그 끝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있을 것이다.
날씨로 보이지 않아서 아쉽기만 하다.
암릉구간
무명봉과 광대치의 중간 지점에
양지재 삼거리가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그 근처임을 시사하는 중간 이정표이다.
산행중 뚜렷한 삼거리는 관찰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지점의 아래 사진이 어쩌면 양지재 삼거리로 생각된다.
우측으로 넘어가면 대안마을이 나올 듯 하다.
아래 사진은 광대치 직전의 하산길이다.
내리막 경사도가 있어 하산길이 꼬불꼬불하다.
광대치(廣大峙, 820m) : 여기서 점심식사를 해결한다.
아름새드리에서 3㎞정도 대간길을 진행하면 월경산 1㎞ 정도를 남겨두고 봉화산과 월경산 사이의 가장 낮은 재가 나온다. 이곳이 광대치(廣大峙)이다.
광대치의 명칭은 두산백과 지지리(知止里)편에서 마을 앞산이 관을 쓰고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광대동이란 마을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행을 해보니 봉화산,무명봉에서 광대치까지는 빨래판처럼 비교적 평편한 능선길이다. 오르막 내리막이 그리 심하지 않다. 광대치로 내려가는 길이 약간의 경사있어서 일부 내리막길이 지그재그로 되어있지만 춤추는 듯한 느낌은 아니다. 광대치에서 월경산으로 가는 길은 춤추듯이 지그재그 느낌이 있기는 하다.
지지리 지역은 북동에서 남서로 뻗은 백두대간의 북쪽으로 좁은 계곡(지지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광대치(廣大峙)의 의미가 ‘넓고 큰 고개’라는 한자의 직역보다는 어릿광대의 광대(廣大)로 백두대간길(앞산)이 관을 쓰고(1,000m고지의 높은) 춤추는 형국의 지형을 광대로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앞산이라면 월경산과 그 남쪽 대간길인데, 산이 춤추는 지세에 낮은 고개에 그 대표성을 가지는 광대치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후 마을이름을 광대치에 따라 광대동이라고 붙였다는 것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는 느낌이다. 지세를 따져서 명명한다면 월경산이 광대산이 되던가 아니면 고개와 마을 이름이 월경치와 월경동이 되었을 것이다.
두산백과 사전에서 평안남도 대동군,강원도 이천군에서 어릿광대들와 연관되어 광대동이라는 지역이 나오며 한자로 넓은광의 광대(廣大)을 쓰고 있다. 황해북도 장풍군, 황해남도 송화군의 광대동도 넓은 광의 광대(廣大)의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탈놀이하는 광대꾼의 한자(漢字)도 [廣大]이다.
지지계곡은 장수군지역이지만 계곡하류는 판소리로 유명한 남원이다. 타 지역의 광대동의 유래처럼 광대꾼들이 모진 멸시와 천대를 피해 원지지마을에서 북쪽에 자리를 잡은 곳이 광대동(廣大洞)이 되었을 것이고, 광대들이 남동쪽 함양으로 넘어가기 위한 고개가 광대치(廣大峙)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광대(廣大)라는 단어로 인해 앞산이 춤추는 형국이라는 변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개인생각일 뿐임을 밝혀둔다.
또한 블로거에서 이곳의 광대치는 [광]자에 넓을광(廣) 과 빛광(光) 2개가 혼용되고 있다. 두산백과 사전의 여러 지역의 광대동에 한자로 빛 광(光)를 사용하는 지역은 없다. 광대동이 있는 지지리는 1,000고지의 능선인 백두대간의 북쪽에 위치하여 많은 빛이 비출 수 있는 지역이 아니며, 광대치(光大峙)도 동쪽으로 월경산과 월경산의 지봉(873m)이 가리고 있는 820m의 낮은 고개라 빛 광(光)자가 어울리는 고개는 아니라 본다. 즉 광대치(光大峙)가 아닌 광대치(廣大峙)가 올바른 한자라고 본다.
광대치에서 월경산 올라가는 길의
약초시범단지 이정표
오르막으로 진행하다 보면 12시 방향쪽으로 산이 나오는데 월경산이 아니다.
월경산은 진행시 우측으로 가야 한다.
월경산 이정표
직진은 백두대간길, 화살표가 없는 우측샛길로 진행하면 월경산이 나온다.
약 200m 정도 가면 월경산이기에 다녀오기로 한다.
월경산(月鏡山, 981.9m) :
백두대간 길에서 200m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다.
‘달이 기우는 산’이란 뜻이라는데 漢字는 기울 경(傾)자 가 아닌 거울 경(鏡)이라서 의문이다.
백두대간길에서 벗어나 함양학생수련원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봉우리라 개인 생각으로는 달빛이 비추는 산이지 않을까 싶다.
중재(中峙, 650m) :
전라북도 장수와 경상남도 함양을 가르는 백운산 서북릉에 있는 고개이다.
멀리 희미하게 백운산 정상이 보인다.
멀다......높다.....
좌측편으로 보이는 계곡이 지지계곡이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장안산(長安山)이다. 1,111m이다.
해발 6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한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知止里)에 있는 지지계곡은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발원지인데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다.
하천 주위에 여뀌꽃이 많이 핀다하여 요천(蓼川, 여뀌 요蓼)이라 한다.
인근에는 명당이 많다. 특히 바랑이명당은 어사 박문수가 잡아주었다는 명당이고, 속금산은 등잔불명당이라 하여 정상에 묘가 있다고 한다.
지지폭포는 장군 진급을 앞둔 대령들이 많이 찾는 기도터로 알려져 있다.
또 계곡 주변 바위에는 이곳에 은거했던 은자나 처사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글씨도 있고 바위목이라는 곳은 단군대도(檀君大道)를 신봉하는 교도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재(고개)와 재(고개) 사이에는 봉우리가 있기 마련이다.
중치와 중고개재 사이 봉우리는 중고개재 바로 직전 봉우리이다.
여기는 중고개재 300m 전 지점으로 200m 진행하면 작은 봉우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 봉우리에서 20m정도 내려가면 바로 중고개재가 나온다.
즉 중고개재는 재(峙)라기보다는 봉우리라는 느낌이다.
아래는 중고개재 :
중재와 백운산 중간 정도에 위치한 고개이다.
고개 넘어 서쪽의 지지리 부락은 전북 장수의 가장 오지마을이라고 한다.
중(스님)들이 많이 넘나들었다는 절고개라는 유래가 있으나
중고개재 근처에 그럴싸한 큰 절이 없으니 그 유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신뢰가 떨어진다.
백운산 정상 근처 계단.
이 계단이 보이면 정상근처까지 왔다는....
백운산 정상가기 전 삼거리
백운산은 여기서 좌측으로
직진하면 백운산 중봉과 말봉방향이다.
백운산 삼거리에서 중봉방향으로
백운산 정상부
백운산(白雲山, 1,278m) :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를 이룬 산이다.
흰 백(白)과 구름 운(雲)자를 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 안고 있는 산이란 뜻.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정상석이 2개 이다.
아래 정상석은 과거의 작은 정상석이다.
백운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
[빼빼재]라는 이름이 특이하다.
영취산으로 가는 중 뒤돌아본 백운산
1,084m고지 삼거리 :
봉우리 정상에서 직진하면 영취산이지만
우측에 하산길이 있고 시그널이 걸려있다.
재수없으면 알바할 수도 있겠고,
지도에는 길이 안보이는데 시그날이 많이 달려있으니 많은 산악회가 그쪽으로 하산한 듯 하다.
1,084m 소나무 전망대
길은 전망바위 우측으로 진행한다.
입구부에 쓰러진 경치좋은 곳이라는 이정표가 있으나 길은 희미하게 나와있다.
날씨가 흐리니 올라가 보았자 볼 것이 없으리라 판단하여 지나친다.
1,086봉 전망쉼터
영취산(靈鷲山, 1,075.6m) :
영취산은 13개의 정맥 중에 3개의 정맥을 가지 친 중요한 지점이다.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등의 가지를 친 산이다.
동으로는 낙동강, 서남으로 섬진강, 서북으로 금강을 발원하는 삼강의 분수령도 된다.
영취산이란 원래 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가 이 산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법 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영취산은 "영산" 또는 "취산으로" 축약하여 부르기도 하는데 신령스럽고 신비스러운 산이라 하여, 신령(靈)과 수리(鷲)를 쓰는데 "靈자를 쓰는 산으로는 백두산의 영봉과 월악산의 영봉. 여수의 영취산이'이 있으며, "鷲자를 쓰는 산으로는 영축산·취서산으로도 불리는 영남알프스의 영취산과 고흥의 취령산, 군산의 취성산, 천안의 취암산 등이 있다.
영취산은 의기 논개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논개는 영취산 북쪽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논개의 성은 주(朱)씨이고, 본관은 신안이며, 원래 전북 장수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게 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희(崔慶會)의 후처가 된 것으로 전한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전사했을 때 그녀는 복수를 결심한다.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일 때 기생으로 참석,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무령고개의 무령터널
무령고개/무룡고개(舞龍峙, 920m) :
무룡(舞龍)이란 용이 춤춘다는 말로, 이 재에서 장안산으로 향하는 기새가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는 기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령고개로도 불리는데 무룡고개로 함이 타당할 것이라 보지만...
근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룡고개가 무령고개로 이름이 변경·혼용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지지계곡에 광대마을이 있어 광대치라는 이름이 있듯이(앞서 설명한 개인의견임.) 광대마을에서 계남면으로 넘어가는 무령(舞嶺)고개로 불리우다 어느 듯 무룡고개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무령고개에서 장안산(長安山, 1111m)까지의 길은 춤추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밋밋하고 수월한 능선길이다.
무령(舞嶺)고개에서 920m고지의 높은 고개이다보니 무령(舞嶺)에서 비슷한 발음의 무룡(舞龍)자를 사용하게 되면서 무령고개·무룡고개의 혼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 생각을 적어본다.
무령고개 에 있는 산장 : 벽계쉼터
첫댓글 진작에 알았어모 금방망이 찾아 볼낀데...ㅎ
열공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금방망이 주우면 나눠 가집시다. ^.^
이젠 산행후 우리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였는지 궁금해서 다음님 후기가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
산행길 추억 되뇌이며 미소머금고 한참을 머물렀읍니다ᆢ 무명봉 삼각돌맹이가 엉른엉른자라서 큰입석 되기를 ~ 다음님 기원에 저의 마음도 모읍니다 *.~
작은 것은 저와 동질감을 느껴서리.... ^.^
미투~!!!
넘 고맙습니다.
대간 끝까지 님 글 보고싶네요.
힘드시겠지만 그리고 죄송하지만 계속 부탁 드립니다.
노력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