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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렇게 제국 신민이 되었다
정종현 지음, <제국대학의 조센징들>(휴머니스트, 2019)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였다. 국가 통치를 위한 엘리트 육성을 목적으로 1886년 포고된 제국대학령에 근거하여 도쿄(東京, 1886)를 시작으로, 교토(京都, 1897), 규슈(九州, 1910), 홋카이도(北海島, 1918), 경성(京城, 1924), 다이호쿠(臺北, 1928), 오사카(大阪, 1931), 나고야(名古屋, 1939)의 순으로 모두 9개의 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중 경성제국대학과 다이호쿠제국대학은 조선과 대만에 설립되었다. 서울대학교의 모태이기도 한 경성제국대학은 한국사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1, 2회 졸업생인 유진오와 최용달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헌법을 기초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대학 출신들은 남북한 국가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갔던 조선인 유학생들에 관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일본 본토의 일곱 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들만 해도 대략 784명에 이른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으며, 졸업 후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이 책은 추적해 들어간다.
시인 임화는 현해탄을 식민지 청년이 나아갈 길을 가르쳐줄 ‘높은 사상을 배우러 가는 입구’로 노래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도쿄(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靑年)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해협의 로맨티시즘’
“지사냐, 출세냐?”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식민지인’과 ‘제국 엘리트’ 사이에서, ‘조선인 된 슬픔’과 ‘일본인화 과정’ 사이에서 분열했다. 일제 권력자들은 조선 청년들의 일본 유학을 조선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친일적인 엘리트’의 양성과정이면서, 역설적이게도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세력을 육성하는 ‘조선독립운동의 수원지’라며 골치아파했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지사의 삶을 살다가 스러져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돈맛을 익혔다. 식민지 유학의 최정점에 있었던 제국대학 졸업생들은 결과적으로 다수가 ‘출세’를 선택했다. 제국대학 입학은 ‘입신출세의 티켓을 쥐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졸업생 다수가 식민지 체제에서 출세했다.
일본제국의 교육제도는 오늘날과 달랐다. 교육과정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 대학 3년(의대 4년)의 6-5-3-3제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은 지금보다 1년 적지만 전체 교육기간은 17년으로 지금보다 1년이 길었다(의대는 18년으로 지금과 같았음). 제국대학 입학에 필요한 최소 수업연한은 총 14년이었다. 탈락 한번 없이 진학했다면 제국대학 입학 최소 연령은 스물 살 전후였지만, 엄격한 선발 과정 때문에 지체되어 늦은 나이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패전 이후 학제가 개편될 때까지 고등학교는 실질적으로 대학 예과였다.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준하는 교육기관은 경성제대의 ‘예과(2년제)’가 있었을 뿐이다. 인격이 형성되는 중요한 학창시절을 입시 준비로 허비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생 수와 제국대학 정원이 대체로 엇비슷해서 고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대학 진학이 별로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할 때 오히려 입시가 치열했고, 고등학교부터는 실질적인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자유롭고도 학업에 부담이 없는 인생의 황금기로 꼽았다. 고등학교의 이런 자유는 학교 제도에 의해 보장받았다. 미래의 엘리트인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의 일시적 일탈은 세간의 허용뿐 아니라 심지어 칭찬까지 받았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에는 바깥 세상에 없는 ‘독서와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고등학교의 자유롭고 호방한 문화와 생활기풍을 보여주는 풍속이 ‘데칸쇼’의 노래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첫 자를 합친 ‘데칸쇼’를 후렴으로 반복하는 이 노래는 고등학교의 자유로운 문화와 교양주의를 상징한다. (그러나 1935~1945년에 이르러 고등학교는 인간 형성의 장으로서의 특색을 서서히 잃어버린다. 고등학교가 늘어나면서 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대입 경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된 신상초(1922-1989, 동아일보 논설위원, 제5,9,10,11대 국회의원)는 자신의 고교시절 독서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파스칼의 <팡세>를 원서로 읽어나갔다. 그때 팡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후일 사회에 나와 이 책을 우리말로 옮겨 출판했다.” 고교 시절 프랑스어로 독서를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고등학생들의 지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식민통치 시기가 변화 없는 균질적인 시간은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는 기복이 있었고, 식민지인들의 의식도 변했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인식도 1920년대와 1930년대 중·후반 이후가 크게 다르다. 민족운동, 사회운동과 연관되어 있던 유학생들의 성격은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해 급격하게 변한다. 제국대학 학생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인이라는 자각과 운동성은 약해졌고 팽창하는 제국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은 점점 강화되었다.
1936년 교토제대 동창회는 <교토제국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회보>(이하 <동창회보>) 창간호를 간행한다. 재학생들이 발간을 주도했다. 특히 당시 경제학부 재학 중인 박병교가 핵심 역할을 했다. <동창회보>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글도 있었지만 좀 더 많은 글은 점점 비정치적인 학술 논문 또는 제국의 가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1930년대 후반기, 일본이 대륙 침략을 본격화 하면서 식민지 조선인의 엘리트들은 제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환각을 체험했다. 창간호에 실린 ‘만주 시찰기’는 재편되는 대륙의 질서를 체험하며 제국대학의 식민지 유학생이 제국의 주체로 신생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만주 시찰의 출발점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식민지 청년의 일본화 된 시선이다. 박병교는 기차를 타고 만주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조선의 풍경을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조선의 농촌 풍경은 “마치 일본 내지의 산요센(山陽線) 일대와 흡사한” 것으로 포착되며 압록강을 넘어 도착한 만주 지린은 “조선의 평양, 일본의 교토”로 비유된다.
경제학도인 박병교는 다양한 통계를 사용하여 만주를 개발한 제국의 비전과 능력을 찬양한다. 식민지 청년은 제국대학 유학을 통해 일본의 시선을 내면화했다. 박병교는 항일 독립군과 홍군 등을 ‘홍비(紅匪)’로 부르며 합리적 제국을 어지럽히는 야만의 적으로 타자화 했다. 그의 만주 시찰은 한마디로 제국의 주체로 신생하는 여행이었다.
이 지점에서 시인 서정주(1915-2000)가 생각난다. 그는 일제 말기에 열성적으로 ‘협력’했던 사실을 아주 간단한 말로 변명한 일이 있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 제국의 신민으로 거듭난 청년들에게 일본은 진정 ‘조국’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