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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링 위에서의 제3의 길>의 줄거리:
사각의 링 위에서 싸워야 하는 선수들의 인생에는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극복하고 승리하든가 아니면 좌절하여 패배하든가,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걷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인생에 비유해도 좋다면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링 위에서는 제3의 길이 믿음 안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링 위에서의 제3의 길
(마14:22-36)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링 위에서의 제3의 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링 위에서의 제3의 길’
여러분, 지난 11월 9일 뉴스에 나온 기사내용입니다.
제목이 뭐냐 하면 ‘링의 전설, 세상을 떠나다’ 이런 제목으로 기사가 났습니다.
그 내용은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중에 조 프레이저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간암으로 진단받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67세를 일기로 세상의 링을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링의 전설이 세상의 링을 떠났다’
이 조 프레이저 선수에게는 별명이 붙여져 있는데 ‘스모킹 조’라는 별명이었습니다.
‘스모킹 조’라는 건 총을 탕하고 쏘고 나면 그 총구에서 연기가 나지 않습니까?
마치 총알이 나가듯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별명입니다.
어렸을 때 팔을 다쳤고 또 팔이 짧아요,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데 이 결함을 잘 극복을 해가지고 이 사람의 레프트 훅은 전매특허였습니다.
전광석화 같이 빠른 속도로 예측을 불허한 상황에서 레프트 훅을 날려버릴 때 ‘스모킹 조’, 총을 쏘는 것처럼 상대방을 넉다운 시키는 그런 전매특허의 무기였어요, 레프트 훅이.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당시 승승장구 하며 무패의 행진을 계속하던 무하마드 알리와 1971년인가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일전을 벌입니다.
그 ‘스모킹 조’의 주먹을 가지고 무패 행진의 알리를 때려눕혀 첫 번째 패배를 안깁니다.
굉장했었지요, 세기의 대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벌어진 두 번의 경기에서 알리에게 연거푸 지고 마지막으로 197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알리와 싸웠는데, 한쪽 눈이 퉁퉁 부어서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 15라운드에서 트레이너가 기권을 하게 됩니다.
그 뒤로 이 조 프레이저는 일평생을 알리의 그림자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 링 위에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내 눈앞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오는 적을 때려눕히거나 판정으로라도 이겨야 되는 승리의 길이 있고 또 하나는 내가 승리하지 못하면 중도의 길이 있는 게 아니고 반드시 좌절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길이 있습니다.
두 가지 길 중 하나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이 링의 상황이 인생의 상황과 너무 비슷합니다.
자, 사업의 문제가 생겼다.
링 위에 올라 선 권투선수가 상대방을 무찔러 이겨야 되는 것처럼, 사업문제도 그 문제가 생기자마자 내 인생을 사각의 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람관계의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극복하지 못 하느냐, 두 가지 길이 항상 놓여 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과제가 있고 부담이 있고 스트레스가 있고 좌절감이 있고 우울함이 있고 패배가 있고 걱정과 근심이 있어요.
왜? 인생은 언제나 매순간마다 다양하게 끊임없는 변수와 문제들에 의해서 우리를 사각의 링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사각의 링에 올라간 사람에게는 언제나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에요.
사업의 문제가 있을 때는 사업의 문제를 극복해서 성공하느냐, 아니면 돈의 힘에 좌절되어버리고 마느냐.
그래서 조 프레이저가 일평생을 알리의 그림자에 묻혀 살았듯 인생에서 극복하려고 극복하려고, 승리하려고 승리하려고 했으나 승리하지 못한 채, 평생을 그 그림자에 드리워 살게 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싸워야 되고 극복해야 되고 승리해야 된다는 과제가 주어지는 면에서는 사각의 링과 인생이 너무나 흡사합니다.
매순간마다 인생은 사각의 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런데 인생의 링 위에서는 제 3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에요.
극복하고 승리하느냐, 좌절해서 실패하느냐, 이 두 가지 길 말고도 인생의 링에는 문제가 다가오고 변수가 생기고 과제가 주어지는 이 인생의 링에서는 제 3의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그 기사의 제목이 그랬어요, ‘링의 전설, 세상의 링을 떠나다’
세상의 링을 떠난다, 이 삶의 현장인 링에서의 제 3의 길은 삶의 현장이라는 링을 떠나는 겁니다.
이게 제 3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이 뭡니까?
삶의 링에서 예수님의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 아니에요.
좌절을 벗어나서 승리의 길로 다시 재기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엄청난 오해가 여기에 스며들어 있어요.
믿음의 길은 제 3의 길입니다.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좌절해서 실패하고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3의 길은 링을 떠나는 겁니다.
삶의 현장을 마음이 떠나는 거예요.
몸이 있음으로 부딪히게 되고 만나게 되고, 주어지게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의 모든 문제들 과제들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가 있는 삶의 현장을 떠나는 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아예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
포기하는 것과는 달라요, 여러분!
포기는 링 위에 있으면서 상대방 선수의 강력함 앞에서 상대적으로 내 능력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포기는 내 능력에 좌절하는 거예요.
주어진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내 능력에 좌절하는 게 포기이고, 기피인 것입니다.
사람이 몸이 살아있는 한 열심히 살아야지 삶의 현장을 떠나면 되겠느냐? 그건 기피이다.
기피가 아니에요, 삶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내가 싸워 극복하겠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엉뚱한 오지랖입니다, 그게 오버라는 거예요.
아니, 내 삶인데 내가 극복하고 승리해야지 무슨 말이냐?
그게 바로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악한 오지랖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주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가 극복해야 된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내가 극복해야 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빌린다는 그게 믿음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마음이 충만해서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게 믿음입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의 전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어요.
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이건 쇼크예요, 쇼크.
한 마디로 조 프레이저의 ‘스모킹 조’의 레프트 훅이 날라 온 겁니다.
그런데 그 레프트 훅이 어디로 날라 왔느냐?
자기들의 이 땅에서의 인생의 미래를 향한 모든 두려움, 앞으로 다가올 지도 모르는 수없이 많은 과제와 문제들 앞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되는 모든 부정적인 그림자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레프트 훅이었다는 겁니다.
이 오병이어의 현장,
한번 보세요, 내 손에 든 보리떡과 물고기가 떼서 주는데 또 생기고 또 생기고 하는 거예요, 내 손 안에서 지금.
허~ 이건 기절할 일이에요, 기절할 일, 호흡이 멎을 일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현장에서 제자들의 마음은 이제 미래를 향하여 조 프레이저의 레프트 훅을 날리면서 미래에 다가올 모든 문제들의 중압감을 한 방에 날려버린 상태입니다.
“됐다, 됐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되겠다!”
그리고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이 무리들을 다 보내고 나면 반드시 이 승리의 현장에 단순히 이 순간에만 승리가 아니라 앞으로 인생 전체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 왜? 이 빈들에서 만 오천 명에서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은 게 열두 광주리였으니까 안 될 일이 없는 거니까 - 이 승리의 현장에서 인생의 승리를 선취하는 이 순간에 뒤풀이라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가 이상해요.
본문에 보니까 22절에 ‘예수께서 즉시…’ ‘즉시…’
먹이셨습니다, 광주리로 나머지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공식적인 일은 끝났습니다.
끝나자마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재촉한다는 말은 강제로 내몰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등 떠밀려 가는 거예요. -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내기 전에 제자들을 먼저 보내버렸어요, 그 다음에 무리들을 다 흩어버리시고 혼자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하시는데 무려 여섯 시간 이상을 기도하십니다.
대충 짐작이 저녁 먹을 시간이었으니까 그 시간부터 생각해서 여기서 4경쯤에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고 그러는데 그 시간이 새벽 3시에서 6시입니다.
그러면 최소한 무리를 다 보낸 게 9시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여섯 시간 이상은 기도를 하신 것이에요.
그리고 제자들은 여섯 시간 이상 동안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풍랑과 싸우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이에요.
베드로가 허락을 받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내려오다가 바다에 빠집니다.
이때 주님이 오셔서 손을 잡아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나무라십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자,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삶의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주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이 성공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성공한 모습이 바로 앞에 나왔던 헤롯 왕가의 모습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건 헤롯 왕가의 제동장치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와 마음이 결합된 상태에서 육체가 만나는 이 세상의 삶에 마음먹은 대로 다 하면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세상에 대해 이겼을 때 나타나는 일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근친상간, 퇴폐적인 유흥의 감정에 휩싸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상에서 성공한 결과, 마음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다고 한 결과인데 이것이 바로 세상의 바다에 마음이 빠져버린 것이라는 것을 바다 위를 걸으시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갖자마자 즉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바다 위로 보내시고 바다에 빠져 죽을 위협 앞에 세웁니다.
헤롯은 이 세상의 바다에 이미 빠져버린 겁니다, 성공했어도 빠진 것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고 주님께서 믿음이 없는 자라는 핀잔을 하시게 됩니다.
다 조합해보면 어떤 얘기가 됩니까?
베드로가 세상의 바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도 더 앞서 있는 현실로 보고 느끼고 맞이해 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제 1의 현실,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 먼저 절대적인 현실로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하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도 먼저 현실로 볼 때 내 마음은 이 세상바다를 떠나는 것이에요, 세상바다 안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천국이 세상에 맞닿아 있어요.
불가에서도 세상을 고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어지는 문제, 과제와 씨름해야 되니까.
이겼다 해도 그 다음에 또 문제가 주어지고, 또 ……
다 승리했다고 할 때, 마지막에 돌아보니 자아의식의 골수까지 썩어버린 병이 나타나고 퇴폐가 나고 이 세상에 먹혀버린 상태에서 온갖 부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바다에 천국이 접해 있는데 어떻게 이 세상의 바다에 빠지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이고, 믿음은 하늘을 마음에 갖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바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신 거예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느냐?
그래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마음을 먹느냐?
세상에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향해 가느냐?
너는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다.
너의 성공은 하나님을 제1현실로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돈 문제 때문에 걱정하시죠?
바다에 빠진 거예요.
돈 문제라고 하는 라이벌을 앞에 두고 링 위에서 지금 싸우고 있는 겁니다.
제3의 길이 아니에요.
믿음의 길은 떠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지요, ‘아니, 그럼 왜 삶을 주셨나?’
삶을 왜 주셨는지 아십니까?
마음이 몸으로 만나게 되는 삶을 떠나라고 삶을 주신 겁니다.
삶의 문제를 극복해서 승리의 삶으로 만들라고 준 게 아닙니다.
혹시 실패해서 좌절하게 되더라도 ‘실패는 병가지상사다’ ‘칠전팔기다’ 이런 말을 듣고 다시 일어나라고 삶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삶의 길은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패배하는 것도 아니에요.
삶에 처한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3의 길, 삶을 떠나는 거예요.
삶을 왜 주신다고요?
삶을 떠나라고 주십니다.
그러면 왜 어차피 떠나야 될 삶을 주십니까?
삶을 주시고 우리 마음이 육체로 살게 되는 이 삶과 하나님과 둘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삶을 주신 겁니다.
선택의 과정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필연일 뿐이에요, 필연.
필연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여자가 여럿 있는 중에 한 여자와 결혼하니까 그것이 사랑이지, 세상에 오직 남자가 나 하나고 여자가 그 여자 하나일 때 그건 필연이죠, 사랑이 아니라.
선택이 없는데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그렇게 많아도 왜 그 남자가 좋습니까?
많은 남자 중 그 남자가 좋으니까 사랑이죠.
마찬가지예요.
내 육체로 만나는 삶이 중요합니다, 삶의 승리가 매력적입니다, 가치가 있습니다.
가치가 있으니까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때 그게 사랑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인다고 믿는 거예요.
이것은 오해입니다,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삶을 왜 주십니까?
삶을 떠나라고 주시는 거예요.
믿음의 길은 링을 떠나는 겁니다.
링 위에서 문제와 씨름해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제1의 승리의 길, 제2의 실패의 길이 있다면, 믿음은 제3의 길로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완전히 떠날 때.
우리가 붙잡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에요.
그건 사이비 이단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 공산당의 모토예요, 유토피아.
교회 안에서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건 사이비입니다.
잘사는 것 같은 모양이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에 의해서 벌어질 수는 있어요.
또 얼마 못살고 순교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서 벌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해서 나가는 이 모든 기독교는 다 사이비이고 이단입니다.
공산주의와 다를 게 없는 거예요.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가치를 신앙적으로 하나님, 예수님으로 이루어가겠다는 얘깁니다.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신앙적 공산주의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따라서 잘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벌어질 수도 있고, 못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둘 일이 아니에요, 우리 마음은 오직 세상이라는 링을 떠나는 겁니다.
세상바다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와 씨름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가 있는 세상이라는 사각의 링은 마음이 십자가 붙잡고 그 링에 대해, 그 문제에 대해 죽고 마음이 떠나서 아버지하나님을 제1현실로 절대적인 현실로 마음에 모셔 들이고 갖는 거예요.
주님이 여섯 시간 이상 기도하시고 바다 위를 걸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자,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뭐예요?
하늘을 내 현실로 갖는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만나는 그 어떤 육체가 경험하는 현실보다 더 앞선 현실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셔 들일 때 나타나는 일은 이 세상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식의 일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바다에서 뜨는 겁니다.
문제와 더불어 엉켜들어가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주님의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세상 바깥으로, 세상바다의 표면 위로 올라서서 세상을 딛고 사는 거예요.
이 제3의 길을 십자가 붙잡을 때 문제에 대해서 죽게 되고 내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십자가가 사랑의 표현이에요, 내가 이 세상 삶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는 표현이 십자가를 붙잡는 거죠.
십자가를 붙잡고 링을 떠나서 하나님을 마음에 갖게 될 때 이 세상바다에 빠지지 않을 것이에요.
모든 문제가 주어지는 사각의 링을 십자가로 떠날 때 세상바다에 빠지지 않고 하늘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떠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삶의 현장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적 섭리가 나타나실 거예요.
링을 떠납시다!
제3의 길이 우리의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을 주심은 극복하라는 것도 아니고 좌절에서 헤어 나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삶을 버리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감을 통하여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삶을 주셨음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사각의 링을 떠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됨으로 이 세상을 빠지지 않고 세상바다 위를 걸어갈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이제라도 잘사라보자 했는데 막으시네요
공산당 같은 신앙이라도 왕궁을 이루고 싶네요
그래서 신의 능력을 추호도 의심없이 믿얻건만
잘살려고 믿지않고 십자가의 느력을믿어 바다를
다스리는 자로 천국을 세운다면 ㅋㅋㅋㅋㅋ
아멘! 십자가의 삶 참생명의 길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