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 이춘희
날개에는 바람의 결이 새겨져있는 걸까
돌아갈 곳을 잊지 않겠다는 듯
곱게 쓸어 개킨
어머니의 날개들은
언제나 서랍 속에 가지런했다
눈에 선한 북녘 하늘
어디선가 뜸부기 울어대고
횃불 아래 참게를 잡던 소녀만큼
가볍고 작아져서야 비로소
깃을 펼친 어머니
짧은 봄날인 듯
불 속에서 잠시 타오르던
어머니의 날개는 이내
훨훨 바람을 탔고
그러고도 남은 생은
경비실 옆 의류함에
분리수거 되었다
집3. / 이춘희
머리카락도 시계를 보는지
새로 돋는 그 남자의 머리는
모조리 하얗다
이미 어디선가 한 생을 돌아
너덜너덜해진 컨테이너 하나
벼르기를 몇 해째
온순한 양 한 마리 뒤뜰을 서성였다
노랗고 커다란 컨테이너가,
그 남자의 영혼과 그 영혼의
불온한 동반자들을 불러 모을 네모상자가
뒷마당 감나무 아래 놓이던 날
휘영청 달이 높았다
벽에는 뜨거운 소주 포스터를 붙이고
달달한 막대커피를 맘껏 마시리라
삐그덕 회전의자에 앉아 툭 툭 담뱃재를 털고
구닥다리 전축을 돌려 비틀즈에 취하면
주님도 기도 없이 지새는 이 밤을 용서하시리라
통학버스처럼
온 몸으로 접근금지를 외치는
노란 집을 건너다보며
아내의 주문은 밤이 깊도록 간절하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복(伏) / 이춘희
하얀 꽃 눈부시게
허공을 밝힐 때부터
나무는 기다렸습니다
4H 마크가 훈장으로 남아있는
누런 마을회관 벽을 돌아
더워라 더워
덜컹대는 철문을 여는
오얏 이씨 할배의
꼬질꼬질한 쥘부채가
맨 먼저 들어서고
들깨밭에서 땀을 쏟던
산등성이 외딴 집 내촌댁 뒤로
빈 손수레에 끌려
웃말 감나무집 아주머니까지 모이면
온 동네 복(伏)놀이 하는 날
번지도 없는 자두나무는
택호도 없는 자두나무는
반지르르 벌겋게 달궈진
사람들 사이
달디 단 향내 나는 전 재산을
네모진 상 위에 올리며
올해도 이 마을 주민이 됩니다.
짐 -이사,1997* / 이춘희
별을 따라 걸어왔지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넜을 때
기다려준 환대는
가난한 등짐을 비추던 노을빛
보랏빛 현호색 꽃잎
낮게 흔들리는 터에
흙을 부려 동산을 만들고
아이들이 뛰노는 동안
슬픔으로 자라난 나물을 캤지
밀레니엄 밀레니엄
세상이 들썩여도
어쩌나 우린
매일 밤 낯선 곳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야 해
안녕 스트라스부르
굿바이 드로셀 가쎄
소나무 잣나무가 드리워진
둥근 창으론 어느새
스물 두 개의 풍경이 지나가고
벌써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과
가물가물
첫눈을 기다리는
먼 여행지의 저녁 무렵.
*가족과 함께 이천에서 자연살이를 시작한 해.
틈 / 이춘희
장독 같던 자식들은 홀씨가 되어 떠났다 찢어진 문구멍으로 햇살이 둥글어 방 안은 고요롭다 백일홍 옆 박각시* 붕붕대는 황혼이 오면 마디게 차오르는 그리움
겨를 없이 놓쳐버린 모든 것에 설운 인사를 보낸다 *박각시과 박각시속에 딸린 커다란 나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