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포청천 서순신
KBC 9시 뉴스 헤드라인으로 서순신 중앙지검장의 긴급 회견이 발표되었다.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엄마 아버지와 차를 마시던 윤재가 깜짝 놀랐다.
가족 모두 TV 뉴스에 긴장한 얼굴로 집중했다. 뉴스 내용은 경악할 만했다. 찻잔을 손에서 놓고 뉴스에 빨려들었다. 윤재도, 엄마도, 아버지까지도.
-중앙지검은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오철희 정영자 부부를 구속했습니다.이들은 명동 암달러 시장과 캘리포니아에서 100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이들 부부의 사기행각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드러났습니다. 천 도환 대통령 처제였던 정영자는, 국세청 정보 차장을 지낸 남편 오철희와 함께 사기 행각을 벌였습니다.
주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업체에 접근했습니다. 이들 업체에 좋은 조건으로 자금 조달을 제시하고, 담보로 대여액의 두 배에서 많게는 여덟 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았습니다.
이 약속어음을 할인해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주식에 투자해 어음을 유통시키고 사기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 액수만 해도 7,000억 원을 넘었습니다.-
서슬 퍼런 서순신 중앙 지검장의 수사 결과 발표에, 구속인사들의 수갑 찬 모습이 영상에 나왔다.
무려 30여 명에 이르렀다. 오철희 정영자 부부, 은행장, 기업 간부 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철강업계 3위인 월신 제강과 도급순위 7위인 강영 토건도 부도가 났다.
이 뉴스가 나가고서, 청와대 연루설도 나돌면서 집권 초기 정통성과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한 천도환 정권에 큰 오점을 남겼다.
두 부부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서순신 중앙지검장이 90도로 인사하며 강한 어조로 메시지를 전했다.
“법은 국민을 위해 지키라고 만든 겁니다. 검찰은 국민을 위해 불의를 일삼는 이들을 일벌백계할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씀 하셨다.
“서순신 중앙지검장, 대단한 사람이네. 송나라 명판관으로 칭송받던 포청천이 회귀라도 한 건가. 이순신 장군의 이름과도 비슷하니 신뢰가 가는구먼.
살아있는 군부 정권 아래서도 저렇게 소신 있는 행동을 하니 속이 후련하네.”
엄마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버지를 보며 입을 얼었다.
“여보. 천 도환 대통령을 두고 돌직구를 날렸네요. 괜찮을까요. 저런 긴급 뉴스를 보내면서 대통령 측근까지 밝히려면 윗선에서도 고민이 컸을 거예요.”
윤재가 엄마를 우러러보며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 이제 시대는 변하고 있어요. 엄마가 다니는 KBC도 대단하다는 걸 오늘 느꼈어요. 참, 그러고 보니 저 서순신 중앙지검장! 엄마. 들었지요?”
“어~그래, 중앙지검장이라고 했잖아? 혜림이 아버지!”
윤재가 바로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아. 혜림이구나. 지금 TV 봤는데 축하한다. 아버님! 서순신 중앙지검장님!”
“응. 너도 봤니? 근데 아버님? 누구 아버님?”
“너. 혜림이. 장난하냐? 지금. 우리 아버님이다. 됐냐?”
“히히. 그럼. 그렇게 진작 얘길 해야지. 난 엄마랑 둘이서 보고 있는데. 아빠가 자랑스럽네.”
“그럼. 저런 포청천 같은 분이 권력 눈치 안 보고 법질서를 바로 잡으니까 어수선한 나라가 숨통이 트이겠네. 기업도 좀 일하기가 좋아질 거고. 국민들도 안심할 거고.”
그때, 엄마가 윤재한테서 전화기를 다짜고짜 빼앗았다.
“혜림이냐? 엄마다. 보고 싶네. 우리 딸”
“네. 엄마. 잘 계시죠? 저도 엄마 보고 싶어요.”
혜림이 옆에서 TV를 보시던 혜림이 엄마가 놀란 눈으로 혜림이를 흘겨봤다.
“네? 엄마라고? 엄마가 나 말고 어디 또 있니? 이리 줘봐. 전화기.”
이번에는 혜림이 엄마가 혜림이 전화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저 혜림이 친엄마인데요. 혜림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분은 혹시?”
“네. 저. 혜림이 엄마 맞아요. 혜림이가 제 딸이에요. 몰랐냐? 예린아!”
참 진도가 팍팍 잘도 나갔다. 척이면착이니. 옛날 예인여고 동창생이 만났으니 전화가 그칠 줄 모르겠다. 엄마 김연희와 혜림이 엄마 이예린의 조우라.
“어, 너 연희 아냐? 언제 우리 혜림이와 엄마 딸 하는 그런 사이가 됐냐?”
“그건 됐고. 하여튼 예린이 네 남편 서순신 중앙지검장. 멋지다. 풍기는 카리스마가 어마무시하던데. 예린이는 무서울 게 없겠네. 부럽다. 밥 한번 사라.”
예린이. 연희. 윤재가 듣기에도 흐뭇한 이름이었다. 혜림이. 윤재. 예린이. 연희. 각자 역할을 잘하고 있다. 아버지는 영문을 모르신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KBC 뉴스는 다음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언뜻 들어도 기겁할 사건이었다.
-다음은 안타까운 사건 소식입니다. 경기 연쇄 살인 사건으로 벌써 일곱 번째 터졌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태안에서 반경 4km 내 지역에 성폭행 결합 연쇄살인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의자에 묶어두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피해 여성 속옷과 스타킹을 얼굴에 씌우고 폭행한 사건입니다.
용의자 몽타주를 보면, 코가 우뚝하고 눈매가 날카롭습니다. 왼손 시계 밑에 문신 자국이 있는 24~27세가량의 남자로 키는 165~170cm 정도로 보입니다.
이 몽타주와 같은 용의자를 보면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해주기 바랍니다. 현상금으로 500만 원이 붙었습니다.-
아버지가 TV를 끄셨다. 엄마도 말이 없었다. 윤재는 며칠 전 만난 동철이가 떠올랐다. 비슷한 용의자를 추격하다 칼을 맞아 입원도 했다던 동수형이 걸렸다.
수원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동수형이 이 연쇄 살인 사건으로 2년째 비상 근무 중이었다. 얼마나 노고가 많을까. 만나보고도 싶은 동수형, 몸은 회복됐는지.
경기지방경찰청 산하 경찰들이 총동원되는 상황으로, 온 국민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 사건은 언제나 해결될지. 가슴이 답답했다.
윤재가 동철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윤재야. 오늘도 연쇄살인 사건 보고 놀랐다. 동수형이 고생 많겠어.”
“응. 윤재 너나 나나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도 없고. 정말 울화가 터진다. 어떤 또라이 새끼가 이렇게 지저분하고 사악하게 지랄발광을 하는지.
내 잡아서 족치고 박살 내고 싶다. 연약한 부녀자들을 상대로 천하에 몹쓸 짓이나 하고 어디서 또 뭘 하는지. 참, 내.“
윤재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의 별들이 가물가물 바람에 흔들거렸다.
위에서는 천문학적인 권력형 사기 사건이 벌어지고, 아래에서는 약한 서민을 볼모로 망나니 성폭행 살인 사건이 터지고.
가운데서는 이런 뉴스나 보며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세상 참 불확실하다. 본능적 욕구에만 매몰된 이들.
경기도 남부 지역이면, 평택 공장이나 시흥 공장에 사는 기룡자동차 직원들도 몹시 신경이 쓰일 텐데.
더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데. 윤재 양쪽 주먹이 우는지, 으스러질 듯 힘이 들어갔다.*
34화 끝 (3,251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