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황실의 순장제도와 그들의 무덤
우리나라에도 고대에 순장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래전에 사라진 미개한 문화이다. 주인이 죽은 후 죽어서도 주인을 모시기 위해 어찌 산 사람을 죽여서 묻을 수 있었을까????
명을 세운 주원장은 이러한 순장제도를 부활한 인물이다. 자신이 죽자 16명의 후궁과 수백명의 궁녀를 죽여서 자신의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단 매장하는데 이곳을 동정(東井)과 서정(西井)이라 부른다. 그의 아들 영락제는 주원장의 본부인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부 문헌자료에는 고려의 공녀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의 어머니도 예외없이 순장되어야 했다. 자신이 피해 당사자이니 이러한 잔인한 제도가 갖는 폐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도 역시나 순장제도를 실천하고 있다. 물론 순장문화는 계속해서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에게도 이어졌다. 정말 잔인하고 미개한 문화이지만 이것을 당당히 그리고 무슨 대단한 일 인양 버젓이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죽은 사람을 ‘朝天女户’라 하여 그 가족들이 세습토록 하였다. 즉 황제를 위해 죽은 집안이라 하여 굉장히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하였으며, 그 가족은 딸이나 누이의 희생을 통해 부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죽은 후궁들을 집단으로 매장하였는데, 이를 동정과 서정이라 하였다. 현재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무덤조차 철저히 도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 일까???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의 무덤조차 도굴하고 싶었을까 싶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굴하였던 것이다.
순장제도는 정통제에 의해 금지되기에 이른다. 정통제는 평생을 잘 한일 하나 없이 황제 노릇을 하였으나, 오직 칭찬할게 있다면 순장제도를 없앤 일이라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렇게 해서 순장제도가 없어지는 듯 하였으나, 청나라가 세워지고 다시 순장제도는 부활한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대비와 후궁 아길근이 순장된다. 누르하치의 아들 황태극도 죽었을 때 두 명의 후궁이 순장된다. 그리고 황태극의 아들 세조가 죽었을 때에도 후궁이 따라 죽는다. 예친왕 다이곤이 죽었을 때에도 시녀가 또한 따라죽는다. 이러한 영향으로 전국에서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는 현상이 있었고 이를 ‘烈女’ 혹은 ‘節婦’라 부르면서 비를 세워주는 일이 유행하였다. 강희제는 1673년(강희 2년)에 순장제도를 ‘잔혹하다’고 하면서 철저히 금지할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조선에서도 열녀로 받들어지고 열녀비를 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후궁들을 죽이는 방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자료가 중국에는 없고 우리 『世宗實錄』세종 26권, 6년(1424,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17일(무오)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제가 죽자 궁인(宮人)으로 순장(殉葬)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되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娘)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자가 걸상을 빼내므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여기서 한씨는 조선에서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누이이자 인수대비의 고모가 되는 분이다. 중국에 공녀로 보내져 영락제의 후궁이 된 사람으로 이를 빌미로 한확은 조선에서 부귀를 누렸다. 그 외에도 한확의 또 다른 누이가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이때 중국을 향해 떠나는 모습을 『世宗實錄』세종 42권, 10년(1428, 명 선덕(善德) 3년) 10월 4일(임오)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 사신이 한(韓)씨를 모시고, 화자(火者) 정선(鄭善)·김안명(金安命)을 인솔하고서 해청(海靑) 1연(連), 석등잔석(石燈盞石) 10개를 가지고 돌아가니, 임금이 모화루(慕華樓)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보내고, 진헌사(進獻使) 총제(摠制) 조종생(趙從生)과 한씨의 오라비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한확(韓確)이 함께 갔다. 도성 안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의 형 한씨가 영락 궁인(永樂宮人)이 되었다가 순장(殉葬)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나.”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생송장(生送葬)이라 하였다.
여기서 그를 ‘생송장’이라 불렀다는 점에서 순장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가야만 했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누이는 황제가 죽은 후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순장에서 빠지는 기적같은 영예를 얻는다. 이와 같이 잔인한 제도가 불과 몇 백 년 전에도 중국에는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은 그들의 문화가 그렇게 발전적인 모습은 아니었던 듯하다.
명나라 후궁들이 순장된후 묻힌 동정 지금은 과수원으로 바뀐것 같다.
명나라 후궁들이 순장된후 묻힌 서정의 모습으로 비석만 외롭게 서 있다. 아마도 한 맺힌 귀신들이 많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