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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새 서울 우유
“존,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자,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웰링턴에서 가장 명소로 꼽히는 중국 얌차(Yum Cha) 레스토랑으로 가요.”
“의원님. 말씀만 들어도 설렙니다. 저야말로 얌차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챵시밍 의원이 안내한 곳은 웰링턴에서도 번화한 곳에 자리한 중식 레스토랑이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규모에서 중국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미리 예약을 해 놓았는지 종업원이 특별석으로 안내했다. 국회의원이라서 그런가?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도 중국 음식이 꽤 인기 있는 메뉴였다.
“존. 마침 이달 들어 중국 정통 특선 요리와 진미가 선보이고 있으니까 마음껏 들어요.”
챵시밍 의원이 자리에 앉으며 여유로운 미소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심혈을 기울인 일을 잘 마친 뒤였다.
그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에 산해진미가 풍성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올라오는 얌차 메뉴에 민재가 감탄했다.
민재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요리를 바라보았다. 그 요리에 대해 챵시밍 의원이 친절하게 소개말을 덧붙였다.
이모가 사랑스러운 조카에게 이야기하듯 정감이 넘쳤다.
“이건 말린 관자와 오리구이를 곁들인 쌀밥으로 기본식이라 불러요. 여기 새우 볶음은 사천 두반장으로 맛을 낸 거라 담백하고 좋아요.”
“네. 의원님. 의원님은 이 음식점 쉐프 같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들게하는 마력을 지니셨어요. 잘 먹겠습니다. 감사해요.”
보기만 해도 부자가 되는 느낌에 대우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자, 민재도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자, 마음껏 들어보자.
요사이 정신없이 몰아친 여러 일에 민재는 몸도 마음도 좀 힘들었다. 오랜만에 보양식을 들다보니 이제 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맛이 정말 좋았다.
“존. 잘 드시니까 내가 보기 좋네.”
챵시밍 의원이 중국말로 짧게 말했다. 말끝에 ‘요’자를 살짝 뗀 채로. 민재는 그런 챵시밍 의원이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이렇게 잘 챙겨주시니까 꼭 이모 같아.”
민재도 단어 끝의 ‘요’자를 은근슬쩍 끊어먹었다. 참 잘도 먹지. ‘요’자까지 끊어먹다니. 그런 민재를 바라보는 챵시밍 의원이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존. 이것 좀 들어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두 번 삶은 죽순과 완탕 스프야.”
“죽순이라고요? 나 이것 어릴 적 외할머니가 뒤뜰 대나무 밭에서 꺾어다 요리해 준 건데. 오늘은 옛날 시골 외할머니 집에서 이모랑 죽순 먹네. 하하”
“호호. 존은 마치 어린 아이 같아. 한국학교 4학년 개구쟁이처럼. 그래 물장구치고 개구리 잡던 옛날로 나도 돌아가는 듯 해 좋아.”
“의원님 이모도 어린 시절 개구리 잡아먹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예쁜 분이.”
“그럼. 내가 초등학교 땐, 중국에도 먹을 게 없어서 오빠랑 개구리 잡아 구워먹고 그랬어.”
민재가 웃으며 다시 장난기 섞인 말로 응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몸보신해서 의원님 이모가 튼튼하게 건강을 다지셨구나. 의정 활동에 소수민족 장관까지 역임하시느라 엄청나게 힘드실 텐데도.”
“존. 장난기가 귀엽네. 자. 이번에 올라온 것 좀 맛봐. 이건 고수와 마를 곁들인 목이버섯 볶음이야. 아주 귀한 특식이지.”
풍성한 얌차로 배가 가득 찼다. 어느새 민재 허리띠가 한 칸 늘어났다. 식사를 마치자, 중국 전통차가 올라왔다. 대추가 들어간 복숭아 진액차었다.
“의원님 이모. 정말 배 터지도록 잘 먹었어요. 이제 좀 살 것같아. 후~우.”
“그래. 잘 먹었다니 이 이모가 배가 더 부르네. 음식 잘 먹는 사람이 좋더라고. 존, 아니지 민재는 크게 성공하겠어. 일하는 것, 먹는 것 보니까.”
“이모가 그렇게 말하니 조카도 기분 좋은데요. 어렸을 때, 전 너무나도 못 먹고 살았어요. 엄마 아빠도 일찍 돌아가셨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니까요.”
챵시밍 의원이 따뜻하게 데워온 우유를 한 컵 그윽하게 바라보며 마셨다. 민재도 창시밍 의원 흉내를 내며 우유 잔을 들어 올렸다.
“민재. 난 말이야. 이 우유를 들 때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 떠올라. 우유 먹기가 귀한 때였지. 부잣집 아이들이 우유 먹는 게 무척 부러웠어.”
“이모도 그랬어요? 저도 초등학교 때, 서울 우유가 먹고 싶었어요. 조그만 유리병에 우유가 들어있고, 그 뚜껑이 밀봉되었는데요.
그 밀봉 플라스틱 비닐을 톡 눌러 찢고, 우유 병 뚜껑을 따서 마셨거든요. 전 보기만 했는데요. 그 우유 병 따는 소리를 저도 내고 싶었어요.
그때 못 먹어본, 그 우유와 병뚜껑이 눈에 아른 거려요. 그 이름. 서울 우유. 지금은 없어졌을 거 에요. 그 아픈 추억이 오늘을 살아가게 도와줬나 봐요.“
챵시밍 의원이 우유 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민재. 넌 이모 이야기를 어찌 그리 똑같이 하니? 그때 못 마신 우유를 평생 마실 만큼 사놓고 실컷 마시고 있어.”
민재가 의아한 얼굴로 챵시밍 의원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민재야. 왜 그리 뚫어져라 이모를 쳐다보니? 어디 뭐 묻었니?”
“네. 이모 얼굴이 우유로 뽀얘진 것 같아서요. 하하.”
“민재 넌 확실히 장난기 많은 악동이구나. 그렇게 빤히 숙녀 얼굴을 바라보는 건 실례야. 호호.”
“엄마 동생 이몬네 뭘. 우리 이모 건강하고 예쁘다고요.”
챵시밍 의원도 조카뻘되는 민재와 중국말로 수다 떠는 게 편했다. 주변 테이블에서 한번씩 시선이 들락거렸다. 챵시밍 의원이 우유잔을 쳐다봤다.
“민재야. 이 우유. 무슨 우유인지 알아?”
“네. 서울 우유요. 하하.”
“호호. 그래 맞다. 옛날에 못 마셔본 우유.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어. 새 서울우유. Ace Milk야. 이모가 이 우유를 평생 마실 것 사두었어.
중국에서 최고 인기 상품이거든. 인구가 많은데, 아이들이 이 우유를 마셔.“
“평생 마실 것이라니요? 그게 얼마나 되는 데요?”
“일만 달러 치. 호호.”
“일만 달러라고요? 우와!”
민재가, 맞장구쳤다. 다음 순간 입에서 또 튀어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Ace Milk! 내가 10만 달러 치 갖고 있잖아. 챵시밍 의원이 1만 달러면 나는 그 열배네. Ace Milk 주식. 이게 웬 선견지명이야!’
민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무말도 못 하자 챵시밍 의원이 달랬다.
“민재야. 어린 시절 그렇게 배고파하면서도 못 마셔봤다면 이제는 좀 마셔. 아주 실컷. 다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될 거야. 이 Ace Milk! 민재를 살려줄 거야.”
챵시밍 의원이 다시 의미심장한 눈으로 우유 잔을 바라봤다. 다시 마셨다. 잔 바닥이 비도록. 민재가 얼이 빠진 채, 거목을 다시 바라보았다.
“민재야. 이 이모가 반세기를 살아보니 이제 좀 알 것 같아. 추운 겨울을 지내고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오십번이 넘자, 세상을 조금 알 게 된거야.
공자 말씀에 지천명(智天命)이라고 있잖아. 어떻게 하늘의 뜻을 알까? 동양의 성인이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많아졌어.“
“네. 이모. 벌써 그 연륜에 이르셨네요. 지천명(智天命)!”
“그래. 자신이 누구인가?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잖아. 애드가 알렌 포우도 그런 말을 했다지. 인생이란 자신을 창조하는 여행이라고. 동감이야.”
민재가 챵시밍 의원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이런 것 같았다. 오랜만에 시골 외갓집엘 갔다. 마침 외갓집에 다니러 온 이모를 만났다.
맛있는 음식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배가 불렀다. 속이 꽉 찬 느낌이었다. 생생한 이모 말이 민재 가슴에 맴돌았다.
“사람은 때를 읽을 줄 알아야 해. 민재도 그걸 잘 하는 것 같아.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거야. 세상에 혼자 사는 게 아냐.
하늘이 주는 때 앞에 나를 준비해 놓는 거야. 거기까지가 우리 할 일이지. 다음은 하늘이 그 때에 맞게 우리를 움직여 주는 거지.
그럼 나대로 일어서게 돼. 다음부턴 조심스레 맘대로 맡기는 거야.
우리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여행을 하는 거고. 일하고, 만나고, 쉬고. 크는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원하는 것 앞에 우뚝 설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지. 나아갈 바를 알려주면. 마음을 여미고 가는 거야.“
‘나대로 & 맘대로!’
***
민재가 호탤 숙소로 돌아왔다. 뜨거운 욕조에 누워 눈을 붙였다. 물이 찰랑거렸다. 아르키메데스가 누워있었다. 그대로가 좋았다.
“따르릉!”
휴대폰이 울렸다. 손을 뻗어 타올로 손을 닦았다. 겨우 휴대폰을 집었다.
“아니? 이 저녁에. 웰링턴인데. 누구지?”
“존. 나 앤드류야. 놀랐지? 어제 존 전화받고 기다렸어. 국화 일은 잘 끝났지?”
“네. 앤드류. 전화줘서 고마워요. 국회 일 다마치고 저녁먹고 이제 막 호텔에 왔어요.”
“그럼. 내가 린다와 함께 그 호텔로 가지. 우리 집에서 가까워. 한 10분이면 도착 할 거야.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고.”
민재가 옷을 갈아입고 1층 프런트로 내려갔다. 웰링턴은 낯설어도 만날 사람이 있어서 고마웠다. 호텔 입구로 나가 조금 기다렸다.
“어이. 존. 반갑네. 우리 동네까지 국회일로 출장까지 오고.”
“앤드류. 린다. 두 분이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제가 고맙습니다.”
민재에게 살던 집을 팔고 웰링턴으로 이사와 사는 두 분 얼굴이 무척 평화스럽게 보였다.
웰링턴에 있는 IRD( 뉴질랜드 국세청) 본사로 발령받고 내려와 사는 두 분이 친척 같았다. 1층 로비에서 창가로 자리해 담소를 나눴다.
“존. 오늘 국회에서 법안을 발의하는 회의를 했다며?”
“네. 앤드류 덕분에 그 법안은 본회의로 상정됐어요. 한국학교 빌려쓰는데 문제가 발생되어, 여기까지 왔네요.
그때 친구 로버트 변호사를 잘 연결시켜줘서 고마웠어요. 현지인 학교를 두달 시한부 사용에서 육개월로 연장 조건으로 바꿨으니까요.“
린다가 앤드류 옆에서 찻잔을 들며 거들었다.
“존은 대단해요. 택시 일에 한국학교 봉사에다 국회의원 특별 보좌관까지. 못 하는 게 도대체 뭐예요?”
“아직 결혼을 못 했어요. 하하.”
“존은 농담도 잘하네. 여유가 어디서 그렇게 생기지?”
앤드류와 린다가 존을 칭찬하며 그동안 생활 이야기를 나눴다.
“존. 실버타운과 한국학교 지을 부지 1에이커를 구했다고? 정말 그 뜻이 가상하구먼. 그럼 그 집으로 이사를 가겠네. 지금 존 사는 두칸짜리 집은 렌트줄 건가?”
“네. 그러려고요. 아는 사람 있으세요? 두 분이 추천해 주시면 제가 좋은 가격에 렌트 줄게요.”
“우리야 여기서 정년 때까지 살 거니까. 우리는 됐고. 존 여자 친구 있을 거 아냐? 그 여자 친구한테 빌려주면 되겠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여자 친구가 렌트살면 어떤 점이 좋은 데요?”
“응. 보물을 얻게 될걸. 인생의 가장 큰 보물. 내가 그랬어. 20년전에.”
앤드류가 씩 읏으며 이야기하자 민재가 더 궁금증에 흥미가 일었다. 그때 린다가 앤드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엷은 미소를 띠면서 말을 보탰다.
“그 두 개짜리 집. 그때 제가 세들어 살던 집이었어요. 앤드류 여자 친구였었고요.
앤드류는 그 집 융자로 사놓고 몸채와 별채를 다 렌트줬어요. 본인은 정작 방 한칸짜리 유닛에 옹색하게 살았고요.‘
‘세상에나. 그럼 난 어떡하라구?’
민재가 망설이는 얼굴로 잠깐 생각에 잠기자, 앤드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오늘 그냥 만난 게 아니네. 존. 세상은 다 때가 있는 법이야. 그때를 알아보는 눈. 그걸 놓쳐서는 안돼.”
“그러믄요. 우리가 괜히 여기에 왔겠어요? 우리도 내켜서 왔는데요. 나대로 해봐요. 하늘이 함께하면 맘대로는 시간문제예요.
엊그제까지 존이 우리한테 전화하기 전엔 몰랐어요. 이 호텔에 오늘 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존! 여자 친구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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