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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산 피란시절 재출발 준비
1) 옛 학우들과의 해후
1951년 1월 27일, 부산 초량역에 도착하신 참아버님과 제자 김원필 씨는 추운 항도 역내 대합실에서 버터깡통으로 밥을 지어 요기하고 첫날 밤을 보내셨다. 당시 참아버님께서는 몹시 야윈 얼굴에 지극히 초라한 행색이었다. 명주 바지저고리는 너무 새까맣게 기름때가 끼어서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국방색으로 물들인 속이 겉으로 나오도록 뒤집어 입었다. 피란길 내내 단벌로 지내시다 보니 상거지 누더기가 다 돼 있었다. 게다가 우중에 흙탕물까지 튀어 더렵혀져 있었다. 신발은 바닥이 다 닳아 발가락에 흙이 끼는 정도였다. (285)
비록 누더기 옷을 입었지만, 장래 뜻이 전체화된 소망의 시대에 이런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연극을 꾸밀 때 천만인이 바라볼 수 있는 실극(實劇)의 주연(主演)이라고 생각하셨다. 역사를 창건하는 주연의 심정을 갖고 불행하다는 생각 없이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기도 하셨다.(285)
서울 흑석동 집에 주소만 남겨 놓고 내려와 있던 곽노필 씨를 찾았다. 그 모친의 안내로 인근에 살고 있는 곽씨를 만나셨다. 그리고 거기서 3일간을 보내셨다. 이때 김원필 씨가 근방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해 입주했다. 곽노필 씨와 밤새워 대화를 나누시면서 장래 포부를 피력하시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시기도 했다. 그 참담한 전쟁 상황에서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차원의 말씀으로서, 한국이 중심된 미래 통일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을 설파(說破)하셨다. 그러나 곽노필 씨는 때마침 장교시험에 합격해 2월 13일부로 입대(入隊)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뜻길을 함께 하지 못했다.(286)
1월 31일 오후 3시경 40계단 근처 은행 앞에서 우연히 옛 친구 엄덕문(嚴德紋) 씨와 만났다. 인정의 극치에 가까운 7년 만의 감격적 해후(邂逅)였다. 얼싸안고 서로의 근황(近況)을 문답한 후, 엄덕문 씨의 강권(强勸)에 못 이겨 곧바로 경남도청 앞 부민동 그의 단칸 셋방으로 가셨다. 엄덕문 씨의 부인 고희용 씨와 여섯 살 된 딸과 네 살 된 아들까지 네 식구와 더불어 옹색(壅塞)한 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부인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한복을 빨아 꿰매 주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이것이 다음에 뜻있게 기억될 날이 있을 것이요.”라고 의미 깊은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287)
이때 참아버님께서는 일주일 만에 엄씨의 가족을 전도하셨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섭리, 종교와 신앙의 진수, 예술관 등을 강력한 논조로 말씀하셨다. 그와 동시에 영계의 증거역사가 있었다. 예수님의 여동생이 나타나 “예수님의 일로 마리아에 대한 한을 풀어야 하는데 그 세 번째 문의 열쇠를 가진 분이 문 선생이다.”고 증거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 몽시(夢示)의 내용을 원리적으로 설명해 주셨다.(287)
일주일 간의 말씀과 설명을 들은 엄씨는 무릎을 꿇고, “그대는 나의 친구가 아니고 나의 선생이요 위대한 성인이요 또 철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 상황을 어색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엄덕문 씨는 그날부터 참아버님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셨다. 부인도 제자 입장에서 극진히 모셨다. 또 엄씨의 누님인 엄순태 씨도 자주 들러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가끔 군고구마를 사와 나눠 드시기도 했다. 물론 친구들은 이런 태도에 대해 힐난(詰難)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엄덕문 씨 자신은 “그 변화는 책장 한 페이지를 넘기듯 했다.”고 술회했다. 엄덕문 씨 내외는 그 후로도 계속적인 몽시와 현시(顯示)를 받으면서 믿음을 쌓아나갔다. 그 가족의 정성에 대해 참아버님께서는 “우리 이 다음에 한 집에서 삽시다.” 라는 답례로써 장차 한 뜻 안에 살자는 이상을 기약(期約)해 주시기도 했다.(287)
2월 중순 경 엄덕문 씨의 직장이 끊겨 함께 서류철 표지를 만들어 파는 등 애를 썼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엄덕문 씨의 단칸 살림집에 들어계시는 참아버님에 대한 주인 할머니의 참견과 험담이 극심했다. 3월 6일, 비 오는 아침에 결국 속임수로 내어 쫓겼다. 이사간 남부민동에서도 밤을 새워 말씀을 나누다 보니 집주인들이 또 잔소리를 했다. (중략) 엄덕문 씨는 좌담형태로 계속해서 말씀을 들었다. 이로써 세상이 훤히 보이듯 깨달음을 가지면서 친구들에게 전도를 하러 갔다 박대(薄待)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288)
2) 애환서린 피란민 생활
4월 초순경 남부민동 집에서도 내어쫓기듯 나오게 됐다. 엄덕문 씨는 따로 지내고 참아버님과 김원필 씨는 초량역 뒤쪽의 협소한 판잣집 노무자 숙소에 들어가서 10여 일을 지내셨다. 그리고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난 흥남 옥중 제자 김원덕 씨의 괴정동 집에서도 반 달가량 머무셨다. 이 무렵 참아버님께서는 5월 11일 시작 날짜로 하신 『원리원본(原理原本)』집필에 들어가셨다. 이후 1년간은 주로 이 일에 열중하셨다.(288)
제3부두에서 목도(운반(運搬)하는 일) 일을 하시면서 반 달가량 지내셨다. (중략) 양지쪽 숲속이나 방공호에서도 주무셨다. 일어나 옷을 입으면 김삿갓 노래가 생각나고, 그 자리를 떠나려면 바위나 숲이 서러워하는 것이 느껴져 집보다 귀하게 생각됐다고 하신다. (중략) 때로는 피란민촌 낯선 집 처마 밑에 의신(依身)도 하시고, 전전(轉轉)하며 밥을 얻어 드시기도 했다. 얻어다 주는 밥도 드시고, 점심 대신 누룽지도 드셨다. 단지 끼니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 민족이 겪는 삶의 애환(哀歡)을 모두 겪어 보시는 극적(劇的)이고 인상적인 시간들이었다. 이렇듯 밥을 얻어 드시는 처지와 발을 동동 구르는 밤 추위에도, “아버지,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다.(288~289)
그때 초량역전 팥죽장사, 시루떡 장사 아주머니들과도 친하셨다. 부두 일을 끝내고 나오시다가 따뜻한 팥죽 통을 끌어안고 30분만 얘기하면 그냥 먹을 수도 있고, 며칠이면 돈까지 맡길 정도가 됐다. 그때는 팥죽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었다. 죽을 팔기 위해 열심인 아주머니의 모습, 때 묻은 손으로 퍼주던 죽이 늘 그립다고 하신다.(290)
김원필 씨가 식당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참아버님께서 엄덕문 씨와 흥남의 옥중제자 김원덕 씨를 데리고 오셔서 식사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밥을 계속해서 갖다드리면 물리치지 않고 잡수셨다. 그런 모습을 처음 접한 김원필 씨는 그동안 참아버님께서 얼마나 배고픈 생활을 해오셨는가를 깨닫고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290)
피란시절에 자갈치시장 인근 동네를 많이 다니셨다. 고향을 떠나 월남해 아무런 기반도 없는 피란민들의 피란살이 설움과 곡절(曲折)이란 남한의 어떤 노동자보다, 감옥 수인(囚人)들보다 더 비참하다고 하신다. 당시 정착지 없이 전전하신 참아버님의 일상이 바로 그 애달픈 피란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중략) 범냇골 어귀 ‘나가야(長屋)’ 라는 곳에서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가량 하숙했다. 방은 협소하여 누우시면 머리와 다리가 벽에 닿았고, 엄덕문 씨라도 오게 되면 비딱하게 누워야 했다. (290~291)
참아버님의 주된 일과는 역시 원리(原理) 집필(執筆)이었다. 옆에서 연필을 깎아대기 바쁘게 속기하셨다. 쓰시는 동안 우시고 찬송하시고, 또 울고 기도하셨다. 때론 2백, 3백 미터 거리 뒷산 마그마한 평지에 올라 노래와 명상을 계속하시면서 심혈을 기울여 써나가셨다.(291)
흑석동 시절 신앙적으로 가까웠던 이기완 씨를 전도하셨다. 이기완 씨는 기성신앙 관념으로는 도저히 소화하기 힘든 말씀에 혼란을 겪으며 결사적인 산상기도를 했다. 그때 ‘문선생의 말씀이 옳다.’는 영적인 응답과 무형의 하나님이 참아버님 몸 안으로 들어가는 환상 등을 보고 나서 결국 뜻길 입문(入門)을 결심했다.(291)
3) 범냇골 토담집에서 재출발 준비
참아버님께서는 초여름부터 인근 산지를 도시면서 건축자재가 될 만한 돌과 흙을 파 옮기셨다. 때론 성황당의 돌과 흙까지 파 옮기셨다고 한다. 그리고 피란통에 마땅한 작업도구가 없어 깨진 부삽(부엌용 삽)을 하나 얻어 터를 닦으셨다. 공동묘지 근처로서 돌투성이의 골짜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1951년 8월 부산시 동구 범일4동(현재는 ‘6동’) 1513번지, 범냇골 막바지 수정산(水晶山:306m) 중허리에 아담한 토담집을 지으셨다. 건축의 주역은 참아버님, 보조역은 김원필, 옥세현, 엄덕문, 이웃 송문규 씨 형제 등이었다. 장마철이라 유달리 고역(苦役)을 치르셨다. 맨돌과 흙만 포개 쌓다 보니 두 번이나 무너져 앉아 세 번째야 완성했다.(292)
두 평 안쪽 단칸방이었다. 별도의 부엌은 없었고 바깥 한데(=室外)에 솥 한 개를 얹은 부뚜막이 있었다. 그 옆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굽히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1미터 높이의 허술한 출입문이 있었다. 오른쪽 벽 위에 큰 책 한 권 높이의 종이영창(映窓)이 있고, 그 턱에 참아버님 고무신을 놓았다. 윗목(아궁이로부터 먼곳)에는 석유궤짝에 냄비 등을 넣어 놓고, 풍로(風爐)는 바깥에 뒀다.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지붕은 레이션(ration, 戰鬪食糧) 상자로 연결해서 가물면 하늘이 보이고 궂은 날엔 비가 들쳤다. 비가 오면 방 한구석에 작은 샘이 솟고, 밑에는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산쪽의 굴뚝을 통해 들어온 물은 방(房)고래(=炕洞)를 거쳐 아궁이로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몇 겹의 거적(straw mat)을 깔고 서너 겹 가마니(straw bag)를 펴서 깐 다음 폭이 넓고 긴 요를 펴서 깔았다.(292)
원시인의 손자국을 상상케 하는 질박(質朴)한 땅 위에 움막집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한때 다 쓰러져 가는 헛간 집 같은 방 한 칸이라도 누구보다 사랑할 수 있는 방으로, 왕궁 이상의 귀한 방으로 살 것이라며, 하나님을 모실 한 칸의 방을 세계의 누구보다 간절히 그리워하셨다. 또 하나님이 택한 땅에서 정성 들이고 싶어, 지극히 작은 땅 한 평이라도 그리워하셨다. 그랬기에 이 토담집에서 그 어떤 영화로운 궁중생활보다도 하나님의 아들로 효행할 수 있는 제일의 길, 최고 깊은 내심의 기준에 도달하기를 소원하며 정성 들이셨다.(293)
당시 참아버님의 외모(外貌)는 실로 초라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얼굴은 검을 대로 검어 있었다. 복장은 아직 피란길에 입으셨던 누더기 옷 그대로였다. 퍼런 물을 들인 한복 겹바지에 미국 작업복을 입고 일본 운동화를 신고 계셨다. 그렇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3개국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복장을 하고 다닌다고 여기셨다.(293)
1951년은 후반기는 김원필 씨 직장 뒷바라지와 내적 준비에 주력하셨다. 김씨는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돌아왔다. 부업(副業)으로 미군들 사진을 보고 초상화(肖像畵) 그리는 일을 했다. 천에다 풀을 먹여 팽팽하게 해서 나무틀에 고정시켜 놓고 그렸다. 한 장에 4달러짜리 하루에 10장 안팎, 많을 때는 20~30장까지도 그렸다. 참아버님께서는 김원필 씨를 자녀대표로 삼고 최대의 정성과 수고와 애정을 기울이셨다. 출근 때는 마을 아래까지 따라 나가야 마음이 편하셨다. 낮에는 미리 재료를 사다가 틀을 만들고, 저녁 때는 장을 봐다가 취사를 끝낸 후 멀리 동구(洞口)에 나가 기다리셨다. 김씨는 회사에 갔다 퇴근해 오는 것이 연인을 찾아오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했다.(294)
참아버님께서는 그림 그리기가 끝날 때까지 지켜 앉아 도우셨고, 일찍 깨워 출근시켜 주셨다. 그리기 작업이 끝날 때까지 식구들에겐 벽에 기대어 졸더라도 누워 자지는 못하게 하셨다. 처음에 얼굴형을 잡기 좋게 똑같은 사이즈로 금 긋는 것과 배경 그리기를 도와주셨다. 그리고 점차 입술이나 옷이나 머리카락 채색을 도와주셨다. 그렇게 해서 벌어온 돈으로 전도 경비와 생활비를 충당하셨다. 돈벌이는 식구 수 증감에 따라, 마음자세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고 한다. 참아버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쓰신 것도 아니었지만, 민망(憫惘)스럽게도 돈 쓰신 내역을 일일이 말씀하시며 늘 미안해하셨다고 한다.(294)
원리원본 집필은 계속됐다. 밤엔 부산도성(釜山都城)을 바라보시며 명상에 잠기셨고, 새벽이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다. 때론 찬송을 되풀이하시면서 서럽게 우시기도 했다. 김씨는 참아버님의 울음 섞인 음성의 기도와 노랫소리에 매번 놀라 깨곤 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잠을 깨워 캄캄한데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기도를 함께 하시기도 했다.(295)
부산항구에 줄을 지어 들고나는 군수물자(軍需物資) 선단(船團)들의 동향을 헤아려 보시면서 전쟁 상황 변화를 감지(感知)하셨다. 보통 때는 50척, 많을 때는 100척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 많은 배들이 기적(汽笛)을 울리며 연기를 내뿜는 것을 보시면서, “장차 저 대해를 건너 기대하던 심정의 인연의 씨를 저 나라에 가서 뿌려놓아야 된다.”고 생각하셨다. 또 “내 손으로 저런 배를 만들어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고 다짐하셨다.(296)
늘 식구를 기다리는 그리움에 사무친 나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상선(商船) 위에 앉은 참아버님 주변에 수많은 식구들이 밀려드는 환상(幻想)을 보여주며 위로하셨다. 그러나 벽 하나를 넘을 수 없었다. 식구들은 물밀 듯이 밀려왔으나 마지막 손이 닿지 않았다. 그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셨던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잃어버린 아들딸을 기다리는 그 심정적 체휼이 필요했다. 석양이 되면 ‘안 오나’, 아침이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닭이 울기 전에 ‘안 오나’ 그렇게 오매불망(寤寐不忘)의 심정이 돼야 했다. 이 땅 가득한 그 그리움의 운기(運氣)로 인해 만민은 참사랑의 품으로 돌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296)
이 무렵 참아버님의 심경(心境)의 일단(一端)을 표현하신 친작(親作) 성가가 바로 「어둠에 싸인 세력」이다. 이 노래는 본래 참아버님께서 수첩에 적어두신 것을 김원필 씨가 발견해 옮겨 뒀다가 후일 공개했다. 다른 친작 성가는 하나같이 밝고 감격적이고 소망에 넘치는 데 반해, 이 곡은 유일하게 진지하고 적나라하다. 당시 사탄세력의 도전에 매우 착잡(錯雜)한 사정(事情)이나, 약한 죄인의 입장에서 구원받아 나가는 성도의 심회(深悔)가 매우 절실하게 표현돼 있다. 모든 성도들에게 있을 만한 신앙적 진면목(眞面目)을 대신 드러내는 한편, 자녀들을 고대하는 깊고 절절(切切)한 기다림의 심정이 가득 배어 있는 애절(哀切)한 가사인 것이다.(296)
4) 원리원본 탈고(脫稿)와 전도출발
참1952년 2월부터 옥세현 씨가 하늘로부터 책망을 받고 나서 작정하고 장기적으로 머물며 부엌일을 맡아 했다. 남편과 자녀들이 찾아와 돌아가자고 애걸(哀乞)을 했지만, 매번 사정해 보내곤 하면서 오로지 하늘의 명을 따라 모심의 도리를 다했다. 참아버님께서는 미군(美軍) 부산기지사령부 목공부(木工部)에 나가 얼마간 일하시기도 했다.(297)
그 무렵 5월 10일 오전에 지난 1년간 열중해 오신 『원리원본』집필과 교정(校訂) 및 교열(校閱)작업을 마감하셨다. 「기록 제1권」~ 「기록 제5권」으로 나눠 쓰시고 각 권마다 두 곳에 구멍을 내어 묶으신 총 690여 쪽의 원고이다. 4ㆍ6판 8절 중절지를 반으로 접은 16절 크기의 불투명한 갱지(更紙)와 투명한 기름종이에 대부분 국한문(國漢文) 혼용(混用)의 횡서(橫書) 흘림체로 속기(速記)해 쓰셨다. 본문 내용은 주로 연필로 쓰셨고, 교정과 교열작업은 검정색, 파랑색, 갈색 잉크를 사용해 펜으로 하셨다. 극히 미미하게 밑줄을 치는 데는 빨간 색연필이 사용됐다. 특히 중간 10여 쪽 분량의 본문은 파란색 잉크 펜으로 씌어 있다.(297)
일찍이 해방 무렵 친히 회계장부에 쓰신 일명 『회계책』이라는 원리 원고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관리를 맡은 차상순 목사는 참아버님 흥남 수난 기간 중 경찰의 가택수색(家宅搜索)과 감시(監視) 상황에서 부득이 이를 없앴다고 한다. 또 흥남 옥중에서 박정화 씨가 틈틈이 말씀을 받아 적었다가 후일 1천 2백 매 분량으로 정리한 ‘원화원 이상(圓和園 理想) 라는 주제의 원리초고(原理草稿)가 있었다고 하나 사장(死藏)됐다. 그런데 비로소 이 부산 피란시절에 이르러 친필로서는 현존(現存) 최초의 원리기록이 되는 『원리원본』이 완성됐던 것이다.(299)
참아버님께서는 잃어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산에 올라 타락으로 막혀진 영적인 담을 하늘의 심정으로 터트리셨다. 그 결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식구들이 찾아들었다. 대표적으로 강현실 전도사, 이요한 목사가 들어왔고, 이후 한 사람 두 사람 뜻 맞는 사람을 보내주시어 재규합(再糾合)의 역사가 시작됐다.(299)
5월 10일 오후에 새 식구 강현실(姜賢實:1927) 전도사가 찾아왔다. 경주 영주 출신으로 고려신학교 2학년생이며 범천교회 시무전도사였다. ‘범냇골의 이상한 청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일 세 시간씩 일주일간 기도한 끝에 결심이 생겨 스스로 토담집을 찾아왔다. 이후 말씀과 영적 역사를 통해 입교하기에 이르렀다.(300)
12월 1일에는 이요한(李耀翰:1916) 목사가 들어왔다. 이 목사는 평북 선천에서 유소년기부터 장로교 신앙을 갖고 24세 때 목회를 시작했으며 일본 동부신학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퇴학까지 당했다. 해방 직후 서울 등지를 거치며 ‘재림주 한국 강림’ 계시를 접했다. 제주도에 피란(避亂) 갔다가 부산에 나왔을 때, 오래전 서울에서 신앙적 교분이 있던 옥세현 씨를 만나 범냇골로 와서 말씀을 듣게 됐다.(300)
그 외에도 범냇골 시절 왕래한 식구는 김재산(金在珊) 씨, 흑석동 시절 인연됐다가 전도된 이기완 씨와 딸 백희수 씨, 이웃의 송기주 씨와 자녀 효숙, 문규, 방송 씨, 흑석동 시절 인연된 박윤염, 박경도 씨 남매와 박씨가 전도한 미군 크레이톤 워즈워드, 재종제(再從弟) 문승룡 씨, 평양식구 지승도, 정달옥, 정득은(丁得恩) 그리고 이요한 목사가 인도한 오영춘(吳永春) 씨 등이었다.(301)
5) 옛 식구 수습과 말씀 선포
참아버님은 식구들이 오면 쉬지 않고 말씀해 주셨고,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정에 북받쳐 많이 우셨다. 뚜렷한 형식은 없었으나 말씀으로 잔칫집처럼 들떠 있었으며, 늘 주일 같은 분위기로 사람이 붐볐다. 식구들은 떡과 음식을 장만해 와서 말씀을 듣다가 간식으로 나눠 먹기도 했다. 자신은 단벌이면서 누가 오면 옷을 사주셨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 주셨다.(301)
당시 한국 전쟁 등 암담한 현실 때문에 대개의 신앙인들은 내세를 위주로 희망과 가능성을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참아버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을 모아 놓고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셨다. 머지않아 외국을 나가게 될 것이니 외국어를 공부하라고 하시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아오면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등장할 것이라고 하셨다.(302)
특히 이요한 목사나 강현실 전도사 등을 여러 교역자들과 신령집단에 보내 새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또 친히 방문하시기도 했다. 대부분 참아버님을 증거하고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모시고 따라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만나서 정성으로 말씀을 하실 때 그들은 사심을 갖고 대하게 되면 받은 복과 은사를 모두 거둬 오셨다.(302)
보통 사람이라면 처자(妻子)를 먼저 찾아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별의별 곡절(曲折)을 거치면서도 먼저 동지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먼 사람까지, 이북(以北)에서 따르던 식구들을 비롯해 인연된 동지들을 찾는 데 2년이 걸렸다. 즉 참아버님께서는 남한에 오셨을 때 성진님 모자(母子)의 행방을 다 알고 계셨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약속한 몇몇 사람을 다 만날 때까지 연락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기다렸다가 그 수습이 끝나자 연락을 주셨다. 그래서 1952년 11월 성진님 모자가 연락을 받고 찾아 왔었다.(303)
참아버님께서는 6년 만의 해후(邂逅)였으나 먼저 나가 반갑게 맞지 못하셨다. 아벨 입장의 식구들이 앞서 맞아야 할 원리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벨은 가인을 통해 소개를 받아서 사랑해야 된다. 그러나 식구들의 들어오라는 말이 없어 참아버님께서는 눈물로써 반겨 안아주지 못하시고 “애가 성진인가?” 하고 무정(無情)하게 대하셨다.(304)
더구나 성진님 생모(生母)가 참아버님을 만나 인사할 때, 그간의 뜻을 위한 자신의 고생을 뒤로하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살아서 돌아왔으니 감사할 뿐이다.”고 위로하는 하늘의 신부이길 바라셨다. 또 아들 앞에는 “천도를 가는 훌륭한 아버지가 오셨다.”고 인사시킬 수 있는 어머니이길 바라셨다. 그러나 최씨는 오히려 참아버님을 원망하는 자리에 섰다. 이렇듯 천도(天道)가 엇갈린 자리,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서는 처자를 만난 의미가 없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매 순간을 엄중한 원리적 기준을 지키기 위해 이렇듯 비참한 경지(境地)를 거치셔야 했다.(304~305)
성진님 생모는 오랜만에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 원했지만 참아버님께서는 식구들을 위한 공적 생활을 계속하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도 돈이 생기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셨다. 또 당시 6개월간은 매사를 섭리적 어머니격인 옥세현 씨와 뜻적으로 의논하는 기간에 계셨다. 그런데 최씨는 그런 섭리적 경륜(經綸)과 방향을 달리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305)
6) 수정동 수난과 식구 유대
토담집 시절 식구가 늘자 고려파 계통의 경계와 반대가 시작됐다. 또 평양서부터 기성교회 장로였고 신학공부를 했던 옥세현 씨의 남편 우씨의 모함과 반대가 뒤따랐다. 성진님 생모 최씨의 오해와 고발로 혼돈과 시련이 중첩(重疊)됐다. 피신(避身)을 반복했고 무사(無事)와 평안(平安)이 없는 나날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런 참담한 현실을 눈물과 피땀, 인내와 용서와 사랑으로써 헤쳐 나가셨다.(305)
반대(反對)와 훼방(毁謗)이 점차 심해져서 토담집을 떠나 1953년 1월 수정동으로 예배 처를 옮겼다. 그렇지만 곧 뒤따라와서 반대역사를 계속해서 두 번 더 거처를 옮겼다. 참아버님께서는 범냇골 토담집에 비하면 대궐 같다고 하시며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러나 성진님 생모가 다시 찾아와 살림을 부수고, 참아버님께서 아끼시던 성경도 찢어버렸다. 너무나 아쉬워하셔서 오영춘 씨는 국제시장에 가서 똑같이 생긴 성경을 사다가 드렸다고 한다. 최씨는 때로는 마음이 풀려 예배에도 참석하고 식구들과 화목(和睦)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조석(朝夕)으로 변해 종잡을 수가 없었다.(306)
강현실 전도사는 1953년 2월부터 내내 부엌일을 전담했는데 고생이 심해 꼬챙이같이 여위어 있었다고 한다. 4월에는 이요한 목사의 인도로 이봉운(李鳳雲) 씨와 자녀 4명(수경, 무경, 문경, 현경)이 입교했다. (중략) 5월엔 피란 도중 경주에서 일시 작별했던 박정화 씨와 재회했다. (중략) 이봉운 씨는 밀가루 경단(瓊團)에 설탕을 입힌 사탕을 만들어 팔았는데, 참아버님께서는 ‘성화탕(成和糖)’이라 이름을 지어 주셨다. 또한 빵과 나무젓가락을 팔기도 하면서 부수입을 올렸다. 이렇듯 이봉운 씨 가족은 식구들을 위해 밖에서 봉사하는 생활을 주로 하며 묵묵히 뜻을 받들었다.(306)
오영춘 씨는 얼마나 부지런하게 뛰어다녔는지 이요한 목사가 오토바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다. 옥세현 씨 등 할머니들은 영적 역사를 많이 했다. 지승도 씨는 대구에 가 있다가 몇 달 동안 범일동 뒷산에 올라 하늘이 명하신 기도사명(祈禱使命)을 수행하기 위해 주야(晝夜)로 정성 들였다. 늘 숨이 넘어갈 듯한 간절한 기도로 역사를 하기도 했다.(307)
김재산 씨는 하늘의 지시로 부부성별을 하느라 남편의 혹독한 핍박을 받고 경찰에 쫓기면서도 참아버님 안위를 위해 계속 눈물로 기도했다. (중략) 특히 수정동교회 시절(1953년) 참아버님께서는 평양 기독교 기반을 대표한 식구 김원필 씨와 정달옥 씨를 부부로 인연 맺는 축도를 해주셨다. 이때부터 가정생활을 시작한 김원필씨 내외는 훗날, 즉 1960년 4월 16일 서울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거행된 3가정(김원필, 김영휘, 유효원) 축복식을 통해 전 축복가정의 맏형 자리에 이르게 됐다.(307)
예배시간은 성령역사가 지속되는 분위기였다. 참아버님께서는 진정하기 어려운 역사라도 단 한마디로 중단시키시고 맺힌 것은 모조리 다듬어 풀어주셨다. 직접적인 영(靈) 분립(分立)이나 치유(治癒)의 역사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시고 자기 책임으로 분별케 지도하셨다. (중략) 원리에 대한 말씀도 하셨지만 신앙지도를 위한 말씀도 하셨다. 식구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갖가지 생활상 문제를 말씀으로 풀어주시면 감화(感化) 감복(感服)하지 않을 수 없었다.(308)
이 무렵 수정동 세 번째 집에서 참아버님께서 지으신 성가가 「복귀의 동산(5장)」과「성원의 은사(6장)」이다. 「복귀의 동산」은 맡겨진 과업과 꿈이 너무나 크고 소망적이라 가사 내용이 매우 장중(莊重)하고 희망에 차 있고 복락(福樂)이 넘쳐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박정화씨는 일찍이 흥남 감옥에서도 참아버님으로부터 이 성가를 배웠다고 증언했는데, 수정동 시절에 비로소 식구들에게 소개됐던 것이다. 「복귀의 동산」은 가사의 성격과 흐름이 회고조(回顧調)와 역사성이 짙어, 찬양의 범위가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에 이르고 있다. 「성원의 은사」는 근본적이면서 단순한 편이며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찬송하고 영광을 돌려 큰 은사에 보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310)
7) 대구 개척 전도
강현실 전도사는 교회 살림을 맡아 하면서도 참아버님의 지시로 자주 유명한 목사와 신령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났다. 그러던 중 1953년 7월 17일경에 참아버님께서 대구 40일 개척전도를 명하셨다. 7월 20일 아침, 강 전도사를 불러 기도해 주신 후,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협조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격려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옷 한 벌과 상행(上行) 여비(旅費)만을 주셨는데, 훗날 “성경에 두 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을 세우려고 그랬다.”고 해명해 주셨다고 한다. 돈이 있으면 돈을 믿고 다니기 때문에, 돈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가라는 뜻이 있었다.(310)
강현실 전도사는 기와담장 위에 손을 올려놓고 유심히 바라보시는 참아버님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울면서 승리를 다짐하고 출발했다. 대구에 도착해 서문교회 도 집사라는 이를 만나 안지랑이산(대덕산)에 올라 기도하고 「동산의 봄노래」를 불렀다. (중략) 8월 중순경에는 이요한 목사가 대구 전도에 증원(增員) 파송됐다. 강 전도사가 닦은 터전 위에 교회를 세우라는 뜻이 있었다. 먼저 교동 2층 집에 있는 지승도 씨를 찾아 가방을 놔두고, 안지랑이산에 올라 기도하다가 주위에 올라와 있던 기성교회의 권사, 집사들에게 말씀을 전해 은혜를 나눴다. 며칠 후 산에서 내려와 가정예배를 시작했는데, 임춘자 집사 집에서 30~40명이 모였다.(310~311)
당시 부산과 대구에서 인연된 식구들로는 이득삼 씨와 두 딸 최순실, 최순화 씨, 그리고 김성실, 김복순, 오금전, 도기선, 정덕기, 방달순, 유선이, 김순철, 이한성 씨 등이 있다.(311)
1953년 7월 23일 한국동란이 휴전됐다. 맥아더 장군의 중국본토 공습과 북벌(北伐) 주장을 반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실책(失策)으로 인한 한국전 휴전과 민족분단은 세계사적 비운(悲運)을 낳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절대적으로 반대해야 했고, 설령 휴전을 하더라도 또 북벌을 주장하며 공세(攻勢)로 나갔어야 했다.(312)
한반도는 세계의 축소형이요, 세계는 한반도의 확대형이다. 한반도의 휴전선은 공산독재체제와 자유민주체제가 대립하고, 악편의 좌익과 선편의 우익이 대결하고, 유물론과 유심론, 무신론과 유신론이 부딪치고 있는 대치선(對峙線)이다. 또 구약시대의 헤브라이즘의 흐름을 이어받은 기독교 문명과 헬레니즘의 흐름을 계승한 공산주의 문명의 대치선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선편과 악편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모든 대립과 투쟁(鬪爭) 상황(狀況)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략) 미국과 한국의 실책으로 2차 대전 직후 참아버님의 출발섭리 기반으로 준비된 세계적 통일권인 연합국과 추축국 6개국, 특히 민주세계가 공산권 세력에 의해 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세계문제의 축소형인 남북분단과 공산주의 문제는 참아버님 필생의 십자가로 남아졌던 것이다.(312)
참아버님께서는 이런 참담(慘憺)한 정세 하에 해방 후 수난(受難)과 역경(逆境)의 7년 노정을 마감하시고 섭리적 재출발의 돌파구(突破口)를 모색하셔야 했다. 그래서 부산과 대구의 교회를 터로 해, 9월 17일 옥중제자 박정화 씨를 대동(大同)하시고 폐허상태의 서울로 올라가셨다.(312)
8) 부산 범냇골 성지
지금의 범일 6동에서 1동으로 내려오는 계곡 중간을 흐르는 내를 ‘범내’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이곳에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산림이 울창하고 냇가에 때때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중략) 일찍이 한민족의 예언서 『정감록』에는 ‘利在八金山(이재팔금산)’이라 하여 6ㆍ25동란 같은 큰 환란에는 부산(釜山)으로 피란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을 파자(跛字)로 예언해 놓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참아버님께서 부산 피란시절에 터를 잡으신 범일동 지근의 옆 산이 팔금산이었다.(314)
참아버님께서는 1965년 1월 26일 부산 부용동 1가 69-10 소재 부산교회 방문 때, ‘釜山之聖道 聖道之福音(부산지성도 성도지복음)’을 휘호해 주셨다. ‘부산이 근원이 된 하늘의 뜻길, 거룩한 도시의 복음이여 세계만방에 퍼져 영원하라’는 축원(祝願)의 내정이 담겨 있다. 힘이 넘치고 정성스럽고 짜임새가 있는 이 휘호에는 그 옛날 항도(港都) 부산에서 뜻을 부둥켜안고 희비애락(喜悲哀樂)을 겪으신 착잡한 심회가 깊이 어려 있다. 그리고 그해 12월 14일, 토담집 위쪽으로 3백 미터 거리 ‘눈물의 바위’ 자리를 세계 40개국 120개 성지 중의 하나로 축복하셨다.(314)
1965년 당시 황환채 지구장이 토담집 위 판잣집을 매입해 보존해 왔다. 1975년에 이 지역이 불량주택개량지구(不良住宅改良地區)로 지정되자 박규남 당시 교구장이 김원필 재단이사장의 지시로 ‘범냇골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 택지를 확보했다. 12월 우물터 공사 착공을 시발(始發)로, 이듬해 2월 부속주택 공사를 착공했다. 7월 27일에 기념관 신축기공을 했으며, 12월 23일에 연립 2층의 기념관이 완공됐다. 1978년 10월 29일, 기념과 개관식 때 참아버님께서는 ‘凡一殿(범일전)’이라는 이름과 ‘一道之源一心一念(일도지원일심일념)’을 휘호해 주셨다. 옛날 토담집 곁에 있던 바윗돌이 범일전 내부 중심에 앉아 옛 역사의 자취를 대변한다.(315)
이날 참아버님께서는, 범일전의 바위는 비를 맞고 볕이 나면 바지를 말리곤 했던 곳으로, 어느 누가 중히 여기지 않고 바라보지도 않았지만 참아버님과 관계된 인연으로 섭리적 가치를 갖는 세계적 역사적 조건물이 됐다고 하셨다. 우리도 하늘의 심정세계에 있어서 두터운 인연을 남김으로써 섭리사적인 가치를 갖는 역사적 기념의 대상이 되라고 훈시하셨다.(316)
범일전엔 원리 집필과 초상화 그릴 때 사용한 앉은뱅이 책상과 대한등, 초상화 틀, 토담집 돌조각, 휘호 등이 전시돼 왔다. 이런 유품들은 현재 청평 천정궁 박물관으로 이관(移管)돼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범일전 주변으로는 기념교회와 우물집, 부속건물 5동이 위치해 있다.(316)
부산 범냇골 성지는 특히 1980년대 미국기독교 성직자들 순례 때, 많은 영적 역사가 있었다. 범일전과 본성지 눈물의 바위, 수정산 정상 성지 등엔 오늘도 뜻길 새 출발의 뿌리역사를 더듬어 흠모(欽慕)하는 세계 식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참아버님께서는, 가장 깊은 뿌리의 역사를 알고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역사시대에 최고의 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