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1:1-13, 사울의 최후, 24.10.30, 박홍섭 목사
사무엘상 마지막은 사울의 비참한 최후로 끝이 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했던 왕이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다는 극적인 메시지입니다. 그가 어떻게 왕이 되었습니까? 삼상 8:10-20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다스려주심보다 이방 나라들처럼 능력 있는 인간 왕이 다스려주는 것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왕 때문에 너희가 이런 고통을 당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심판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이스라엘은 우리는 왕이 있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미련한 고집에 하나님께서 “좋다 그러면 너희들이 원하는 왕의 모습을 한번 봐라”라고 허락한 왕이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 소망에 부풀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모두가 원하고 환영했던 왕입니다. 용모가 준수했고 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마음에 쏙 드는 왕이 세워졌으니 이제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사무엘상 내내 보여주는 그런 비극적인 사울의 삶과 죽음입니다. 역대상 10:13-14절은 사울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이 평가대로 이제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이 소원한 왕 사울의 죽음으로 끝나고 사무엘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의 등극으로 이어집니다.
혹, 사울은 자기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왕이 되어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억울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왕이 되지 않았더라도 같은 종류의 삶을 살다가 그렇게 죽을 사람입니다. 다만 왕의 자리에서 그런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사울의 최후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병기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어찌 보면 매우 신앙적인 모습 같습니다. 할례 없는 자들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면서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신앙적 자존심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과 행동은 끝까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지독한 자기 중심성에서 나온 말과 행동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은 적군을 신체 절단과 거세를 통해 고문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난 후 목을 자르는 참수로 처리했습니다. 사울은 그것이 두렵고 싫어서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 죽기 싫다며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신앙적 행동이었다면 그 치명적인 부상이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그때라도 사력을 다해 하나님을 찾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명분, 자신의 이름, 자신의 체면만 생각하다 스스로 자결합니다. 겉으로 거룩한 종교적 용어와 습관이 있지만 속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힘 있는 왕의 실체가 이러합니다. 그가 왕이 되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다윗을 죽이려는 일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도 하고(24:16-22, 26:21-25) 다윗을 헤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도 했지만(19:6) 끝내 다윗을 향한 적대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그 적대감이 컸었는지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여호와의 제사장 80여 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22:17, 21).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건은 사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길보아 산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아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자신도 화살에 맞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로 생을 끝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꿈꾸는 무엇이 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삽니다. 그 정점이 왕입니다. 사울은 그 정점에 오르는 것보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교과서입니다.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어떤 왕이 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울처럼 그 자리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리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자신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맡기신 일차적인 사명은 백성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삼상 9:16). 그런데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이스르엘 평지와 요단 강변까지 땅을 빼앗깁니다.
이런 그의 마지막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번 전투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수치 당함을 무릅쓰고 사울과 그런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사무엘과 신접한 여인을 통해 말씀해주신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시고 블레셋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힘 있는 왕을 세워달라고 고집을 부렸던 미련한 이스라엘의 삶을 대변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삶으로 시작하고 자신을 위한 삶으로 끝이 납니다. 이방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은 예배와 기도, 신앙과 삶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갔습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말하고 거룩한 종교적 형태를 띤다 해도 그 실체는 모두 자신을 향했습니다. 나를 위한 예배, 나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런 삶의 최후가 이렇다고 보여주는 반면교사입니다. 사무엘상을 마치면서 우리의 삶에 이런 모습은 없는지 잘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