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22-25, 그가 누구이기에, 24.10.27, 박홍섭 목사
본문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누가복음만 아니라 막 4:35-41, 마 8:23-27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한결같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음은 성경이 이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왜 이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할까요?
이 기사의 핵심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주님의 책망과 “그가 누구이기에”라는 제자들의 놀람입니다. 주님은 광풍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어디 있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은 바람과 물결을 다스리는 주님의 기적을 보고 이제는 전혀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혀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여 순종하게 하는가?” 이들은 주님이 병자를 고쳐주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보았지만 자연을 다스리는 주님의 능력은 처음 경험합니다. 아직 제자들은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다 모르고 있습니다. 몰라서 주님이 함께 있음에도 광풍이 가져온 죽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누가가 본문을 여기에 기록한 의도가 무엇일까요? 성경해석의 세 가지 기본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 신학적 해석인데 그중에서도 문맥의 고려가 가장 중요합니다. 본문을 앞의 흐름과 연결하면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는 7:35의 맥락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누가 지혜의 자녀들인가? 7:36-50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은 여인, 8:1-3은 예수의 2차 갈릴리 사역을 위해 뒤에서 자신들의 소유로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같은 여인, 8:4-15절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좋은 밭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옳으심을 증거하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8:16-21은 이런 지혜의 자녀들이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며, 말씀을 듣고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예수님의 새로운 동생, 형제, 모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등장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책망과 제자들의 놀람을 앞에 문맥과 연결해 보면 이런 사실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지혜의 자녀들을 대변하고, 좋은 땅으로 기경 되고, 주님의 은혜로 진리와 생명의 등불이 켜진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다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믿음이 더 자라야 하고 책망받을 내용이 많으며, 아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더 많이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가르치십니다. 갈릴리 2차 사역의 주된 핵심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먼저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풍이 호수로 내리칩니다. 여기 ‘광풍’은 아래서 위로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으로 모든 것을 부수는 강력한 바람입니다. 그렇게 갈리리 호수 서쪽 산과 골짜기에서 발생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덮쳤습니다. 이로 인해 배는 침몰 직전의 위태로운 지경이 됩니다. 어부들이 포함된 제자들은 지금의 이 상황이 자신들의 노력과 경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수준의 위험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다급하게 주무시고 있는 주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깨셔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도 꾸짖습니다.
주님이 광풍을 다스린 이 기적은 뒤에 나오는 다른 세 가지 기적과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8:22-56은 네 가지의 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2-25은 광풍의 위험에서 구원하는 기적이고, 26-39은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구원하는 기적, 43-48은 질병으로부터 건지시는 기적, 40-42, 49-56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입니다. 누가는 이 네 가지 기적을 주도면밀하게 연결한 뒤 9장에 열두 제자를 각 고을로 보내는 파송의 장면을 배치합니다. 주님께서 이 네 가지 기적을 통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은혜로 불러 지혜의 자녀로 삼아 자신의 옳으심을 증명하시고 이들을 통해 생명과 진리의 빛을 밝혀 어둠을 비추고자 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을 30배, 60배, 100배로 맺히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배워서 주님을 더 잘 신뢰하고 더 잘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네 가지의 기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22절이죠.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하십니다. 주님이 이 상황을 주도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3절입니다. “행선 할 때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려치매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배에 광풍이 몰아칩니다. 배에 물에 가득 찼고 제자들의 죽음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무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풍이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어떤 바다도 순풍만 있지 않습니다. 광풍이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광풍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다 광풍이 있습니다. 나에게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광풍은 불어옵니다. 불신자만 아니라 성도에게도 인생의 광풍은 불어옵니다. “광풍 끝 순풍 시작” 이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호수를 건너가자 하셨고 예수님이 배에 계시는데 광풍이 불었습니다.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은 광풍이 불었던 그 시간을 저물 때라고 했습니다. 어둠이 찾아와 캄캄해졌습니다. 광풍만 해도 무서운데 어둠이 결합 되니 더 두렵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다급하게 주님을 깨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우리는 이런 때가 없습니까? 우리도 이런 순간을 경험합니다. 내 지식, 내 경험, 내 소유, 내 능력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한계 상황 말입니다. 이 한계 상황을 주님이 허락하시고 연출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르치십니다. 당신이 누구이신지? 주님이 왜 그들을 제자로 불러 묵은 마음을 기경하여 착하고 좋은 땅으로 만드셨는지, 왜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알려주시는지, 주님이 켜주신 진리의 등불을 감추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여 인내로 결실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그 한계 상황 속에서 가르쳐주십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은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다른 사람의 귀신들렸던 고통을 건져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는 경험했지만, 아직 자신이 한계 상황에서 어떻게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십니다. 건너편으로 가자 하시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광풍을 만나게 하시고 죽음의 위기를 만나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어떤 분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흉흉한 바다와 광풍을 다스리는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실존적인 한계 상황, 위험, 악령, 질병, 죽음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광풍의 위험, 악령의 공격, 질병의 고통,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 나라의 주인,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이 행하는 기적으로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으로 인해 여기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광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광풍보다 훨씬 크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광풍에 집착하지 말고 광풍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성도의 인생은 자기 계획 자기 시간표대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과 환경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가르치는 주님에게 잘 배워야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저럴 때는 어떻게 하며, 한계 상황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주무시고 있는 주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광풍 속에서도 주무셨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절대적인 신성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광풍 속에서도 잠잘 수 있는 분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꾸짖음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내가 자고 있다면 너희들도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에 질병의 광풍, 가난의 광풍, 관계의 광풍이 찾아와서 내 인생의 배가 깨어지려고 하고 침몰하려고 할 때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왜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도 주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잠잘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아직 제자들은 이런 믿음이 없습니다. 주님은 광풍 속에서 주무심으로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배운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오랜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배운 뒤 한 고백을 보십시오. 시 3:1-6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고 해도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천만인이 자신을 둘러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누워서 자고 깨고 합니다. 시 4:8을 보십시오. “나는 평안히 눕고 자리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잠잘 수 없는 상황에서 누워 자고 있습니다. 평안히 자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게 제 세상입니까? 하나님 세상입니까? 이게 제 교회입니까? 하나님 교회입니까? 하나님 세상이고 하나님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피곤해서 자야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광풍을 꾸짖을 수 있고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올 때 광풍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비록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도 나를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지혜의 자녀로, 진리의 말씀을 내 삶에 생명의 열매로 결실하는 자로, 주께서 밝혀주신 은혜의 등불을 그릇으로 덮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비추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운 만큼, 믿는 만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잘 배우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