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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들(2263.2024.8.18)
히11:32-34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형통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히11장에는 믿음으로 산 사람 가운데 있었던 짤막한 성공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한 사람 전도 해 봅시다. 추수감사주일날 총동원주일을 지켜서 그날까지 1인1명 이상 전도합시다. 한 사람 전도하는 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하고 반드시, 꼭, 기필코, 기어이 성공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롬10:17절‘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출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굉장히 큰 믿음을 갖기 소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능력 있는 믿음 소유하기를 소원하십니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이 설명해 줍니다.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믿음입니다. 막9:23절‘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했습니다.
히11:33절‘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여기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했는데,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미디안 연합군을 진멸했고, 입다는 믿음으로 암몬을 이기고, 바락은 믿음으로 적장 시스라의 나라를 진멸하기도 했습니다. 약속을 받기도 하며 했는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축복과 번성과 후사의 약속을 받았고, 솔로몬은 믿음으로 지혜와 축복의 약속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했는데, 다니엘은 믿음으로 사자의 굴에서 사자의 입을 봉하는 축복을 받았고, 삼손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염소 새끼 찢듯이 찢을 수 있었습니다. 34절‘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했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으로 뜨거운 풀무 불에서 머리털 하나 타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했는데, 엘리야는 믿음으로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용맹되어 했는데,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모두가 다 믿음으로 용맹을 떨쳤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인생을 성공케 하는 바탕이고 비결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시간 믿음으로 성공했던 사람 중 가운데 세 사람을 소개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1.믿음으로 성공한 에녹은 천국으로 직행을 했습니다.
히11:5절‘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우리가 흠모하는 에녹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곧 천국으로 직행한 믿음입니다. 도대체 죽음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요, 불행이며, 고통이며, 눈물이고, 슬픔입니다. 죽음은 한 사람 나의 죽음이라기보다 인생 모두의 죽음입니다. 히9:27절‘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인생은 예외 없이 다 죽어갑니다. 연회안에 2달동안에 소천 했다는 소식이 많이 와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지난 수요일은 점심도, 저녁도 장례식장에서 먹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이미, 벌써 그 날이 정하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시저도 죽었고, 나폴레옹도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암병을 고친 의사도 죽은 것 보았고, 다른 사람에게 죽음의 의미를 열정어린 내용으로 강의했던 철학자도 죽은 것 보았습니다.
창세기 5장은 성경족보 중의 중요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예외 없이 났다, 살다, 죽다는 뜻으로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말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에 관하여는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5;24절‘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죽음이 무엇입니까? 에녹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데려가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때에 믿음 있는 에녹을 어디로 데려갔습니까? 결코 지옥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가심입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슬퍼할 것 없습니다. 절망할 것 없습니다.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예수믿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천국에서 만나시는 믿음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 여기 악한 짐승 있으니 두려울 것 없겠네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까지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생을 살 때에도 잘 살아야 하지만 죽을 때에도 잘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잘 살아야 합니까? 이웃을 사랑하면서 불쌍한 사람에게 구제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질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요, 어떻게 잘 죽어야 합니까? 부끄러움 없는 죽음을 준비했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순교라도 할 수 있으면 더 복이 될 것입니다. 이제 무디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았기에 종국도 아름다웠습니다. 승리하는 생애를 살았노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임종 전에 그는 말했습니다. ‘땅은 물러가라 하늘이 열린다’매우 의미 있는 내용입니다. 멜란토우는 말했습니다. ‘지금 눈앞에는 천국밖에 뵈지를 않는다’ 했습니다.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 찬송 잊지 않고 있다가 임종할 때에 부르면서 하나님의 데려가심에 응하여야 할 것입니다. 찬송작가 토플레이디도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간다’ 살아있을 적에 비슷한 찬송을 많이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찬송가사대로 살았고 찬송가사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우리가 이것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에녹의 경우에서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녀를 낳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성도 중에 더러 말합니다. ‘살림하느라고 너무 바빠서요. 장사하느라고 시간이 모자라서요’ 이것은 핑계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에녹은 살림하면서, 자녀를 낳으면서, 부부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살림하는 동안에 부부끼리 언쟁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쪼들려 허덕거리는 궁색을 피울 수 있고, 자녀문제로 밤잠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에녹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그의 생애를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에녹처럼 살림하면서, 장사하면서, 학교 생활하면서, 직장생활하면서, 얼마든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저마다 무엇인가 함께 동행하기를 소원합니다. 젊은이들은 쾌락과 동행합니다. 지성인들은 과학과 동행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물질과 동행하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권력과 동행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방법이 다릅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에녹은 답할 것입니다. ‘그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마음과 뜻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암3:3‘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과 의견이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면서 주님 뜻대로 살지를 못하면 주님과 동행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동행하려고 하면 도덕적 성질이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와 동행하려면 나도 거룩해야 합니다. 죄를 포기해야 하고, 세상과 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검찰총장과 동행하려는 사람은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동행하기는커녕 감옥에 갇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성도는 우선 도덕적으로 순결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양심이 깨끗해야 합니다. 정말 나의 도덕성은 이처럼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단 없는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동행하는 사람끼리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중단 없는 대화를 어떻게 합니까? 방법은 기도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이것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5절‘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외국을 순방할 때 어떤 사람이 대통령과 동행하기에 적합합니까? 대통령을 괴롭히고, 또 슬프게 하고, 가슴 아파하게 하고, 귀찮게 하면은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습니까? 모시고 가는 대통령을 기쁘시게, 마음 편안하게 해드리는 자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눅15:10‘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십니까? 죄인된 내가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한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롬 12:1에 우리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믿음생활 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활로, 행실로 믿음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논리가 아닙니다. 순종이고, 실천이고, 생활이고, 행동입니다. 고후9:13절에 보면 후한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향유담은 옥합을 받으실 때에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벳새다 소년처럼 나의 오병이어를 드렸을 때에,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을 때에 이미 기뻐하신 하나님인줄로 믿어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2.믿음으로 성공한 요셉은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했습니다.
22절‘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여기 임종시란 말은 죽을 때란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단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원어에 보면 텔 루톤이란 헬라어입니다. 결산한다는 의미를 지니 단어입니다. 생각하면 죽음은 인생의 결산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한마디로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죽음의 구렁에서 구출되어 애굽으로 팔려가기도 했고, 보디발의 집에서 청지기로 수고하다가, 젊은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러더니 억울하게 옥살이하기도 했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언젠가 우리의 임종의 때가 있을 터인데, 그때 남길 말이 무엇이면 싶습니까? ‘나는 믿음으로 살다가, 이제 믿음으로 가노라’얼마나 멋집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의 결산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은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라고 했는데 이는 자기 시신에 관한 유언장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자기를 애굽에 장사지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시온에 묻어달라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말속에 그의 믿음이 잘 나타났습니다. 성공이 무엇입니까? 저마다 인생이 성공, 성공 염원하는데 그 성공을 요셉의 생애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으면 성공입니다. 인생은 저마다 돈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명예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지위와도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인생이니, 또 그것이 필요한지라 염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니 성공의 의미를 터득할 때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서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성공은 저절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애굽에 가서 국무총리까지 됐으니 말입니다. 요셉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결코 물질이 아니고 지위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성공은 하나님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9장을 보면 2절, 3절, 21절, 23절, 한결같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서 성공토록 하시지 않았습니까?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에 하나님이 건져주셨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에 하나님께서 석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해석하도록 하시더니 마침내 일국의 손꼽는 지위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성공인 것을 기억하십시다.
둘째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으면 그것도 성공입니다. 지식이 많은 것, 복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으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오히려 지식이 화가 되지 않습니까? 권세가 많은 것, 인생의 복입니다. 그러나 그 권세도 약자를 억울하게 만드는 권세라면, 도리어 그 권세가 그 자신에게 해가 될 것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손해 보면서 형제에게 유익을 끼치는 성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럴 때마다 목회자의 눈시울이 따가워질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나무를 심고 열매는 후손이 따먹게 하리라, 이러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있는데,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자기의 데나리온을 주고, 시간과 정성을 나누어주면서 기뻐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왜 이렇게 해서 기쁨을 누리고자 합니까? 땅의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록이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39:5절‘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셨더니 그 복이 이웃에까지 넘쳐 흘러났다는 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나 때문에 이웃이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나 때문에 이웃이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웃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면서 사는 여기에, 인생의 보람이 있지 아니합니까? 또한 이것이 인생의 본분이 아닙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지닌 믿음이 아닙니까?
요셉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으로 마감하지 아니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오히려 여기서부터였습니다. 요셉의 믿음을 보시고 그 후로도 80년 동안 동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7년 풍년의 때에 무엇 하기 위하여 곡식을 산더미처럼 모았습니까? 이웃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이처럼 아름다운 생애였습니다. 성공이 어떤 것입니까? 험준한 고난을 이겼으면 그것도 성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논리와는 다릅니다. 어쩌면은 파라독스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더 큰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에 요셉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산 요셉인지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요셉으로 하여금 고난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창39:20-21절‘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했습니다.
요셉의 경우 고난이 무엇입니까? 시119:71절‘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옥에 갇힌 것이 요셉에게 도리어 유익이었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롬8:28절‘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요셉이 당한 고난이 요셉에게 오히려 선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시34:19절‘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낙망할 것 없습니다. 고난당한 성도가 계십니까? 두 주먹 불끈 쥐고 인생을 새 출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대학가고 싶어서 돈벌면서 공부하려고 하니까 무지하게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입학원서 제출하니까 시작이 반이라고 결국은 대학을 잘 졸업을 했습니다. 왜 시골에서 조차 논밭을 팔아서라도 대학진학을 하려고 합니까? 또 기왕이면 좋은 대학에 가려고 버둥댑니까? 모든 것들은 인생을 성공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대학이 좋은 대학입니까? 한국에서 서울대학, 이화여대, 좋은 대학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 대학이 좋고, 영국의 옥스퍼드나 켐브리지 대학이 참 좋은 대학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경우를 자세히 보십시오. 그의 신앙 인격을 쌓고 또 성공을 가져오는데 최고의 대학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 대학이 있습니다.
요셉이 지망한 대학이 어떤 대학입니까? 감옥대학입니다. 고난대학입니다. 요셉은 옥살이 고난을 통해서 그의 신앙인격을 높이 쌓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도리어 성공의 밑받침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감옥대학에 입학한 요셉을 보십시오. 교복이 지정이 되어 있는데 죄수복입니다. 죄수복입고 인생의 겸허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파란 죄수복 한 번 입으면 불행만이 아닙니다. 인생을 수업할 수가 있습니다. 옥중에서 식사시간이 일정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했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요셉은 규칙생활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감옥대학 3년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메이커 있는 의복만 입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수성찬, 마음에 둔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하라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법을 어겼더라면 몽둥이를 맞을 뻔 했고, 그러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 준법정신을 배우게 됐습니다. 이 백성들에게 하나의 결함이 있다고 하면은 교통법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준법정신은 국민적으로 배워야 될 정신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요셉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으시고 계시는데 결국 요셉이 어찌되었습니까? 어느 날 감옥대학 학장이 불렀습니다. ‘요셉아, 이리오라. 네 성적이 매우 좋구나. 이제 내 비서가 되다오’그래서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일5:4절‘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믿음이 이기네 ♬ 믿음이 이기네가 우리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입니까? 만일 요셉에게 이 믿음이 없었다면 종착역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 됐다,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모함했고 그의 남편이 나를 죄도 없는데 옥에 처넣었다. 이제는 원수를 갚을 때가 됐구나’이것이 요셉의 마음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살아가는 요령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요셉은‘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결단도 했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어쩌면은 요셉의 찬송이었을는지 모릅니다.
요셉의 신앙인격이 어찌했습니까? ‘네 입은 나를 욕해도 내 입은 너를 축복하리라’얼마나 아름다운 인격입니까? 이 인격을 본받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마다 높은 자리를 얻게 되면 아랫사람들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또 앙갚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들이 나를 팔아먹었지,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당했는지 모른다. 이제 너희들 맛 좀 보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보복이 없었습니다. 치리가 없었습니다. 모함이 없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가슴만 있었습니다. 나가서는 민족을 가슴에 품는 아량만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어찌했습니까? 사자 굴에 들어가면서까지 고난을 참았습니다. 자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어찌했습니까? 풀무 불에 들어가면서까지 인내할 수 가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믿음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의지를 강철같이 키워야 할 것입니다. 젊은 독수리처럼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주님 뜻대로 살겠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요셉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3.믿음으로 성공한 모세는 바로의 공주아들의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24절‘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이것이 모세의 믿음입니다.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그러한 믿음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 얼마나 굉장한 이름입니까? 모세는 애굽의 권세를 손 안에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권세 앞에 어느 인생이 아부를 하지 않아도 좋을만한 인생 없었을 것입니다. 날아가는 참새라도 뚝 떨어지는 권세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울의 표현대로 그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권세를 분토처럼 여겼습니다. 또 모세는 애굽의 모든 재물을 한꺼번에 손으로 쥘 수 있었습니다. 아마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 이상의 부호가 될 뻔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람들마다 그토록 좋아하고 꿈속에서라도 황금만능을 주장하는 인생들인데 그것을 헌신짝처럼 팽개칠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엉터리 인생이다,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핀잔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세의 인생입니다.
또한 모세의 믿음은 취할 것을 취할 줄 아는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예를 취하고 재물을 취하고 박수를 취하고 훈장 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잘난 체 합니다. 똑똑한 체합니다. 아는 체합니다. 가진체합니다. 더 많이 가졌다고 뽐냅니다. 그런데 모세는 도리어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상 주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성공 표준이 무엇입니까? 권세가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돈도 아닙니다.
바울이 대답해줍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자체가 모세의 성공이요, 삶의 표준이요, 푯대요, 기준입니다. 모세는 때문에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광야까지 모세를 추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풀3:5절‘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왜 이 말씀을 주셨습니까? 모세의 길이 앞으로 열릴 험준한 목회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40년 동안 광야교회를 이끌어 갈 모세를 위하여, 목회자 모세를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너의 선 곳은’ 목장이요, 바로 모세가 섬길 교회입니다. ‘거룩한 땅이니’교회는 거룩, 거룩,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목회자는 거룩한 교회에서 양무리를 먹이는 일인지라, 먼저 더러운 신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식이 있는 목회자라고 하면 무릎을 꿇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목자를 위한 양이냐, 양을 위한 목자냐’답은 뻔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정답해주셨습니다. 요10:11절‘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것이 선한 목자의 표어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작은 목자들입니다. 한 사람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상주감리교회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슴 하고 있습니다.
‘너희 신을 벗으라’ 무슨 뜻입니까? 첫째는 죄씻음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출3:5절‘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신고 다니는 그 신을 보라. 얼마나 많이 더러운 것, 냄새나는 것, 때 묻은 것이 묻어 있느냐? 네가 선 땅 거룩한 땅이 아니냐? 거기를 어울리지 아니한다. 더러운 신을 벗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맘도 깨끗케 하고 몸도 깨끗케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상과 의지가 진리여야 할 것입니다. 시24:3절‘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시24:4절‘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하나님 앞에서 설 자는 먼저 죄씻음을 받아야 되겠기에 모세를 향해서 네 신을 벗으라 말씀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신을 벗는 일은 종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주인만 섬기라고 하는 뜻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좋은 신 신고 주인을 모실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신들메도 감당치 못할 인생이 아닙니까? 그리고 신을 벗으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방법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모세에게는 애굽 궁에서 닦은 교육이 있습니다. 재능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는 목회자 될 수 없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신을 벗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기술과 재주를 의지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를 아니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해야 합니다. 교회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강단에 인간적인 방법을 올려놓으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의 방법으로 대치하려고 할 때에 여기에 목회자의 고뇌가 있습니다. 괴롭습니다. 답답합니다.
네 신을 벗으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역시 고난을 각오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맨발로 걸어갈 때에 광야길인데 가시가 발을 찌를 것 아닙니까? 맨발로 어떻게 비탈길을 갈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신을 벗고 맨발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경우 그의 신발은 80년 동안 그의 몸을 돌봐준 신이 아닙니까? 그러고 그 발이 보호를 받아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신을 벗으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터 모세는 광야 길에서 발이 부르트고 피가 흐를 것이다, 가시가 발을 찌를 것이고 발바닥에 수많은 상처가 있으리라, 이것이 목회자의 길이니라, 신을 벗으라 말씀했습니다. 어찌 보면 목회자의 길은 호화찬란한 길인 것 같으나 그 길은 험준한 길입니다. 광야길 가는 길이요, 가시밭길입니다. 신을 벗고 가야 되는 길입니다. 피가 나야 되요,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인내해야하는 것이 모세였습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기도 많이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거룩한 땅이니란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거룩, 거룩, 거룩한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모든 일은 거룩한 방법, 곧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 것입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나 자신을 땅에 묻어야 합니다.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들어나게 하는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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