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19-2
제19대 숙종(이순)의 여자들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경왕후가 죽고 두번째로 들어온 왕비다.
인생이 파란만장(?)했다.
장희빈(옥정)이 때문에.. ..
그리고 장희빈 때문에 조선사회부터
지금까지도 좋은 평을 받고 계신 분이다.
연극에도 악역과 선한 역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선한 분이 있으면 악한 놈이 있다.
전자를 a good guy
후자를 a bad guy라고 한다.
이 세상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악역도 필요하다.
하느님이 왜 세상을 만들면서
선한 사람만 만들지 않은 이유를 아는가?
원래 착한 사람들만 있으면
세상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 조물주가 우리들을 위해 그렇게
창조하신 것으로 알고 악한 놈들을 만나면,
"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재미있게 살으라고 그러는구나!"
하고 생각을 바꾸시길..
ㅎㅎ 말은 쉽다!
인현왕후 민씨!
조선사회의 대표적인 선한 여성상이다.
장희빈을 백그라우드로 깔아서..
밤하늘의 별들도 밝게 빛난다.
왜?
밤하늘이 아주 까맣기 때문이다.
그 까망이 없다면 저 별들도 밝지 않을 것이다.
고난이나 고통이 더 진할수록
그 기쁨도 더 커지지 않을까?
민씨는 1667년(현종 8년) 여흥 민씨
민유증과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81년(숙종7년) 14세에 21살 숙종과 혼인했다.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승하한 일년 후, 시어머니 명성왕후 후원과 서인 측에서
세력을 잡기 위해 추대로 이루어진 혼인이었다.
항상 장희빈과 함께 떠오르는 인물,
생전 유일하게 폐위되었다 다시 복위한 왕비이시다.
장희빈 관련 매체에서 중요 인물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인지 한국 역사 속 왕비 중
가장 유명한 왕비 중 한 분이시다.
명실상부 명문가 출신의 왕비이다.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이며
남인의 영수 허적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인현왕후의 진외조모
양천 허씨는 허적의 고모가 된다.
예의 바르고 정숙했디.
너무 예의가 바른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오죽했으면 첫날밤부터 예의를 너무 밝혀
초야의 분위기가 어색했다고 한다.
"허~거참, 예의를 차릴 때 가서 차려야 하는데."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모름지기 왕통을 이으려면 왕자를 생산했어야
하는데..그래서 더 찬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후원자였던 시어머니,
대비 명성왕후가 숙종 9년에 승하해 버린다.
다른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슬펐다.
숙종이 아무리 제멋대로 해도
엄마 명성왕후의 눈치는 좀 보았는데
이제는 그런 제동장치도 없어져 버렸으니..
인현왕후, 고난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장희빈에게 흠뻑 빠졌던 숙종이
중전보다는 노련한 후궁들을 찾았다.
그러다가 숙종 12년에 남편 숙종이
장나인(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
일설에는 인현왕후가
장옥정을 궁으로 불렀다는데 드라마를
재미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래도 여자인데..^^
궁에 복귀한 장나인(옥정)의 나이는 28세였다.
다음 장희빈편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인정한 최고의 미녀에다 요리(?)실력도 뛰어나서 숙종이 정신을 못차린다.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이뻤다."
- 숙종실록 17권, 12년 (1686) 12월10일 -
시기 질투 모함하면 못말리는 장나인!
이번에는 인현왕후가 타겟(표적)이 된다.
숙종이 장나인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자 이징명이 상소를 올린다.
"전하, 옥체를 보전하소서!" 하고...
눈에 뭐가 씌인 숙종, 재깍 이징명을 귀양 보내고,
장나인은 그 배후가 인현왕후라고 숙종을 부추긴다.
못된 버릇은 개나 주어야 하는데
지 버릇을 못주고 못고쳤다.
그러니 인현왕후는 어떻겠는가?
완전히 꿔다놓은 보리자루 신세가 돼버렸다.
게다가 장나인 30살에 아들 윤(경종)을 낳자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것처럼 거침이 없다.
다음 수순은 뭐겠는가?
희빈으로 승격한 장옥정은 더 큰 꿈을 꾼다.
대권!
아니, 왕비 자격증을 받겠다는...^^
인현왕후를 폐위시킬 짓거리를 한다.
정사는 아니지만, 숙종이 점심 때
장희빈이 있는 영휘당으로 갔다.
마당에는 피를 흘리며 죽은 개 한마리가 있었다.
장희빈은 울고불고 하며 숙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하, 신첩은 정녕 제명에 죽지 못하겠습니다!"
"왜 그러는 게요. 내 사랑 희빈?"
"중전이 소첩에게 생일 음식이라고 보냈는데
섬뜩한 생각이 들어 개한테 시험을 했더니
개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숙종, 눈이 뒤집혔다.
당근 인현왕후에게 가서 난리를 쳤다.
인현왕후,
"? ? ?"
참 미치고 환장하것따!
숙종이 서른이 되어
왕자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바로 원자로 책봉한다고 하자
서론 쪽에서 난리가 났다.
서인 영수 송시열이가,
"왕비마마가 아직 젊으시니 원자를 생산할
여력이 있사옵고, 송나라 신종도
10년 뒤에야 후계자를 정하였습니다.
너무 성급하시옵니다!" 했다.
요렇게 숙종의 심기를 거드렸다가 동조한
서인들이 몽땅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는다.
83세의 송시열도...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서인이 Out 하고 남인들이 득세한다.
1689년 숙종 20년에 일어난 일이다.
당근 인현왕후도 폐위되어
안국동 감고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인현왕후 민씨에게 물어진 죄는
1.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2.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
3.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4.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였다..
꽤나 정치적인 이유로서
폐서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의심스러운 것은?
.
'어떻게 왕의 육체를 조롱했을까?' 이다.
첫날밤에 숙종과 인현왕후가
트러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궁금하다.
(이 대목은 19금이 아니라 50금!!)
여차저차 하여
장희빈이 중전으로 올랐다.
~ 생략 ~
그리고 장희빈이 폐위되자
인현왕후는 다시 중전으로 컴백한다.
이후 숙종이 다시 남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694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났고,
인현왕후는 일단 덕수궁에 들었다가
숙종과 밀당 끝에 당일로 왕비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
왕세자 윤이 인현왕후 아래로 입적된다.
따지고 보면 원수의 자식이건만
친아들 못지 않게 귀여워했으며
세자도 인현왕후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
인현왕후,
숙종 27년 8월 병으로 35세로
파란만장한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ㅠㅠ
박복하도다!
그러나 백성들이 존경하는 왕비였고
후세에도 그 덕을 기리니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사극에서도 장희빈이 팜므파탈의 이미지의
여배우를 캐스팅한다면 인현왕후는 대체적으로
단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들이 맡았다.
죽어서 명예와 칭송을 들으니
어느 정도 본전은 추린 것 같다..
고생하셨다.
실제로 인현왕후도 한 성깔 있었다.
질투도 했고.. ㅎ ㅎ
출생 시에는 향기가 났다든지 인현왕후전이나 사씨남정기에서 매우 현숙하고 부덕이 높은
여군자로 묘사하기도 하나,
사실 이건 서인측 기록에서의 이야기이다.
특히 사씨남정기 같은 경우는 작자 김만중이
인현왕후의 가까운 친척으로 그녀의 폐비와
관련해서 귀양살이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걸 근거로 그녀가 정말
인품이 뛰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현왕후도 사람이었는지라 질투심이 있었다.
사실 숙종의 사랑을 받는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서 영빈 김씨를 들이도록 하기도 했고,
희빈의 버릇을 고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희빈에게 매를 내린 적도 있었다.
숙종에게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과 귀인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궁궐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한 사람들에게 당부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꾸며내어
모함할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숙종 20권, 1689년 4월 21일
투기하는 것 외에도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선후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禍)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21권, 1689년 5월 1일
이쯤되면 투기를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궁궐로
환궁한 이후에도 인현왕후는 공공연히
"희빈의 저주로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폐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숙종 15년의 탄일문안 사건..
당시 숙종에게 했다는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 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 말을 보면
사실 욱하는 성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BJR 전법>을 쓰셨다.
일명 <배째라 전법>이다..
인현왕후,
폐서인으로 6년간 지내면서 몸이 약해졌는지
복위 8년 후인 1701년 8월 14일
새벽 2시경 창경궁 경춘전에서 요절하였다.
(똑똑한 네이버) 참고함.
내일 또 계속 됩니다 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