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중훈군주,무령왕(武寧王) 이야기
아들아, 공산성에서 만난 역사와 인물..세번째, 주인공은 유명하지만, 우리가 생각보다
잘 알지 못하는 인물, 백제의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이다.
공주의 송산리고분군은 웅진백제 시대 왕릉급, 고위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모여 있단다. 1971년, 이곳에서 우리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로 꼽히는
대사건이 있었다. 바로 베일에 묻혀있던 무령왕릉의 발견이었지.
무령왕릉 단면도 및 재현
아들아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연이었어. 장마철에 송산리고분군 6호분의 벽화가
훼손되지 않도록 고분 외곽으로 배수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인부의 장비에 뭔가
딱딱한게 걸렸지..무령왕릉 입구의 벽돌이었어.
아무도 그것이 무령왕릉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단다.
급히 발굴을 하는데..우리나라 고고학의 대부라는 김원룡 선생이 진행했어.
입구를 막은 벽돌을 제거하자 벽돌로 된 아치 터널이 나타나고 그 입구에 돌로 된
상상속 동물인 진묘수가 나타났고, 그곳에 무덤의 주인을 말하는 지석이 놓여있었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무령왕릉 표지석
모두 전율했지..처음으로 대하는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고,
그 주인공이 다름아닌, 백제의 중흥군주..무령왕이라니.
무덤은 도굴흔적 없이 온전했었다.
바로 옆 6호분은 일제시대 때 도굴꾼 가루베에게 털렸는데..
무령왕릉은 하늘이 도왔음인지..그의 마수(魔手)를 빗겨갔다.
무령왕릉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이고,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로 축조한
무덤으로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걸작이다. 또한 함께 나온 유물의
수와 수준 또한 단연 최고라 할 것이다.
무령왕릉 발굺 순간
아들아, 그러나 이 우연의 발견이 가져온 무령왕릉의 발굴은 하룻밤만에 졸속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발굴이기도 했다. 특종에 눈먼 기자들, 경험없고 무지한 인부와
발굴 지휘자들이 빚어낸 참극이라고나 할까.
이때 발굴에 참여했던 김원룡 선생 등 관계자들은 이 졸속 발굴에 대해 오랫동안
후회했다는 구나.
무령왕릉에는 무덤을 지켜주는 상상속의 동물인 진묘수, 일본산 금송과 삼나무로
제작된 왕과 왕비의 관, 그들의 목제 베개, 금제 관장식 등 각종 장신구들 수많은
유물이 나왔지만..
역시 가장 눈여겨 볼 것은 무덤의 주인을 증언해 주는 묘지석이다.
무덤자리를 토지신에게 돈을 주고 산다는 재미있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도 볼 수 있지.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백제의 높은 문화수준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해외
여러 나라와 통하는 열린 나라의 모습. 그리고 더이상 혼란에 빠진 약한 나라가 아니라
다시 강한 나라로 발돋움한 것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무령왕릉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묻혀질 역사 속 수수께끼의 답을 밝힐 퍼즐 한조각이
세상으로 걸어나온 순간이었어.
백제 제25대왕..무령왕(武寧王, 462~523).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
아들아, 무령왕이 일본의 가카라시마란 작은 섬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앞에서
얘기했었지?
가카라시마 무령왕 탄생지
그럼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개로왕(蓋鹵王)일까 아니면 곤지(昆支)일까.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 했지만, 무령왕릉에서 나온
기록으로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오히려 동성왕 보다 무령왕이 나이가 위이고, 백제 관련해서는 삼국사기보다
오히려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 이를 참고해야 할 것 같구나.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과 곤지 둘다일 수 있어.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생물학적 아버지는 개로왕, 그를 기른 것은 곤지이니까.
아니면 진짜 곤지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지.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곤지가 동성왕 모대와 무령왕 사마를 모두 일본에서 키우며
성장시켰는데..한 아버지이지만 어머니는 다른 형제일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그러니까..말하자면 왕위계승 문제에 있어서 모대와 사마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는
적수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이지.
하여간..나이가 작은 모대가 형인 사마를 제치고 본국 백제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고
23년 후, 왕권강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위사좌평이자 가림성주인 백가에 의해
살해되고..무령왕은 나이 40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단다.
무령왕이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후 제일 먼저한 것은 가림성주 백가를 제거한 것이란다.
왕을 죽인 역적이니..당연히 백가는 제거 대상 제1호가 되어 마땅한데..
이 백가는 무령왕에게 반항 한번 없이 투항했다가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데 왜 그랬을까.
무령왕과 동성왕
만약의 경우인데..
동성왕의 죽음 뒤에 무령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왕이 오른 후 백가는 공을 세웠으니 사면하고 치하해 주길 원했지만
무령왕은 백가를 그냥 두기엔 너무 위험하니까 그리고 놔두면 부담이 될테니까
그대로 토사구팽(兎死狗烹)해버린 것이라는 의견을 내어 놓는 사람도 있단다.
무령왕 흉상
역사에 전하는 무령왕의 모습은 아주 잘생긴 미남이고 8척 장신..180에서 190cm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와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고..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진정한 대왕이었다고 말하고 있어.
이런 무령왕이 다스리는 백제는 백성들이 살기 좋고, 안정된 나라였으며..
바다 건너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그리고 왜와 통하며 부유하고 열린 나라였다.
그리고 이렇게 백제는 서서히 강했던 강국의 면모를 찾고, 고구려에게 몰리기만 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당당히 맞서는 강국으로 변모했지.
그 자신감이 무령왕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란 글에 드러나 있는 것이란다.
아들아, 무령왕은 523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왕도인 웅진성 밖 야산 언덕에
묻혔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무령왕릉인 것이지.
백제 성왕 동상 (충남 부여군)
무령왕의 뒤는 태자 명농(明農)이 이으니 곧 백제의 제26대왕인 성왕(聖王)이란다.
성왕도 부왕인 무령왕 만큼 뛰어난 군주였고, 무령왕 시대에 싹을 틔운 문화가
그의 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지..
그리고 무령왕이 기초를 쌓은 위에 성왕은 드디어 사비 천도를 단행하고 북진해서
한강을 되찾는데 성공했단다..
물론 성왕의 최후는 어렵게 찾은 한강유역의 영토를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잃고
복수전에 나섰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게 되는 비운의 결말을 맺었지만..
확실한 것은 백제의 중흥을 이끈 그 중심에 무령왕이 있었다는 것이지.
아들아, 아직은 네게 보여주지 못한 무령왕릉,,언젠가 멀지 않은 때에 네가 직접 보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