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 사명감과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역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민족의 아픔이며 상처인 6·25의 역사를 다시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지난 반세기 동안 이념과 체제가 남·북으로 갈라져 동족 간에 갈등이 극심했고, 남(南)은 선이요 북(北)은 악으로 규정된 상황에서 6·25의 평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때의 사실조차 제대로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6·25를 겪고, 그 때의 상황을 말해 줄 수 있는 세대들은 이미 7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6·25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이번 시리즈를 준비하게 되었다.
6.25를 전·후로 한 장성군의 인명과 재산피해를 모두 조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많은 인력과 시간 그리고 예산이 따라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지는 올해 장성군 북일면, 북이면, 북하면의 주요 피해지역을 우선으로 조사할 계획이다. 이 곳은 노령산의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방장산과 병풍산 등과 가까이 있어 입산자(빨찌산 활동 또는 전쟁을 피해)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컸던 곳이기 때문이다.
1. 장성군의 6·25
1950년 6.25일 발발한 남·북 전쟁은 북한 인민군의 우세한 기동력으로 남하하기 시작해 7월23일 새벽 인민군이 장성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인민군은 읍내무서를 장성경찰서에 설치하고, 정치보위부대는 대창동 강병원, 노동당 사무소는 충무동, 인민재판소는 등기소, 유격대 사령부는 매화동 천주교회에 설치했다. 이 무렵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수·순천 사건으로 산속에 들어가 활동했던 빨치산과 남쪽에 거주했던 남로당원들이 유격대 사령관 등의 지위를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각 읍.면 단위마다 인민위원회를 주축으로 여성동맹위원회와 청년동맹위원회 그리고 농민위원회를 결성시켰다.
읍·면 단위 인민위원회에 소속된 청년동맹위원회나 농민위원회는 이념과 사상과는 상관없이 대부분 머슴이나 소작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이들은 사상학습을 통해 지주(地主)와 경찰, 관료 등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이 때 하헌종 장성군수와 읍·면장의 가족은 물론 이장 경찰 및 군인 가족 그리고 지주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청년동맹위원회와 농민위원회에 소속된 청년들이 지주와 또는 평소 사사로운 감정에 있던 사람들을 죽이자 국방부 문관으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변진일에 의해 8월18일 ‘태극결사대’가 조직되어 좌익청년들을 암살하게 된다. 8월 중순부터 9월 하순까지 태극결사대가 처형한 좌익청년은 20여명에 이르렀다. 좌익청년들은 태극결사대원들을 색출하기 시작해 16명의 대원과 그들의 가족 등 42명을 죽이는 등 보복의 순환이 이어졌다. 태극결사대 이외에도 비밀리에 반공단체를 결성한 곳이 있었는데 광복형제단, 화랑단, 결사단(決死團) 등이다.
9·15일 인천 상륙작전에 의해 국군이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 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좌익에 적극 가담했던 인민위원회 소속 청년들은 노령산맥을 중심으로 방장산, 병풍산, 백암산 등으로 입산하게 된다. 이들은 입산하기 전 반공단체 회원들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는데 북이면 사거리 일대의 강씨 문중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47명을 집단 학살했다. 북하면 약수리와 중평리 일대의 울산김씨 일가의 부녀자를 포함한 38명도 집단으로 학살했다.
2. 9·28 수복후의 장성
6·25 당시 장성군에서 발생한 인명과 재산피해는 아직 조사된 바가 없다. 다만 ‘장성군마을사’(장성문화원 발행)를 참고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약 1만여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고, 주택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들 피해 가운데 80% 이상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까지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인민군에 의해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9월28일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장성군의 인명과 재산피해가 가장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퇴로를 잃은 인민군과 좌익 가담자 그리고 집에 남아 있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입산한 사람들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수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낮에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반공청년단이 밤에는 빨치산이 서로 보복과 약탈을 일삼는 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주민들은 낮에는 경찰과 반공청년단에 시달리고 밤에는 빨치산들에게 시달리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경찰과 반공청년단은 좌익의 가족이거나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아무런 증거나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고, 빨치산은 경찰에게 빨치산의 정보를 제공했다거나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 또는 식량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였다.
심지어는 경찰 또는 군인들로부터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경찰 편이라고 단정하거나, 빨치산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니 빨치산의 첩자가 아니냐는 단순한 논리가 먹혀들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노령산맥과 이어진 방장산과 축령산이 있는 북일면과 북이면 그리고 병풍산, 백암산 등이 있는 북하면은 마을 가옥의 80%가 불에 타버렸는데 이들 가옥 대부분이 국군이 장성에 들어온 이후로 빨치산의 소탕을 위해 국군에 의해 소각되었거나 빨치산의 보복에 의해 태워진 것이다.
국군은 산속으로 들어간 빨치산의 자수를 유도하며 방송과 전단지를 통해 자수자에게는 목숨을 살려준다고 회유했으나 산에서 내려온 입산자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따라서 빨치산의 저항은 더욱 강렬했고, 국군의 소탕작전에 의한 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3. 북일, 북이, 북하면의 피해상황
인명 피해가 많았던 북일, 북이, 북하면은 약 2천5백 명에서 3천여 명이 희생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일면에서 인명피해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박산(50여명), 작동(80여명), 양막(40여명), 금곡(40여명), 교촌(50여명), 평암(70여명), 안정(30여명), 계광(30여명), 율리(30여명)으로 평암마을의 경우는 25호 가구 가운데 19호에서 70여 명이 죽었다. 금곡마을의 경우에는 국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없었으나 국군이 들어오면서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30명의 청년들을 마을 회관에 모이게 한 뒤 아무 이유 없이 국군에 의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 40여명이 사망한 양막마을과 50여명이 사망한 교촌마을은 인민위원회에 소속된 청년들과 빨치산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1952년 5월에는 작동마을 앞에서 빨치산의 열차 습격사건으로 승객 60여명이 사망하고, 군인 3명이 살해되었으며 시체를 나르던 주민 6명이 행방불명되기도 했다.
북이면은 사거리(70여명)와 원덕리(100여명), 신평리(120여명), 백암리(180여명), 신월리(140여명), 죽청리(130여명)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사거리의 경우 국군이 들어오기 전에 45명(진주강씨 몰살)이 죽었고, 나머지는 국군이 들어 온 이후로 사망했다. 원덕리 원덕마을은 100여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원덕마을은 95호가 불에 타고, 주민들은 사거리로 옮겨졌다. 신평리 거마마을도 100여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백암리 선평마을은 34호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 지주였던 조씨 일가가 37명, 변씨 일가가 13명이 죽는 등 60여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백암리 용산 마을은 30여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가운데 20여명은 국군이 들어온 뒤 산으로 들어갔다가 죽었다.
조양마을은 45명이 죽고 13명이 행방불명되었는데 행방불명자는 입산하여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북하면은 화룡(50여명), 원동(50여명), 덕재(80여명), 기동(100여명), 하만(30여명), 장사(30여명)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30여개 마을에서 인명피해가 있었다. 화룡에서는 약수초등학교(약수초등학교)가 불에 타버리는 등 피해를 입었다. 원동마을은 52명이 죽었는데 남자가 31명 여자가 21명이었다. 장성댐 건설로 지금은 수몰된 기동마을에서는 100여명이 사망했다. 북하면의 피해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마을이 불에 탔었다. 불에 탄 마을은 국군의 수복이후로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국군에 의해 소각되었거나 일부는 지주와 경찰가족들에 대한 보복으로 빨치산에 의해 소각된 것이다.
4. 맺음말
장성군 북일, 북이, 북하면 가운데 피해가 가장 많은 일부 지역만을 대상으로 약식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명 피해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이후 남쪽에 남은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피비린내 나는 보복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산이 국토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전쟁 승리에만 집착한 미군은 인천 상륙으로 인민군과 좌익세력의 퇴로를 막음으로 해서 이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치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6·25전쟁은 남북간의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킨 것만 아니라 남쪽 주민들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더구나 민간인 희생자의 대부분은 남·북 군인들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남쪽 주민 간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1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6·25의 역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사실대로 기록되지도 못했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했다.
6·25의 피해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와 자료 수집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 때의 사실을 증언해 줄 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역사의 일부나마 기록해 두는 것이 지역언론의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금년에는 우선 북일, 북이, 북하면의 피해 상황을 조사 보도할 계획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혹 출처는 어디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