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34> 결산 (끝)
‘깨달음’의 공론화 싹 틔웠다
|
사진설명: 본지의 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에 대한 교계 안팎의 관심은 지대했다. 사진은 2000년 10월24일 본지 주최로 조계사에서 개최된 간화선 대토론회 모습. |
‘깨달음’과 ‘수행’은 불교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고, 수행의 궁극적 지향점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깨달음과 수행(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되거나 토론된 적은 드물었다. 개인적으로, 혹은 사적(私的)인 공간에서, 학술토론회에서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이야기 한 경우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공론화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본지가 지난 5월4일(2028호) 시작해 12월21일(2090호) 끝낸 ‘기획토론 -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하는가’(이하 깨달음과 수행)는 교계안팎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깨달음과 수행’이 시작되자 독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다”는 것이 대다수였다. 법주사 승가대학장 철운스님은 “주장과 토론 부재(不在)가 불교를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는데, 불교신문의 기획토론은 깨달음에 대한 담론을 보편화하는 데 상당히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시기가 적절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미산스님은 “수행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무척 높은 시점에 깨달음과 수행의 참뜻을 물으려는 기획이 시작돼 고무적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깨달음과 수행’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논박하고, 비판받은 사람이 다시 반론을 펴는 식의 일반적인 ‘쌍방향 토론’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자기견해를 밝히는 방식이었다.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서 비판만 하는 교계 풍토를 바꿔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연재가 나갈 때마다 전혀 상반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반론기회를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초기불교에 근거한 ‘수행법’에 대한 글이 나갈 때마다 간화선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오지 않느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청탁하면 글은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이라는 특성상 글이 없으면 실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주장이라도 논리정연하게 자기주장을 피력한 글이 있어야만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초기불교에 교리적 근거를 둔 수행법에 관한 글들만 나간 것은 아니다. 정토.천태.법화 등 각 분야에 기반을 둔 수행법들도 골고루 소개됐다.
‘깨달음과 수행 중간점검’(2050호. 7월23일자) 당시, 동국대 강사 조준호씨가 “전공별 글쓰기가 이뤄지지 않는다. 개론적인 설명도 좋지만, 중관 유식 여래장 화엄 밀교 등 불교의 주요사상 별로 깨달음과 수행의 역사적.사상적 특징을 열거하면 보다 심화된 내용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화사승가대학장 해월스님 역시 “원시불교 초기불교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 약간씩 다른데, 명확한 구분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역사성.사상성의 제고를 지적했는데, 이를 염두에 뒀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 견해만 밝히는 토론의 특성상 ‘갑론을박’의 극적 재미가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기고자들의 입장이 독립적으로 게재될 뿐, 주장에 대한 반론(反論)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지 않아 단절되는 느낌이라는 것. 익명을 요구한 독자는 “학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만한 주장이나 낯선 논리를 펴는 기고자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을 실으면 잘못을 바로잡거나 더욱 풍부한 담론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은 삶 속에…신비주의 벗겨낸 건 큰 성과
‘각자 주장 여과없이 실어 주관화 우려’ 지적도
이와 함께 “논지를 펴기 위해 인용하는 경전 근거가 풍부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처럼 싹튼 공론의 장이 ‘하루장터’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요구가 많았다. 본지가 지난 2000년 10월24일 주최한 ‘간화선 대토론회’같은 심포지엄이나 좌담회를 통해 ‘깨달음과 수행’의 흐름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당부가 줄을 이었다.
‘깨달음과 수행’이 교계안팎에 던진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는 ‘깨달음’에 대한 신비적인 면을 벗어낸 점으로 평가된다. ‘깨달음은 삶 속에 존재 한다’ ‘수행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 깨달음에 관한 현학적 언어유희로만 치달으면, 불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
동국대 강사 마성스님은 “깨달으면 모르던 영어도 술술 왼다는 어처구니없는 ‘도통주의’를 반드시 떨쳐버려야 한다”면서 “깨달음은 사물과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일 뿐 꿈속의 잠꼬대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고려대 조승택 교수는 “불교의 목적은 행복추구이며, 수행은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탁마와 정성”이라고 지적, 주목 받았다.
이번 토론에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깨달음에 관한 검증장치가 성립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각각의 주장을 여과 없이 싣다 보면 깨달음이 지나치게 주관화될 여지가 있다”는 동국대 강사 차차석씨의 지적이 대표적. 특히 간화선자들의 주장이 실리지 못한 것도 아쉬움이 남는다.
“깨달음과 수행은 언어가 끊어진 곳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언어와 말을 통하지 않고는 세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언설의 세계에서 간화선의 궁극처를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도 말을 통해 법륜(法輪)을 굴렸다는 점을 상기하면, 굳이 지적이 필요 없는 부분일 것이다.
깨달음과 수행은 불교의 존재 이유다. 수행을 통해 탐욕.어리석음.성냄을 제거하고, 동시에 자리이타(自利利他)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불교는 살아있기 힘들다. ‘깨달음과 수행’ 기획토론은 이 점을 분명히 상기시켰다고 생각된다. 물론 단순히 토론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질 때 ‘깨달음과 수행’은 더욱 빛날 것이다. 지면의 연재는 끝나지만,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긴 글들이 마음속에서 계속 써지고, 생활 속에서 실천되기를 기대한다.
어떤 주장들 나왔나
‘깨달음 지상주의’경계…
‘불국토 완성’참여 주장도
‘깨달음과 수행’ 관련 기고를 본지는 33회에 걸쳐 실었다. 필자들은 한결같이 ‘불성에 대한 자각’과 ‘고통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수행은 생활 속에서 이뤄져야”되며, 깨달음을 향한 열정이 자칫 집착으로 변질돼선 곤란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은 사성제를 집중조명하며 “우리의 삶은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 등이 가합, 매순간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존재일 뿐인데 중생들은 이것을 모르고 이것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이름붙이고 거머쥐고 있기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동국대 김성철 교수도 “열반하려면 마음에 맺힌 것이 없어야 한다”며 탐.진.치 삼독심의 지멸(止滅)을 강조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 누군가에 대한 원한, 일체가 공함을 자각하지 못한 분별심이 남아있는 한 죽음 이후 다시 내생을 맞이한다”고 경고했다. 경전연구소 김재성 소장은 “깨달음은 괴로움을 완전 이해하고 그 원인인 탐진치를 제거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마성스님은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깨달음”이라며 “삶의 현장에서 실현할 수 없는 공허한 언어의 나열이나 삶과 유리된 외침은 한낱 헛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 깨달았다고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식물인간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고 분석했다.
보조사상연구원 김방룡 기획실장은 “깨달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비워가는 진행형”이라며 “깨달음은 수행 속에 존재하며, 자비를 통해 표현된다”고 주장했다. 동국대 강사 김진무씨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이지만, 그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바로 이 땅에 부처님에 의해 시설된 불법을 통해 ‘불국토의 완성’을 위해 목숨 들어 매진함에 더욱 역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 수행법에 대한 평가에선 입장이 엇갈렸다. 특히 각각 ‘직관’과 ‘분석’으로 대변되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간화선은 분별심을 차단하는 직관을 중시한다”(혜원스님)는 주장과 “위빠사나는 대상을 분리, 해체해서 무아의 성질을 보는 것”(각묵스님)이란 주장은 뚜렷한 대비를 보였다.
‘깨달음 지상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 “깨달음만을 위한 수행은 출가중심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라며 “깨달음의 주술에 사로잡혀 종교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역할마저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건국대 성태용 교수 역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으로 구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참선만 하지 말고 총체적 삶을 통해 꾸준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기했다. 동국대 윤영해 교수도 “깨달음의 사회화란 깨닫고 나서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비행의 실천을 통해 나와 세상이 함께 깨달아가는 것”이라는 주장, 눈길을 끌었다.
[출처 : 불교신문 2092호/ 12월28일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이 연재글을 접한 후 많은 것을 생각해 봅니다.
덕분에 좋은 가르침 받고 물러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