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2. 칸헤리·바쟈·베드사석굴
칸헤리의 110개 석굴은 거대한 조각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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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사석굴의 부처님> |
2002년 3월4일 오후 7시10분.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 불교유적의 ‘원천’인 인도 불교유적들을 답사하기 위해.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3월5일 새벽 2시(현지시간). 호텔이 들어가 잠깐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칸헤리(Kanheri) 석굴로 갔다. 도착하니 오전 10시. 가슴 설레게 만들었던 인도불적 취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칸헤리 석굴에서 우리가 맨 처음 본 것은 원숭이였다. 석굴 앞 넓은 공터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 가지에 수많은 원숭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크기도 각양각색이었다.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선가(禪家)에선 사람의 마음을 원숭이나 말에 빗대 ‘의마심원’(意馬心猿) - ‘뜻’은 ‘말’처럼 왔다 갔다 하고, ‘마음’은 ‘원숭이’처럼 항상 움직인다 - 으로 표현하는데,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원숭이들은 한 순간도 가만있지를 못했다.
‘깩깩’거리는 원숭이들을 보며 석굴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원후 1세기 후반(2세기)부터 7세기까지 개착된 110여개의 굴을 가진 칸헤리. 석굴 앞에 서니 갑자기 “이곳에 왜 석굴이 개착됐을까. 언제부터 조성되기 시작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학자들에 따르면 인도 석굴개착의 역사는 상당히 깊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벤자민 로울랜드 교수(1904~1972)는 〈인도미술사〉에서 “베다시대(기원전1500~800)이래 은자(隱者)나 선인(仙人)들은 거처 장소로 석굴을 많이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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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헤리석굴 전경> |
이런 전통을 이어, 데칸고원 방향으로 간 초기 불교도들도 자연스레 ‘석굴 성소(聖所)’를 만들었으리라. 그때가 기원전 1세기나 이전, 그 무렵이었다. 처음엔 독거(獨居) 수행자를 위한 석굴이 주로 만들어졌지만, 승가(僧伽)의 형성과 더불어 거대한 석굴사원들이 개착됐다. 숙달된 개착술을 자랑하기 이전의 초기 불교 석굴사원들은 대개 뭄바이에서 300km 반경 내에 위치하는데, 기존 지상건물을 그대로 모방한 형식을 취했다. 그러다 차츰 독자적 양식이 개발되고 기술이 발전하자, 찬란한 불교 석굴사원 시대가 열렸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매표소 바로 옆 석굴 앞에 다가섰다. 부처님과 보살들이 점점이 흩어져 조각돼 있다. 간단히 합장하고, 칸헤리를 대표하는 차이탸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도 불교석굴 차이탸굴(예배당) 가운데 4번째로 큰 것이며, 면적은 317평방미터에 이르는 제3굴. 기원후 180년 경 개착된, 상좌부(부파불교)와 대중부(대승불교)가 함께 사용한 유명한 석굴이다. 굴 안에 있는 몇몇 조상(彫像)들은 5세기경 조성된 것이며, 높이 7m나 되는 부처님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거대하면서도 세장(細長)한 몸매, 건강한 상체, 쭉 뻗은 두 다리, 감은 듯 뜬 듯한 눈매 등 대불(大佛)은 정말 놀라운 조각이었다. “이토록 멋진 조각을 남긴 인도불교가 왜 쇠망했을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선인·은자들의 거처로 쓰인 석굴
상념에서 벗어나 3굴을 돌아 산 위로 올라갔다. 석굴 저 멀리 아라비아 바다와 옛날 항만도시 숫파라카(지금의 소팔라) 지역이 보였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계곡 구석구석에 산재한 석굴들의 위치를 보고, 계곡으로 내려가 한 굴 한 굴 자세히 살폈다. 입구를 제외한 3면에 승방(僧房)이 개착된 굴, 중앙 홀에 우물이나 음식창고가 마련된 굴 등 다양한 형태를 자랑하는 110여개의 굴들이 저마다 찾아온 참배객을 맞이하는 듯했다. 이 모든 석굴에 수행자들이 자리 잡았을 당시 불교는 얼마나 활동적이었을까. 따가운 태양 아래서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데이트 족이나 관광객만이 찾는 굴로 변한 칸헤리. ‘불교의 인도’를 만들었던 인도 불교는 무엇 때문에 ‘인도의 미미한 불교’로 전락됐을까.
쓸쓸한 마음만 간직한 채 칸헤리를 내려와 뭄바이를 거쳐, 바자(Bhaja) 석굴(22개 현존)과 베드사(Bedsa) 석굴(12개 현존)이 있는 로나블라로 이동했다. 우리나라라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3월 초인데도 대지는 무척 뜨거웠다. 차 안에 있다 밖으로 나오면 온 몸이 금방 땀으로 젖었다. 데칸고원을 서서히 올라 로나블라에 도착한 때가 지난 3월6일 오후2시. 즉시 바쟈 석굴로 갔다. 바쟈 석굴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농촌 길이었다. 곳곳에 소들이 지나가고 있고, 소똥도 아무 곳에나 흩어져 있었다. 한적한 촌길을 지나 도착한 석굴 앞엔, 규모 큰 상점이 있는 마을이 있었다.
상점 앞에서 시작되는, 경사 45도나 되는 산길을 30분 정도 걸어 올라갔다. 산비탈 곳곳엔 연료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조중인 소똥더미들이 즐비했다. 바쟈 석굴 입구에 도착해 굴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비탈이라 그런지 석굴 앞엔 급격한 낭떠러지가 있고, 석굴과 낭떠러지 사이에 큰 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늘에 앉자마자 땀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곧바로 바쟈 석굴을 대표하는 차야타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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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쟈석굴의 차이탸굴> |
우리가 들어간 차이탸굴은 사실 전형적인 초기석굴 사원에 해당된다. 기원전 1세기 초 조성된 이 차이탸굴은 기둥들에 의해 ‘중앙부의 넓은 공간’과 ‘주변의 좁은 복도’로 구분된다. 석굴의 가장 안쪽 반원형 공간엔 예배대상인 스투파가, 암석을 깎아 만든 스투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스투파를 돌며 예배하고, 승가의 여러 의식과 집회들이 거행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조성된 것 같았다. 천장에 붙어있는 기둥들과 스투파를 만지며 “어떻게 조성했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2400년전의 석공기술 뛰어나
로울랜드 교수에 의하면 인도 석굴은 ‘건축적인 방법’이 아닌 ‘조각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석공들은 석굴이 들어설 절벽의 표면을 먼저 다듬는다. 표면에 석굴의 정면과 입구 윤곽을 그리고, 석굴 천장이 될 부분에서부터 개착한다. 실내에 비계를 세울 필요도 없다. 만약 천장과 지붕이 완성되면 다른 부분으로 작업이 이어진다. 깨어진 돌은 입구를 통해 반출되며, 기둥과 스투파 부위는 남겨진다. 기둥과 스투파가 완성되면 하나의 석굴이 마무리되는 셈. 바쟈 석굴의 차이탸굴도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성됐다.
스투파를 시계방향으로 돌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는 팔각형 기둥을 쓰다듬었다. 돌을 다듬은 석공의 기술이 얼마나 정교한지 걸리는 것 하나 없다. 기원전 1세기라면 거금 2,400여 년 전. 그때 벌써 이처럼 뛰어난 기술을 가졌단 말인가. 감탄만 나왔다. 차이탸굴을 나와 옆의 다른 석굴로 갔다. 비하라굴(스님들이 거주했던 곳)인지라 승방만 있고, 굴 앞에 우물이 있었다. 바쟈 석굴을 관리하는 인도고고학국 소속 데히바희씨(50)가 마침 물을 퍼고 있었다. 우물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길어 올린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입 속에 물을 넣어 혀로 돌려보았다. 별다른 맛은 없었다.
바쟈석굴에 갔다 온 다음날 베드사 석굴로 향했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개착된 베드사 석굴은 베드사 읍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9km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있었다. 석굴에 올라 내려다 본 마을 전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탁 트인 들판 여기저기에 집들이 흩어져 있고, 군데군데 밭에는 농부들이 소를 몰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인도 농촌 풍경은 가난에 찌들린 모습이었는데, 멀리서 본 농촌은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찬란한 유적만 남은 인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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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칸고원 석굴분포도> |
베드사 석굴의 차이탸굴에 들어갔다. 바쟈 석굴 차이탸굴과 별 차이는 없었다. 있다면 석굴 입구가 막혀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 정도였다. 중앙에 스투파가 있고, 기둥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은 거의 똑 같았다. 옆의 비하라굴에 들어가 봐도 바쟈 석굴과 다르지 않았다. 전체를 본 뒤 석굴 앞마당에 드리워진 그늘에 앉았다. 담배 피우는 관리인에게 불교에 대해 물었다. “불교는 모르며 힌두교도”라는 간단한 말이 되돌아왔다.
그늘에 앉아 마을을 보며 ‘인도불교의 현실’을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왜 불교가 쇠퇴하게 됐을까. 인도에 올 때 함께 비행기 타고 온 화두를 끄집어냈다. 칸헤리 바쟈 석굴을 돌면서도 항상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화두. 베드사에서도 타파되지 않고, 오히려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다가왔다. 인도불교 쇠망의 비밀을 푸는 날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으러 온 보람이 있을 텐데 말이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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