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론
사회가 다원화 되어 가고 산업화, 도시화 되어 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소외 되어가고
왜곡되어 가며 정신적 육체적 질환은 자꾸만 증가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교회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목회자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참된 목회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에 대해 목회와 치유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필요하겠다고
하겠다. 커뮤니케이션은 나면서부터 인간의 가치형성과 사고를 지배해왔고 타아를 통한 자아를 인식하며 하나님고의 관계를 파악하게 해주고
커뮤니케이션이 깨질 때 인산은 살 수 없게 되므로 커뮤니케이션은 치유목회와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1. 커뮤니케이션의 정의
1. 어 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라틴어의 "Communis"에서 온 말로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유기체가 지식 정보, 신념, 의견, 감정 등을 공유 또는 공통화하는 행동이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라틴어 동사는
"Communicare"로서 같이 이야기하다, 협의하다, 대답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사회 공동 목표를 시사해 주고 있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 또는 이상의 유기체(Organism)가 다른 유기체와 지식, 정보, 신념, 감정 등을 공유
또는 나누어 갖는 행위 즉 공통화라고 본다. 정장복은 여기에 설교적인 의미를 가미하여 한 인격체와 인격체 사이에서 사상(Thought),
감정(Feeling), 정보, 효과적인 사상(Idea)을 공유하는 행위로 복음전달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기독교 진리의 제요소 일체를 메시지라
부르고 그것을 어떻게 공유시키느냐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모어(William F. more)는 커뮤니케이션과 신앙행위 간의
밀접한 관계는 단순히 언어적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신앙정신에 대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보며 그리스도교적 증언이나 복음전파, 청지기직, 교육, 선교활동 등 이 모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신의
은총과 신의 재현은 신앙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목회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그 목표가 달성된다고 할 수 있다.
2.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원천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커뮤니케이션의 원천적인 모든 문제는 에덴 동상에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인간을 하나님 자신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선택하셨으며 그랬기에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은 오셔서 아담과 말씀하셨다. 언어를 주셨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의무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함으로 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파괴시켰으며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여야할 인간이 단절의 고뇌를 경험하고 사회적 관계가 황폐되며 격리되는 불행으로 고통하기 시작했고 죄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이
파괴되었다.
이에 대하여 투엘하우(Ruel L. Howe)는 최상의 인간관계는 대화의 관계이며 거기서 성령의 열매를 찾고 있다.
즉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열매요 기독교적인 생활 표적이며, 책임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사는 생활의 결실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최상의 인간관계는 최상의 인간관계는 대화의 관계이며 커뮤니케이션 회복의 관계라는
말이다.
3. 커뮤니케이션의 목적과 필요성
고이어(Robert S. Goyer)는 "커뮤니케이션이란 본질적으로
이중적이며 의도적이며 의미의공통성을 목표로 삼는다"고 했으며 루엘하우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는 그룹 사이사이에 Information과 의미가 전달되는데 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제시된 진리에 대해 책임 있게 가부간의 결단을 내리도록
돕는데 있고 생활양식을 낳게 한 생명력과 관계를 맺게 하는데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게 하는데 있다.
요약하면
커뮤니케이션이란 커뮤니케이션 자체로서는 의미가 별로 없으며 다른 목적을 가지는데 메시지가 전달되면 그것을 받아 결단을 내리고 전달자와 피전달자가
서로 만남으로 서로가 참인간이 되어 가는데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메시지의 커뮤니케이션 필요성에 관하여 정장복은 말하기를 "메시지가
전달되었으면 듣는 사람이 전하는 사람과 함께 메시지에 머물기를 요구하며 나아가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관계를 수립하여 전달자와 피전달자가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것이 전달자가 추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다"고 한다. 최창섭은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나면서부터 인간의 가치관 형성과 사고를 지배하여 왔고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타이와의 관계 속에서부터
자아가 인식되 어져 왔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관계까지도 파악하게 되었고 이
커뮤니케이션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 회를 연결하여 사회 성립의 전제가 되었다.
이 말은 만약 커뮤니케이션이 없으면 문화가 전달
될 수 없고 장가 형성될 수 없으며 생명을 연장시켜 나갈 수 없어 고아로 남게 됨으로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이 큼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를 전달자와 피전달자가 공유하는 것이며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의 목표요 필요성이다. 그런데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아니하면
메시지의 내용이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사장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커뮤니케이션의 연구와 중요성이 있다. 이것을 복음과의 관계 가운데서 생각하면
복음이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2.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라스웰(Herold
Lasswell)은 커뮤니케이션을 과정에 따라 "누가"(who says), "무엇"(what)을, "누구"(to whom)에게,
"어떤매체"(which chanel)를 통해, "어떤효과"(with what Effective)를 얻느냐?로 파악하며 쉬람(W.Shramn)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을 A가 B라는 내용을 C라는 채널을 통해 D에게 전달하여 E라는 효과를 얻는 과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요소이다. 1) 정보원(Source)- 커뮤니케이터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주체이다. 2)
기호와(Encoding)- 보통 단어의 선택을 의미한다. 3) 메시지(Message)- 커뮤니케이터가 수신자에게 목적 달성을 위해 고안한
내용과 기호의 집합으로 커뮤니케이터의 생각이 기호를 거쳐 밖으로 표출되는 상태이며 여기에서는 내용(Content), 기호(Sign),
취급법(Treatment)로 구성된다. 4) 기호(Signal)- 기호화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으로 채널을 통해 메시지를 운반한 다.
5) 미디어(Midium)- 메시지의 운반 회로를 말한다. 6) 해독화(Decoding)- 기호화의 반대 과정으로 수신자가 도달한
기호를 자신의 의 미체계 속에서 해석하는 과정이다. 7) 수신자(Recipient)- 목적지(Destination)로서 메시지를 받게
되는 표적이다. 8) 효과(Effects)- 수신자가 커뮤니케이션 자극에 대하여 나타나는 반응 전체를 의 미한다. 그러는가하면 이
과정을 "S-M-C-R-E"로 공식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리이드(Clyde Reid)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을 더욱 역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1)전달(Transmission) - 송신자가 메시지를 내놓는 단계 2)Contact - 수신 메시지와 만나는
교류점
3)반응(feed back) - 메시지의 공유화로 접촉결과가 표현된다. 4)이해(Comprehension)
- 메시지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질 때 수용하는 전달자의 메시지가 어떤 것인가 알게된다. 5)수용(Acceptance) - 이해했어도
수용자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세 가지 반 응이 있다 6)내면화(Intenalization) - 받은 메시지를 자기화 하는
과정이다. 7)실천(Action) -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는 메시지대로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메시지를 어떻게 기호화하고 어떤 매체를 통해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여 보다 많은 효과를 얻느냐가 과제이다. 내용이 좋아야 함은 물론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커뮤니케이트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맥루한(Marshal Mcluhan)은 "미디엄이 메시지이다"(Medium is
Message)로 했다. 즉 사회는 커뮤니케이션하는 내용보다 커뮤니케이트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매개체(The media)에 의해 그 양상이
형성되어 왔다는 말이다. 전달되는 과정이 효과적이지 못해 제대로 수신하지 못한다면 그 메시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어 수신자가 영접할 때에만 복음이 복음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맥루한의 말은 타당하다.
3. 기독교와
커뮤니케이션
1. 복음과 커뮤니케이션
케리그마란 복음의 선포 또는 고지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란
설교 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된 소식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는데 그리스도는 약속되었던 구원자이시며 인간 희망의 성취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약속의 복음이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능력의 복음이 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들에게 삶과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말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될 때에
자아가 인식되며 문화가 전달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 말은 매우 타당한 말이다. 또한 이 말을 복음에 도입한다면, 복음이
상호전달될 때 현장의 무리는 살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들은 죽음을 향하여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사실상 하나님 중심적인
구속의 역사는 믿는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이 말은 복음을 현장화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새 삶을 얻게 하며
영접한 자들로 치유가 일어나게 하는 목회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최창섭은 교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를 통해 신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1차적 기능이며 이것을 선교 또는 복음전파라고 한다고 했다. 케리그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계시하신다. 자기 자신을 알리는 하나님의 의지는 사랑의 주체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의 주제인 유일자라고
알리기 원하는 유일자의 의지인 것이다. 쥬어드(Juard)도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의 행복을 위해, 더욱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그에 대해
알고자 할 뿐만 아니라, 나는 그가 나를 알 수 있도록 나의 사랑을 그에게 표시한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의 표시를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며 이것이 성육신 사건으로 성육신
공명(Empathy)이라 할 수 있는데 공명이란 타인이 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대로 그 세상을 지각하며 그와 더불어 그의 세계를
나누며(share) 그의 준거기반(The Frame of Reference)속에 자기를 좌정시키려는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그 사람과 더불어 진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자기가 이해 받고 있으며 인식 받고 있다는 깊숙한 해방감을
경험하게 되는데 성육신 사건을 인식할 때 공명을 맛보게 된다. 기독교의 예배의식은 고통과 죽음속에 있는 인간과 그 삶을 나눔으로서 인간의
실존을 긍정해 주며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에 같이 참여하기 위하여 인간의 준거기반 속으로 뛰어 들어오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 사건을 로마서 1 : 2 말씀과 요한복음 1 : 14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말씀을 선포해 왔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과 소외는 더 깊어지고 괴리는 더 커짐에 따라 결국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인 인간으로
오셔서 그 아들속에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이다. 이는 로고스 곧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사렛 예수의 선교에서 역사화
되었으며 역사적인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대한 증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초점은 성육신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농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 안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의 생애와 삶, 교훈이 케리그마이며 이 케리그마를 믿는 사람에게 성육신 공명은 내면적 갈등과 소외 및 지옥과 같은 심연에 깊이
내려가 참여하심을 인식하고 진정한 공명을 통해 인정받고 있고 이해 받고 있다는, 깊고 감동적인 경험을 하게 되며 신경중적 요소가 제거된다. 믿지
않는 자에게도 케리그마가 선포되고 그것이 커뮤니케이션 되면 그에게 복음으로 역사하여 여러 가지 조건에서 자유하게 된다. 이것이 목회이다. 즉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이 목회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케리그마는 말씀을 통한 계시이든 성령님의 계시이든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특히 목회자들은 이 복음 곧 케리그마를 어떻게 선포하며 커뮤니케이션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2.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교회의 복음전파, 선교자체를 커뮤니케이션 행위로 본다면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원을 교회의 시작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복음전파, 케리그마 선교, 기독교 교육, 사도적 전통의 계승 등 모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a.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시초
최창섭은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은 4C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철학과
문화인 그리이스 문화와 철학을 몰아내고 그 대신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만든 것은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또한
그는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비조를 어거스틴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활동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이단에 대항하여 기독교 교리를 옹호할 변증자(Apologist)즉, 홍보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문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시인(poet)양성이요, 셋째는 대중 자체의 교육을 주장했다. 또한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De Doctrina Christina"를
집필했다. 이로 볼 때 어거스틴은 교회 커뮤니케이션 또는 선교이론의 비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그 이론이 현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해도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인식과 방향은 훌륭히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거스틴의 교회 커뮤니케이션 철학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선교 이전에 성직자들이 성서에서 진리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하며, 둘째는 하나님의 진리 즉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De Doctrina Christina에 나타난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시세로(Cicero)와 같이 교육과 즐거움을
주는 것과 설득(to move or pursuade)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De Doctrina Christina는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설교학(Homilectic)이라는 학문 분야가 발달했고 문예 부흥 시대에나 종교개혁 시대에 교세 유지에 큰 공헌을
했다.
b.교회와 커뮤니케이션
교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두어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전파이며 하나님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로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일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또한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해서 인간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자신들을 개방하도록 존재한다. 해머(Hamer)는 커뮤니케이션은
친교라고 한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친교의 성취와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교회는 커뮤니케이션 기관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즉 교회는 인간을
그들의 고립과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神)과 친교를 위해 설계된 커다란 "커뮤니케이션 네트
워크"(Communication net walk)이라고 할 수 있다. 루엘하우는 교회와 세상과의 대화에 관하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이 이
대화를 통해서 또 이 대화 속에서 교회와 세상에 영향을 주고 이를 심판하고 깨끗케 하신다고 하며 본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 todaudfurr은 이 신인(新人)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은
신적인 위격을 지니신 예수님 곧 하나님께서 자기 표현이신 영원한 말씀이시며 이 육화한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은 행동과 당신의 생애,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셨으며 이 경우에 있어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media)로서의 그분의 성육신화(Incarnation)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구원의 도래와 수난과 신의 영광에의 고양에
대한 기쁜 소식에 접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웨버(Robert E. webber)는 교회를 회복된 교회의 공동체로 보았다.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의 열쇠는 속죄의 교리이며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을 지배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커뮤니케이션 파괴를 연속화시키는 악의 권세를
쳐부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이 더 이상 죄의 멍에 아래 살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의 동료 신자들과의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했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볼 때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성육신 커뮤니케이션의 역사 현실 속에서 커뮤니케이터가 됨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이웃과 화해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교회에서 하는 활동(예배, 설교, 심방, 상담, 교육, 치유 등) 즉
목회활동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기관으로서의 역할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를 통해서 임재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때 예배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설교를 통해 지금도 커뮤니케이션 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영접하게 되며, 상담을 통해 타인과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 함으로 일체감을 갖고 되고, 선교를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고 고난의 하나님을 보면서 사랑과 구속을 맛볼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
4. 깨어진 커뮤니케이션
루엘하우는 "대화의 위기"에서
무너진 인간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중단된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화가 끊어지고 방치된 희생자는 죽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인간 관계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가지게 되며 이러한 관계가 깨어 지고 포기되면 인격이 인격으로서는 죽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결론이 아니다. 정 신병원을 찾아가 인간 관계의 주변에서 큰 상처를 입고 완전히 후퇴한 사람을 볼 때 확실하게 알게 된다. 깨어진 인간 관계와
인격의 죽음으로 중단된 대화의 비극 은 하나님을 잃는다는 일이며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게 된다.
즉 대화가 끊어지면 인간 관계도
끊어지고 인간의 인격도 죽게 된다는 것이며 대화가 끊기는 때에 사랑은 죽고 반감과 증오가 생긴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화는 죽음관계에서 소생할 수
잇게 하는데 이것이 대화의 기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대화의 중요성과 효력을 알 수 있으며 대화의 관계에서만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인데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이 될 때 살고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아니할 때 죽는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웨버는 커뮤니케이션의 붕괴의 원인을 창세기에서 찾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는 자기
자신과의 붕괴를 가져오며 더 나아가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를 가져오며 인간과 자연과의 붕괴를 가져오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죄의 결과는
전체 창조 질서 사이의 교제(또는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클라인벨은 인간관계의 단절은 창조주와 궁극적인 관계를
수반해 오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다른 어떤 치유 기술보다 더 효과 있는 화해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치유의 기능을 지닌 이러한 화해의 기능이 소생될
때에 목회에 대해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곧 치유 목회의 기능의 하나인 화해 목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 화해는 대화와 대화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결국 성서적으로 본다면 커뮤니케이션의 과제는 항상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인 화해의 빛
아래서 조명되어야 하며,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 파괴 작업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화해 작업도 각
개인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과 인간 사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 인간과 자기 자신의 자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깨질 때, 단절과 좌절과 영적, 육적 질병이 오는 것을 알 수 있기에 목회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하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질 때 온전케 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루어지는
목회라고 말할 수 있다.
5. 치유의 과정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1. 상담과 커뮤니케이션
클라인벨은
목회자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방문, 집단접촉, 일반 목회활동 등 정상적인 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비정규적 상담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심방중의 경청과 응답은 치유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대화를 지니도록 도와주며,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가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모든 목회 접촉을 통해 상담과 치유의 기회가 된다고 말한다. 로저스는 상담자가 재담자의 감정적인 면에 응답하면 내담자에게 잠재해 있는
감정에 만족을 주고, 그 이상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며 또 가장 효과적으로 재담자의 적응 문제를 정서적인 근저에로 인도해 나가게 된다고
했다고 했다. 또한 상담은 긴장을 일으키어 어떤 형식의 해결을 요하는 요구 내지 요구의 갈등이 있을 때 효과적이라고 한다. 즉,
피상담자가 원조를 희망하고 있고, 자진해서 상담자에게 자신을 맡기려고 하며, 기쁜 마음으로 원조를 받으려고 할 때 효과가 크다는 말이다.
그러는가 하면 치유자의 치유적인 태도는 문제를 가진 사람의 병과 알콜중독, 자살충동 증세를 가진 사람 앞에서 목사가 자기 자신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의식될 때 치유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치유적인 태도가 좀 더 충분히 발동되는 것은 이러한 심정을 뛰어넘어 "상대가 곧
나다"고 의식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치유자는 하나의 인격체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적인 접촉을 하여야 한다. 즉 기술자의 자세가 아니라
참다운 인간의 자세가 되어 인간적인 접촉을 할 때 관계가 형성되며 신뢰감이 생기어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되는데 이것이 튜니어가 말하는
인격의학이다. 이 말은 내담자와 상담자, 환자와 치유자의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때에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2. 복음과
커뮤니케이션
투르나이젠은 복음이 전달되면 회개가 오고, 회개는 사죄를 통해 인간의 삶이 구체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으며
죄의 자리에서 사죄의 말씀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데 이것이 중생이라고 했다. 터너는 복음이 구원의
선포라고 한다면 치유는 구원의 일부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육적 신체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예수는 그렇지 않고 영육 모든 면에서의 구원을 생각하셨다. 여기서 터너의 말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터너는 치유의 능력은
첫째,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신할 때 일어나며, 둘째,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이
건강하길 바라야 한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고 셋째, 예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보내셨고, 다섯째, 예수는 인간을 전인의 차원에서 보시고
치유하셨다는 것을 확신할 때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치유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가득 차서 모이게 되고 각각에게나 모두에게
분명히 치유하심이 임하리라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요약하면 내담자나 성도가 낫고자하는 간절함과 나을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과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치유를 가져오게 한다는 말이다. 곧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치유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치유 요구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응답과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치유요구의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때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로서 치유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
3. 대화와 커뮤니케이션
대화는 경험의 의미를 변화시키며, 대화를 통해 생의 정황은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된다. 참된 생명 즉 현재있는 생명은 하나의
만남이요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고통, 실망, 낙심, 충돌의 경험과 실패와 전락에서 대화를 통해 변화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믿을 수 있고 생각하도록 연설이 행해질 때 환자의 개인적 특성에 대한 설득이 이루어진다고 했으며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좀 더 완전하게 좀 더 쉽게 믿게 된다고 한다. 투루나이젠도 목회는 대화(Gesprach)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인간의
삶을 인간적이 되게 하는 위대한 수단도 바로 말(wort), 언어(sprache), 대화(sprechen)이며 말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위력이라고 말한다. 목회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답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대화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대화의 상대자 쌍방은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자들이 되며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하시며 대화의 쌍방이 자기들
나름에만 집착하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적 영적 현실에 뚫고 들어와 완성해주고 결단해 준다. 이상을 줄인다면 목회는 대화로
이루어지며 대화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목회대화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말씀을 듣는 자로
하여금 회개케 하며 그 말씀이 구체적인 삶속에 뿌리박게 함으로 전에는 방황했으나 이제는 정착하며, 전에는 매어 있었으나 이제는 해방을 받고,
전에는 불안 속을 헤매었으나 이제는 위로를 받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는 좋은 커뮤니케이션의 관계 하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4. 설교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치유
필립브룩스(Phillip Brooks)는 1877년 예일대학 설교학
강의에서 "설교란 한사람(설교자)에 의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이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설교자와 커뮤니케이션의
상관관계를 뚜렷이 밝히고 있다. 정장복은 이제까지 설교자들이 커뮤니케이션의 무관심 속에 있었으며 일방적으로 외치는 데에만 급급했고 두 인격체
사이에 발생되는 대화적인 관계의 설교 이해는 외면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설교는 곤경의 결정적 단계에 이르고 젊은이들에게 외면 당해
왔다고 했다. 즉 메시지가 원하는 만큼 전달되지 않았고 원하는 만큼의 효과도 가져오지 못하며 허공을 치는 위치에 머물러 왔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예증이라도 하듯이 클라이드 리이드는 "나는 우리 목사님이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뭔가 배웠으면 좋겠어 목사님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말들만
사용하는 것 같아서 이해할 수 없단 말이나, 지겨워, 잠자기 딱 알맞아" 하는 예문을 들고 있으며 나웬(Henri J. M. Nouwen)도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 설교후에 신도에게 물어 봤을 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졸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챠티어(Myron R. Chartier)는 하나님께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최종 행동으로서 성육신을 취하셨기에 그것이 바로 가장 진정한 설교를
위한 신학적 모형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영원의 말씀을 그 시대에 상황에 맞게 인류에게 심어주심으로 하나님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해
보이셨으며 설교는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설교가 단지 설교자의 기교에 의해서만 감화와 감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역동적 사역 아래서 이룩되어진다. 이것이 연설과 설교의 다른 점이다. 그렇다고 설교자와 회중의 노력이 없이 은혜만을 촉구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교의 완성이란 준비한 설교가 회중의 가슴에 전달되고 거기서 불이 붙어 타오를 때 한편의 설교가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설교자와 회중이 설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설교되어지고 받아들여져 변화가 일어나며 치유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젖을 때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설교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선포하고(preaching), 잘 해석하며(Interpretation), 잘
적용하여(application),청중으로 영접하고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나 치유도
커뮤니케이션이 될 때에 이루어지며 그러한 면에서 목회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모든 설교는 번잡한 마음의 문제점, 괴로워하는 양심의 고통, 혼탁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으며 이와 같이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거기에 적은 빚이라도 던져주며 어떤 개인을 도와서 실제적으로 그것을 통해 자기의
잘못을 찾게 해주는 것이 설교이며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방법만큼 관심을 끄는 것은 없을 것이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에게 현장화 시키는데 설교자와 성도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변화와 치유에 목표를 둔 설교가 가치를 잃게 된다. 물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지만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못한 설교를 통해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는
힘이 든다. 그래서 바우만(Daniel Baumann)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 생활에 관여하고 계심을 느끼게 될 때 이것은 개인적인
기쁨을 동반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행복과 하나님의 뜻이 같은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spiritual
presence)은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없이 느낄 수 없으며 커뮤니케이션이 있을 때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담스는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이 사람들을 결속시키며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 간의 문제해결을 한다고 하며 이것은 곧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는가 하면 커뮤니케이션의 규칙과 모든 정의가 성경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뢰도가 좁혀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격차도 좁혀진다. 그런데 이 격차를 좁히기 위해 곧 커뮤니케이션(하나님과 인간)의 부활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을 해결하셨다. 이 말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이요 바른 관계를 맺어 그 안에서 화평을 누리게 하시고자 하심이다. 즉 목회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과와 같다. 곧 커뮤니케이션은 구원활동을 전제로 한 과정이다.
5.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소외된 인간과
커뮤니케이션 하셨고, 또 커뮤니케이션하고 계신다는 말로 바꿀 수 있으며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지속적인 행동이며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웨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커뮤니케이션하신 형태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해 말씀하셨고, 성서 안에서 말씀하셨으며, 커뮤니케이션이 보전되고 전수되는 현장으로 교회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 자신을 능동적으로 알리시는 전달 수단이며 성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기록한 것으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며,
교회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현장이라는 말이다. 또한 웨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역사를 통해서 소통하신다는 것인데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구속의 메시지이며 성서의 중요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죄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아 생명에 들어가는가 말해주며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그 사실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며, 역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과 자비를 배우게 되고 우리의 일상적인 곧 고난, 압제, 굶주림, 욕망의 한가운데서 고통
당하는 자에게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둘째는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신다고 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직접
또는 간접적인 언어 사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언어는 복음 유포의 열쇠이며 인간을 위한 전달 수단이다. 니다(Eugen Nida)는 언어로서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해도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한다. 셋째는 환상을 통해
소통하신다고 한다. 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성서에는 많은 긍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민수기 12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구분 짓고 있다. 칼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의 3중적 형태를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of God), 선포된 말씀(proclaimed word of God), 계시된 말씀(Revealed
word of God)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성서)으로,
선포된 말씀(설교)으로, 계시된 말씀(예수 그리스도)으로 우리에게 커뮤니케이션 하셨다는 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소외된 인간 죄로 인해 진노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커뮤니케이션 하시길 원하셨고 같이 거하길 희망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역사 안에서, 말씀을 통해, 환상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셨고 결국은 계시된 말씀(예수 그리스도)으로 우리에게
커뮤니케이션 하셨다. 이 하나님 기록된 말씀으로 계시된 말씀으로 커뮤니케이션 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선포하여 죄와 운명과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치유받도록 해야 한다.
결 론
목회란 양을 돌보는 일(Pastoral Care)로서
슬픔, 소외, 고독 등의 어려움 가운데 잇는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 주어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며 이러한 일을 전담하는
사람들 목자(목사)라고 한다. 이 목자의 원형은 요한 복음에 기록 된대로 예수님이시며 예수의 생애와 교훈과 행적을 닮아갈 때 참된 목자라고 할
수 있다. 목회란 넒은 의미로서는 양을 돌보기 위해 목사가 행하는 모든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힐트너는 목회의 기능을
치유(Healing), 화해(Reconcilling), 인도(Guiding), 지탱(Sustaining)이라고 했는데 한말로 줄인다면 이는
치유라고 할 수 있다. 목회가 소외되고, 갈등과 열등의식, 신체적, 영적, 정신적 결핍자들 파손되고 왜곡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이것은
치유행위이며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목회의 목표는 치유라고 할 수 있다. 치유란 단지 육체적인 회복이나 영적인 치료만을 의미하지 않고
전인적인 면에서 왜곡, 침해, 고통 당하는데서 회복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상태로까지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교육을 통해서나
훈련(descipline)을 통해 방향을 잡고 향상되어 가는 것도 포함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목회자는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치유"하면
신유의 은사를 받는 사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데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 전도, 선교, 설교, 심방, 상담 등도 치유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구주로 영접하고 아름다운 구속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치유된 자의 삶이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해야 한다. 치유의 과정인 교육, 전도, 설교, 심방, 상담, 훈련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복음이 되어 그 사람 안에서 역사 하려면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복음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만약
복음이 커뮤니케이션 되지 못해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복음은 아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묻혀있는 보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카톨릭에서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데 개신교에서는
연구가 부족한 듯하다. 세상은 매스 미디어의 발달이 눈부신데 구태의연한 자세에 머무를 때 복음이 외면 당할 염려까지 있다고 본다. 물론 갈등과
감화가 인위적인 것만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지만, 성령의 역사라고 해도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보는 자에게만 성령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다. "목회란 치유행위이며 치유목회는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야ㅣ곱ㅣ의ㅣ우ㅣ물ㅣ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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