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10월말부터 다음해 1월까지 나는 브라질에 있는 한 한인교회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브라질은 여름이었다.) 성가대 세미나는 제대로 문화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교인들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던 것 같았다. 연일 실시되는 성가대 세미나엔 전 대원들이 일터에서 달려와 참석했고 그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어느 주일날 아침, 성가대 연습을 시키고 있는데 젊고 아름다운 자매가 와서는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긴 머리에 늘씬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국의 어느 미녀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배꼽티에 미니스커트, 맨발에 샌들을 신고 엄지발가락에는 빨간 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러고 성가대에 앉으려고 하나?" 나는 그녀의 옷매무새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지만 특히 그녀의 발에 시선을 멈추고 생각했다. 다른 곳은 가운으로 가릴 수 있지만 발은... 그러나 그녀는 내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성가대 가운을 입고는 성가대 석에 당당히 그것도 맨 앞자리에 앉았다.
예배 후 연습시간에 나는 예배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가대원들은 최대한 단정한 몸가짐을 갖추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모두 양말을 착용하고 절대 맨발에 샌들차림으로 오지 마십시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다음 주에도 그 아름다운 자매는 미끈하고 색시한 발가락을 시위하듯 드러내고 성가대 석에 올랐다. 내심 나의 불쾌감은 컸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 정중히 부탁을 했다. "샌들에 맨발...." 모두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네" 대답만 했다. 하루는 어느 집사님 댁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그 집사님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이곳 브라질에서는 샌들에 양말을 신지 않습니다. 그것이 투명 스타킹이라고 해도요. 샌들을 신을 때는 맨 엄지발가락을 내놓는 것이 이들의 예의입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엄지발가락이 없는 스타킹도 있다면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곳의 문화와 생활 습관을 알지 못한 나의 오해와 경솔함이 지적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자매. 그녀의 성가대 참여는 그녀로서는 아주 건설적인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발과 미니스커트 배꼽티만 트집잡고 있었으니... 물론 겉으로는 웃음을 띄고 한 말들이었지만 어느새 내 마음이 새어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의 한국적 보수주의 경향과 브라질의 보편적인 문화가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지니고 있는 것, 내가 교육받아온 것만이 절대 적이며 전부가 아니었다. 그곳의 문화 속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정당한 것이었고 또한 나름대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것과 내 것 중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나는 진정과 신령한 예배를 위해서는 단정한 몸가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정한 몸가짐이란 정숙하고 깨끗함을 기본으로 정성 드린 '가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그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것으로 정숙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것을 택하도록, 내 것만을 강요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다음 주부터 그 아름다운 자매는 성가대에 참석하지 않았다.
벌써 몇 해가 지난 일이지만 그 일이 가끔 생각나면 나의 좁은 소견과 무지를 질책하며 씁쓸히 웃는다. 그러나 분명 그 일은 내게 큰 교훈이 되었던 것 같다. 이제는 새로운 일과 새로운 장소에 직면하게 되면 먼저는 그곳의 분위기와 질서와 문화를 살피고자 노력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