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20일 (일) 맑고 푸름
아침 일찍 7시 좀 넘어 잠실역에 산우들이 모여든다. 모인 이들은 모두가 상기된 얼굴이다.
산행이라지만 상산회 15주년 기념으로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기 때문이다.
이미 가본 사람도 몇 있건만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기쁜 인사들을 주고 받는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울릉도/독도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다.
(출발전)
자랑스러운 이들을 나열하면
강병서, 김상희, 김재용, 김한주, 김호경, 박세훈, 엄형섭, 이성열, 이종기, 이종원, 정태성, 최해관
해서 12명의 사나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해야 옳다고 하겠다.
그는 김재윤군이다. 갑작스러운 일로 불참하게 되어, 미안함을 전하려 외산주 한병을 들고 몸소 버스에 내방해주어 고맙기 그지 없었다.
관광버스는 거의 만석으로 묵호항을 향해 예정대로 7시반에 출발했다.
모두들 버스 운전수의 세련되지 못하고 퉁명스러운 안내를 들으며 묵묵히 앞을 응시한다.
초반에 힘뻬지 않으려는지 조용하게 아침 잠을 연장하며 졸고 있다. 아침은 묵호에 가서 먹는단다.
아침 준다는 말에 식사 거르고 나온 사람들도 별 수 없이 3시간을 참는 수 밖에...
영동고속도로 중간 휴게실에 들러 간단히 요기하고 묵호에 10시40분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그런대로 잘 차려진 늦은 아침을 먹었다.
식당 안을 둘러보니 “千客萬來”의 휘호가 눈에 들어온다.
천명이 각기 열번씩 오면 만번이 되는 건지 아니면 각각 만번씩 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고객만족경영의 중요한 성과지표이다.
(묵호항)
항구에 도착해서 12시30분 배를 기다린다. 씨플라우어2가 우리를 태우고 떠난다.
배삯은 일인당 울릉도까지 50,500원이다. 363톤짜리 배에 정원이 376명이면 한명이 한 톤씩
깔고 앉아 가는 셈이다.
(선상에서)
배는 망망한 검푸른 동해를 가르면 나아간다. 곧이어 양주가 우리에게 인사하니,
영혼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자비로운 지공도사 엄원사는 앞에 앉아있는 4명의 “북한산” 아주머니들에게 수작을 건다.
양주 한잔으로 그들과 말문을 트고, 이것은 두고두고 안주꺼리가 되는 기회가 되었다.
북한산에 대한 설명은 다음날로 미룬다.
드디어 배가 도동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4시 5분이다. 말과 전설의 울릉도에 도착한 것이다.
갈매기가 반기며 한 쪽의 낮은 절벽은 우리를 환영하는 기색이다.
하선해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도동소공원이 나오는데, 발디딜 틈 조차도 없어 보인다.
거의 물반 사람반으로 항구가 북적인다. 오징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숙소는 나중에 가기로 하고 우선 섬 오른 쪽을 택해 관광하기로 하였다.
조그만 봉고에 북한산 여자들과 두 쌍의 부부, 우리랑 해서 모두 20명이 탑승했다.
김기사의 입담은 우리의 피로를 씻어준다. 몸집이 제법 되어 보이고 나이도 있음직 한데,
본인 주장은 모든 이쁜 아가씨는 자기의 적이라고 떠벌이면서 이것저것 설명한다.
교육이 잘 된 것 같기도 본인의 노력이기도 한 것 같다.
(도착후 나들이)
(울릉도 해상풍경과 봉래폭포,도동항)
울릉도의 나이는 250만년이고 크기는 직경 10Km 정도의 원판이다. 가운데 큰 산이 있으니
평지는 거의 없다.
평평한 곳은 바다와 인공구조물 뿐이다. 서 있으면 양발은 수평이 안 맞는다.
울릉도에는 3無라고 하여 도둑, 공해, 뱀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꽃뱀은 조심하란다.
인구도 점차 늘고 있고 현재 만명정도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교회가 3, 40개 된다고 하니...
참고로 울릉도에서 토종인지 외지산인지 여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종아리 굵기를 보면 안다고 한다.
섬 저편의 저동을 간단히 지나 관모봉에 올랐다.
내려다 보이는 바다 저편에 죽도가 있어 아직 혼인 못한 여자를 부르는 아저씨가 있다고 한다.
봉래폭포를 보고 다시 저동의 촛대바위와 거대한 펭귄에 인사하고 나니 하루가 저문다.
그러나 오늘 시작은 이제부터이다.
해가 넘어가면서 갑자기 생기를 찾은 회장단은 울릉회센타에 자리를 편다.
곧이어 서울에 있는 윤대희군의 소개로 울릉도/독도 경비단장과 식사하는 영광을
우리 모두가 갖게 되었다.
현직 경찰로서 현지 상황을 친절하게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또한 그의 저서 “독도일기” 한권을 선물로 가져왔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독도에 관하여 매일 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고 이것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입증하는 귀한 자료라고 하여 우리 모두가 그의 수고를 축하해 주었다.
(즐거운 저녁시간)
늦은 밤 명가펜션은 고요하였다. 간단히 여장을 풀고 다시 모였다.
일요일 저녁이라 사람들도 별반 보이지 않고 우리끼리 편하게 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 대목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람은 김재용군이다. 그는 신참내기로 이제 자리에 잘도 어울린다.
처음 참석한 것뿐만 아니라, 외산주를 무려 4병이나 육지에서 반입했다는 사실이다.
김호경군의 “양주나 한병” 주문을 “양주 담당”으로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하나, 앞으로도 계속 모임을
위해 잘 못 알아듣기를 바랄 뿐이다.
암튼 즐거운 하루였고 내일을 약속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5월 21일 (월) 더 맑고 푸름
숙소의 이른 아침은 아름다웠다. 새소리와 함께 아침 해가 오르면서 가까이 바다가 보인다.
적절히 가까운 산에 초록이 한창이고, 바람까지 살랑인다.
어제 밤에는 경치를 볼 수 없었으나 밤사이에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은 것 같았다.
오늘은 필히 독도에 가야 한다.
울릉도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낮에 갈 수 있을런지는 그 때 가봐야 안다고 했다.
(울릉의 아침)
아침식사를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나리분지로 향하였다. 사동,
그러니까 도동의 왼편으로 섬을 일주하는 셈이다.
오늘 기사는 정기사다. 남자다. 북한산 여자들은 제법 낯이 익어서인지 앞좌석에 앉아서 기사와
큰 소리로 말을 주고 받는다.
(오전 나들이)
봉고를 지배하겠다는 듯이. 정기사의 입심도 보통이 아니다. 적절한 예의를 갖추면서 손님을 대한다.
많은 바위들을 두꺼비, 코끼리 같은 동물에 비유해주고, 안되면 거시기에 빗대어 설명하고,
이장희가 사는 평리 마을이라면서 손가락으로 가르쳐주고 지나간다.
예림원에서 울릉도 수목을 감상하고, 나리분지에 들어섰다.
너른 분지에 이제는 사람들이 그리 많이 살지는 않지만, 취락이 되는 분지는 세계에서 이곳 뿐이란다.
나리분지에서 명이, 삼, 취, 고비, 부지깽이 등해서 나물 비빔밥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막걸리 한잔이 제격이다. 독도 배가 12시에 뜬단다. 서둘러 도동으로 가야한다.
(점심)
돌아오는 길은 정기사의 입담이 빛을 발한다. 여자를 산에 비유한다.
20대 금강산, 잘못 올라갔다가는 총맞는다. 30대 설악산, 사시사철 다 좋다. 40대 북한산,
이놈 저놈 다 올라간다.
50대 남산, 가까이 있으나 안 올라간다. 60대 동산, 산같지 않아서...
그러자 예의 앞좌석 여자들이 “우리는 북한산이네요” 라고 떠든다.
묘한 뉴앙스이다.
이후 이들은 북한산 여자로 명명되었고, 그렇게 지낸 것 같았다.
(오후 나들이)
배가 출항한다. 약간의 비장함을 갖고 떠난다. 여차하면 결전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12시 떠난 배는 독도에 2시5분에 도착했다. 요금은 왕복 40,500원이다.
이곳에 와도 파도가 심하면 접안을 할 수 없다고 한다.
한방에 접안을 하고 하선하니, 드디어 독도를 내발로 밟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역사적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여기는 독도)
한쪽 편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독도는 우리땅”의 선언식을 갖기도 한다.
독도는 생각보다는 아름답고, 생각보다는 넓게 보인다.
동섬과 서섬의 어울림은 우리를 편안하게 맞이해준다.
그러나 배가 고동을 울린다. 이젠 가야 한단다.
시계를 보니 2시35분, 그러니깐 30분도 채 못있고 떠나게 되었다.
독도를 지키는 이들에게 건강과 안녕을 빌어 주었다.
작년 한해 80여회의 일본 순시선 출몰에 강하게 지켜 왔고,
올해도 사수해주기를...
배는 숙제를 마치고 당당히 돌아섰다. 바다는 조용하고 잔물결만 일렁인다.
오후 햇빛은 사막의 모래 파도에서 처럼 물위에서 반짝인다. 한낮을 지난 오후의 바다는 평온하다.
울릉도로 다시 돌아오니 갑자기 속세에 온 느낌이다. 또 다시 물 반 사람 반이다.
오른쪽 해안 도로를 산책하였다.
(저녁무렵 나들이)
한 시간 여의 산책길은 바다와 직접 면한 길이어서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길이다.
제주 올레길보다 더 나아 보인다. 저녁 식사는 암소한마리 집이다.
(저녁)
이성렬군의 옛 직장 동료들이 예약해 주고, 그리고 울릉도 소금 선물까지 가지고 왔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겠는가? 한잔씩 기울이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랜다.
모두가 건강해 보이고 즐겁다.
숙소에 다시 오니 저으기 맘이 놓인다. 잠들기 전에 약간의 음주가 더 필요하렷다.
다들 모여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눈다.
최해관군이 우리 남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일갈한다.
“왜 이 나이가 되어서 집에서 꼬리를 내리는가? 대한민국 남자는 다 어디 갔나?
집에서는 내 앞에서 금토이다.”
토다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다.
다들 최해관군을 보고 부러워하는 눈치이고, 의지 박약함이 밤이라서 들키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잘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성인봉에 올라가야 한다.
5월 22일 (화) 더 이상 맑고 푸르기 어려움
이른 아침, 식사가 잘 차려져 있다.
손님이 숙소에 모두 들어찼다고 해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너른 마당에 뷔페 식으로 식사가
마련되었다.
(아침)
이렇게 멋진 곳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니, 감사한 일이다.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마련해준 차가 안평전이란 곳에 우리를 데려다 준다.
시간은 7시 반이 채 안되었고, 성인봉(해발 984)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성인봉을 향하여)
초장에는 가파른 듯하지만 수목이 울창하고 산이 가깝고 아기자기하다. 곧 이어 평탄한 산길을 걷는다.
산죽이 펼쳐지고 마가목 군락지가 보인다. 햇빛이 나뭇잎으로 투과되어 안온하게 보인다.
늘 그렇듯이 박세훈군은 거북이 등에 타고 맨 뒤에서 천천히 오른다.
어찌 된 일인지 신참내기 김재용군이 그와 함께 안보이고, 맨 앞에서 내달렸다.
결국 일착으로 성인봉에 도달했다.
성인봉에 모두 오르니 만감이 교차했다.
기분은 좋았으나 정상은 볼품 없이 협소헀다. 인생의 정상이란 것도 이렇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성인봉)
(하산길)
(울릉의 숲 그리고 꽃)
휴식 시간에 박세훈군과 김재용군의 불일치에 대한 복기가 이루어졌다.
전날 밤 박은 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걱정말고 내옆에서 천천히 가자고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김이 박의 페이스를 맞추어 보고 나니 너무 늦어서 그냥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배꼽 잡고, 한 줄기 배신감(?)이 박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감을 보았다.
그리고 요사이 공자 말씀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최해관군의 일침이 우리를 교육시킨다.
言顧行 行顧言.
(끝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여유)
점심 먹고 묵호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기 전에 약간의 시간을 마련하여 홍삼을 먹으러 용궁으로 갔다.
붉은 해삼 맛이 소주와 함께 어울리고 이제는 정리 시간을 갖는다. 한 친구가 떠든다.
어느 노승이 인생 마감 직전에 있었다.
제자들이 누워있는 스승 옆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한 제자가 케익 사러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후 저자거리에서 케익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스승님이 평소 좋아 하시던 거 한 조각 드시지요.” “그래 고맙다.”
한 조각을 맛있게 들자,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들에게 한 말씀해 주세요” 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스승 왈, “케익 이즈 딜리셔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지금 여기에서 케익 말고는 다른 말이 필요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건배, 소주 이즈 딜리셔스.
잠시 후 오후 4시배는 우리를 7시 넘어 묵호에 데려다 줄 것이고,
사람들은 밤 12시정도에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리라.
이번 울릉도/독도 산행은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고 상산회의 일획을 긋는 귀한 행사였다.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만든 회장단의 노력 덕분에 안정된 일정으로 시종 우애 넘치는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완벽한 날씨를 허락하신 하늘에 감사하고,
회장단 수고와 함께 우리 모두의 즐거움을 나눈 귀한 이박삼일이었다.
편집자 주 : 함께 동행을 못해 글과 사진이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 작업시간 두시간이 지나 끝이 나는데 허리병 도졌다. )
2 0 1 2 . 5 . 3 0 .
글쓴이 : 강 병 서
박 사 : 김 호 경
편 집 : 김 승 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