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사는 조선 세조때 사육신이라 일컫는 박팽년, 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등 六臣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 배향되어 오다가 선생의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어 놀라 다섯분을 함께 향사를 지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다.
하빈사는 1694년(숙종20)에 '낙빈(洛濱)' 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1866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강당건물만 중건되었다. 1974년에는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마을의 옛 종가터 뒷산에 정면 5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분의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1981년에 외삼문, 숭절당, 관리사, 담장등을 갖추었다. 사당 주위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태고정(보물 제 554호)이 있다. 출처 달성군 홈페이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었다. 출처 문화유산.
이 곳에는 본래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위패를 봉안한 하빈사(河濱祠)가 있어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공의 현손(玄孫)인 박계창(朴繼昌)이 사육신 여섯 분이 함께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깨달은 바가 있어 다섯 분의 신위를 더 설치해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묘(別廟)와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는데, 3년 후인 1694년(숙종 20)에 유생들의 소청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1866년(고종 3)에는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나, 1924년 문중에서 원래 터보다 위쪽인 현 위치에 강당 건물만 중건하였는데, 그후로도 사당을 세우지 못해 서원이라기보다는 문중의 재사(齋舍)와 유사한 모습이 되었다. 1974년에는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의 구 종가(宗家)터 뒷산에 육신사(六臣祠)가 건립되면서 그곳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고 매년 춘추절에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토기와집으로 1982년에 복원한 것이다. 출처 달성군 홈페이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출처 문화유산
첫댓글 흔적 남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