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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김충기목사/기다리는 은혜 (합 2:1-3)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답답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그나마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그 시간을 알면 좀 낫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대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3절)고 했습니다.
1. 조급하지 말자.
사람이 갑작스런 일을 만난다든지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발생할 때 조급해집니다. 너무 다급하면 기도도 안됩니다만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조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새벽기도는 물론이요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합니다. 사실 기도는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조급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교통사고도 조급한 마음을 가질 때 잘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안정을 찾고 침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제자들이 조급해 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했습니다. 3, 4절을 보면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고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6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베들레헴은 물론이요 온 유대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마 2 : 1-12). 태어날 때부터 소동이 일어났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더 큰 소동이 일어날 수 있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소동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30년 동안 때를 기다리며 묻혀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세 명의 제자를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께서 아주 밝은 모습으로 변형되셨고, 말로만 듣던 엘리야와 모세를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내려갈 생각은 하지 않고 집을 짓고 살자고 예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있으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 : 7)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내려오면서 생각합니다. "산 아래서 본 예수님과 산 위에 본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구나!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보았지.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빨리 나타내셨으면 좋겠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성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나타낼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조급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자기 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행 1 : 6). 그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바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 마디로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조급했습니다.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여인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모셔 오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 그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6절).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조급하게 기다립니다. 그런데 오시지 않습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찾아오셨습니다. 조급하게 기다릴 때는 오시지 않고 이제 죽어 장사된 지 나흘이나 되어, 오셔도 별의미가 없는 때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예수님의 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긴 대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절)고 하신 것을 이루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합니다.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다가도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하여 쉽게 포기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안나 선지자는 결혼한 지 8년 만에 과부가 되었습니다(눅 2 : 36). 팔십사 년을 메시야를 기다리며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팔십사 년을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누가복음 2 : 37을 봅시다. "과부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 안나는 주야로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루를 지내면 하루가 금방 갑니다. 또한 기도하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고 불안할수록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아도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때에 정확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더 이상 조급해 하지 맙시다.
2. 참고 기다리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참고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1 : 21에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왜 이제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자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오셨으니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참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참을 수 있게 하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아무리 분하고 억울해도 기도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게 합니다. 시편 37 : 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7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하십니다(3절). 또한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하시고(4절),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하십니다(5절). 그리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고 기다리지 못함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지 못하고 조급함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그만 문제도 조급하게 말하므로 더 크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참고 기다렸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참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때를 정하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끌어당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기도의 응답은 적당한 때에 주신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적당한 때에, 필요한 때에 응답하십니다. 내 자신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필요한 시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조급하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적당하고 필요한 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때가 바로 적당한 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당한 때가 언제입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의 때를 정해 놓고 예수님이 와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나사로가 죽어가는 것만 봅니다. 이때가 지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시간, 자기들의 상황, 자기들의 문제만 바라보았지 예수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된 후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시간이 따로 있습니다. 받는 자의 입장에서의 때는 지금이지만 주는 자의 입장에서의 때는 지금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렇듯 언제나 내 때와 하나님의 때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때를 하나님의 때로 착각하지 맙시다. 우리가 이것을 착각할 때 기다리지 못하고 오히려 조급하고 초조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쓰러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가 조금만 도와 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와 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능성도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의 때일 수 있습니다. 이때가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때인 것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요한복음 11 : 39, "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시간은 '나는 틀렸다', '나는 소망이 없다', '나는 필요없다'고 하는 그 순간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4 : 35 이하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배 고물에서 곤히 주무셨습니다. 그때 큰 광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다의 생리를 잘 아는 제자들이 열심히 노를 젓고 물을 퍼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실 차례라는 겁니다. 이제 주님의 시간입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보고는 안될 대에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옵니다. 세상에 한 가닥의 희망이 있어도 주님께 의뢰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면서 주님보고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거미줄 만한 소망까지 끊어졌을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때요 하나님의 시간인 것입니다. 욥도 세상에 대하여 한 가닥의 소망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욥기 17 : 1에 "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 되었구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할 순간에 하나님께서 배로 더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상황,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나아갈 수도 없는 그 곳. 바로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임을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왜 그렇게 기도를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세상은 조급해졌습니다. 가정을 보아도, 자식을 보아도, 직장과 사업을 보아도 조급해졌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미리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쉽게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말고 하나님의 때까지 계속해서 인내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기다리는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