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1리
○ 버제이, 버지이, 법전
옛날 이곳에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큰 밭이 있었다. 그 밭에 마을이 생겼다고해서 법전이라 하였다. 법전에는 진주강씨가 많이 살고 있는 집성촌 마을이다. 버전이라는 명칭도 있는데 법전리에서 3백 수십년간 세거하는 진주강씨를 버전이 강씨라하여 버전이라고도 한다. 법전리에는 법전면의 중심소재지로서 봉화읍과 소천 현동을 연결하는 국도 36번이 통과하며 폭 5.6m의 하천이 소재지의 남향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행정기관, 학교 등이 집중된 곳이다.
? 법흥사 : 철거연대는 알수 없으나 지금에도 절의 흔적인 고기와장과 옹달샘물이 있어 절터였음을 알수 있으며 지금은 구전으로 남아 있다.
○ 성잠, 성재미
유래는 알수 없으나 잠은 강흡이라는 분이 34세때 병자호란의 굴욕을 겪자 부모와 16세되는 동생을 동반하여 춘양으로 은둔했다가 이 지역에 세거의 터를 잡았다고 한다.
? 이오당 : 1985년 8월 5일 문화재자료 제156호로 지정됨. 병자호란시 세마부사이던 강흡이 대청이 명을 빼앗았음에 명을 섬기던 신하가 어찌 청을 섬길 수 있느냐하여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자락인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 이 정자를 지었다하며 정자 이름은 락오천 종오년했다는 데서 이오당이라 한다.
? 뇌풍정 : 1992년 4월 28일 전통건조물 제21호로 지정되었으며 일제 강재항과 설죽 당 강재숙 형제의 유덕을 당모하기 위하여 1907년에 건립하였다.
○ 용동, 밀김이
법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에는 산세가 용혈이라는 구멍이 있어서 밑구무라고 한 것이 밀김으로 변천하여 불리어 오다가 해방을 지나면서 용동이란 지명으로 불리어 지고 있으며, 또는 마을 앞산 지형이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동이라고도 한다.
? 장선나들 : 용동마을 북향으로 들어서면서 우측부근에 춘양장과 봉성장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장사꾼들이 넘나든다하여 이 지명이 유래되고 있으며 이지역에 무치역이라는 주막도 있엇다고 전한다.
? 절골 : 오래전에 큰 절과 작은 절이 있었다하여 불리어지게된 지명으로 지금은 절의 흔적은 없으나 그 자리에 중이 죽었다는 큰 묘소라 있다.
○ 음지말, 음지마을, 순흥법전
법전면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법전리 가운데 폭이 5.6m쯤되는 조그만 개울을 두고 조선시대에 개울의 오른쪽은 순흥땅이었고 왼쪽은 안동땅으로 경계를 경계를 갈라 이지명을 순흥법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음지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역에는 잠은 강흡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대과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으며 후손 류하 강태중은 1858년 철종9년에 법천 강윤과 법천의 두 동생인 첨지 중추부사 강완과 참봉 강한 3형제분의 유덕을 기려 제실을 건립하고 추사 김정희가 쓴 경체정의 현액을 걸어 지금도 법전리 137번지에 남아있다.
? 경채정 : 1994년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298호로 지정
○ 서명이, 서망이, 서망
조선시대 임금이 행차하다가 이곳의 종사형편을 보고 매우 걱정했다고 하며, 이곳에 모내기만 하면 전국이 풍년인줄 알고 안심했다고 한다. 이곳에 백성들이 성은에 감격하여 서쪽에 있는 대궐을 바라본다고 하여 서망이하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소형기계관정개발로 농수문제는 전혀 없으며 본마을 앞에 영동선을 연결하는 법전역이 있어 역직원들을 위한 역관사 2동에 4가구가 살수 있도록 건물이 있으며 지금은 1가구가 살고 있다.
법전2리
○ 모랫골
산이 헐벗고 모래가 많아서 유래된 지명이며, 지금은 조림으로모래산이 별로 없고 산에는 나무가 많은 편이다. 이 지경은 한마을이 5리정도의 튼골을 이루고 있어 아랫모래골, 윗모래골로 부르고 있으며 모랫골 입구에 서낭당이 2개 있는데 마을입구의 북향으로 오른편에 있는 당은 일반적인 당이고, 왼편에 있는 당은 삼신당으로 매년 음력 정월 14일밤이면 풍년농산의 기원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동리에서 유사를 정하여 당제를 올리고 있다.
? 황새마을 : 산의 지형이 황새의 목같이 생겼으며 옛날에는 황새가 날아와서 황새망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황새를 보기가 힘들다.
? 매내말골 : 모래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지명의 유래는 알수 없으나 현재 1가구가 살고 있다.
? 꼬치골 : 모래골에 들어서면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인가는 없으나 농경지가 있어 세로의 길이 있다.
? 안석골 : 모래골에서 북쪽에 위치한 구릉지로서 농지가 많아서 농민들의 왕래가 빈번하며, 주재배 작물은 고추, 담배 등으로 현재 한 가구가 살고 있다.
○ 사랭이, 새랭이, 사령
모래골의 북향 2km 정도에 있는 마을로 주위의 산이 마사토의 산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마을이 개의 형상을 하고 있고 주위의 산 8개봉이 개의 유두룰 상징하고 있어 예부터 이마을은 8호이상이 거주하지 못한다고 하여왔으며 현재 7가구가 살고 있다. 이지역의 특산물로는 사령 뒷산이 송이가 자라기에 알맞은 형태를 갖추고 있어 매년 많은 량의 송이를 채취하고 있다.
? 사령소류지 : 모래골 지역의 홍수조절과 농지의 수리한전을 위하여 1958년 착공, 준공하여 관개면적은 19.7ha이며 유역면적은 428ha로 관리되고 있다.
? 머골 : 골이 깊고 험준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사랭이와 춘양을 연결하는 길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산림이 울창하여 다니기 어려우며 현재는 거주 가구가 없다.
○ 붓든, 북둔, 부둔
마을의 양쪽에 배틀같은 산이 잇고 가운데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유래된 동명이며 마을에 둔덕이 많아 교통이 불편한 오지부락이다. 이 마을에는 수년전부터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올렸으나 10여년부터 성황당을 철거하고 제를 올리지 않다가 근래에 들어 다시 음력정원 14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그 주위에는 수령 약 150년되는 노목 한 그루가 있으며(보호수 읍면나무 11-29-4-2호 지정) 그 이후 심겨진 배나무 1그루, 소나무 1그루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 광산골 : 일본인들이 다덕에 일진광산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노무자들이 살도록 사택을 지었던 위치로 해방이되어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페광이 되면서 지금은 형체를 찾아볼 수 없고 광산개발로 인한 흙더미가 남아있어 광산의 흔적이 있다.
? 큰골 : 붓든에서 가장 큰골이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인가는 없으나 10년전만 하여도 뽕나무가 많이 심어져 누에고치 생산으로 농가소득을 올렸다.
풍정1리
○ 갈뱅이, 갈방
산줄기에 칡꽃이 많이 핀다는 갈방산 붕턱 해발 600m지점에 있는 망르이며 풍정리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히하고 갈방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갈방이라고 하며 25가구가 살고 있다. 1940년대에 다덕광산이 번창할 때 외지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재궁골 : 갈방산 밑에 잇는 골로서 옛문중의 재사를 모시는 재궁(영양김씨)이 있었다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현재 흔적이 있으나 사람은 살지 않는다.
? 선바우골 : 유래는 알수 없고 인적이 없으며 토지만이 있다.
? 불당골 :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깊은 산골에 절이 있었다하여 불당골이라 하며 지금은 밭을 일구면서 절터 자리를 증명할 수 있는 기와장이 발견되고 있다.
? 삼바우골 : 연대는 알수 없으나 10여 농가에서 많은 대마를 재배하여 왔는데 재궁골에서 흘러나오는 갈방 본도랑 옆에서 대마를 찔 수 있는 큰 용광시설이 있었다고 하며 삼바우골이라고 불려졌다 한다.
? 화약골 :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금광개발에 필요한 화약을 보관하기 위하여 화약저장고를 지어 보관한 곳으로 화약골이라 하였다.
○ 명창골
산세가 아래 명동은 월자이고 웃명동은 일자의 형국같이 생겨서 명동 또는 명창골이하고 하며, 조선 숙종대 이시선이라는 선비가 정자를 짓고 정자앞에 연못과 큰 소마무가 있어 정자 이름을 송월제라 했으며, 명월청풍이라는 데서 명청동이라 이름이 불려졌는데 지금은 명창골이하고 한다.
? 바우재 : 법전1리 용동에서 풍정으로 넘어오는 고개에 바우가 큰 것이 있어 유래된 지명으로 지금은 맑은 물로 알려지고 있다.
? 작은 명창골 : 산세가 일자 형상으로 생겨 작은 명창골이하 한다.
? 큰 명창골 : 산세가 월자 형상으로 생겨 큰 명창골이하 한다.
○ 불미골
명창골 북쪽으로 산등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로 풀피형상으로 되어 있어 풀피야를 따서 아동 또는 불미골이하고 한다.
? 구절리 : 예전에 절이 있었다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이 절에서 불공을 드려 아들 9형제를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늘고개 : 고개가 완만하게 생겼다하여 불린 이름이다.
? 재궁골 : 남양홍시 재궁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보기 어렵다.
? 불암골 : 바위가 암자처럼 생겼다하여 유래된 것으로 아직까지 그 흔적이 있다고 한다.
? 광소골 : 일제시대에 광산활동이 활발하여 그 근처에 집이 많이 있었다하여 불린 지명이며 광산흔적이 남아있다.
○ 시드물, 풍정
460여년전 3개군(순흥땅, 안동땅, 봉화땅) 지경에 우물이 있고 우물옆에 단풍나무가 있었는데 단풍나무 풍자, 우물정자를 따서 풍정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우물뚜 껑에 풍정이라는 큰 글자가 남아있다. 또한 마을앞 냇가에 맑은 우물이 있고 우물부근에 큰 신나무가 있다고 해서 시드물 또는 풍정이하고 부르며 본래 이 마을은 안동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05년 봉화군에 편입되고 1914년 법전면에 편입되었다.
사덕정 : 이영기 선생이 선조 27년(1594년)에 낙향하여 인조19년(1641)에 건립하여 후학배양과 수련한 곳으로 1928년에 중수하였으며 1991. 9. 6 문화재자료 제249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 청두골 : 풍정리 언고개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옛 어른이 정자를 지으려다 짓지 못했던 곳이라고 한다.
? 사당골 : 바우제 밑에 있는 곳이다.
○ 사택
사택이 생기기 전까지는 단지골이라 불리어 졌으나 1935년경 일본인들이 다덕광산을 개발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사택 43동과 목욕창 1개소, 야구장 1개의 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시기의 광맥은 금, 은 등이 생산되었으며 광부 600명과 일본인 100명 정도가 광산개발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은 폐광되고 광부들은 뿔불이 흩어지고 지금은 사택에 사는 사람이 없다.
? 단지골 : 산세가 단지같이 생겨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조고개 : 기러기, 청둥오리 등의 철새들이 갈방지역에 왔다가 여름이 오기전에 북쪽으로가기위하여 잠시 쉬었다가 지나가는 고개라 하여 고개라 한다.
풍정2리
○ 돌다리, 석교
옛날 비가 많이 와서 마을앞 냇물이 불어나 마을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자 홍장군이라는 힘센 장사가 큰 돌을 혼자 들어 다리를 놓았다고해서 돌다리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마귀할매가 돌을 이고와서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1984년경 돌다리위에 시멘트 다리를 붙혀 넓히고 난 후부터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가 “동네 과부가 많이 생긴다”고 건의가 있어 시멘트다리를 다시 철거하였다.
? 삼부실 : 오래전에 삼부자가 살았다하여 삼부실로 불리어 졌으며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 노리미, 노림
산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노리미 밖노리미로 불리고 있는 마을로 1620년대에 정언섭이란 사람이 개척하여 자신의 호인 내은리라 하였으나 1700년경 잠계 강두 라는 사람이 이곳에 와 살면서 노리미라고 불렀다.
? 이여송이 깨뜨린 바위 : 풍정2리 노림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막힌 조그마한 마을이어서 옛날에는 피난처로 유명했다하는데 이 망르이 정씨일가가 자리를 잡게된 동기는 이조 때 방원의 난에 의하여 삼봉 정도전이 피살되자, 숨을 곳을 찾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했던 곳이라 한다. 언제인가 사람들이 정자를 짓고 이 마을에 제일먼저 들어온 사람이 호를 따서 정호를 내은정이라 정했다고 한다. 마을에는 정북쪽 산마루턱에는 큰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이 바위 꼭대기에 올라서면 사방이 훤히 보였고 학이 떼를 지어 살고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때 일본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조정에서 중국의 원병을 청하여 이여송이 군사를이끌고 이곳을 지나다 우뚝솟은 바위를 보고는 필시 이로 인하여 후일 조선에 명장이 날것을 염려하여 칼을 뽑아 바위를 산산조각으로 깨뜨렸다. 이후 낙원인양 떼를 지어살던 학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지금도 그 바위가 있던 자리에 넣ㅂ적한 반석이 있고 주위에는 조각이 난 바윗돌이 딩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애석함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지질이 : 척곡1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공동묘지가 위치하고 있다.
○ 심새, 심수
시드물에서 동쪽으로 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식수가 없어 냇물을 식수로 사용하였으나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리므로 식수를 찾기위해 여러곳을 파보았으나 우물을 찾지 못했다. 어느날 마을 한구석에 큰 향나무 밑을 살펴보니 물기가 있어 파 보았더니 맑은 물이 솟아 우물을 사용한 후부터 마을이름을 심수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심새로 많이 불린다.
? 가마고개 : 고려때 부길개촌이라 불렀으나 이수 라는 선비가 이곳에 와서 살면서 앞산 봉우리(풍정리 매봉산)가 가마솥같이 생겼다고해서 부현 으로 고쳐 불렀으며 풍정리 중심 마을인 시드물에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전주이씨 6가구가 살고 있다. 1940년대 다덕광산이 번창할 때의 광구 흔적이 지금도 여러곳에 남아있다.
? 예끼밭골 : 골이 깊어 여우가 많았다고 하여 전해지는 지명이다.
? 추자나무골 : 큰 추자나무(호두)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큰골 : 들이 넓고 크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 엉고개, 아현
500여년전에 봉화금씨가 와서 살면서 암현이라 불렀으나 어린아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자주 죽게되자 아?q능로 고쳐불렀다한다.현재 봉성면과 재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아랫마을, 웃마을로 나눠 불린다.
? 횟골 : 예전에 관문이었던 자리로 들어와 회를 사용하여 횟골로 불리며, 현재는 농지만이 있다.
? 샘골 : 골이 깊은곳에 샘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 절골 : 절이 있었던 곳이다.
? 결편 : 유래는 알 수 없고 철길건너 새터골 아래골로 명호면 양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 모티 : 엉고개 입구와 새터골 가는 길목으로 효자 금홍달의 비가 서있는 곳이다.
? 새터골 : 광산을 했던 곳으로 맑고 아주 찬 생물이 흘러 나오던 곳이다.
? 효자 금홍달 전설 : 금효자는 고려때 시중벼슬을 한 금의의 후송이요 인조왕때 생원이고 손자이다. 효자공이 11세 되던해에 화창한 어느 봄날에 아버님께 글을 배우고 있을 때 앞 뒷산에서 장끼(꿩)가 소리높여 울었다. 아버님이 "이때는 꿩이 알을 품는 때다"라고 말씀하셨다. 효자공은 아버님말씀을 듣고 문뜩 생각하기를 저 꿩을 잡아서 부모님께 드리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큰 그물을 만들어 산 기슭에 놓았더니 꿩이 그물에 걸렸다. 효자공은 기쁜 마음으로 부모님께 드렸다. 이렇듯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잘 섬겼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께서 병환중에 은어를 잡숫고싶다고 하셨다. 때마침 장마 뒷날이라 강물이 크게 불었기 때문에 은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은어는 맑은 물에서만 놀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자공은 은어를 구하기 위하여 ?a탕물이 흘러내리는 강기슭을 오르내렸다. 그때 은어 한 마리가 뛰어나와서 효자공은 놀랍고 기쁜마음으로 은어를 움켜잡고 집으로 달려와서 어머님께 드렸다. 그리하여 곧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척곡1리
○ 양지마을, 새마, 큰말, 신기, 양촌
1600년대 도사 강윤조의 아들중 형 흡이 음달에 거주하고 동생 각(恪)이 이곳에 거주하여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였다하여 새마로 불리었으나 지형적으로 양달에 위치하여 양촌이라고 하며 건너마을 형이 살던곳을 음지마로 불리우고 있으며 현재 진주강씨의 종택이 있다.
? 법전강씨종택: 민속자료 제40호 조선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나자 도은 강격선생이 친형인 잠은 강흡선생과 함께 법전 양촌에 와서 도학에 전념하며 후진을 배양하던 곳이라 일명 도은구택이라고도 불린다.
? 각골 ;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산촌처럼 형성되어 있는 조그만한 동리로 고추농사를 주로하고 있다.
? 늘구리 : 이 마을은 약 200년전 90세이상 장수노인이 9명 살았다하여 노구리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늘구리로 불린다.
? 사밭골, 마전 : 양지망르 진주강씨 종가에서 바라보면 오목하게 생긴 곳에 있는 골짜기로 삼을 많이 재배했다하여 유래되었다한다.
? 법계서실 : 해은공의 제자인 성근묵,성수묵이 건립하였고.강윤의 증손인 강태중이 건립한 정자는 음지마을입구 경체정이고,이오당은 법전리에 소재하며 강흡선생의 유덕을 기리기위해 후손이 건립한 정자입니다...
ㅇ결문골, 결망골, 명동, 검문골
이 마을은 명호면 도천리와 접경으로 물이 단아하고 들이 한건하여 건명동이라 부리었으나 현재는 거문골로 불리고 있으며 아랫마을은 아래거문골, 윗마을은 윗거문골로 불리우며 주로 밀양박씨와 의령여씨가 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망르 뒷산 형국이 거미형국을 닮아 거미골이라고도 전해지며 지금의 거문골 정미소에서 남쪽으로 10m정도 내려가면 논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극심한 가뭄이 닥쳐와도 식수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이 마을의 근원이 되었으며 지금은 아랫거문골로 이어지는 농로 확장으로 뭍혀 버렸다.
? 옻밭골, 칠전 : 아랫거문골 일부를 옻밭골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옻밭이 많아서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지금은 개간하여 농지로 사용하고 있다.
척곡2리
○ 중간들
소윤이 갈방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마을을 안고 흘러 낙동강상에 들어가니 춘양에서 10리, 방전에서 10리, 명호에서 10리 상하십리라 이를 두고 중간들이라 불려졌다하여 전주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질그무 : 약초의 일종인 지초가 많이 있었다하여 유래되었다.
? 철까무 : 유래를 알수 없다.
? 관터 : 판문이 있었던 터라 전해지고 있으며 하천주위를 이루고 있는 산과 계곡이 기암괴석으로 형성되어 10년전만 하여도 인근 주민의 관광지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수해 등으로 길이 끊겨 사람들의 이용이 적고 하천변으로 농경지가 조금 남아있다.
○ 삼의실, 삼위실
버드나무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다실권씨(권석충)의 묘, 전주이씨(이시황)의 묘, 진주강씨(강 찬)의 묘소가 있는데 그 첫 번째 묘소가 이 마을 뒷산에 있고 두 번째 묘소가 장고개에 있고 마지박분의 묘소가 버드나무골에 있다하여 이 지명을 삼의실이라 불리고 있다.
? 장고개 : 옛날에는 춘양장을 드나드는 길목의 고개로서 많은 장꾼들이 이 고개에서 출입장도 보았다고 하며 지금도 춘양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남아있다.
? 회석룡 : 유래는 알 수 없고 현재 거주자가 없다.
? 햇돌배기 : 버드나무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입구에 2m가량 촛대모양의 횟돌이 서있는 마을이라 하여 횟돌배기라 한다. 지형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 버드나무골 : 마을어귀에 큰 버드나무가 있다하여 유래되었으며 지금도 마을주위에는 버드나무가 많다.
? 개금두들 : 깨금(산에 나는 열매_나무가 많았던 언덕이 있었다한다.
○ 멋질
○ 재청이, 자천 : 산의실에서 북서쪽의 마을로 소지리 수청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재챙이라고 불렀으나 약 120년전 붉은 샘물이 솟는다 하여 좌천이라고 불리어 지고 있다.
소천1리
옥천, 옥천터
소천에서 개울건너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조선 영조때 우부승지 조덕린이 이곳에 와서 운곡천의 맑은 물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옥천이라고 하고 이것을 유래로 김환이 마을을 개척하면서부터 아을 이름이 옥천이라 햐였고 옛날 유고정신과 전통가옥인 고가가 잔존하고 있는 마을이다.마을뒤로는 오천봉이란 산이 있고 앞으로는 운곡천이라는 대천을 끼고 있다.
어풍대 :평지마을과 옥천터사이에 있었던 곳으로 부족국가 시대에 소라왕이 싸움에 패하여 달아나던중 이곳에 이르러 바람을 쏘이고 쉬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바위와 절벽, 노송이 잎뭅이므로 행인들의 휴식처가 되었다하나 국도 확포장으로 인하여 일부 흔적만 찾을 수 있다.
? 뱀밭골 : 유래는 알 수 없으며 현재 옥천터 식수가 있는 곳이다.
? 새미골 : 샘이 있었던 곳이라 붙여지 지명이며, 현재는 옥천터 식수가 있다.
○ 오미, 오산리
옥천터 북쪽에 잇는 마을인데 조선 영조때 참판 권두추가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양보하고 이곳으로와 정착하여 오미라 하였다. 일성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금가마귀가 나래를 핀 형상이어서 오산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오산으로 부르고 있다.
? 창애정 : 오미 남족에 잇는 망르인데 참판 이중광이 그 호를 따서 창건한 정자이름을 따라 지금의 지명으로 불린다.
창애정은 창애 이중광(숙종35년-정조2년)선생이 건립한 정자로서 영조 18년에 학생으로 참봉과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 창애정을 짓고 명현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후진을양성하던 곳으로 굽이도는 운곡천을 앞두고 서있는 정자는 한층 운치가 높아 지나는 36번 국도를 지나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 동막골 :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중양에 있는 골을 말한다.
? 배리골 : 변전소 우측으로 있는 골로서 조금씩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다.
○ 평지마, 평밭, 평촌
조래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의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다고하여 평촌이라고 불린다. 명호면 삼동리와 경계를 이르며 마을입구 어풍대가 위치하고 있다.
? 안골 : 평지망르 뒤 도로건너 산기슭에 있는 골로서 현재 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절골 : 삼동재 바로 ?뼁? 있는 곳으로 예전에 절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도 절의 흔적이 있다.
소천2리
○ 어은골, 어은동, 엉골
막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숙종때 대 문장가인 李光庭이 1939년에 이 마을에 정착하여 漁隱亭을 짓고 그 정자 이름을 따서 어은동이라 하였으며 현재 정자는 없어지고 ? 라하여 정자가 섰던 자리만 남아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을 앞터가 고기가 숨은 모양과 같아서 漁隱洞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 절골 : 과거에 절이 있었다하여 절골이라 하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전 990번지)
? 막골, 막동 : 언골에서 북향으로 있는 마을인데 인근동리에서 농사를 짖기 위해 막을 치고 비를 피하던 곳이라하여 생긴 지명이며, 지금은 웃막골, 아랫막골로 나뉘어 불리어지고 있다. (답 723번지)
○ 사미정
소천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영조때 ? 조덕인이 1727년 지은 정자 이름을 따서 四未亭이라고 불렀으며 四美亭앞을 흐르는 운곡천과 널찍한 반석, 절벽이 한폭의 그림처럼 어울려 오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사미정(四美亭) : 玉川 ? [ ? 제 17대 효종 9년(1658) - 제 21년 영조 13년(1737)]이 이곳 名 ? 地를 찾아 亭子를 建立하고 ? 亭이라 하였다. 그후 後? 들이 未年.未月.未時에 重? 하고 亭子이름을 四美亭으로 바꾸었다. (1993. 2. 25.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76호로 지정됨)
? 대래수 : 숲이 아주 우거지고 머루, 다래가 많아서 다래수 또는 대래수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전 567번지)
? 선바우 양지골 : 사미정에서 북서쪽으로 2Km골로 들어서면 양지쪽에 마치 바위가 살아서 마을을 지키고 서있는 것 같다고 하여 선바위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며,선바위는 크기는 폭 0.9m, 높이 2.4m로 서있었으나 해방을 전후하여 어떤 석수장이가 묘소 상석을 할려고 중간기둥을 잘라 깨진 상태로 넘어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한양조씨 조석대씨가 그 앞에서 공양도 하였다 한다. (임 82번지)
○ 조래, 졸천(拙川)
조래 또는 졸천이라고도 하며 원래 안동부에 딸린 ? 이었으나 1985년에 봉화군 춘양면에 편입된 마을로서 옛날 ? 王이 도읍을 정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옥천에서 분류된 동네라고 한다.
? 졸천 : 운곡천의 물줄기가 사미정으로 오면서 불리어 졌다고 한다.
玉溪亭 - 玉溪 金明?이 학문에 정진한 학자인 동시에 효자로 이름났다 그는 ?을 당하여 잉어가 특효하다 하니 한겨울에 잉어를 구하여 치료하였으며 ?에 호랑이가 주위를 돌며 그의 효행을 가호한 ?天之?로 감찰직에 추대되었다. 후손 의서 김씨 문중에서 선친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화장산에 건립하였는데 1939년경에 이곳으로 移?하였다.
? 도장골 : 졸천에 도장(창고)이 있었다하여 도장골이라고 한다. (전 664번지)
○ 가무, 감의
소천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뒤에 해발 539mdml 감의봉 이름을 따서 감의라고 불리운다. 감의봉은 결혼 신부를 태우는 가마의 위쪽 촉다리와 같이 산의 형세를 하고 있어 감의봉이라고도 한다.
? 동미쏘 : 어떤 스님이 추운 겨울에 이 자리를 지나다 보니 이곳이 따뜻한 곳이라 잠시 앉아서 옷에 이를 잡다가 뒤로 넘어져 죽은 이후부터 중쏘 또는 동미쏘라 한다. 100여년 전만 하여도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얕은 천에 불과하나 주위 경치가 수려하여 사미정과 연계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산 111번지)
법전면 눌산1리
○ 눌미, 눌매, 눌산(訥山)
옛날에는 눌뫼라고 불렀는데 눌미로 바꾸어 불리우고 있으며 감보게 사람에게 지배를 당하고 눌렀다하여 눌산이라는 설도 있으며 감보가 上訥 거리늘미가 下訥이라고도 한다.
? 거리늘미 : 늘미와 같은 마을이면서 마을 가운데 개울을 두고 있는 서쪽편 마을을 말하며 늘미에서 춘양으로 가는 마을에 있다하여 거리늘미라 한다 ( 전 1138번지 일대)
? 홈재 : 눌미에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협곡을 이루고 있어 홈재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홈재에는 변씨 재궁이 있고, 큰묘소가 여러개 있다 (대지 895번지)
정수암(靜水岩), 정삼 : 눌미에서 동북쪽으로 300m지점에 위치하며 옛날에 靜水庵 이라는 암자가 있었다하여 정수암이라 하다 정삼이라 불리우고 있다.
靜水庵 : 신축연대는 알수 없으나 1930년경 철거되었으며 눌산리 평해 황씨의 정자로 본명은 알 수 없으나 1924년경에 사망했다고하며 그의 號가 3가지 (이령, 해주, 죽별당, 수성 감동공)로 학문이 높아 그 인근에서 한학을 배운 제자가 20여명된다고 한다. (건축구조는 방 2칸, 중간마루 1개, 앞 반침마루) (대지 974번지)
○ 멀골, 원곡 (?谷)
눌미에서 남동쪽으로 산을 넘어 4km정도 떨어진 洛東江 上流 강변 마을로 눌미에서 멀리있다 하여 멀골이라는 말도 있으며 멀골 뒷산에 月?山이며 그 아래 마을을 舞月谷이라 부르다가 멀골로 불었다는 설도 있다. ?東江? 맑은물과 기암괴석, 소나무 숲으로 경관이 아름답다.
? 아람, 아호(鵝湖) : 멀골에서 낙동강 상류로 2km정도 올라가 위치하며 의성김씨 정자가 있는 앞 강변에 바위가 거위 모양으로 하고 있다하여 아람이라 하며 지금은 거주자 없다. (대지 85번지)
○ 고눌미, 골눌미, 고눌산 (古訥山)
눌미에서 북서쪽으로 600m 떨어진 마을로 골이 졌다고 고눌미라 하며 마을앞 동구에 서낭당이 있는데 300여년 묵은 버드나무 1그루와 100년 정도 묵은 무프레 나무 2그루가 있는데 전자의 나무는 수해등으로 고사된 상태에 있다. 이 마을에서는 농사의 풍년과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토속신앙으로 매년 음력 정원 14일에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유사를 정하여 당고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谷訥골에 위치해 있다고 곡눌이라고도 한다.
○ 새터, 신기 (新基)
눌산1리 들어오는 고개넘어 첫마을로 감보개 마을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다가 차츰 이 고을로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하여 新基라 하였으며 우리말로 “새터”라고 한다. 이 마을 입구에 120년전에 택호 김다말댁이라는 자가 심었다는 당수나무(소나무) 2그루가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농사의 풍년과 마을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 감보개, 현포 (玄圃) :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눌산리에서 가장 먼저 마을이 생겼다하며 새터마을 북쪽방향에 위치해 있으며 약간 골짜기가 들어가 있다. (대지 1110)
○ 두천(杜川), 농천(聾川), 마그내
늘미에서 산을 넘어 남동쪽 2km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聾川이라 했는데, 향기로운 물이 흐른다고 杜川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그내는 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 돗대석 : 마그네에서 남쪽으로 1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마그네 마을이 배 (?) 형세로서 그곳에 돗대석이라는 돌기둥이 2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훼손되고 흔적만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그네 마을은 부촌(富村)이었으나 어느날 대사가 촛대석을 넘어뜨려서 그 이후로 마을이 쇄퇴하였다는 설이 있다.
○ 갈골 (葛谷)
멀골에서 낙동강 상류 400m지점에 위치하며 石門이 있고 갈마음수(葛馬飮水)명지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 석문 (洞石門) : 옛날 명호면 삼동 사람들과 재산면 공이 사람들이 장을 보기 위하여 이 길을 내왕하였으며 지금도 이 자리에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폭 2m 높이 2m의 석문이 있고 그 앞으로 새로운 농로길을 닦아 현재는 길의 흔적은 없다. 석문앞에 洞石門이라는 글씨가 세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갈골의 안동권씨의 석수장이가 새겼다 한다. (임 154번지)
? 자라바위 : 석문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하천변에 폭 3m, 길이 4m 크기로 자라가 기어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다. (천 1432)
? 말바위 : 자라바위 바로밑에 말의 안장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도 있다. (천 1432번지)
? 갈마음수 (葛馬飮水) : 어떤 양반집안에서 묘터를 잡기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말이 목이말라 물을 마시던 자리?여 붙여진 이름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어떤이는 석문자리위라 하기도하고 어떤이는 갈골에서 남쪽으로 낙동간 건너 재산면 지역이라는 설도 있다.
법전면 눌산2리
○ 부트네(扶川), 부천(扶川)
1. 부용꽃이 피는 못이 있어 芙?谷이라 한다. (池)
2. 삼동과 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양쪽 지여기 너무 높아 부축해 준 부락이라서 扶川이라 하기도 한다 (山)
? 감성골 : 부트네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뒷산 행상이 마치 감싸있는 모양이며, 성을 쌓은 것 같아서 감성골이라고 한다 (눌산리 전 520번지)
? 구가무 : 유래는 알 수 없고 부트네 입구에 있다. 입구에는 소나무 고목이 서있고 진성이씨 재사가 있으며 느티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군보호림으로 지정관리 하고 있다. (지정번호 11-1, 전 579번지 일대)
? 불탄골 : 오래전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불이 크게나 타버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산 70번지)
?군봉굴 : 유래는 알수 없으며 부트네에서 1km지점에 위치하고 사람은 살지 않고 있다 (산51번지)
구가암(九佳唵) : 1993년 11월 30일 유형문화제 제 283호로 지정됨
? 李東? 先生의 ?子 李? [? 19호代 ? 9年(1683) - ? 21代 ?祖 18年(1742)]의 ?를 ?하기 ?하여 ? ? 23代 ?祖25年(1825)에 ? ? 은 李?을 中心으로 後?들이 세운 ? 임.
○ 방고개, 방현(芳峴)
1. 고려시대 방고개촌이 있었으나 1782년 경주최씨 전성기에 최진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고개마루에서 백일장을 개최하였으며, 여기에 뽑힌 선비가 과거에 급재하고 돌아올때 알리는 소리가 고개마루까지 들렸다하여 芳峴이라 한다.
? 뱃동 : 방고개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형상이 배탄 것 같은 모양이라서 뱃등이라 한다. (산 136번지)
? 장골 : 방고개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골 막바지에 장사가 있어서 장골이라 한다. (전 325번지 일대)
? 물알, 수하동 (水下洞) : 마너무 남동쪽 맞은편에 위치한 마을로서 아래쪽의 나루터는 소천면 임기리 담월로 건너는 낙동강 상류이다. (전 155일대)
? 능하이 : 큰 묘터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답 346 - 2 번지)
○ 마너무
1796년 ? 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산이 말등같이 생겼다하여 마너무라하고 입구 좌측에 당이 위치한다. 옛날에는 명호 삼동사람들이 소천 현동 가자면 3고개를 지나야 하느데 첫 번째 고개가 장고개고 두 번째 고개가 마너무 왼쪽의 문고개가 있고 3번째 고개가 마너무 오른쪽의 수리고개를 넘나들었다.
? 강성배태기 : 마너무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암산 끝꼴리에 붙은 것 같으며 월암산을 강산이라 하며 비탈에 붙었다하여 강성배태기라 한다. (눌산리 770번지)
? 도(桃)릉골 : 복숭아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복숭아 나무가 전혀 없다. (대지 651번지)
법전면 어지1리
○ 녹동(鹿洞), 노룻골
어르말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고려시대 春? 에 속하였던 것을 1723년 ?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을 先子의 白?洞天이란 문장을 따서 ?洞으로 개칭하였고 지금은 그 후손인 ?城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을 북쪽에 산 양호와 남쪽에 산 음호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이고 범의 양식이 노루이므로 노루골이라 전해온다. 춘양에서 소천방면으로 36번국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마을 2km전방 암벽에 백녹동천이란 암각이 새겨져 있었다하나 도로 개설로 손실되고 없다.
? 세잔골 : 양호옆에 골로 범의 활동이 주로 밤에 이루어지므로 밤이 새지말라는 뜻에서 새잔골이라 불렀다 한다. (전170 - 1번지)
? 전딧골 : 전두골 (前頭谷) 녹동 입구에 위치한 큰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람은 살고 있지 않으나 농지가 50마지기 있다. (전 849번지)
? 솔안, 송내(松內) : 녹동역, 녹동입구에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는 소나무 숲이 많이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지302 - 7번지)
○ 목비골
노룻골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 마을로서 ? 때 ?장수가 왜군들이 목을 벤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각 성씨 서너집이 산비탈 밭과 논농사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본 마을 앞에는 36번국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영동선을 연결하는 녹동역이 자리잡고 있어 눌산 지역과 소천리 주민들의 교통중심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녹동역을 주위로 200여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서있고 여름이면 인근농가에서 법전 복수박을 생산 판매할 수 있는 원두막 시설이 함께 어우러져 지나가는여행객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전435번지)
○ 새마을
노루재 주변 골짜기에 화전민이 산재하여 있었으나 해방후 빨치산이 양민을 학살하고 강제징용하여 국민을 불안하게 하여 정부에서 노루재 주변의 주민을 골짜기에 정착하도록 집 3채에 5가구 13명이 이곳에 이주해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로 지명되고 있다. (전 40번지)
화장사 : 옥천터의 김도락(義城金)이 자식이 없어 어지리 산 9번지에 절을 지으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하여 절칸 2채에 방 6칸반을 지어 공양하니 이후 아들 2명을 낳았다고하며 1979년 등록없는 사찰 철거시 없어지고 그 이후 어지리 산 42번지에 현재 주지 스님인 이정봉(79세0외 신도 10명이 헌금 모그?瀏? 1979년 법당 3칸과 산신당 1칸을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노룻재(?) : 어지리 ?洞에서 소천면 ?洞里로 넘어가는 고개를 노룻재라 하며, 이고개 이름은 재아래 마을이름을 따서 노룻재라 불리우고 있다. (산 10-1번지)
? 고장골 : 오래전에 절이 있었다 한다. (산 14-4번지)
? 삼거리 : 노루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1931년 일제때 차도가 개설되어 울진과 춘양 영양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어 삼거리라 한다. 지금은 국도변에 몇몇 가구가 고추, 약초등을 재배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전 127번지)
법전면 어지2리
○ 어름말, 어지(於旨), 어지리(於旨里), 어로동(於老洞), 어동(漁洞)
1606년경 영양남씨가 개척하여 노모에게 항상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하여 어로동(魚老洞)으로 불리운다. (답 742번지)
? 재궁골 : 어르말에 딸린 마을로서 충간공 난은( ? ) 이동표(李東標)의 재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 500번지)
? 빈소골 : 어르말 재궁골 뒷골짜기 마을로 거유(巨儒) 이동쵸가 모친 산소옆에 움막을 짓고 3년 거로중(居盧中)과로로 득병 별세한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 빈소골이라 한다 (전 478번지)
? 묵골(물골) : 골이 깊고 물이 많아서 물골이라고도 하나 현재는 묵골로 불리어지고 있다.(답 530번지)
? 먹적골 : 일명 “식적골” 이라고도 하며, 예전에 부자가 있어서 먹을 것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답 476번지)
? 고가골 : 오래전에 고씨가 한집 살았다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현재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 (답 470번지)
? 다람골 : 어르말에서 녹동으로 가는 경계지역으로 재가 다람지만이 올라갈 정도로 가팔랐다는 설과 목비골에서 베어진 왜장 및 왜병의 목을 당시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곳에 메어달아 전시하였다하여 붙여진 설이있다. (답420번지)
? 골거리, 거릿마, 어리말거리 : 솔안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어르말거리 또는 거릿마을로 불리며, 36번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답 315번지)
○ 맛질, 미곡리(味谷里), 마질里(馬叱里)
어르말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시대때 울진에서 춘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주막이 있었는데 행인들로부터 음식맛이 좋아하여 맛질, 미곡(味谷)이라고 불리게 되었다한다.
? 와싯골 : 오래전 이 골에서 기와를 구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답970번지)
? 긴밭골 : 밭고랑이 길었다고하나, 현재는 밭중앙에 집이 있어서 길지 않다. (전 100번지)
법전면 소지리
○ 소주골(小池 )
소주골(小池 )이란 이름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연화지(連花池)란 작은 못이 있어 소지(小池)라고도 한다. 소주골 입구에 들어서면 약 200년 묵은 소나무가 마을 전체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당초에는 버드나무와 함께 당제를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40년전에 이 마을 주민이 버드나무를 베어버리자 소년참상이 있었다하며 그 이후 당제에 불을 질러없어지고 소나무만 남아있다.
連花池 : 못이 생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약 200평 정도의 못이 있었는데 1962년 산사태로 인하여 메몰되어 없어지고 지금은 그 형체를 찾아 볼 수없다. (전 356번지)
? 절골 : 오래전에 절이 있어 절골이라 전하나, 현재는 절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산 308번지)
? 서낭골 ; 예전에 서낭당이 있어 서낭골이라 전하여지고 있으나 현재는 찾아 볼수가 없다. (전 531번지)
?七부자골 : 옛말에 일곱명의 ?가 한마을에 살았다고하여 칠부자 골이라 전하여 지고 있다.(전 340번지)
○ 수청거리
수천거리는 100여년전 나환자가 모여 살던곳으로 당시 주변에 버드나무가 자연적으로 넘어져 다리를 놓았다고하여 ?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로 통용되고 있으며 춘양에서 법전으로 오는 관문이라하여 수청거리라 한다. 현제 도로상에 늘어선 원두막이 있어 도로 이용자들을 상대로한 복수박 수입으로 농가 소득증대에 한몫을 하고 있는 곳중에 한지역이다. 또한 현제 도로변 옆에 느티나무로 꾸며진 소공원이 있는데, 마을주민과 도로통행인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 절 골 : 법천사 라는 절이 있어 절골이라 전하며 오래전에 나환자가 10여가구 살았다고 하며, 나환자는 전부 이주하여 현제는 한가구도 없다. 산173번지)
○ 고누골
마을 어귀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고바우라는 동명으로 불리었다는 설도 있고, 130세된 노인이 살았다고 하여 고로리라고 했다고 하나, 바위는 찾을길이 없다. 이마을 북쪽방향으로 큰 산밑에 박씨성,지씨성을 가진 자들이 가장 먼저 자리잡았다고 하며,지금은 두성씨는 전혀없고 단양지씨 묘소만 마을북쪽에 남아있다. 이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정월 14일에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이 지역은 중산간 지대로 산이 울창하여 자연송이 자라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어 많은 양의 송이가 생산되어 농가의 부소득원으로 호당1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새마을,신촌
새마을 소주골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1948년 새로 생겼다고 하여 새마을 또는 신촌이라고도 하며 소주골로 들어가는 入口 ? 하고 있어 거릿마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여름철이며 36번 국도를 이용하는 여행객들에게 인근 농가에서 생산한 법전 “복수박”을 판매 및 자연송이 채취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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