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목회 이후의 생활.
목회를 마치고 광주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와 함께 산을 찾았다. 광주와 전남 지방의 산에 다녔다. 목회 중에 단 한 차례도 산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먼저 풀어야 했다. 또 할 일도 없었다. 마침 아내도 산에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함께 다니니 좋았다.
교회는 아내의 요구대로 계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휴무장로의 직분이 그대로 있었다. 여자 권사들이 반가워 해 주었다. 하지만 목회자를 비롯한 장로들은 겉으로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으나, 어딘가 냉담한 모습을 보였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왔느냐고 하는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교회에 다시 와서 시무장로라도 되면 어떻게 될 가하는 것 같았다. 수석장로가 은퇴해서 내가 복귀하면 수석이 될 형편이었다. 나는 추호도 그런 기대는 안했고, 다만 복귀 후 원로 장로가 되었으면 했다. 휴무장로는 내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당회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 이름이 못 마땅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그대로였다. 나도 할 말이 없어 그대로 예배시간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는 것으로 교회생활을 했다.
★2008년이 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2008년 7월 3일 어머니가 99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 하셨다. 어머니는 나에 대해 서운함이 많으셨다. 목회를 그만두고 돌아와서 교회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구역장으로 있는 구역의 예배 인도는, 아내의 요청으로 내가 했다. 하지만 성실하게 하지를 아니해서, 그러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셨다. 휴무장로로 있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찌하지 못한채 지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장례식은 교회장으로 하면서 설립교인이라고 700여만 원의 장례비 일체를 교회에서 부담하고, 성대하게 했다. 우리는 조위금 1200만원 전부를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써 놓은 일기와, 돌아가신 후 장례를 마치고 써 놓은 일기가 저장되어 있어 여기에 옮긴다. 아울러 7월 5일 장례식 때 박희서 장로가 읽은 조사가 저장되어 있어서 그것도 옮겨 본다.
★7월 1일. 월요일.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참으로 어려운가 보다.
6월 10일부터 물만 드시다가 25일부터는 아무 것도 안 드셨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호흡을 하신다. 6월을 넘겼다.
집에 오는 사람들이나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어서 가셔야 할텐데 한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다시 일어나게 하실건가 하는 생각도 된다.
일어나시던지, 천국에 가시던지가 빨리 결정되었으면 좋겠다.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기다림도 지쳐 간다.
하나님! 저희 가정에 함께하시옵소서.
★7월 31일 목요일
오래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쓸 수 있는 내용이 많았는데 ---.
7월 3일에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7월 5일에 장례식을 하고 망월동 아버지묘 옆에 안장했다. 10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함께 마련해 논 자리에 안장했다.
장례예식은 계림교회가 교회장으로 준비했다. 모든 의식과 장례비용 일체를 교회가 담당해 주었다. 설립교인에 대한 예우로 성대하게 했다. 장례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당회가 모든 것을 결정해서 시행 했다. 장례식 장면을 촬영하여 CD로 제작하여 유가족에게 주고, 교회 홈페이지에도 올려놓았다.
동생 기형이가 미국에서 와 가지고 장례식에 함께 해 주어 좋았다. 4일 저녁에 도착하여 장례식에 참여했고, 15일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14일까지 집에 함께 있으면서 뒷마무리까지 잘 해 주었다. 여수에 계신 고숙도 방문했고, 임동 외숙, 그리고 이모집에도 함께 다니면서 10만원씩 봉투도 드리면서 인사를 했다.
1,300만 원정도의 조위금은 어머니의 뜻을 생각해서 유가족의 이름으로 1,000만원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용한이 엄마와 숙이 남편 박서방에게 각각 100만원씩 주었다. 박서방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너무 불쌍했다. 우리 몫의 감사도 해야겠기에 우리부부의 이름으로 200만원 건축헌금으로 따로 드리기도 했다.
어머니가 가신 후 빈자리가 계속 허전하다. 잘 해 드리려고 노력도 했지만. 역시 잘못한 것이 많다는 후회가 뒤 따른다. 무엇보다 말을 툭툭하게 했던 것이 가슴 아프다. 친절하게 자상하게 해 드렸으면 좋았으련만.
나이가 많아 돌아가시니까 장례식에 손자들의 역할이 큰 것을 알았다.
용범이, 미혜와 신랑 관혁이 때문에 화환 큰 것이 3개였고 계림교회 안수집사회와 계림 5-2개발위원회에서도 화환이 왔었다.
해지의 직장에서는 조문객이 왔고 조위금도 상당 액수였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교회덕택에 훌륭하게 잘 치루었다. 이제 앞으로의 우리의 삶이 어머니의 좋은 뜻을 잘 받들어 잘 사는 일만 남았다. 어머니로 인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 자녀 손들이 잘 감당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장례식에서 교회 박희서 장로의 조사가 저장되어 있어서 옮긴다.
★삼가 서복금 권사님 영전에!
권사님! 서복금 권사님!불러도, 불러도 이제는 대답이 없으신 우리 서복금 권사님!권사님이 그렇게나 사랑하시던 계림교회에서, 그리고 모든 교인들이 계림교회 예배당에서 지금 권사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는 환송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얼마 전부터 권사님께서 기력이 쇠하여지신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많은 걱정들을 했었지요. 3부 예배를 마치고 나오시면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시는 걸 본 설희라 집사가 서둘러 권사님을 등에 업자 마다않고 설집사 등에 업혀 식당으로 가시던 그 때, 우리는 권사님 기력이 너무 쇠하여 지신 것에 놀랐습니다. 그 이후 권사님은 교회에서 뵐 수가 없었지요. “어디가 아프실까?” 우리들은 뵐 수 없는 권사님의 모습에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궁금해 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 어인 소식입니까?"나, 이제 하늘나라 갈란다.“ 하시면서 며느리가 드리는 식사도 받지 않으신 채, 곡기를 끊으시고 물만 드신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저희들은 가슴이 저미었습니다. 그리고 떨렸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은 모두들 하루라도 더 살려고 몸부림을 한다는데, 그리고 죽음이 두려워 극도의 불안에 떤다는데 죽음을 그렇게도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결단하시는 분도 계시는 구나해서 경외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나, 그렇게나 결단하신다더니 끝내는 가셨군요. 잘 가셨습니다. 서복금 권사님!요즘 사람들은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아프고 3일 만에 죽기를 바란다‘ 는 말 들어 보셨지요. 권사님도 그렇게 사셨으니 잘하셨습니다. 천수를 다하시고 가신 권사님의 삶에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고 계실 권사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마음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다만,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권사님께서 살아생전 교회를 위해 그렇게나 염려하시고 애타하셨던 그 값진 믿음을 저희들이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권사님은 62년 전, 한창 젊었었던 서른일곱의 나이에 박수복, 김복덕 집사님과 함께 우리 계림교회를 개척하셨지요?고만고만한 어린자녀들 8남매를 키우시면서 손에 물이 마를 날 없이 바쁘게 살아야 하는 그 나이에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자녀들을 키워본 저희들이기에 그 때의 권사님 모습이 우리 눈에 그려집니다. 그로부터 60여 성상을 오직 기도로 섬겨 오신 권사님은 우리 교회의 살아있는 역사요, 움직이는 교회이셨습니다. 따라서 권사님의 웃음은 우리의 기쁨이 되었고 권사님의 눈물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권사님! 권사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젊으셨을 때 너무나 많이 흘리셨을 땀을 닦아 드리는 심정으로 교회가 설립주일을 기념해서 드리는 옷 한 벌 값도, 선물이나 작은 기념품대도 드리는 대로 고스란히 교회에 바쳐 버리셨습니다. 무얼 좀 해드리려고 교회가 아무리 애를 써도 권사님은 그저 그 모든 것을 교회에다가 다 바치셨습니다.최근에는 자녀들이 주는 용돈이나 교인들이 찾아가 뭘 좀 맛있는 것 사드시라고 놓고 간 돈도 꼬박 꼬박 모아 무명으로 건축헌금으로 바치셨다는 소식에 저희들의 가슴은 미어졌습니다.
권사님! 저희들이 잘 할게요. 권사님이 그토록 염려하시는 교회 건축도, 화목한 교회분위기도 남아있는 저희들이 잘 만들어 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평안히 쉬세요. 권사님!우리는 이제 그 따스한 모습의 권사님을 다시는 뵙지 못할 것입니다.그걸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슬프지만 얼마 있지 않아 권사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갈 것이기에 울지 않겠습니다. 멀지 않아 하늘나라에서 권사님을 만나게 될 소망을 안고 기쁜 마음으로 권사님을 땅에 안장하겠습니다. 권사님! 편히 잠드세요. 2008년 7월 5일 권사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박희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