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청량산 산삼 에피소드 우리는 절 탑 앞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마침 적당하면서도 가파른 앞산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목표는 저 산봉!” 권도운 (본명: 권기문
가장 바쁜 시기에 건강 문제로 조용한 도시에 내려가 전화번호까지 몇 번 바꾸고 지냈는데, 2년 정도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배우던 중대 철학과를 나온 어느 작가 지망생이 영화진흥위원회에 응모할 시나리오 원고를 들고 봉화 닭실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서 하룻밤을 자고 주소를 물어서 찾아왔다. 작품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하고 다음 날 아침에 혼잣말처럼 말했다. “봉화군 명호라는 곳에 금강산보다 더 좋다는 청량산이 있다. 신라 성덕왕 십 년에 태어난 김생이 나뭇잎에 붓글씨를 연마하여 신필이 되었다는 그 김생굴 헌팅하러 가는 데 같이 안 갈 거야?” 그랬더니 좋아하며 따라나섰다. 퇴계 이황이 호를 ‘청량산인’으로 쓸 정도이며, 해 질 무렵 절벽에 비친 역광에 도를 깨쳤다는 전설이 있는 곳인데, 그 제자를 그곳에 데려가고 싶었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아무리 좋아서 샘을 파도 독자의 입맛에 맞는 물을 찾기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 제자가 그런 한계점에 닿아 있었기에 백 마디의 말보다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절 탑 앞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마침 적당하면서도 가파른 앞산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목표는 저 산봉!” 하고 먼저 기어올랐다. 한 발만 잘못 짚어 미끄러지면 뼈도 못 찾을 벼랑 끝이었다. 나는 몇 번을 미끄러질 뻔하며 간신히 올라 나무꼬챙이를 꺾어서 땀을 뻑뻑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캐기 시작했다. 뒤이어 올라온 제자가 땀을 흘리며 물었다. “선생님, 뭐 하십니까?” 몇 번을 묻자 나는 겨우 말했다. “산삼이야. 조용해. 떠들면 도망가.” 라고 말했더니, 눈이 휘둥그레……. 잠시 후, 다시 물었다. “선생님, 저 한 뿌리만 캐면 안 될까요…?” “그래, 몇 뿌리만 캐.” 그랬더니, 곧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감탄사를 쏟아놓았다. “선생님, 산삼을 캐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몇 년간 가르친 건 어찌하고 겨우 산삼 몇 뿌리에, 쯧쯧……!’ 우리는 여러 뿌리를 캐서 안전한 곳으로 돌아내려 왔다. 제자가 김생굴 헌팅은 어쩌냐고 물었지만, 새 운동화를 신었더니, 발이 아프다며, 그냥 내려왔다. 산 아래 강가에서 나는 제자에게 물었다. “오늘 산삼 캤지?” "네, 산삼 캤습니다.” “실망하지 마. 이건 그냥 풀이야.”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내가 산삼 닮은 풀을 강물에 버리자 그는 안타까워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거 가져가서 뭐 할 건데?” “팔죠.”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뭐할 건데?” “…….”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돈이란 없어지게 마련이지만, 산삼을 캤다는 그 순간의 기분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 “자네는 작가가 될 사람이야. 산삼을 캐던 그 정신으로 작품을 캐 봐.” 그러자 조금은 알아듣는 눈치였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 비로소 작품 얘기를 했다. 어느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생기고 지도 코치가 오면서 친구 간의 갈등, 이성 간의 갈등, 재정문제로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간의 갈등…….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갈등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축구 붐이 일어났으므로 이야기는 매치(match)가 되었으나 전반적으로 테마(독Thema)를 운반하는 과정도 소극적이었으며, 특히 클라이맥스(climax)가 너무 밋밋했고 감동이 없었다. 작품분석과 첨삭까지 마친 후, 나는 부득이 내가 실화처럼 흑백 때 문학관으로 썼던 「00의 다리」라는 상징적인 다리를 그 작품 클라이맥스에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의 눈이 반짝했다. “다리 이쪽은 과거, 다리 중간은 현재, 다리 저쪽은 미래. 우리 함께 미래를 향해―” 한 아이가 가리키며 소리치자, 와― 하고 달려가는 아이들―. 아이들이 다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 카메라는 클로즈업하며 스톱되었다. 대충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다리 위의 ○○들」이란 제목으로 당선되어 여러 감독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몇 작품을 하고 자연스럽게 「무슨 18세」인가 청소년 프로를 꽤 인기리에 하더니(제목을 지어줌), 드디어 주말 연속극까지 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거하게(?) 한턱을 내면서 말했다. “지금도 저는 그 산에 가면 산삼이 있을 거 같아요.” 그 후 나도 잊고 있었는데, 스터디(study)에서 처음 보는 지망생이 찾아와서 「청량산 산삼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말했다.
“선생님을 따라가면 작가를 만들어 준다던데요.” 하면서 계속 따라다녀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대 철학과 그 제자가 「청량산 산삼 에피소드」를 작품으로 쓰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으나 그는 생각하는 듯하더니, “선생님의 지적재산을 제가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하시죠.” 라고 말했다.
권도운 (방송작가) 1967년 단편 「병사의 일기」 소년한국일보 당선. 시조 「할아버지 쌈짓돈」 조선일보 우수상. 1972년 시나리오 「신화」, 「환녀」 영화 매거진 당선. 1975년 KBS 舞臺, 戰友, TV 文藝劇場, 傳說의 故鄕 당선 및 執筆. 1979년 시 「순이 생각」 여성 중앙 당선, 1990년 수필 「非常金」 영남일보 당선. 대한문학인협회 고문. 한국기독교작가협회 부회장. 「공백의 비밀」 DNA·RNA 학술연구협회 고문. 논문 「과학과 영靈의 만남」 등 ............................................................................................................................................................................................................................................... 〈수필〉 청량산 산삼 에피소드 우리는 절 탑 앞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마침 적당하면서도 가파른 앞산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목표는 저 산봉!” 권도운 (본명: 권기문
가장 바쁜 시기에 건강 문제로 조용한 도시에 내려가 전화번호까지 몇 번 바꾸고 지냈는데, 2년 정도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배우던 중대 철학과를 나온 어느 작가 지망생이 영화진흥위원회에 응모할 시나리오 원고를 들고 봉화 닭실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서 하룻밤을 자고 주소를 물어서 찾아왔다. 작품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하고 다음 날 아침에 혼잣말처럼 말했다. “봉화군 명호라는 곳에 금강산보다 더 좋다는 청량산이 있다. 신라 성덕왕 십 년에 태어난 김생이 나뭇잎에 붓글씨를 연마하여 신필이 되었다는 그 김생굴 헌팅하러 가는 데 같이 안 갈 거야?” 그랬더니 좋아하며 따라나섰다. 퇴계 이황이 호를 ‘청량산인’으로 쓸 정도이며, 해 질 무렵 절벽에 비친 역광에 도를 깨쳤다는 전설이 있는 곳인데, 그 제자를 그곳에 데려가고 싶었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아무리 좋아서 샘을 파도 독자의 입맛에 맞는 물을 찾기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 제자가 그런 한계점에 닿아 있었기에 백 마디의 말보다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절 탑 앞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마침 적당하면서도 가파른 앞산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목표는 저 산봉!” 하고 먼저 기어올랐다. 한 발만 잘못 짚어 미끄러지면 뼈도 못 찾을 벼랑 끝이었다. 나는 몇 번을 미끄러질 뻔하며 간신히 올라 나무꼬챙이를 꺾어서 땀을 뻑뻑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캐기 시작했다. 뒤이어 올라온 제자가 땀을 흘리며 물었다. “선생님, 뭐 하십니까?” 몇 번을 묻자 나는 겨우 말했다. “산삼이야. 조용해. 떠들면 도망가.” 라고 말했더니, 눈이 휘둥그레……. 잠시 후, 다시 물었다. “선생님, 저 한 뿌리만 캐면 안 될까요…?” “그래, 몇 뿌리만 캐.” 그랬더니, 곧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감탄사를 쏟아놓았다. “선생님, 산삼을 캐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몇 년간 가르친 건 어찌하고 겨우 산삼 몇 뿌리에, 쯧쯧……!’ 우리는 여러 뿌리를 캐서 안전한 곳으로 돌아내려 왔다. 제자가 김생굴 헌팅은 어쩌냐고 물었지만, 새 운동화를 신었더니, 발이 아프다며, 그냥 내려왔다. 산 아래 강가에서 나는 제자에게 물었다. “오늘 산삼 캤지?” "네, 산삼 캤습니다.” “실망하지 마. 이건 그냥 풀이야.”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내가 산삼 닮은 풀을 강물에 버리자 그는 안타까워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거 가져가서 뭐 할 건데?” “팔죠.”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뭐할 건데?” “…….”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돈이란 없어지게 마련이지만, 산삼을 캤다는 그 순간의 기분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 “자네는 작가가 될 사람이야. 산삼을 캐던 그 정신으로 작품을 캐 봐.” 그러자 조금은 알아듣는 눈치였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 비로소 작품 얘기를 했다. 어느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생기고 지도 코치가 오면서 친구 간의 갈등, 이성 간의 갈등, 재정문제로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간의 갈등…….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갈등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축구 붐이 일어났으므로 이야기는 매치(match)가 되었으나 전반적으로 테마(독Thema)를 운반하는 과정도 소극적이었으며, 특히 클라이맥스(climax)가 너무 밋밋했고 감동이 없었다. 작품분석과 첨삭까지 마친 후, 나는 부득이 내가 실화처럼 흑백 때 문학관으로 썼던 「00의 다리」라는 상징적인 다리를 그 작품 클라이맥스에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의 눈이 반짝했다. “다리 이쪽은 과거, 다리 중간은 현재, 다리 저쪽은 미래. 우리 함께 미래를 향해―” 한 아이가 가리키며 소리치자, 와― 하고 달려가는 아이들―. 아이들이 다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 카메라는 클로즈업하며 스톱되었다. 대충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다리 위의 ○○들」이란 제목으로 당선되어 여러 감독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몇 작품을 하고 자연스럽게 「무슨 18세」인가 청소년 프로를 꽤 인기리에 하더니(제목을 지어줌), 드디어 주말 연속극까지 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거하게(?) 한턱을 내면서 말했다. “지금도 저는 그 산에 가면 산삼이 있을 거 같아요.” 그 후 나도 잊고 있었는데, 스터디(study)에서 처음 보는 지망생이 찾아와서 「청량산 산삼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말했다.
“선생님을 따라가면 작가를 만들어 준다던데요.” 하면서 계속 따라다녀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대 철학과 그 제자가 「청량산 산삼 에피소드」를 작품으로 쓰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으나 그는 생각하는 듯하더니, “선생님의 지적재산을 제가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하시죠.” 라고 말했다.
권도운 (방송작가) 1967년 단편 「병사의 일기」 소년한국일보 당선. 시조 「할아버지 쌈짓돈」 조선일보 우수상. 1972년 시나리오 「신화」, 「환녀」 영화 매거진 당선. 1975년 KBS 舞臺, 戰友, TV 文藝劇場, 傳說의 故鄕 당선 및 執筆. 1979년 시 「순이 생각」 여성 중앙 당선, 1990년 수필 「非常金」 영남일보 당선. 대한문학인협회 고문. 한국기독교작가협회 부회장. 「공백의 비밀」 DNA·RNA 학술연구협회 고문. 논문 「과학과 영靈의 만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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