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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둔마을 |
둔덕면은 15개 행정리가 있으며 하둔리에는 하둔마을과 방답마을이 있다. 하둔은 수심이 얕아 민물 때에는 통영과의 여객선과 장군들의 돛배들이 드나들었으나 썰물 때는 넓은 간석지로 변하여 선박출입은 할 수 없고 초성과 보름 때 온 면민의 아낙들이 모여 우럭, 바지락, 맛조개 등을 채집하였으나 1935년 간첩사업으로 조개잡이는 살아졌다.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각종 관공서가 모여 있다. |
방답마을/방답진 |
하둔 동쪽 둔덕천 건너 마을로 1935년 80ha의 간석지에 간척사업을 한곳으로 임진왜란전에 방답진을 두었던 곳이나 전라도 여천군 돌산으로 진을 옮겼고 임란 때에는 그 곳 僉使李純信(방답첨사)이 옥포대첩 때 李舜臣(삼도수군통제사)과 함께 참전하여 선무3등공신의 한명이다. 방담꿈 또는 방답구미라고 전래되고 있다. 방답(防沓)이란 제방안의 개펄을 매립한 논이라 방답이라 한다. |
둔덕천 |
둔덕골에 흐르는 길이 7.7km의 큰 내로 거제도에서 세 번째 크다. 골이 깊고 길어 각종 민물고기들이 많다. 은어, 참게, 숭어, 농어, 병아리, 장어 등이 아직도 잡히고 있다. |
왕새우양식 |
하둔간척지 중앙에 보면 왕새우판매라는 간판이 보인다. 주인은 삼성전자에 근무하다 고향이 좋아 이곳에 터를 잡고 왕새우를 키우고 있다. 직접 먹을 수도 있고 구입하여 갈 수도 있으니 철새도 구경하고 새우도 먹고~~~. |
둔덕간척지/철새도래지 |
하둔마을에 있는 간척지(干拓地)는 1926~1935년 일본인이 만들은 곳으로 80ha의 넓은 간척지에는 지금은 일부는 논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습지로 그대로 있어 철새들이 언제나 노 뉘는 곳이다. 거제에서 가장 큰 간척지이며 철새도래지이다. |
둔덕간척지 |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시작하여 1935년 12월에 준공한 60ha의 간척지를 조성한 대형토목 공사였다고 하니 그 당시 장비와 기술 인력으로 볼 때 가히 대역사였을 것이다. 둔덕의 젖줄인 둔덕천의 하구에 위치한 이 뚝길을 걸어서 숭덕초등학교에 다니던 어구마을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가 되었고 여름밤 시원하고 모기 없어 밤늦게 까지 도란도란 세상사는 이야기하며 낚시를 즐기던 곳,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던 청소년의 쉼터가 되어준 고마운 뚝이다. |
~낚시고장 어구마을, 이름 예뿐 아지랑마을~
하둔에서는 산방산쪽으로 가면 폐왕성과 산방산비원이 있고, 계속 직전하면 사등면 성내마을이 나온다. 또 하둔을 다리를 건너면 법동리로 가는 길과 바닷가로 어구로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이번 코스는 해안선을 따라 거제일주를 하기 때문에 어구방향으로 차를 돌린다.
3~4분가면 아담한 어구마을이 나온다. 입구에는 '어구정보화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50여척의 전마선이 보인다. 이곳이 거제도에서 가장 많은 낚시배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족단위의 낚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10월에는 전국 전마선낚시대회가 열린다. 이곳이 낚시로 유명하게 된 연유는 바다에 양식장이 많아 고기들이 많고 바다가 잔잔하여 낚시하기에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산도 제승당 가는 카페리가 있으며 시간은 15분 정도 걸린다. (055-633-2807) 눈앞에 보이는 서좌도, 비산도 등의 한산도는 원래 거제소속이었으나 1900년 일제강점기시대 통영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어구항은 外海의 물이 內海로 순환하는 지역으로 1971.11.24 한미패류위생협정을 맺어 굴생산량은 50%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2년마다 한번씩 패류위생관리팀이 내한하여 점검하고 있다. 그래서 어구,아지랭이,한산도 등지에서는 청정지역이라 하여 모든 숙박시설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도하다.
어구마을은 둔덕면 여러 마을 중 가장 작은 마을로 한산도와 인접해 있다. 옛날에는 한산도가 거제도 소속이었으나 통영시에서 분리되면서 한산도와 4개의 섬을 통영에 버리고 왔다. (한산도, 홍도, 매물도, 장사도 ) 지금 생각하면 원통한 일이다. 통영사람들은 좋겠지마는?
해방되기 전까지는 50여기구가 살았으며 주로 농사일을 하고 일부 낚시를 하여 생계를 이어갔으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정해역으로 한미위생행정협정을 맺어 굴, 홍합, 우렁생이 양식이 늘어나면서 다른 지역과 반대현상인 인구가 늘어나고 가구 수가 늘어 현재는 89세대가 살아가고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내해에서 외해로 변환하는 곳이라 바닷물이 말고 고기가 많고 공기가 좋아 현대인이 살아가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마을 터백이인 김만규의 기억에 의하면 예날에는 전마선(둥구맹이)를 타고 노를 저어 한산도에서 나무도 해오고, 멀리 매물도까지 노를 저어 낚시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대마도가지 노를 저어가서 수기목(삼나무)원목을 가져와 집을 짓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대마도에 가서 어떻게 나무를 가져 올수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대마도에는 약 70%가 한국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1400년경에 선조시대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대마도를 정벌하고 한국인이 상당수 살았다고 하니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얘기이다.
어구는 지정학적 위치나 현재의 지명으로 보아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어구리 좌편 해안에 고무실을 짓고 북을 쳐 왜선의 침입을 알렸고 우편 상봉우리에 수리방을 두어 수로 및 수리를 관찰하였다. *마을 뒤산에는 망터가 있는데 옛날 망을 보던 곳이나 빈대가 많아서 폐쇄했다고 한다. 하청면 북사도 경남에서 큰규모의 절이었으나 빈대 때문에 페절했다고 하니 빈대가 무섭기는 무서운가보다.
어구에서 2~3분 거리에 아지랭이 마을이 있다.
거제도는 갯마을이 많아서 마을의 명칭이 무슨 무슨 浦니 해서 ‘浦’자가 들어 있는 마을 이름이 많이 있다. 마을 이름도 이상하리만치 까마귀재, 무지개재, 꽃바구미, 함박구미 등 순수한 우리말 이름들이 있다. 원래 거제군은 동부면, 둔덕면, 사등면, 한산면, 일운면, 이운면, 연초면, 하청면으로 되어 있었다. 한산도에서 제일 가까운 거제가 아지랑이 마을이다. 한산만을 지척에 두고 거제 사람들은 이웃같이 왕래하며 살아왔다. 그 당시 결혼식은 서로 가까운 이웃마을끼리 중매를 해서 혼사를 할 때이다. 한산도와 거제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빤히 마주 바라보고 있어서 이웃같이 왕래하면서 혼사를 맺어 모두가 사돈지간이라 할 만치 많은 사람들이 인연을 맺고 살았다.
한산도 처녀 인물이 좋아
거제 총각 바람났네.
연해 욕지 한바다에,
임을 찾아 떠난 배야,
임을 싣고 오실 적에 우리 님도 싣고 오소.’
이와 같은 노래로 봐서도 한산도 처녀가 인물이 좋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제 총각들은 한산도 처녀들을 색시로 맞이하기 위해 안달이 났다. 한산도 처녀들은 얼굴도 곱고 마음씨도 착하고, 일도 잘 했다.
<아지랑마을의 전설>
지난해 가을에 한산도에서 시집왔던 한산도 아가씨가 이른 봄에 첫 친정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친정 부모님과 친척이며 이웃 사람들에게 대접할 차반을 한 바구미 담아 이고 아지랭이에 와서 나룻배를 타야 한산도 친정에 갈 수 있었는데, 해는 서산에 기울고 한산도에서는 나룻배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바위틈 밑에서 하룻밤을 새워야 했다. 마침 이 때에 수도승 한 사람이 한산도를 건너기 위해 나룻터까지 와서 배를 찾다가 배가 없으니까 바위틈을 찾아서 하룻밤 잘 곳을 찾고 있었다. 그 당시는 불교가 퇴폐하여 있을 때라 중이 마을의 부녀자를 희롱하고 업어 갈 때였다. 외진 나루터에서 예쁘고 젊은 여인과 중이 만난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일이다. 그래서 여인은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켜 쥐죽은 듯이 바위틈에 꼭 숨어서 밤이 얼른 새고 나룻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 노숙할 만한 곳을 찾아 헤매던 중은 여인이 숨어 있는 바위 위에 있는 작은 동굴을 찾아 들었다. 여인과 중은 넓적한 바위를 사이에 두고 아래 동굴에는 여인이 있고, 그 위에 동굴에는 중이 있어 지척이 천리로 묘한 인연 속에 밤은 차츰 깊어만 갔다. 봄바람은 차가왔다. 여인은 쥐덫에 걸린 생쥐 모양으로 달달 떨고 있었다. 어느덧 초생달이 살짝 웃으며 서산으로 기우는 것을 보니 새벽에 가까운 듯했다. 일각이 여삼추다. 초봄이지만 이 지대는 최남단 따뜻한 곳이라 제일 먼저 화신이 전해져서 온 산이 참꽃으로 뒤덮은 꽃동산이었다.
수도승은 바람결에 풍기는 꽃향기에 젖어 이성이 그리워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간간이 부는 바람결에 꽃향기에 더불어 여인의 화장 냄새까지 곁들여 더욱 황홀하지만 험한 갯가 산록에 아름다운 여인이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수도승은 눈을 감고 살아온 인생 항로를 재조명해 본다. 만물은 음과 양이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영생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나서 온갖 망상과 번뇌를 잊으려 애를 쓰면서 수도를 해야 하는지 이렇게 수도를 해서 도가 터진들 무엇을 한단 말인가? 어차피 한번 나서 한번 죽는 몸일진대 쾌락 속에 살다가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온갖 망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나긴 밤이었다. 아니다. 모든 망상은 육신을 병들게 하는 마구니다. 수도승은 다시 눈을 감고 죄의 업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서로가 다른 생각 속에 어느덧 날은 밝았고 나룻배가 도착하였다. 바위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새운 수도승과 여인은 나룻배를 탔다.
참 묘한 인연이다. 바위 하나를 벽으로 삼고 긴 밤을 새웠고, 또 한 나룻배에 같이 타게 되었으니, 여인은 그제사 안도의 한숨을 ‘휴-’하고 내쉬면서 어제 저녁은 아찔아찔한 하룻밤이었다며 아무 일없이 무사히 잘 지냈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고 수도승은 자기가 베고 잤던 바위틈 밑에서 예쁜 여인이 자고 있었던 걸 몰랐던 것이 또한 천만다행 스러웠다. 여인이 그 바위 아래서 자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온갖 상념이 뒤범벅이 된 어제 저녁에 그냥 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인을 겁탈하거나, 반항하는 여인을 죽였을지 모른다. 수도하는 중의 몸으로 나무아미타불이 되었을 것이다. 지난밤을 생각하니 역시 아찔아찔하게 넘겼다고 생각하면서 스님은 합창을 한다. 그 후부터 이곳을 아찔아찔하게 넘겼다고 해서 아찔이 고개라고 하다가 세월이 흘러 아지랑이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설에는 이곳이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바닷가에 있어서 제일 먼저 봄이 오는 곳으로, 이웃 꽃바구미는 꽃이 만발하여 꽃바구미를 이루었다고 해서 꽃바구미라 하고 함박구미는 꽃따라 함박 웃고 있다는 뜻이며, 아지랭이는 아지랭이가 피어난다고 아지랭이라 했다고 하는 말도 있다.
지금도 둔덕면 어구리의 남동단 제일 끝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산도와 인접해 있고 저녁 노을이 아름다워 사진가들이 가끔 찾는 곳이기도 하다. 아지랑이에서 거제면 법동쪽으로 가는 고개가 아지랑이재이다.
< 於九里 지명 소개>
於九里마을 |
漁九란 천혜의 어장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옛날 풍랑이 심해 피항한 왜구들이 오쿠(오지)라 부른게 어구로 변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於九란 임진왜란 때 방어하던 곳, 둔덕면 9개리의 끝 마을이란 뜻이기도 하다. 의종이 여기서 무기를 만들며 外人 出入을 금지시켜 外人禁이라 불렀는데 주민들은 지금도 외인금이라 부르기도 한다. ☛외인금(외인금지): 고려 의종왕이 복위를 꿈꿔 무기를 만들고 外人을 禁止시켰다고하여 불렀던 이름이다. ☛어구(漁口): 고기가 많이 잡이는 항구 ☛어구(於九):남부면 저구(猪仇)나 둔덕면 어구(於仇)는 일본인들이 쳐들어 올 때 방어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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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支浪마을 |
어구의 동쪽 끝 거제면과 경계하고 서남쪽 한산면 서좌도와 875m이고 또 한산도와 375m의 송전탑이 있고, 지역이 뾰족하고 언덕이 가파라 아지랑이 갯마을이었으나 청정해역 굴양식으로 30여호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낚시배가 40여척이나 되며 부두에는 조선소 협력업체가 있어 흉물스럽다. |
아지랭이재 |
아지랑이에서 거제도 법동개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현재는 버스가 다닌다. |
於九港 |
어구항은 外海의 물이 內海로 순환하는 지역으로 1971.11.24 한미패류위생협정을 맺어 굴생산량은 50%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2년마다 한번씩 패류위생관리팀이 내한하여 점검하고 있다. 그래서 어구,아지랭이,한산도 등지에서는 청정지역이라 하여 모든 숙박시설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도하다. 낚시의 고장이며 한산도 제승당가는 카페리가 있다. |
첫댓글 갯가마다 전설이 주절히 널려있다는데 재미난 전설 많이 올려주세요. 아참! 그리고 그 아낙과 중과의 인연은 그기에서 끝이 난것인가요... 요즘도 사람들은 인연에 따라서 만나고 혜어지고 하는 것인지... 좋은 인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