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0 진주성 결사대 이야기 보도자료.pdf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 관군뿐만이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온 백성들이 합류했다.
■ 진주 관군은 서예원 목사, 성수경 판관, 박승남 판관, 최기필 판관을 비롯한 3,000명이다.
■ 전라도에서는 창의사 김천일, 복수의병장 고종후, 태인의병장 민여운, 순천 출신 의병장 강희열, 우의병부장 고득뢰, 장성현감 김응건, 종사관 양산숙, 만호 오방한, 군기주부 유한량과 유휘진, 해남의장 임희진, 부장 최억룡, 방의대장 강희보, 의병장 이계련 등 1,000명이 참전했다.
■ 충청도에서는 충청병마사 황진, 황간현감 박몽열, 당진현감 송제, 남포현감 이예수, 보령현감 이의정, 해미현감 정명세, 웅천현감 허일, 태안군수 윤구수 등 700명이 참전했다.
■ 경상도에서는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진해현감 조경형, 거제현령 김준민, 삼가대장 윤탁, 적개의병장 이잠 등 1,100명이 참가했다.
5,800명의 진주성 결사대는 9만 3,000명의 일본군을 9일 동안 2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마지막 25번째 전투에서 장마로 무너진 성벽을 통해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예정된 대로 5,800명의 조선군은 모두 전사했다.
5,800명의 결사대가 일본군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한강 이남은 이때부터 일본 땅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훗날, 유대인은 병사 전원이 사망한 마사다전투를 패배한 전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유대인들은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하며 조상의 위대한 행적을 기리고 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마사다에서 신병수료식을 하고 있으며, 이곳을 다녀간 이스라엘 병사는 전쟁터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책 속으로
이스라엘에 마사다가 있다. 마사다는 서기 73년 유대인 병사들이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며 결사항전을 벌인 곳이다. 마사다 병사들은 패배가 임박하자 로마에 속박당할 수 없다며 모두 자결했다. 독립한 이후 이스라엘 국민은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하며 조상의 위대한 행적을 기리고 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마사다에서 신병 수료식을 하고 있으며, 이곳을 다녀간 병사는 전쟁터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마사다를 다녀온 많은 한국인은 유대인 병사들이 목숨을 바친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마사다에 버금가는 진주성 항전을 잘 알지 못한다. 알고 있다고 해도 패배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조금 안다는 사람조차도 ‘기생 논개가 일본군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함께 빠져 죽었다. 진주목사와 외원군 장수들 간에 지휘권이 분리되어 전투에 패배했다. 그리고 진주성 함락 후 6만 명의 백성이 일본군에 학살됐다’는 등 실상을 모른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2차 진주성전투는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다. 5,800명이 지키고 있는 성에 9만 3천명이 공격을 한다면 언젠가는 그 성이 함락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5,800명과 9만 3천명, 즉 1 대 17의 전투에서 5,800명의 결사대는 8박9일 동안 24차례의 전투에 승리했다. 마지막 25번째 전투에서 단 한번 패했을 뿐이다. 함락당할 수밖에 없는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예정된 운명을 맞은 결사대에 패배자란 오명을 씌우는 역사는 없다. 그 누구도 마사다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스라엘 병사에게 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논개가 기생인가? 논개는 자신을 구해준 장수 현감 최경회의 부인을 간호했고, 부인이 사망하자 최경회의 후실이 되었다. 그녀는 지아비인 최경회를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며 진주성에 들어갔다. 최경회가 전사하자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처단하고자 적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왜 우리 스스로 논개를 기녀로 만들었나?
또한 일부에서는 당시 진주 목사 서예원을 위기 상황에서 눈물이나 흘리는 비겁한 장수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전투 지휘자인 창의사 김천일과 갈등을 일으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예원은 일본군이 몰려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바로 진주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지휘했다. 그가 없었다면 8박9일 동안 2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예원과 김천일이 지휘권을 놓고 갈등했다면 그 결과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나서 6만 명의 백성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도 사실일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큰 도시였던 한양성에도 주민은 10만 명 정도였다. 진주성은 한양성에 비해 턱없이 작은 도시였다. 당시 진주성 인구는 인근까지 포함해도 1만 명에도 못 미쳤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진주성 외곽에 거주했다. 그렇다면 6만이라는 숫자는 무엇인가? 일본군이 그만큼 잔악했고, 조선의 피해를 과장한 일부 문헌에 의한 것이다. 심지어는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 장수가 300명 이상, 병사는 3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 문헌도 있다. 논리적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만 명의 백성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조선 임금 및 조정, 즉 조선 정부가 무능함을 지적하려는 사악한 일본 역사가의 계략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10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몰려가자 인근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의병과 지방군 2,800명이 자발적으로 진주성에 들어간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들 주요 지휘관은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사 황진이다. 이들 3인이 각각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진주성으로 들어 간 부대장과 부대는 다음과 같다.
창의사 김천일은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수원부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병력을 모아 수원과 강화, 양천, 행주산성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 임금으로부터 창의사를 제수 받았다. 그는 자신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던 전라도 의병 300명과 기타 병력 600명 등 1,000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합류했다. 그와 함께 진주성에 입성한 장수들은 복수의병장 고종후, 태인의병장 민여운, 순천 출신 의병장 강희열, 우의병부장 고득뢰, 장성현감 김응건, 종사관 양산숙, 만호 오방한, 군기주부 유한량과 유휘진, 해남의장 임희진, 부장 최억룡, 방의대장 강희보, 의병장 이계련 등이다.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는 전라도 화순 출신으로 장수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순 인근의 병력을 모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선조 임금으로부터 경상우도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500명의 의병, 경상도 진관군 600명 등 1,100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최경회와 뜻을 함께 한 경상도 진관군 수장은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진해현감 조경형, 거제현령 김준민, 삼가대장 윤탁, 적개의병장 이잠 등이다.
충청도 병마사 황진은 동복 현감을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을 이끌고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전전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는 이 공로로 선조임금으로부터 충청도 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동복 진관군과 의병 그리고 충청도 진관군 등 700명을 모아 진주성에 입성했다. 그와 함께한 충청도 진관군 수장은 황간현감 박몽열, 당진현감 송제, 남포현감 이예수, 보령현감 이의정, 해미현감 정명세, 웅천현감 허일, 태안군수 윤구수 등이다.
이로써 우리는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진주 관군만이 아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에서 온 백성들이다. 멀고 먼 타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자발적으로 합류하여 일본군과 싸우던 의병부대, 그리고 각 고을을 다스리던 현감, 현령들이 각자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했다. 특히 이들을 지휘하여 진주성에 들어온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사 황진은 모두 전라도 출신이다. 이들은 경상도 진주에서 목숨을 바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조선인은 하나로 뭉쳤다. 제2차 진주성전투를 치른 5,800명의 조선군 결사대의 구성이 이를 증명한다. 진주성 사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결사대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전·현직 대감과 사또, 이들의 지휘를 받고 있던 관군, 학문을 닦고 있던 양반과 상인, 중인, 천민들이다. 그리고 선조 임금은 자발적으로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운 장수에게는 관직을 하사하였다. 조선정부와 백성들은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함께 목숨을 바쳤다. 왜적을 물리친 당사자는 우리의 조상인 조선인이었으며,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력. 그리고 희생을 통해 조국을 지켜낸 것이다.
더욱이 일본군 역시 8박9일 동안 25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추정해보면 일본군도 3만 명 이상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한강 이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던 일본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치열한 전투와 희생으로 일본군은 더 이상 전투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진주성을 함락한 이후에 전라도와 충청도로 진격하여 성을 쌓고 그곳을 지배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남원으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조선군과 명군에 막혀 부산으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5,800명의 결사대가 진주성에서 목숨을 바치며 일본군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한강 이남은 이때부터 일본 땅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차례
책을 펴내며
1장 논개
2장 김해부사 서예원
3장 진주판관 성수경
4장 창의사 김천일
5장 전라좌의병장 황진
6장 복수의병장 고종후
7장 전라우의병장 최경회
8장 거제현령 김준민
9장 김시민의 승리 비결
10장 승기를 잡다
11장 다시 부는 폭풍
12장 진주성에 바친 목숨
맺음말
지은이: 박희봉(朴熙峯) 중앙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Templ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앙대학교 공공인재학부에서 조직론과 리더십론을 강의하고 있고, 주요 연구분야는 사회자본이다. 2015년 신동아 4월호에 행정학 분야 논문인용지수(Korea Citation Index) 1위의 학자로 소개된 바 있다. 주요 논문은 홈페이지(www.socialcapital.re.kr)에 실어 놓았다.
대표저서로는 사회자본: 불신에서 신뢰로, 갈등에서 협력으로(2009), 좋은 정부 나쁜 정부(2013),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2014), 김시민의 전투일지로 임진왜란을 다시 쓰다(2016), 호남관군과 의병은 왜 진주성에서 목숨을 바쳤을까(2016) 등이다.
이 책은 2014년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를 저술하면서 약속했던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산화한 5,800명의 결사대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