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 그리고 인재공 급제교지와 어사화에 관하여 설명 드리겠다.
원칙을 정하기를 교지(敎旨)는 조선전기(1392~1592) 실직교지(實職敎旨)만 선택하기로 했는데, 인재공은 1606년(선조 39) 10월 13일에 교지를 받았으므로 원칙대로 하자면 제외되어야 하겠지만, 교지. 즉 홍패(紅牌)에 어사화(御史花)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선택한 것이다.
적산산성은 고려 말 최영(崔瑩)이 처음 쌓았고,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이 복구하였으나, 방치되어 피폐해진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문성공계 안렴사공파 11세 인재공(訒齋公) 최현(崔晛)이 순무어사(巡撫御使)가 되어서 양남지방의 방어태세를 점검할 때 남한산성과 함께 전략기지로서 개발할 것을 제안하여 재개발되었고 그곳에 사고(史庫)가 설치됨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 문성공계 안렴사공파 11세 인재공(訒齋公) 최현(崔晛)이 순무어사(巡撫御使)로서 전략기지화를 제안하였다.
적상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의 행정구역을 재편하였다.
적상산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이 험준하고 또 정상에 분지가 잘 발달하여 있기 때문에 외적의 침략을 받으면 피난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지금은 분지를 호수로 만들어서 양수발전소가 세워져 있다.
인조실록 5년 5월 10일.
적상산성은 형세가 나라 안에서 으뜸이니 성을 수축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꼭 지켜야 할 곳으로 삼는다면 삼남을 지키는 전략기지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전에 최현이 상소하였을 때 차차 의논해서 시행하겠다는 전교가 계셨습니다.
赤裳山城形勢甲於國中修城積穀以爲必守之地則足成三南一保障也曾因崔晛上疏以徐議施行爲敎
인재공의 제안으로 적상산성이 전략기지가 되었지만, 그뿐이었다면 다시 폐허로 변하였을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묘향산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하므로 인하여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인조실록 11년 1월 23일
춘추관이 사관을 파견하여 묘향산의 실록을 적상산성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주상이 따랐다.
春秋館請遣史官移置香山實錄于赤裳山城上從之
인조실록 15년 3월 27일
예조가 아뢰기를 “어제 영숭전 영정을 강도로부터 모셔 왔는데 훼손된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영정은 당초 경기전에서 모사하여 온 것인데 이번에 경기전 영정을 적상산성에서 본전으로 다시 모셔와 안치하여야 하니 예관과 근신을 보내되 화공을 대동하고 가서 모사하고 모셔오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하니 답하기를 “계사가 매우 합당하니 그대로 거행하라.”하였다.
禮曹啓曰昨日永崇殿影幀自江都奉來則缺裂處甚多此影幀初自慶基殿摹寫以來矣今者慶基殿影幀當自赤裳山城還安于本殿宜遣禮官近臣等使之帶畫師以去摹寫陪奉以來爲當答曰啓辭甚當依此擧行
적상산 사고는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민간에서 발행된 책도 납본되어,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역할을 했다. 대표적 사례로 문성공계 세 번째 대동보 <가경보(嘉慶譜)>와 중랑장공파 부안종회에서 발행한 <전주최씨가장(全州崔氏家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