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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다”라는 자기 고백은 자칫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이라는 은혜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저와 여러분에게는 절대로 부인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독특한 정체성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공해도 나고, 실패해도 나입니다. 실수해도 나고, 흔들려도 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뭐라고 하든 나는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나입니다. 영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나라는 존재 자체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온갖 종류의 상대적인 비교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다시 찾았을 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저와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유한 나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מֹשֶׁה(모셰)는 준수했습니다. “준수טוֹב(토브)”는 “좋다, 선하다, 올바르다, 탁월하다.” 등의 뜻입니다. 겉으로도 아름다웠지만 내적으로도 순결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부모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반드시 죽이라는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따를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그만큼 준수했습니다. 숨겨서 길렀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역청을 바른 갈대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아이를 그 안에 넣고 바다에 띄웠습니다. 그의 장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흉내 내기 어려운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자식의 장래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물론, 좋은 환경을 마련해 줄 수는 있습니다. 앞길을 방해한다고 생각되는 장애물들을 제거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됨됨이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장래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보살피고 힘껏 필요를 채워주되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부모의 믿음에 화답해 주셨습니다. 예상치도 못했었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대단히 수준 높은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십 년 동안 행정과 외교 문서를 작성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왕궁 예법, 통치 체계, 세금 관리, 국가 운영 방법을 배웠습니다. 전차 운용, 무기 사용, 전략과 지휘 등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학, 건축, 측량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종교와 철학을 배웠습니다. 왕궁에서 사용하는 화법, 협상하는 법, 재판과 행정에 관련된 언어를 배웠습니다. 언변과 지도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유모로 들어온 어머니로부터 여호와에 대한 신앙 교육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덕분에 성민 이스라엘을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고, 재판의 체계를 세우며, 광야 공동체를 운영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집트의 차기 대권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얼마나 당당했을까요? 얼마나 자신만만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을까요? 거칠 것이 전혀 없는 현실 속에서 불가능은 없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바로는 그를 향한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살인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히브리 교육을 받은 그는 동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형편은 어떤지 수시로 돌아보며 살폈습니다.
하루는, 이집트 관리에게 맞고 있는 동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침착했습니다. 좌우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살폈습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범사에 공의를 행하시는 여호와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수시로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놓쳐도 여호와만큼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데 정반대인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국 이집트 관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동족을 향한 사랑을 갖추기는 했었지만, 막상 도와주기 위해서는 가장 저급한 능력인 혈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바로는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혼비백산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떨렸습니다. 몸만 겨우 왕궁을 빠져나왔습니다. 광야로 내달렸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사십 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화려한 장래가 보장된 이집트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값없이 주어졌던 부귀영화는 안개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사라졌습니다. 자신을 알고 있던 사람들 기억 속에서 지워졌습니다. 현재는 양 떼를 치는 목자였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지고 또 낮아졌습니다. 깨지고, 깨지고 또 깨졌습니다. 거기다 그는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가 갖추기 위해서 몸부림쳤었던 온갖 종류의 능력은 하나같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붙이는 요인이었습니다. 선천적인 장애와 후천적인 장애는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선천적인 장애도 절망이기는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래왔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후천적인 장애는 훨씬 더 절망적입니다. 절대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삶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입니다. 한때는 세상 전부를 가졌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잃어버린 그가 그랬습니다.
한편, 성경에서 사십은 특별한 숫자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비가 사십 일 동안 내렸습니다. 율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간 그는 사십 일 동안 머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광야를 행진했습니다. 선지자אֵלִיָּהוּ(엘리야후)는 사십 일 동안 광야를 걸어서 하나님의 산에 도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십 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며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이렇게 사십은 시험 기간입니다. 정화 기간입니다. 준비 기간입니다. 전환의 기간입니다. 겸손과 인내를 배우는 기간입니다. 완성되기까지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이집트에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올라갔던 그에게는 까마득하게 낮아지고 철저하게 깨어지는 기간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토씨를 하나도 달지 않고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준비되는 기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사십 년을 사는 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았던 왜곡된 그가 여호와께서 창세 전부터 작정하신 뜻의 계획에 따라 진짜 그로 거듭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했습니다. 깨어지고 또 깨어져야 처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야 했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거나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누구나 다 반드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문제는 나를 비우는 일이 무려 사십 년이 걸려도 아니 평생을 다 투자해서 몸부림쳐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실 때 비로소 될 수 있습니다.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엄연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사십 년 동안이나 절망적인 삶을 사는 내내 한 번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훈련하는 기간이 지나고 나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위로도, 격려도, 용기를 북돋워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가 오롯이 당해 내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철저히 아니 완벽하게 지울 때까지,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탁월한 능력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깨달아 알 때까지 마치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게나 방치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순간순간,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가 미처 깨달아 알지 못하는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똑같이 역사하십니다. 이제 그의 인생 세 번째 사십 년이 시작되어야 할 때가 도래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치던 양 떼를 몰고 하나님의 산חֹרֵב(호레브)에 이르렀습니다. 눈앞에 그야말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불이 붙은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습니다. 스러지지 않았습니다. 불은 태우지 않는 불이었습니다. 소멸시키지 않는 불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임재를 가리키는 불이었습니다.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현상에 이끌렸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동시에 떨기나무 가운데서 여호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철저히 침묵하셨던,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를 모르는 척 외면하셨던 여호와께서 드디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열방 가운데서 당신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신 성민 이스라엘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집트 감독들의 억압이 얼마나 힘에 겨운지 신음처럼 내뱉고 있었던 부르짖음을 낱낱이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당하고 있었던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이 현재 당하고 있는 뼈저린 아픔 역시 알고 계십니다.
부르짖음이 무엇인지, 정서적인 상태는 어떤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계십니다. 여전히 어려운 상태 속에 버려두시는 이유는 당신 뜻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회복되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로 살다 마침내 종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한 다음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오게 할 것이다.”(창15:13b-14)라는,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약속대로, 당신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건져내야 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보낼 계획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막중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더 이상 이집트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인자였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누구 앞에도 당당하게 나서지 못했습니다. 신분을 숨겼습니다. 도망자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양을 치는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불쑥 “제가 누구이기에 감히 바로에게 가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로부터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출3:11b)라는 질문이 튀어나왔습니다. “나 같은 것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절망적이면서도 자조가 섞여 있는 곧 비웃음과 조롱이 섞여 있는 자기 고백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과 능력을 따지게 된다면 그렇게밖에는 달리 고백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즉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a)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보내는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를 보내는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보냄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누구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내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중요합니다. 그는 또 주저했습니다. 만에 하나 성민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집트로 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보낸 분이 누구냐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즉시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대답하라.”(출3;14)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심오하고 근원적인 여호와의 자기 선언입니다. 여호와는 시간과 조건에 매이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차이도 없이 언제나 똑같습니다. 저와 여러분 곧 인간의 이해나 조건에 갇혀계시지도 않으십니다. 절대자이십니다. 영원하십니다. 존재의 근원 되십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만 “나는 나다.”라고 선포할 수 있으십니다.
여호와의 대답을 들은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습니다. 여호와 앞에 일대일로 선 “나”였습니다. 나의 존재 근원 되시는,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시는, 나의 존재 이유가 되시는 여호와 앞에서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실패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시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절망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버리지 못한 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꼬리표를 드디어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죽는 순간까지 당당하게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 옛날 주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만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시102:25-27)라고 노래했습니다. 세상 만물은 지금 당장 아무리 화려하게 보여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같이 필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한결같다고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친히 “나는 여호와라, 나는 변하지 않는다.”(말3:6a)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은 해가 아무리 바뀌고 또 바뀌고 또 바뀌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다고, 똑같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고 동일한 분입니다.”(히13:8)라고 외쳤습니다.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죽고, 제아무리 살기 좋은 시대라 할지라도 변하고, 제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지만, 구원의 유일한 중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여전히 똑같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 역시 아무리 많은 해가 지나도 다른 누구도 아닌“나”입니다. 비록 한 때의 실수로 도망자가 되어도, 비록 실패해도, 비록 한없이 부족해도, 내놓을 것 하나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나”입니다. 도망자가 되라는 것도, 실패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조건이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나는 나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비록 절대로 쉽지 않겠지만, 분명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철저히 비워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세 전 뜻의 계획에 따라 작정하신 본래의 나로 거듭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는 나다!”라고 외치는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까지 전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